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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도서][밑줄] 김광기,『뒤르켐&베버: 사회는 무엇으로 사는가』, 김영사, 2010. ★★★​☆

작성자두괴즐 일섭|작성시간14.11.28|조회수70 목록 댓글 0



뒤르켐 & 베버 : 사회는 무엇으로 사는가?(지식인마을 19)

저자
김광기 지음
출판사
김영사(주) | 2007-03-17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사회를 학문적 연구 대상으로 정립한 사회학의 두 거장 뒤르켐과 ...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뒤르켐과 베버에 대한 입문서. 그들이 사회를 바라본 관점을 풀어썼다"

 

* 개인별점:  (7.0)

- 연구사적 가치: 3.5

- 개인적 만족도: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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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김광기,『뒤르켐&베버: 사회는 무엇으로 사는가』, 김영사, 2010.

 

 

* 만남 1. 뒤르켐

 

뒤르켐은 사회를 ‘그것 자체로 하나의 독특한 실체’를 이루는 ‘현상(phenomenon)’으로 보았다. 36

 

‘사회적 사실을 사물처럼 취급하라’는 뒤르켐의 주장은 단지 ‘비유’적 표현임을 명심해야 한다. 뒤르켐은 그의 유명한 저서『사회학적 방법의 규칙들』(1895)에서 이것을 분명히 했다. 그는 ‘사회적 사실이 사물(thing)’이라고 말한 적이 결코 없으며, “사회적 사실을 사물처럼 취급하라”는 주장은 단지 ‘비유’일 뿐, 그 언명의 핵심은 “비록 형태는 다르더라도 물질적인 것과 동등한 권리를 사회가 갖는다”는 점을 천명하려 했다고 못 박고 있다. 47~48

 

뒤르켐은 자살이라는 인간의 독특한 행위조차도 사회적 사실로 접근했다. 이를 위해 그가 행한 최초의 작업은 관심의 초점을 ‘자살’에서 ‘자살률(suicide rate)’로 옮긴 것이다.(···) 기존의 자살 연구의 주요관심이 “그(녀)가 자살을 왜 했는가?”에 있었다면, 뒤르켐의 주된 관심은 “어떻게 특정 집단 내에서 자살한 사람들의 비율이 비교적 지속적으로 유지되는가?”에 맞추어져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그의 관심은 한 사회에서 있어서 자살률의 안정성과 변화에 맞추어져 있었다. 이는 곧 자살 연구가 뒤르켐에 이르러 비로소 사회적 사실의 수준으로 올라가게 됨을 뜻한다.

그는 이러한 연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통계 연구 방식을 채택하였다. 이 방식은 현재 발달한 최근 연구 방법에 비하면 매우 조야한 것이지만 그 당시만 해도 매우 획기적이었다.(···) 뒤르켐의 통계 사용 방식이 획기적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은 그가 통계를 사용하여 자살률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원인을 찾아내려 했기 때문이다.

자살률의 사회적 원인을 밝혀내기 위해 우선 그가 행한 것은 통계를 사용하여 자살이 정신질환, 인종, 유전, 풍토 등과 같은 요인들과 어떠한 관계도 맺고 있지 않는다는 점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자살의 기저가 되는 사회적 원인을 거론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사회가 ‘통합’되는 정도, 즉 한 사회나 집단의 ‘응집력’ 혹은 ‘연대력(solidarity)’이었다. 50~51

 

(1) 이기적 자살(egoistic suicide)

한 사회나 집단의 응집력이 대단히 약해졌을 때 나타날 수 있는 자살이다. 흔히 집단을 먼저 생각하는 집단주의보다는 과도한 개인주의가 판을 치는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는 자살로 주위의 어떤 이와도 끈끈한 연대감을 맺지 않을 때, 그리고 그러한 상황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들끓는 곳에서 일어나는 자살이다.(···)

 

(2) 이타적 자살(altruistic suicide)

(···) 그는 자살을 사회적 통합 정도와 연결시키고 사회적 통합이 강한 곳에서는 그렇지 않은 곳보다 자살이 덜 발생할 것이라고 예견하면서도 사회적 통합이 극도로 강한 곳에서도 자살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간파했다.(···)

집단의 힘이 개인을 완전히 압도할 때, 그리고 개인에게 있어 집단이 인생의 전부이자 의미이며 개인과 집단이 분리되지 않고 완전히 일치할 때, 개인은 집단이 그에게 자살을 직·간접적으로 강요하더라도 그것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은 집단의 존속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을 위해 요구되는 것이 비록 목숨이라고 할지라도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바칠 수 있고, 게다가 한술 떠서 그러한 요구 자체를 영광으로 받아들인다.

 

(3) 아노미적 자살(anomic suicide)

(···) 뒤르켐의 말에 따르면 사회는 원칙적으로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억제시킬 장치를 보유하고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의 억제력은 인간에게 강한 구속력과 압제를 행사하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으론 사회의 억제력 때문에 인간은 오히려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고 뒤르켐은 설파한다.(···) 선택과 생각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고 스트레스를 받게 한다. 이런 맥락에서, 얼핏 보아 피하고만 싶은 규제와 억압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뒤르켐이 왜 강조했는지를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규제와 억압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뒤르켐은 고상한 말로 ‘무규범 상태(the state of normlessness)’라고 명명하면서 이것을 더 줄여 ‘아노미’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아노미’적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 자살의 유형이 바로 ‘아노미적 자살’이다. 사람들은 규제와 억압을 혐오하는 것 같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규제와 억압이 없는 상황 또한 견디지 못한다. 후자의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 자살이 바로 ‘아노미적 자살’이다.

뒤르켐은 또한 ‘아노미’를 다른 식으로도 규정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어디에 소속되었는지를 모르는 상태’다. 52~56

 

사람들은 왜 그토록 사회나 그들이 속한 집단의 타인들에게 집착하는 것일까? 왜 그토록 그것들을 의지할까? 그것은 한마디로, 사회나 집단이 그런 사람들에게 그들이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어떤 의미 있는 질서를 부여해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뒤르켐은 이야기한다. 그러한 의미 있는 질서를 버거는 ‘노모스(nomos)’라고 지칭하였다. 뒤르켐이나 버거의 눈에 인간이란 존재는 이러한 ‘노모스’가 없이는 삶을 살아가기가 무척 힘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뒤르켐에 의하면 바로 ‘노모스’의 붕괴가 ‘아노미’라는 것이다. 58

 

뒤르켐은 그의 일생 동안 단 하나의 문제에 집착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어떻게 사회질서가 가능한가?”라는 문제였다. 그리고 일평생 동안 뒤르켐을 사로잡았던 그 문제는 조금 달리 표현하면, “무엇이 사회를 지탱하는가?” 하는 것이 된다. 60

 

뒤르켐은 사회질서를 가능케 하는 것, 즉 사회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다름 아닌 종교라고 보았다. 그에게 있어, 각기 생김새와 관심사가 다른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서로 엉겨 붙게 하는 접착제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다름 아닌 종교였다. 즉, 사회질서의 기초에 바로 종교가 있다는 것이다. 61

 

뒤르켐은 우리가 종교를 정의할 때 반드시, 사람들이 그들이 속한 사회의 집합적 심성(집합표상)에 (혹은 그것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가의 여부를 기준으로 종교를 규정해야 한다고 설파하고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때의 뒤르켐이 말하는 ‘집합심성’이란 하나님이나 기타 신, 혹은 정령이나 악마와 관련된 것이 전혀 아니다. 그것은 사회에 관한 집단의 마음이고, 사회에 관한 집합적 표상이며, 그것 자체가 사회적 사실이고 사회이다. 이런 점에 비추어볼 때, 만일 어떤 사회에 구성원들이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어떤 집합적 심성(집합표상)이 없을 경우 그 사회는 통합에 있어서 근본적인 결함을 안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72

 

그는 모든 종교현상이 집단 전체의 흥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집단적인 흥분은 다른 입장(혹은 집단)에서 보면 광분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곳에서 광분으로 보이는 집단적 흥분이 해당 집단에서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집단적인 정신착란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72~73

 

뒤르켐은 종교현상을 일종의 집단적 광풍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 광풍을 구성하는 것은 믿음과 제사였다.(···) 뒤르켐은 종교가 믿음과 제사로 이루어져 있고, 종교는 사회라고 하였다. 그러면 당연히 사회는 믿음과 제사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어야 한다.(···) 74~75

 

종교나 사회나 공히 개인들을 묶어놓은 하나의 ‘다발’이었고, 사람들이 기꺼이 희생을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고 실제로 감내하는 그런 것이었다. 그 속의 사람들은 희생하는 대신 종교나 사회로부터 그들이 살아가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것들을 얻는다. 그것은 다름 아닌 노모스(nomos, 삶의 유의미한 질서)였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안도할 수 있고 위로받으며 카타르시스를 맛볼 수 있다. 그들은 왜 사는지에 대한 답을 종교나 사회로부터 부여받는다. 그것은 그들에겐 힘이 되며 그들이 힘들어 할 때 비빌 언덕이 된다. 76

 

뒤르켐이 볼 때, 사회조차 믿음 없이는 유지될 수 없는 것이다. 사회에서의 믿음이란 사회성원들이 지니고 있는 암묵적인 신념을 가리킨다. 그리고 제사(의례, ritual)란 사회의 영역에서는 다름 아닌 ‘행위(action)로 쉽사리 번역될 수 있다. 뒤르켐이 보기에 사회는 이러한 두 개의 핵심적인 구성 요소로 성립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들이 없다면 사회도 없다. 77

 

뒤르켐은 “하나님이 사라져버린 세계에서 어떻게, 무엇으로 인간을 통합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에 대한 뒤르켐은 해결책은 종교를 다시 재정의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배제된 종교도 나름대로 잘 굴러가는 것으로 보였다. 그 종교에는 하나님이 배제된 대신 순전히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것만이 눈에 보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종교는 그것 자체로 사회였다. 다시 말해, 그 종교는 인간의 통합 그 자체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종교와 사회의 우선순위를 바꾸면 뒤르켐의 해법이 슬그머니 머리를 내밀게 된다. 사회는 종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하나님은 없는 종교이지만 사회는 그것 자체의 힘만으로 인간들을 통합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82~83

 

뒤르켐은 크게 보아 두 가지 수준(유형)으로 결속력을 구분하였다. 그리고 그 구분은 동시에 그가 속했던 현대사회와 그 이전의 사회(전통사회)를 구분 짓는 중요한 잣대가 되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기계적 연대(mechanical solidarity)’이다.(···) 이때의 ‘기계적’이란 의미는 ‘자동적’이란 의미이다.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거의 자동적으로 맺어지는 결속이 바로 ‘기계적 연대’가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유형의 결속이 특징인 사회를 뒤르켐은 전통사회라고 하였다. 85

 

이런 연대를 뒤르켐은 ‘유기적 연대(organic solidarity)’라고 명명하였다.(···) 이른바, ‘쿨가이’들로 이루어진 현대사회에는 <전원일기>가 보여주는 연대와 결속을 기대할 수 없다.(···) 현대 사회는 전통사회에 비해 규모 면에서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비대해졌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를 익히 잘 아는 사이가 되기 힘들 뿐만 아니라 그런 기대를 하는 것조차 매우 어리석은 일이 된다. 이런 사람들과의 관계를 우리는 흔히 ‘익명적’인 관계라고 한다.(···) 현대사회 구성원 개개인은 대개가 비슷하기보다는 서로가 각기 다르다는 점을 인식하기 쉽다. 이런 것을 현학적으로 표현해서 ‘이질적이다’라고 한다.(···)

그중에서 가장 힘든 것은 자신과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을 찾는 것이다. 심지어 한 직장에서도 사정은 매한가지이다. 이러한 것을 뒤르켐은 ‘노동의 분업(division of labor)’이라고 불렀다. 이른바 ‘전문화(specialization)’라는 과정과 함께 동반되는 이 분업은 노동현장에서는 ‘분업’이라는 말로 표현되고, 더 큰 사회의 맥락에서는 ‘분화(differentiation)’라는 말로 바꾸어 사용된다. 88~89

 

 

* 만남 2. 베버

 

사회학은 도대체 무엇을 하는 학문인가? 이 질문에 대한 베버의 답은 비교적 간단명료하다. 사회학은 구체적으로 행동하는 인간들에 관한 학문이라는 것이다.(···) 베버에게 있어 사회학은 인간들이 하는 행동들 중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사회적 행동을 연구하는 것을 말한다. 96

 

정신과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인간밖에 없다. 따라서 베버는 인간에 대해서 다루는 사회과학은 반드시 인간만이 지닌 마음이나 정신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회적 행위의 ‘동기’는 인간이 바로 마음과 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97

 

구체적으로 사회학은 인간의 사회적 행위의 숨어 있는 ‘동기(motivation)’와 그것을 둘러싼 ‘주관적 의미(subjective meaning)’를 ‘이해(Verstehen)’하는 것이다. 확실히 베버는 사회적 행위의 동기와 주관적 의미의 이해를 강조함으로써 인간만이 지니는 마음과 정신에 집중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베버가 보기에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을 가르는 경계가 되었던 것이다. 99

 

베버는 ‘행위의 규칙성’의 발견이야말로 사회과학이 천착해야 할 중요한 과제라고 굳게 믿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대부분 익히 알고 있는 비슷한 환경(상황) 속에서 적용할 수 있는 방식들, 즉 사회적 방식들을 채택한다. 베버는 사회학이 이러한 사회적 행위에 관심을 집중해야 하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비슷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행할 수 있는 ‘규칙’적인 사회적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런 ‘규칙성’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행위’에 담겨 있는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속성을 지닌 사회적 행위의 원인과 그 과정 그리고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사회적 행위에 대한 해석적 이해를 추구하는 과학이 바로 사회학이라고 규정지었다. 그리고 그런 작업에서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은 바로 ‘행위’의 ‘규칙성’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에서 우리가 주의를 기울어야 할 것은 ‘원인’과 ‘결과’, 그리고 ‘설명’이라는 단어들이다. 101~103

 

그에게 인과적 설명과 해석적 이해는 대립관계가 아니고 긴밀한 협조관계에 놓여 있다.(···) 해석적 이해는 인과적 설명이 있어야 하고, 인과적 설명은 반드시 해석적 이해가 전제가 되어야만 한다. 105~106

 

연구자가 자신이 지닌 가치판단의 안경을 가지고 연구 대상에 접근해서 그 가치를 가지고 연구 대상의 의미를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한다. 이를 베버는 ‘가치자유’라고 하였다.(···) 그가 금지한 것은 단지 연구자가 연구를 진행하는 동안에는 반드시 자신이 지닌 나름의 가치를 저 뒤로 접어둔 채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하라는 것이다. 이를 잠시 ‘유보’라고 말한다. 109

 

베버가 사회현상의 인과적 설명을 위해 고안해낸 것은 ‘이념형’이다.(···) 사회학자가 연구 대상이 지니고 있는 여러 성격들 중에서 가장 특이하고 독특한 일부분을 부각시켜 고안해낸 것이 바로 ‘이념형’이다.(···) 그러나 그것은 연구자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110~111

 

베버는 과거와 현대사회를 구분하는 특징으로 ‘합리화’를 꼽았다. 그리고 베버는 집요하게 묻기 시작한다. “도대체 어떤 요인이 현대 서구문명 사회에 합리화를 가져오게 하였는가?” 113

 

마르크스와 베버의 차이점이란 마르크스가 현대사회의 자본주의 발전을 역사 발전의 모든 단계 중 한 단계로 간주한 반면, 베버는 그런 식으로 자본주의 발전을 보지 않았다는 데 있다. 즉 베버는 마르크스와 달리 자본주의의 발전을 역사에 있어 필연적이고 보편적 현상으로 결코 보지 않았다.(···) 베버에게 서구자본주의의 발전은 전 인류의 필연적 역사 발전의 한 단계가 아닌, 서유럽과 미국에서만 전개되는 매우 독특한 현상이었고, 그러한 자본주의 발전의 독특함은 여타 지역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114~115

 

그러나 이때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당시 서유럽과 미국에서 꽃피고 있던 자본주의의 발전이 다른 곳에서 목도되지 않는 매우 독특한 것으로 베버가 간주한다고 해서, 그가 다음의 사실까지를 부인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그 사실은 바로 자본주의적 에토스 중 하나인 이기적인 영리 추구의 극대화는 언제 어디서든지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베버는『중국의 종교』(1920)라는 책에서 그러한 자본주의적 에토스가 고대 중국의 상업 분야에 팽배해 있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베버가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그 점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필 서유럽에서 자본주의의 시동이 걸리게 되었는가?”하는 질문이었다.(···) 고대 중국에서 자본주의적 에토스가 팽배해 있었다고 해도 실제로 자본주의가 발전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116

 

베버는 자본주의의 태동과 발전이 매우 복잡한 인과적 요인들이 서로 얽히고설킨 채 전개된 것으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서유럽과 미국 이외의 다른 곳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매우 특이한 현상으로 간주했다. 따라서 이러한 특수한 현상을 단 하나의 요인으로 환원하여 설명하는 것은 지나친 일반화의 위험에 빠지는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것은 그가 ‘개신교 윤리’ 또한 자본주의가 태동하고 발전하는 데 기여한 많은 요인들 중 하나라는 점을 누차 강조한 것을 보면 충분히 인식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이 수많은 요인들 중 하나임을 인정하면서도 그 영향력이 지대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 또한 베버는 소홀히 하지 않았다. 118

 

베버는 근대적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16~17세기 서유럽에서 최초로 태동할 때 어떤 특유한 생활양식이 자본주의체제와 함께 발맞추어 등장했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체제의 발생에 매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간주한다. 그 특유한 하나의 세속적인 생활양식과 그것을 둘러싼 윤리적 동기 구조가 바로 베버가 고안해낸 ‘자본주의 정신’이다. 베버에 의해서 고안된 또 다른 ‘이념형’으로는 ‘현세금욕주의(inner-worldly asceticism)’라는 것이 있다.(···)

‘현세금욕주의’는 베버의『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핵심으로 작용한다. ‘현세금욕주의’는 이른바 또 다른 ‘이념형’인 ‘자본주의 정신’을 부추기는 이념으로, 역사적으로 개신교가 그것을 중요한 윤리요강으로 표방했다고 베버는 묘사하고 있다. 119~120

 

개신교도들은 속세에서의 성공을 그 증표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루터가 일상의 세속적 직업 자체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소명의 일환, 즉 성직으로 보았는데 그 성직이 번성하고 성공하면 그것이야말로 ‘구원’의 확실한 증표가 되리라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틀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칼뱅주의는 인간의 경제활동을 포함한 인생의 모든 것을 종교적인 것과 연관시켰다.(···) 이런 교의에 수긍하는 개신교도들은 세속적 직업의 성공을 목표로 삼고 불철주야 매진했다. 그들은 시간과 힘 그리고 돈을 허투루 낭비하지 않으며 오직 일만 했다.(···) 그들은 검박했고 절약했다.

그런데 주의해야 할 것은 그들이 이렇게 한 것은 오로지 내세의 ‘구원’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근면, 성실, 검약, 노동 등을 행하는 이유가 내세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지 현세의 안녕과 번영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122~123

 

개신교도들에게 세속적 삶에서의 성공과 번성,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다고 믿을 수 있는 이윤 추구는 더 이상 속물적이라고 비난받고 회피해야 할 사안이 아니게 되었다. 즉 그들은 세속적 삶의 모든 경제활동에 대한 정당성을 종교적으로 인증받게 되었다.

바로 이 점이 자본주의의 정신과 코드가 맞아떨어진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목적은 다름 아닌 ‘이윤추구’를 위한 자본의 축적이다.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본주의 정신은 개개인의 노동을 통한 자립을 조장하고 권장한다. 그 세부 권장사항에는 정신, 신뢰, 검약, 저축, 고된 노역, 절제, 허례허식의 추방, 낭비의 혐오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자본주의 정신과 개신교의 윤리는 닮아도 너무 닮아 있다.(···)

이렇게 양자 간에 코드가 맞아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것을 베버는 ‘선택적 친화력(elective affinity)’이라고 불렀다. 125

 

개신교도들은 혹은 개신교는 자본의 축적과 자본주의체제의 발전을 의도적으로 계획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체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상호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순전히 우연의 산물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이를 베버는 개신교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unintended consequence)’라고 불렀다. 127

 

(1) 전통적 행위

어떤 행위가 아무런 생각 없이 기계적이고 습관적으로 행해지는 행동이다.(···)

(2) 정의(情誼)적 행위

감정으로부터 야기되는 행위(···)

(3) 가치지향적 행위

성공의 여부와는 무관하게 어떤 행동 자체가 지닌 가치에 대해 신뢰함으로써 나타날 수 있는 행동이다.

(4) 목적합리적 행위

목적이나 수단이 모든 합리적으로 선택된, 실천적 목적을 지닌 행위다.(···)

베버는 유형적으로 나누어 본 사회적 행위가 과거 전통사회와 현대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달라지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즉 사회적 행위가 과거에는 전통이나 감정에 의해, 혹은 가치지향적 행위로 표출되었다면 현대사회에서는 점차로 목적합리성에 근거한 행위가 지배적이 된다는 것이다. 132~133

 

베버는 이렇게 어떤 이가 하고 싶어 하지 않은 일이라도 하도록 시킬 수 있는 힘을 ‘권력(power)’라고 하였다. “어떤 이의 의사에 반하여 그리고 그의 저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목적을 관철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권력’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권력’을 쥔 이들은 단순히 그런 ‘권력’을 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로 그들은 명령을 내릴 때마다 타인이 자신의 명령에 따르는지 아닌지를 지키고 있어야만 하는 피곤한 상황을 싫어하고, 다음으로 일시적인 복종이 아닌 지속적인 복종을 원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이는 자신이 과시하는 힘 때문이 아닌 타인의 자발적인 복종을 원한다. 베버는 이 세 가지 사항을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변형된 ‘권력’이 있다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권위(authority)’다. 한마디로 ‘권위’를 정의하면 그것은 ‘정당화된 권력(legitimated power)’이 된다. 133~134

 

권력자의 ‘권위’는 흔히 일상생활에서 어떤 이들이 특정 행위를 하게 될 경우, “그 행위에 대한 근거가 무엇이냐?”라고 물을 때 제시하는 답으로 대변될 수 있다.(···)

(1) 전통

“왜 여자나 남자나 때가 되면 결혼을 해야 하나요?”의 질문에 만일 답이 “예전부터 그래왔으니까”라고 나오게 되면 그 결혼이란 행위는 전통이라는 권위에 의해 자행되는 것이다.

(2) 카리스마

(···) 카리스마적 권위는 모든 전통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베버는 카리스마의 전형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들고 있다.(···)

(3) 합리적-법적 권위

법적으로 용인된 절차에 의거한 권위다.

(···) ‘권위’의 문제와 ‘현대사회’의 논의를 연결시킨 이유는 사회적 행위와 마찬가지로 베버가 현대사회에서의 대부분의 행위가 (3)의 합리적-법적 권위에 의해 주로 이루어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반면 과거사회는 전통과 카리스마에 의한 권위가 지배적이었다고 베버는 강조했다.(···) 현대사회에서는 대부분의 사회적 행위가 점점 더 감정이 결여된 채 딱딱하기만 한 법이나 합리적 계산에 의해서만 행해지는 경향이 짙어진다는 것이다. 134~135

 

베버는 현대사회의 사회적 행위와 그것의 근거를 제공해주는 정당성과 권위에 있어서 ‘합리화(rationalization)’가 급속히 진행 중이라고 진단했다. 즉 전통이나 정서적 혹은 가치지향적인 사회적 행위는 이해타산을 위해 모든 목적과 수단을 엄밀하게 따지는 계산적이고 합리적인 행위들로 대체된다. 그리고 어떤 행위의 정당성은 ‘과거에 그래왔던’ 타성이나 엄청난 파괴력을 보이는 카리스마보다는 사회구성원들 간에 합리적으로 도출된 법에 의해 부여된다. 베버는 이러한 합리화 과정을 현대사회의 큰 변혁을 가져오는 메가톤급 힘으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합리화 과정이 모든 삶의 구석구석에 굳게 뿌리를 내려 자리잡아가고 있음을 목도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관료제(bureaucracy)’다. ‘관료제’적 성격은 이제 현대인의 생활세계 도처에서 목격된다.(···) 이러한 조직은 단 한 사람의 카리스마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거기에는 사적인 감정들은 철저하게 배제될 것이 기대되고 합리적이고 법적인 절차가 중시될 것이다. 136~137

 

베버가 보는 ‘합리화’ 그리고 ‘탈미혹화’는 다름 아닌 ‘계산가능성’을 의미한다. 계산을 통해 과거를 해석하고 현재를 재단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138

 

이러한 과정을 베버는 종교의 ‘세속화 과정(secularization of religion)’이라고 명하였다.(···) 베버의 ‘세속화’ 과정이란 사회에서 차지하는 종교의 힘이 퇴색해가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139

 

그것은 한마디로 ‘피곤함’이다. 종교의 힘이 막강한 시대에는 종교가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의 모든 문제에 대한 일목요연한 해답을 제시해주었다. 이런 세계의 사람들은 대체로 정서적으로 안정되었으며 덜 피곤하였다.(···) 하지만 종교가 맥을 못 추는 곳에서는 모든 문제에 사람들 스스로의판단과 결정이 요구된다.(···) 가치는 공유되고 공통적이며 객관화된 것이라기보다는 잘게 분쇄된 것들이고 다른 이의 가치와 의미들과는 항상 경쟁관계에 놓이게 된다. 이를 베버는 가치의 ‘다신교(polytheism)’적 상황이라고 표현하였다. 144

 

베버가 ‘다원주의’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굳이 가치의 ‘다신교’란 수식을 사용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특정한 하나의 가치가 곧 ‘신’이 되었음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가치의 유래는 사회가 아닌 인간 개개인이다. 고로 이 말은 곧 인간 개개인이 ‘신’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신’들은 서로 조화하지 못하고 배끗거리면서 영원한 투쟁 상태에 돌입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베버가 본 현대사회의 모습이다.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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