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인 「고조선의 강역 (문헌고증 접근)」에서 지면을 상당히 많이 할애하여 패수(浿水)와 관련된 이야기를 전해드린 바 있다. 전편에서 패수와 관련된 언급이 많았던 이유는 패수의 안쪽은 고조선 강역의 안쪽이 되고 패수의 바깥쪽은 고조선 강역의 바깥쪽이 되기 때문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패수의 서쪽은 중국의 영역이고 패수의 동쪽은 고조선의 영역이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패수(浿水)는 고조선과 중국의 경계가 되는 강인데 시기를 세분화할 경우 단군조선(후조선 일 수도 있음)과 연(燕)나라 그리고 위만조선과 한(漢)나라의 경계가 되는 강이다.
구체적으로는 위만조선과 한나라(前漢)의 경계가 되는 강으로 지칭된다는 것이 오늘날 학계의 통설이다. 이 말은 패수(浿水)가 고조선 전성기(全盛期)에 중국과 경계를 이루던 강을 뜻하지 않고 수세(守勢)에 몰린 상황에서 경계를 이루던 강을 뜻한다는 것이다. 임찬경 박사에 의하면 패수(浿水)는 사마천이 편찬한 『사기(史記)』「조선 열전」에 처음 기록된 물길의 명칭이라고 한다. BC202년 전한(前漢)이 건국된 이후 연(燕)지역과 조선의 경계로 정해진 것이 패수라는 것이다.
이처럼 패수가 양국 간에 경계(境界) 내지는 국경(國境)이 되는 강을 뜻하므로 패수(浿水)는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普通名詞)의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양국 간의 경계가 바뀌면 패수의 위치 또한 바뀌게 된다. 패수(浿水)가 보통명사라는 것은 북한의 역사학자인 리지린(李址麟)이 그의 북경大 박사 학위 논문인 『고조선 연구』(1961)를 통해서 주장한 바 있다. 리지린의 학문적 문하생(門下生)이라 할 수 있는 박경순 평론가가 주장하는 내용을 하나의 예로 들어 설명해 보기로 하자.
朴 평론가는 고조선과 연나라의 경계가 난하(灤河) 일대로 유지되었으나 진개(秦開)의 침략으로 고조선은 요하(遼河)로 급속히 후퇴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대대적인 반격을 취해 대릉하(大陵河) 유역까지 회복한다고 보았다. 朴 평론가의 이런 주장을 따르게 되면 난하(灤河), 요하(遼河), 대릉하(大陵河) 모두 패수의 자격을 갖춘다. 朴 평론가는 조선과 연나라의 경계가 대릉하(大陵河)로 굳어진 후 이것이 위만조선이 망하는 시점까지 유지된다고 보았으므로 朴 평론가에게는 대릉하(大陵河)가 패수가 된다.
고조선의 강역을 규명하는 데 있어서 패수가 중요한 이유는 패수(浿水)가 위만조선이 멸망하는 시점에 중국과 경계를 이루던 강이었고 위만조선이 멸망한 후에 패수 건너편인 옛 조선 영역에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패수의 위치를 알게 되면 한사군의 위치 규명도 가능해진다.
그런데 문제는 위만조선이 망하는 시점에 패수로 추정되는 강이 한두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려 열 곳이 넘는다. 게다가 후술하겠지만 패수로 불리는 강 모두가 조선과 중국의 경계를 뜻하는 강이 아니라는 견해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복잡하게 전개되다 보니 오늘날 학계에서는 이를 ‘패수 논쟁(浿水 論爭)’ 이라고 부른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조선 열전」 기록에 따르면 한(漢)나라는 중국을 통일한 뒤 요동(遼東) 지방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浿水)를 조선과의 경계로 삼았다고 했다. 위만(衛滿)이 BC195년에 조선으로 망명하기 위해 동(東)쪽으로 요새를 빠져 달아나 건넜다는 강이 패수(浿水)이고 BC109년에 한나라 사신 섭하(涉河)가 우거왕(右渠王)을 만난 뒤 귀국 길에 자신을 호송하던 고조선의 관리를 살해하고 강 건너 달아났다고 하는데 그 강 역시 패수(浿水)라고 불리는 곳이다.
위만이 건너왔다는 패수(浿水)와 섭하가 도망쳐 건너갔다는 패수(浿水)가 같은 강이었다고 추정되나 패수(浿水)가 국경(國境)을 의미하는 보통명사(普通名詞)로 쓰였으므로 BC195년과 BC109년 사이에 위만조선과 한나라의 경계가 바뀌었다면 같은 강이었다고 볼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사가(史家)들의 일반적인 견해는 이 시기에 국경이 유지되었다고 추정하므로 위만이 건너왔다는 패수(浿水)와 섭하가 도망쳐 건너갔다는 패수(浿水)는 같은 강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이제 패수(浿水)의 위치 비정(比定) 관련 내용을 중국의 문헌(文獻)에 접속하여 알아보자. 그 근거가 되는 사료를 시기적으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그런데 패수와 관련된 문헌은 아래 열거된 다섯 가지 외에도 많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후대에 나온 문헌들이고 아래 내용에 주석을 달거나 인용하는 과정에서 원전(原典)의 내용을 훼손(毁損)하는 참고서(?)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따라서 패수의 위치를 거론하는 문헌은 아래 다섯 가지에 한정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그것이 초심(初心)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된다.
①『水經(수경)』에 의하면 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于海 → “패수는 낙랑(樂浪) 누방현(鏤方縣)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임패현(臨浿縣)을 지나 동쪽 바다로 들어간다”
②『한서』「지리지」<요동군> ‘번한현’에 대한 주석에 沛水出塞外 西南入海 → “패수(沛水, 汗水)가 (국경의) 요새 밖으로 나가 서남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③『한서』「지리지」<낙랑군> ‘패수현’에 대한 주석에서 水西至增地入海 → “강이 서쪽으로 증지(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④『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의하면 浿水出鏤方,東入海 一曰出浿水縣 → "패수는 누방에서 나와 동쪽으로 바다로 들어가는데, 혹은 패수현에서 나온다고도 한다."
⑤ 『십삼주지(十三州志)』에 의하면 浿水縣在樂浪東北,鏤方縣在郡東。蓋出其縣南逕鏤方也 → "패수현은 낙랑의 동북에 있고, 누방현은 군(낙랑)의 동쪽에 있는데, 그 현들(패수현과 누방현)에서 모두 (패수가) 나와 남쪽으로 누방(현)을 지나간다."
①『수경(水經)』은 패수(浿水)의 위치를 전하는 최초의 1차 문헌(文獻)으로 전한(前漢) 말기의 상흠(桑欽)이라는 인물이 저술하였다는 원전(原典)이다. 상흠(桑欽)은 왕망(王莽)이 신(新)나라 (AD8∼24)를 세울 때 국가의 기틀을 잡는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라고 한다. ②와 ③인 『한서』「지리지」는 후한(後漢) 시기인 서기 82년경에 반고(班固)가 편찬한 것이며 ④『설문해자(說文解字)』는 후한(後漢) 시기인 서기 121년에 허신(許愼)이란 인물이 편찬한 것이고 ⑤『십삼주지(十三州志)』는 북위(北魏, 386~534) 시대의 지리학자인 감인(闞駰)이라는 인물이 편찬한 저서이다. 한편 패수(浿水)란 명칭(名稱)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문헌은 전한(前漢) 중기에 편찬된 『사기(史記)』이다.
①『수경(水經)』과 ④『설문해자(說文解字)』는 내용이 같다. 『水經(수경)』과 『설문해자(說文解字)』 모두 낙랑(樂浪) 누방현(鏤方縣, 이하에서는 두음법칙에 따라 루방현이라고 표기하기로 함)에서 나온 패수(浿水)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가는 강이라고 설명한다. 참고로 ④『설문해자(說文解字)』는 허신(許愼)이란 인물이 후한(後漢) 시기인 서기 100년에 집필을 시작하여 121년에 완성하였다고 하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자전(字典) 예컨대 옥편이다.
한편 이보다 한참 후인 북위(北魏)의 지리학자인 감인(闞駰)이 편찬한 『십삼주지(十三州志)』라는 저서에서도 위와 비슷한 내용을 전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십삼주지(十三州志)』에서 전하는 지리지의 내용은 대릉하(大陵河) 서쪽 지역에 국한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따라서 『십삼주지(十三州志)』에 의하면 패수는 대릉하(大陵河) 서쪽에 위치하게 된다.
그런데 후한(後漢) 시기에 편찬된 문헌 중에 패수가 서쪽으로 흐른다는 내용이 있다. ②『한서』「지리지」<요동군>‘번한현(番汗縣)’에 대한 주석에서 후한(後漢)의 반고(班固, 32~92)는 “패수(沛水, 汗水)가 국경의 요새 밖으로 나가 서남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는 내용을 전한다. 번한현(番汗縣)에 있었다는 패수가 동쪽이 아닌 서쪽으로 흐른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한서』「지리지」<요동군>‘번한현(番汗縣)’에서 전하는 패수(沛水)의 패(沛)자는 늪 패자를 사용한다.
이처럼 『한서』「지리지」<요동군>‘번한현(番汗縣)’에서 전하는 패수(沛水)가 『사기(史記)』와 『수경(水經)』에서 전하는 패수(浿水)와 한자가 달라 『한서』「지리지」<요동군>에서 전하는 패수(沛水)가 조선과 중국의 경계가 되는 패수(浿水)로 단정할 수 없다는 견해가 있다. 한편 패수(沛水)를 한자의 뜻에 근거하여 접근할 경우 『한서』「지리지」<요동군> ‘번한현’에서 전하는 패수(沛水, 汗水)는 요동군 일대에 늪지대로 형성되어 있는 강을 의미하게 된다.
늪지대와 관련하여 한 가지 거론할만한 내용이 있다.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이 안시성(安市城, 645년) 공격에 실패하고 퇴각로로 삼은 곳이 요동의 늪이라는 요택(遼澤)이라는 곳이다. 당태종은 군마에서 내려 손수 낫을 들고 잡초를 베어가며 수렁을 메우고 수레를 통과시켜 힘겹게 요택의 늪지대를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요동의 늪이라고 불리는 요택(遼澤)이라는 곳은 오늘날 반금 市 서쪽을 흐르는 쌍태자하(雙太子河, Shuang taizi River)라고 추정된다. 쌍태자하는 요하(遼河)로 불리기도 한다. 이렇게 보자면 『한서』「지리지」<요동군>‘번한현(番汗縣)’에서 전하는 패수(沛水)는 요동 지역에 있는 쌍태자하(雙太子河)가 유력해진다.
한편 『한서』「지리지」의 또 다른 내용인 ③『한서』「지리지」<낙랑군> ‘패수현(浿水縣)’에 대한 주석에서 반고(班固)는 강의 명칭을 밝히지 않았으나 강이 서류(西流)한다고만 밝혔다. 학계(學界) 해석에 의하면 반고(班固)가 강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이유는 강의 이름이 그곳의 현명(縣名)과 같아서 그렇게 기록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패수현(浿水縣)에 있었던 이 강의 명칭이 패수(浿水)였을 것으로 본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한서』「지리지」에서는 두 개의 패수를 거론한다. 하나는 <요동군> ‘번한현’에서 전하는 패수(沛水)이고 다른 하나는 <낙랑군> ‘패수현’에서 전하는 패수(浿水)이다. 한자가 서로 다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둘은 같은 강이 아니다. 요동군 바깥에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되었다는 학계(學界)의 통설(通說)을 따르는 경우 <낙랑군> ‘패수현’의 패수(浿水)는 <요동군> ‘번한현’의 패수(沛水)보다 동쪽에 있어야 한다.
중국 영역인 요동군(遼東郡) 건너편에 한군현(漢郡縣)이 설치되었으므로 낙랑군(樂浪郡)이 요동군보다 동쪽에 있어야 하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낙랑군이 요동군보다 동쪽에 있어야 한다는 이런 내용은 요동군의 치소(治所)가 하북성(河北省) 창려현(昌黎縣)에서 요녕성(遼寧省) 요양(遼陽) 市 일대로 동천(東遷)하기 전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다. BC75년에 요동군의 중심지가 요양(遼陽) 市 일대로 옮겨진 이후 요동군의 서변(西邊)이 난하(灤河) 동부 일대에서 요하(遼河) 동부 일대로 옮겨갔다는 학계의 주장이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요동군의 영역은 요양 市를 중심으로 북으로는 심양(瀋陽, Shenyang) 일대에서 남으로는 안산(鞍山, Anashan) 市에 이르며 그 지역으로부터 서쪽으로는 쌍태자하(雙太子河) 동부 연안까지를 관할 구역으로 두었다고 본다. 이 주장에 따르면 쌍태자하 건너 서쪽은 요서군(遼西郡) 지역이라는 것이다.
요동군(遼東郡)이 동천(東遷)함에 따라 낙랑군(樂浪郡) 역시 동쪽으로 이사 가게 되었는데 난하(灤河)에서 대릉하(大陵河) 사이를 관할로 두던 낙랑군이 그 지역을 요서군(遼西郡)에게 넘겨주고 요동반도(遼東半島)로 이전하였다고 추정한다. 이에 따르면 BC75년 이후 낙랑군의 관할 지역을 영구(營口, Yingkou) 市에서 대련(大連, Dalian) 市에 이르는 요동 반도와 그 동쪽 지역으로 본다.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게 되면 『한서』「지리지」<요동군> ‘번한현’에서 전하는 패수(沛水)를 늪지대인 요택(遼澤)과 결부시켜 오늘날 반금( 盤錦, Panjin)市 서쪽을 흐르는 쌍태자하(雙太子河)로 추정할 수 있게 된다. 더욱이 요동군 지역이라고 추정되는 심양 市에서 안산 市 일대 서쪽에 쌍태자하가 흐르기 때문에 ‘번한현’에서 전하는 패수(沛水)는 요동 지역에 있는 쌍태자하(雙太子河)가 유력해진다.
그리고 『한서』「지리지」<낙랑군> ‘패수현’에서 전하는 패수(浿水)는 물줄기의 흐름이 강이 서쪽으로 증지(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는 내용으로 보아 영구 市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 내려온 후 서쪽으로 흘러 발해로 들어가는 대요하(大遼河, Daliao River)가 유력해 보인다. 낙랑군 지역이라고 추정되는 영구 市 일대에 대요하(大遼河)가 흐르기 때문에 이런 주장은 더욱더 설득력이 있다.
요동군(遼東郡)의 동천(東遷)으로 요동군이 요양 市 일대를 관할하고 낙랑군이 그 남쪽인 요동 반도를 관할하였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게 되면 『한서』「지리지」<요동군> ‘번한현’에서 전하는 패수(沛水)는 반금 市 북부와 서쪽을 경유해서 남쪽으로 흘러 발해로 흘러 들어가는 쌍태자하(雙太子河, Shuang taizi River)가 유력해진다. 쌍태자하는 요하(遼河)로 불리기도 한다.
한편 『한서』「지리지」<낙랑군> ‘패수현’에서 전하는 패수(浿水)는 영구 市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 내려온 후 서쪽으로 흘러 발해로 흘러 들어가는 대요하(大遼河, Daliao River)가 유력해진다. <요동군> ‘번한현’에서 전하는 패수(沛水)는 쌍태자하(雙太子河) 그리고 <낙랑군> ‘패수현’에서 전하는 패수(浿水)는 대요하(大遼河)가 유력하다는 뜻이다.
『한서』「지리지」에서 전하는 두 개의 패수는 요동군과 낙랑군에 있던 강으로 조선과 중국의 경계로 거론되는 패수(浿水)가 아니라는 게 오늘날 학계에서 힘을 얻고 있다. 그런 까닭에 『한서』「지리지」에서 전하는 두 개의 패수는『사기(史記)』 에 기록된 패수(浿水)와는 다른 강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민족사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학계 일각에서 『한서』「지리지」에서 전하는 두 개의 패수를 조선과 중국의 경계로 거론되는 패수(浿水)의 범주에서 제외하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한서』「지리지」에서 전하는 두 개의 패수 중 하나는 조선과 중국의 경계로 거론되는 패수(浿水)로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분명한 점은 『한서』「지리지」에서 전하는 두 개의 패수는 『수경(水經)』에서 전하는 패수와 어우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경(水經)』에서 전하는 내용을 엄격하게 준용(準用)할 경우 『한서』「지리지」에서 전하는 두 개의 패수는 조선과 중국의 경계로 거론되는 패수(浿水)의 범주에서 제외된다. 그러나 만약 『수경(水經)』에서 전하는 내용을 엄격하게 준용(準用)하지 않는다면 『한서』「지리지」는 『수경(水經)』의 참고서가 되어 『한서』「지리지」에 나오는 패수가 조선과 중국의 경계로 해석될 여지를 갖추게 된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한서』「지리지」의 내용을 살펴봄에 있어서 「지리지」가 전하는 패수의 모양 예컨대 물줄기의 흐름에 집착하지 않고, 그것이 전하는 내용 중 패수와 관련 있는 부대 환경을 주목할 경우 『한서』「지리지」도 조선과 중국의 경계로 거론되는 패수의 준거틀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상에서 조선과 중국의 경계로 규정할 수 없는 패수(浿水)로 『한서』「지리지」에서 전하는 패수를 거론하였는데 그런 패수는 이것 외에도 하나가 더 있다. 그것은 조선계 지명으로 쓰이는 패수(浿水)와 패강(浿江)이다. 패수와 패강은 고조선의 수도 근처를 흐르는 대동강(大同江)으로 오늘날 이해되고 있다. 고조선 시대에는 열수(烈水)로 불렸으나 삼국시대에 이르러서는 패수와 패강으로 불렸다고 한다.
이상의 내용을 기준으로 하면 패수(浿水, 沛水)로 불리는 모든 강이 조선과 중국의 경계를 이루는 강이라고 규정할 수 없게 된다. 『한서』「지리지」에서 전하는 패수(浿水, 沛水)나 고조선 수도의 중심부를 흐른다는 패강(浿江)은 조선과 중국의 경계를 뜻하는 강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분명한 점은 고조선 수도의 중심부를 흐른다는 패강(浿江)은 조선과 중국의 경계가 아니라는 점이다.
조선과 중국의 경계가 되는 패수(浿水)를 그것과 관련된 1차 문헌에 근거하여 충실히 살펴보고자 한다면 『한서』「지리지」에서 전하는 패수(浿水, 沛水)와 고조선의 중심부를 흐르는 패수 혹은 패강(浿江)은 제외해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입장이다. 『한서』「지리지」의 내용에 나오는 두 개의 패수(浿水, 沛水)와 조선계 지명인 패수(浿水), 패강(浿江)을 논의의 대상에서 배제할 경우 패수(浿水)는 동쪽으로 흐르는 강으로 규정된다.
그런데 최근 들어 ①『수경(水經)』, ④『설문해자(說文解字)』, ⑤『십삼주지(十三州志)』에서 전하는 패수(浿水) 역시 조선과 중국의 경계를 뜻하는 패수가 아니라는 견해가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①, ④, ⑤에서 전하는 패수(浿水)가 조선과 중국의 경계를 뜻하는 패수가 아니고 『한서』「지리지」에서 전하는 내용과 같은 이른바 특정 지역을 설명하는 강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패수(浿水)가 낙랑군 내부 혹은 그 경계에 흐르는 강이라는 뜻이다.
이 주장을 받아들이게 되면 조선과 중국의 경계를 뜻하는 패수(浿水)는 『사기』「조선 열전」,『한서』「조선전」 그리고 『위략』에서 전하는 패수에 국한되고 ①『수경(水經)』, ②,③『한서』「지리지」, ④『설문해자(說文解字)』, ⑤『십삼주지(十三州志)』에서 전하는 패수는 조선과 중국의 경계와 관련이 없는 내용이 된다.
만약 이런 주장을 따르는 경우 『사기』「조선 열전」,『한서』「조선전」 그리고 『위략』에서 전하는 패수(浿水)를 기준으로 패수의 위치를 규명하여야 하는데 그것이 녹록지 않다는 것이 문제이다. 왜냐하면 『한서』「조선전」과 『위략』에서 전하는 패수는 『사기』「조선 열전」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옮겨온 것에 불과하고 『사기』「조선 열전」의 내용에는 패수(浿水)의 위치를 규명할 수 있는 마땅한 정보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①, ②, ③, ④, ⑤ 에서 전하는 패수가 조선의 국경과 관련이 없다는 일각의 견해는 학계의 정설(定說)로 자리 잡은 것이 아니므로 이런 주장도 있구나! 라는 선에서 그치기로 하자.
조선과 중국의 경계가 된다는 패수(浿水)가 동류(東流)한다는 견해는 전한(前漢) 말기부터 북위(北魏, 386~534) 시대에 이르기까지 근 500년 동안 통설(通說)로 유지되어왔다. 그런데 패수(浿水)를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강이라고 보는 견해가 6세기에 등장하였다. 이런 견해는 『수경(水經)』에 주(注)를 달아놓은 북위(北魏)의 지리학자 역도원(酈道元, 469~527) 에서부터 시작된다. 역도원은 패수(浿水)가 대동강(大同江)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수경(水經)』에서는 패수가 동류(東流)한다고 기록해 놓아 역도원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마침 북위에 온 고구려 사신에게 패수와 관련된 내용을 물어보았고 패수가 서류(西流)한다는 대답을 듣게 된 역도원은 자기의 생각이 맞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런 확증 편향(確證偏向)적 가치관을 내세운 역도원은 급기야 『수경(水經)』의 내용이 잘못되어 오류를 바로잡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근거도 없이 “서북쪽으로 흐른다”는 내용까지 추가하였다.
그래서 『수경주(水經注, 515)』에 “내가 번국의 사신에게 찾아가 물으니 말하기를 ①고구려의 성은 패수(浿水)의 북쪽에 있고 패수는 서쪽으로 흘러 옛 낙랑군(樂浪郡) 조선현(朝鮮縣)을 지난다고 하였는데, 즉 낙랑군 치소(治所)이다. 내가 고구려 사신에게 물어보니 대답하기를 ②평양성은 패수(浿水)의 북쪽에 있는데 패수는 서쪽으로 흘러 옛 한(漢) 무제가 설치한 낙랑군 치소인 낙랑군 조선현을 지나고 서북쪽으로 흐른다. 그래서 지리지에서 말하기를 패수는 서쪽으로 증지현(增地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한 것이다. 또한 한(漢)이 흥하자 조선이 너무 멀어 요동의 옛 새(塞)를 복원하여 패수를 경계로 한 것이다. 이것을 고찰하여 보면 옛일에 대한 어긋남이 있는데 모두 『수경(水經)』의 어긋남을 증명하는 것이다.”라고 기록하였다.
『수경주(水經注)』에 나오는 내용에 해석을 가하면, 번국이란 고구려를 뜻한다. 지문의 내용상 고구려의 성(城)은 고구려의 도성(都城)인 평양성(平壤城)을 뜻하며 여기서 패수(浿水)는 대동강(大同江)을 의미한다. 조선현(朝鮮縣)과 증지현(增地縣)은 모두 낙랑군(樂浪郡) 25개의 현(縣)에 속하는 지명으로 위치 미상이다. 그리고 여기서 ‘지리지’란 『한서』「지리지」<낙랑군> ‘패수현(浿水縣)’에서 전하는 내용을 말한다. 요동의 옛 새(塞)를 복원하여 패수를 경계로 삼았다는 것은 『사기』「조선 열전」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①은 고구려 사신이 말했다는 이야기이고 ②는 고구려 사신이 말한 것을 역도원이 자신의 구미에 맞게 해석해서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내용이다. 그리고 밑줄이 없는 그 이하 부분은 ②의 내용이 맞고 『수경(水經)』이 틀렸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부연 설명해주는 부분이다.
그런데 한편으론 ①에서 고구려 사신이 “고구려의 성이 패수의 북쪽에 있고 패수는 서쪽으로 흐른다”고만 이야기했을 뿐인데 역도원이 여기에 낙랑군(樂浪郡) 조선현(朝鮮縣)이란 말을 추가했다는 확인되지 않은 학계의 주장도 있음을 알려드린다.
『수경주』 내용의 핵심은 “고구려 사신이 말하길 도성(= 평양성)은 패수의 북쪽에 있고, 그 물은 서쪽으로 흐르다가 서북쪽으로 흐른다”이다. 역도원은 『수경주(水經注)』를 통해 패수가 서쪽으로 흘러들어갔다는 것을 반증하려고 무지하게 노력했다. 그런데 ①과 ②의 내용이 다른 점은 ①에서는 고구려 사신이 패수가 서(西)쪽으로 흐른다고 하였는데 ②에서는 역도원이 패수가 서북(西北)쪽으로 흐른다고 내용을 바꾸어 놓았다는 것이다. 역도원은 패수가 왜 서북쪽으로 흐른다고 내용을 바꾸어 놓았을까?
이 내용을 이해하려면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할 때 한나라 원정군(遠征軍)의 진격로(進擊路)가 어떠하였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사서에는 한나라 원정군(遠征軍)이 패수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진격했다고 묘사되어 있다. 원정군이 패수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도강(渡江)했다는 것이다. 역도원의 패수(浿水)가 『사기』「조선 열전」의 내용에 부합하려면 패수는 북서쪽으로 흘러 바다에 접해야 한다.
북서쪽이 여의치 않는 경우 적어도 서북쪽으로 흘러야 한다. 그래야지만 한나라 원정군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진격이 가능해지게 된다. 그래서 역도원은 고구려 사신이 말한 내용에 자신의 주관을 가미해 패수의 방향을 시계 시침(時針) 기준으로 9시 방향에서 10~11시 방향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역도원은 『수경주』에서 패수가 서북(西北)쪽으로 흐른다고 주장하였는데 역도원이 패수로 본 것은 오늘날 대동강(大同江)으로 불리는 강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대동강이 서북쪽으로 흘러 바다에 접하는 강인가? 만약 누군가가 2100여 년 전에는 대동강의 수로(水路)가 서북쪽으로 흘러 바다에 이르렀다고 주장하고 또 그것이 사실로 판명이 났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현재의 대동강은 하류 지역만 놓고 보면 남쪽으로 흘러가다가 서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현재의 대동강 모습은 역도원이 『수경주(水經注』에서 주장한 서북(西北) 방향의 물줄기가 아니다.
역도원은 패수가 서류(西流)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그 근거가 되는 것을 『한서』「지리지」<낙랑군> 패수현(浿水縣) 편(篇)에서 인용하고 있다. 『한서』「지리지」에는 강이 서쪽으로 증지현(增地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면서 요동고새(遼東故塞)를 복원하여 패수를 경계로 삼았다는 『사기』「조선 열전」의 내용도 함께 인용하여 내용을 그럴듯하게 포장한다.
역도원(酈道元)은 『수경(水經)』에서 전하는 패수의 동류(東流) 내용을 서류(西流)한다고 바꾸어 놓은 인물이다. 역도원(酈道元)의 이런 원본조작(原本造作)이 낳은 패수 대동강설(浿水 大同江說)은 역도원의 『수경주(水經注)』이래 『수서(隋書)』, 『신당서(新唐書)』, 『통전(通典)』 등의 중국 사서(史書)에서 한결같이 유지되고 있는 견해이다.
그리고 이런 견해는 훗날 우리나라 주류사학(主流史學)에 힘을 실어주게 된다. 패수가 서류(西流)한다는 역도원의 기록을 근거로 주류사학에서는 패수가 한반도(韓半島) 내에 있는 강이라고 주장해왔는데 그 후보지로 추정되는 압록강, 청천강, 대동강 모두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 들어가는 강이다. 이런 학설에 편승하여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은 패수(浿水) 압록강설(鴨綠江說)을 견지하였으며 일제강점기에 제기된 청천강 설(淸川江說)은 열수(洌水)를 대동강(大同江)으로 보고 평양지역을 고조선의 중심지로 이해하고자 하는 입장에서 제시된 것이다.
필자가 전편인 「고조선의 도읍지와 천도 (왕검성)」하단 부분에서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는 것이 힘든 이유로 후대의 사가(史家)들이 자신의 주관적인 견해라 할 수 있는 주석(註釋)을 달면서 1차 사료(史料)의 내용을 변질하여 훼손시켜 왔고 그 결과 이것을 제대로 규명하고자 하는 후학(後學)들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패수(浿水)와 관련된 내용도 마찬가지이다. 패수와 관련한 1차 문헌인『수경(水經)』에 의하면 패수가 분명히 동류(東流)한다고 기록해 놓았는데 그것의 해설서(解說書)라 할 수 있는 2차 문헌인 『수경주(水經註)』에서는 패수가 서류(西流)한다고 바꾸어 놓은 것이다.
물론 1차 문헌이 원전(原典)이기 때문에 2차 문헌에 우선시되고 더 중요한 사료라고 평가받아야 마땅하겠으나 만약 그것이 잘못된 사실을 기록하였다면 오류를 바로잡은 2차 문헌인 주석서(註釋書)를 더 중요한 사료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2차 문헌이라 할 수 있는 역도원(酈道元)의 주석서(註釋書)인 『수경주(水經注)』가『수경(水經)』이란 저서에 주석(註釋)을 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주관적인 견해를 책 곳곳에 구현(具現)해내었다는 점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역도원의 『수경주(水經注)』는 재(再)창작에 버금가는 수준의 창의성을 갖춘 편찬물이라는 것이다.
역도원은 실제의 역사적 사실보다는 자신의 소신(所信)을 책을 통해서 구현(具現)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서적의 내용이 이런 성격을 띠다 보니 『수경주(水經注)』에서 패수(浿水)로 추정한 대동강(大同江)은 역도원의 주관적인 생각이 짙게 개입되었다고 판단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수경주(水經注)』가 전하는 내용은 객관성이 부족하고 중국 편향적(偏向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민족사학계의 일반 입장이다.
이제 역도원(酈道元)의 《패수 대동강설(浿水 大同江說)》의 내용과 문제점을 거론해보자. 역도원은 『수경주』에서 패수(浿水)를 한반도에 있는 대동강(大同江)에 비정(比定)하려고 하였다. 역도원은 고대의 대동강 일대에 기자(箕子)가 와서 교화(敎化)한 조선(朝鮮)이 있었으며 뒤에 위만(衛滿)이 이곳에서 왕이 되어 왕험성(王險城)에 도읍했고 한(漢)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켜 낙랑군을 설치했는데 왕험성이나 낙랑군의 군치(郡治)인 조선현(朝鮮縣)이 모두 패수(浿水) 일대에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기(史記)』「조선 열전」에 기록된 패수(浿水)가 바로 현재의 대동강(大同江)이라는 것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 홍여하(洪汝河, 1621~1678)는『동국통감(東國通鑑)』을 취사·절충하여 저술한 역사서인『동국통감제강(東國通鑑提綱), 1672』에서 패수 요하설(浿水遼河說)을 주장하였는데 저서인 『동국통감제강』에서 패수(浿水)를 대동강(大同江)으로 혼동하여 비정할 수 있는 이유를 거론하였다. 홍여하에 의하면 “기자가 조선에 와 도읍지로 삼은 곳이 평양(平壤)인데 여기서 평양이란 요양(遼陽)의 옛 이름이다. 요양 옆에 패수가 있었으므로 훗날 사람들이 이를 혼동하여 지금의 평양 인근에 있는 대동강을 패수(浿水)로 부르게 되었다”.
홍여하(洪汝河)는 평양(平壤)을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로 받아들였다. 대동강 북쪽에 있는 평양은 고구려와 관련된 것이고 요양(遼陽)에 있는 평양은 고조선과 관련된 내용이다. 패수(浿水)는 고조선과 관련된 내용이므로 패수는 고구려의 평양이 아닌 고조선의 평양 인근에서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곳은 요양(遼陽) 인근 지역이 된다. 구체적으로 지칭하자면 패수는 요하(遼河)의 한 지류로 요양(遼陽) 서쪽에 있었다고 본다. 이것이 홍여하가 주장하는 패수 요하설(浿水遼河說)이다.
역도원과 고구려 사신의 문답(問答) 내용을 분석해보자. 고구려 사신이 말하길 “성(= 평양성)이 패수의 북쪽에 있다”고 하였는데 고구려 사신이 말한 ‘성(城)’과 ‘패수(浿水)’는 오늘날 평양(平壤) 市 일대와 대동강(大同江)을 지칭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고구려 사신이 답변한 패수라는 강은 고구려의 새 도읍지인 평양 남쪽의 대동강을 염두에 두면서 말한 것이었지 고조선과 중국의 경계가 되는 강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다고 본다.
그 이유는 대동강이 고조선과 중국의 경계가 되는 강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대동강이 패수가 되어 중국과 경계가 되는 강이라면 대동강 북쪽에 있는 평양성이 고조선의 왕검성이 될 것이며 왕검성 일대가 중국의 영역이 아닌 이상 대동강 남쪽이 중국의 땅이라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대동강 북쪽과 남쪽 중 북쪽 지역이 중국의 영토로 간주 되었을 텐데 대동강 북쪽에는 고조선의 도읍지로 추정되는 평양성이 있다. 고조선의 도읍지가 중국 땅에 있을 수 없으므로 대동강 북쪽은 중국의 영토로 볼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대동강 남쪽이 중국의 영토가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중국의 어떤 사서에서도 대동강 이남인 평안남도(平安南道)와 황해도(黃海道) 일대가 중국 땅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만약 고구려 사신이 낙랑군(樂浪郡) 조선현(朝鮮縣)이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역도원(酈道元)은 고구려 사신에게 패수에 관한 부연 설명 없이 패수라는 이름을 가진 강에 대해서만 문의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그런 까닭에 고구려 사신은 그것이 한나라와 조선의 경계가 되던 패수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 당시에 패수라고도 불렸던 평양 밑에 있는 오늘날의 대동강을 이야기했을 수 있다. 참고로 대동강이 패강, 패수(浿江, 浿水)로 불린 것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도 확인된다.
위와 같은 뜻으로 정리하자면 역도원(酈道元)은 한나라와 조선의 경계가 되던 패수를 염두에 두면서 그것과 관련된 정보를 고구려 사신으로부터 얻고자 하였는데 고구려 사신은 그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내용이 전혀 다른 패수(浿水)의 정보를 전달한 것이다. 만약 역도원이 위만조선이 망했을 때 조선과 중국의 경계였던 패수가 어디였냐고 질문을 던졌다면 고구려 사신의 답변은 전혀 달랐을 수도 있다고 본다.
위에서 잠깐 언급하였는데 대동강(大同江)이 패수(浿水)가 될 수 없는 이유는 대동강 북쪽에 위만조선의 왕검성(王儉城) 자리라고 추정되는 평양(平壤)이 있기 때문이다. 패수는 왕검성보다 남쪽에 위치할 수 없다. 그런데 패수로 비정되는 대동강은 왕검성으로 비정되는 평양보다 남쪽에 있다. 대동강이 패수가 되기 위해서는 대동강 남쪽 예컨대 평안남도(平安南道)와 황해도(黃海道) 그리고 경기도(京畿道) 일대에 왕검성이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평안남도와 황해도 그리고 경기도 일대에 위만조선의 왕검성이 있었다는 역사기록이 없다.
역도원(酈道元)이 패수를 평양 북쪽에 있는 청천강(淸川江)으로 비정하였다면 그것은 논리적으로 합당하다. 그러나 대동강은 왕검성으로 추정되는 평양 남쪽에 있으므로 논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역도원(酈道元)이 대동강을 그 무엇인가에 비정 하고자 했다면 그것은 패수(浿水)가 아니고 열수(烈水)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열수(烈水)가 고조선 중심부에 흐르던 강이었고 고조선 때 불렸던 대동강의 옛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열수는 고구려 때 패강(浿江)이라고 불렸고 고려 중기 이후부터 대동강(大同江)이라고 칭하여졌다.
이제 패수(浿水)에 대한 위치 비정이 언제부터 논의되었는지를 살펴보자. 패수에 대한 위치 비정은 조선왕조 시대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1454년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대동강(大同江)을 패수로 비정하였는데 『세종실록』에서는 압록강(鴨綠江)을 패수로 비정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서는 『사기』를 근거로 위만이 건넌 강이 압록강(鴨綠江)이라고 규정하면서도 편찬자들은 『당서』와 『삼국사기』를 근거로 대동강(大同江)이 패수라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조선 전기에 나타난 조정(朝廷)의 패수 위치 비정은 압록강(鴨綠江)과 대동강(大同江) 사이에서 표류하였다.
그런데 이런 시각이 조선 후기인 영조(英祖) 시대에 들어와 큰 변화를 보였다. 『동국문헌비고』(1770)의 편찬에 참여했던 신경준(申景濬) 등은 조선 전기의 패수국내설(浿水國內說)에서 벗어나 『한서』「지리지」<낙랑군>의 패수현(浿水縣)을 설명하면서 패수를 요양(遼陽)의 어니하(淤泥河)로 비정하고 이를 정부 조정(朝廷)의 공식 입장으로 확정했다. 이는 1908년에 간행된 『증보문헌비고』로 이어진 조선의 공식적인 입장이었다. 그리고 이런 내용은 이후에 패수 국내설(浿水國內說)을 부정하는 주된 논거로 거론되었다. 이상은 정부 입장이 반영된 관찬서(官撰書)가 전하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정부 입장이 개입되지 않은 개인의 편찬물인 사찬서(私撰書)에는 패수(浿水)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을까? 패수가 한반도에 있었는지 아니면 없었는지를 기준으로 패수국내설(浿水國內說)과 패수요동설(浿水遼東說)로 양분된다. 그리고 패수 국내설(浿水國內說)은 다시 압록강설, 청천강설 그리고 대동강설로 나뉜다. 고조선의 중심이 동쪽으로 후퇴함에 따라 열수(烈水)의 위치도 동쪽으로 옮겨졌으리라고 보는 견해를 따른다면 열수(烈水)가 대동강(大同江)에 비정될 수 있다. 이 경우 패수는 대동강 북쪽에 있는 강이 되겠는데 후보로 거론되는 대표적인 것이 압록강과 청천강이다.
압록강설(鴨綠江說)은 『동국여지승람』의 영향을 받아 윤두수, 유형원, 이익, 이긍익, 정약용 등이 따랐고 청천강설(淸川江說)은 한백겸이 주장하였다. 대동강설(大同江說)은 유득공, 안정복, 한진서, 홍경모, 이유원 등이 주장하였다. 패수 대동강설은 위만이 패수를 건너 왕험성을 점령하였으므로 당연히 왕험성(평양)은 대동강 아래 있어야 한다는 『사기』와『한서』의 기록과 모순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득공은 왕검성이 대동강 건너 토성리(土城里)에 있었다고 보았으며 안정복은 왕검성이 한양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패수요동설(浿水遼東說)은 홍여하(1621~1678)의 요하지류설(遼河支流說)을 필두로 신경준(1712~1781)·김정호(1804~1866)의 (어)니하설(淤泥河說), 김경선(1788~1853)의 난하설(灤河說), 성해응(1760~1839)의 소요수설[小遼水說, 혼하(渾河, Hun he)와 심하(沈河, Shen he) 일대] 등을 말한다.
홍여하가 패수(浿水)로 비정 하는 요하(遼河)란 오늘날 쌍태자하(雙太子河/, Shuang taizi River)로 불리는 강으로 추정된다. 한편 신경준이 패수로 비정 하는 (어)니하(淤泥河)는 오늘날 대요하(大遼河, Daliao River) 혹은 외요하(外遼河)라고 불리는 강으로 추정된다. 패수가 니하(泥河)라고도 불리고 헌우락(軒芋樂)이라고도 불렸다는 내용은 『요사(遼史)』「지리지」에서부터 시작된다.
쌍태자하(雙太子河)와 대요하(大遼河) 모두 물줄기가 같아 요하(遼河)로 불리는 강인데 하류에서 전자는 반금 市로 흘러 바다에 접하고 후자는 영구 市로 흘러 바다에 접한다. 『동국문헌비고』 편찬(1770) 이후 (어)니하(淤泥河)로 불리던 대요하(大遼河)가 패수라는 것이 조선의 공식 입장으로 자리 잡았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관찬(官撰), 사찬(私撰)할 것 없이 패수대동강설(浿水大同江說)이 무시되고 패수요동설(浿水遼東說)이 주요 학설로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부연하여 설명하자면 패수(浿水)의 위치를 규명하는 데 있어서 우리나라의 사가(史家)들은 중국의 위압(威壓)에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것이다. 조선 전기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나 조선 후기의 사문난적(斯文亂賊)의 예에서 보듯이 시대의 정서에 반하여 붓을 휘두르면 당사자의 가문은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할 수 있게 된다. 이는 국가 간의 관계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지금이야 패수(浿水)를 황하(黃河)로 비정하든 양자강(揚子江)으로 비정하든 그것이 정부의 공식 입장이 아닌 이상 중국에서는 이를 미친놈의 학설이라고 치부할 뿐 중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개입하지 않는다. 그러나 과거에는 상황이 그렇지가 않았다. 그런 학설이 정부 조정(朝廷)의 공식 입장이 아니더라도 그런 내용이 중국에 알려지면 외교(外交) 문제로 크게 비화되어 정부 조정이 난처해질 수밖에 없게 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중원(中原)에 뿌리를 둔 명(明, 1368~1644)나라가 난징인 남경(南京)에서 북경(北京)으로 천도한 시점이 1421년이다. 북경 코앞이 천진 市, 당산 市 그리고 진황도 市 일대이다. 조선 전기의 사가(史家)들이 설령 『수경(水經)』의 내용을 인지(認知)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수경(水經)』에서 전하는 패수 동류설(浿水東流說)에 근거하여 패수(浿水)가 명조(明朝)의 수도인 북경 인근에 있으므로 그 근처까지 옛 조선(朝鮮)의 땅이었다고 감히 주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중국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조선 조정(朝廷)의 입장은 더욱더 그러했을 것이다. 따라서 조선 전기에 나타난 패수의 위치 규명 문제는 관찬(官撰), 사찬(私撰)을 불문하고 한반도(韓半島) 이남인 압록강(鴨綠江)과 대동강(大同江) 사이에서 표류할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그런데 이런 기류(氣流)가 조선 후기에 이르러 바뀌게 된다. 영조(英祖) 시대에 들어와 『동국문헌비고』(1770) 편찬으로 조선 전기의 패수국내설(浿水國內說)은 지양(止揚)되고 패수요동설(浿水遼東說)이 정부 조정(朝廷)의 공식 입장으로 확정된다. 조선 정부는 패수를 요양(遼陽)의 어니하(淤泥河)로 비정하였는데 이는 오늘날 영구 市로 빠져나가는 대요하(大遼河)를 말한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패수의 위치를 압록강 너머 요동(遼東)지방으로 규정할 수 있었던 것은 중원(中原)에서 중국의 왕조교체(王朝交替)가 이루어졌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정복왕조(征服王朝)인 청나라(淸, 1616~1912)는 만주(滿洲)에서 태동한 후 중원(中原)에 진출하여 한족(漢族) 중심의 명(明)나라를 멸하고 1644년에 청조(淸朝)의 중심지를 만주 심양(瀋陽)에서 하북성(河北省) 북경(北京)으로 옮긴다. 북경으로 천도(遷都)하면서 청나라는 중국 본토 경영에 진력(盡力)하게 된다. 이처럼 청조(淸朝)의 관심이 중원에 집중되다 보니 동북쪽에는 자연스레 관심이 소홀해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런 ‘중원 중시 - 동북 경시(中原 重視-東北 輕視)’라는 국가 정책이 청나라의 기본 기조(基調)를 이루게 되면서 본거지(本據地)였던 동북 지역인 만주지역을 등한시하게 되었다.
이런 외적인 환경이 조성되면서 조선 후기 시대에 이르러 일개 개인의 편찬물인 사찬(私撰)은 물론이고 정부의 편찬물인 관찬(官撰)에서도 패수(浿水)의 위치를 만주(滿洲)로 비정할 수 있게 되었다. 청조(淸朝)의 전성기인 건륭제(乾隆帝, 1735~1796) 시기에 정부 조정(朝廷)이 대요하(大遼河)로 불리는 요양(遼陽)의 어니하(淤泥河)를 패수로 규정하고 이를 정부의 공식 입장으로 삼았다는 것은 당시의 시대 분위기로 보아 상당히 혁신적이고 과감한 결단이었다고 생각된다.
이제 민족사학(民族史學) 계열의 학자들은 패수(浿水)를 어디로 추정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진개(秦開)의 북벌(北伐) 이후 연(燕)나라는 만번한(滿潘汗) 일대를 경계로 삼았다고 한다. 안쪽은 연나라의 영역이고 바깥쪽은 조선의 영토라는 것이다. 만약 만번한 일대가 위만조선이 망하는 시점까지 조선과 중국의 경계로 유지되었다면 만번한 일대에 흐르는 강이 패수(浿水)가 된다. 민족사학 계열의 학자들이 패수의 위치를 다르게 비정 하는 이유는 진개(秦開)의 북벌(北伐) 결과를 다르게 해석하여 의견이 서로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필자가 「진개(秦開)의 북벌」편에서 내용을 전해드린 한 바 있는데 민족사학(民族史學) 계열의 소수설 입장은 『사기 흉노 열전』의 기록을 수용하여 진개(秦開)의 동호(東胡) 격파를 고조선에 대한 침략이라 규정하고 고조선은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에 이르는 1000여 리의 땅을 잃고 난하(灤河) 동쪽으로 후퇴하게 되었다는 내용을 받아들인다고 전한 바 있다.
반면 민족사학(民族史學) 계열의 다수설 입장은 『위략』의 내용을 받아들여 동호(東胡)는 1000여 리의 땅을 잃었고 고조선은 2000여 리의 땅을 잃어 고조선이 요하(遼河) 동쪽으로 후퇴하게 되었다는 내용을 받아들인다고 전한 바 있다. 여기서 2000여 리란 『사기 흉노 열전』에 나와 있는 조양(= 장가구市)에서 양평(= 창려縣으로 난하 일대)에 이르는 1000여 리에 추가로 난하(灤河)에서부터 요하(遼河)에 이르는 1000여 리를 말한다.
단재 신채호와 같은 초기 민족사학자들은 연나라 진개(秦開)의 침략으로 고조선이 요하(遼河) 동쪽으로 완전히 밀려났고 이것이 고착화(固着化)되어 위만조선(衛滿朝鮮)의 영토로 계승되었다고 본 데 반하여 해방 이후 세대인 민족사학 진영의 상당수 입장은 진개(秦開)의 침략으로 연나라가 요하(遼河)에 이른 것은 사실이나 이것은 지극히 일시적인 현상이었고 고조선의 반격이 뒤따라 연(燕) 소양왕(昭襄王, BC311~BC279) 사후 실지(失地)를 곧 회복해나갔다고 규정한다.
윤내현 교수는 고조선이 한때 요하(遼河)까지 후퇴하였다고 밝히지는 않았지만 난하 유역을 회복하였다고 주장한 데 반하여 북한의 역사학자 리지린과 한국의 박경순 평론가는 실지 회복이 불완전하여 대릉하(大陵河)까지만 수복하였다고 보았다. 한편 복기대 교수는 초기 민족사학자들과 의견을 같이하여 요하(遼河)가 위만조선이 멸망하는 시기에 조선의 마지막 국경이자 경계였다고 추정하였다.
『사기 흉노 열전』의 기록을 받아들인 민족사학 계열의 소수설 입장에 의하면 난하(灤河)를 포함해서 난하 인근에 있는 하천이 패수(浿水)의 후보지로 거론된다. 난하는 오늘날 당산 市와 진황도 市의 경계가 되는 하천으로 난하 일대란 오늘날 천진 市, 당산 市, 진황도 市 지역을 지칭한다. 김봉렬 평론가와 이찬구 박사는 구수(滱水)를 패수로 비정 하는데 구수의 현재 이름은 당하(唐河, Tanghe River)로 보정 市 남쪽에 흐르는 강이다. 당하(唐河)는 독륙강(獨六江, Duliujian River)과 내륙에서 만난 후 천진 市 중부에서 발해로 흘러 들어간다. 독륙강(獨六江) 일대는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이 발견되는 지역이기도 하다.
김종서 박사는 천진 市 북부를 통해 발해로 흘러 들어가는 영정하(永定河)를 패수로 비정하였고 심백강 박사와 황순종 평론가는 한때 조선하(朝鮮河)라고 불렸다는 조백하(潮白河)를 패수로 비정하였다. 조백하(潮白河)는 바다로 바로 연결되지 않고 하류에서 영정하(永定河)와 만난 후 바다로 들어간다. 최동환 평론가는 갈석산(碣石山) 북쪽에 있는 양하(洋河, Yanghe River)를 패수로 보았다. 양하는 진황도 市 서쪽을 관통해 발해로 흘러 들어간다. 참고로 김종서 박사는 진개(秦開)의 북벌이라는 사건을 역사 조작으로 보았다.
『위략』의 기록을 받아들인 민족사학(民族史學) 계열의 다수설 입장에 의하면 패수(浿水)의 후보지는 난하(灤河)에서부터 요하(遼河)까지이다. 초기 민족사학자인 장도빈, 문정창 그리고 오늘날 재야사학자로 분류되는 윤내현 교수, 이덕일 박사가 난하(灤河)를 패수로 추정한다. 尹 교수는 『한서』「지리지」<요동군> ‘번한현’에 대한 반고(班固) 주석에 근거하여 패수(沛水) = 한수(汗水)라는 등식(等式)에 따라 난하에 한수(汗水)가 있는 점을 들어 난하가 곧 패수라고 주장하는 근거로 삼고 있다.
尹 교수가 『수경』에서 근거를 찾지 못한 이유는 『수경』에서 전하는 낙랑(樂浪) 루방현(鏤方縣)과 임패현[(臨浿縣), ☞ 임패현은 패수현(浿水縣)을 뜻함]의 위치 고증에 실패하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한서』「지리지」에서 답을 구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한서』「지리지」<요동군> ‘번한현’에 나오는 패수는 조선과 중국의 경계를 뜻하는 패수(浿水)가 아니다. 한자가 틀린 패수(沛水)이다. 아무튼 尹 교수가 패수로 비정한 난하는 오늘날 당산 市와 진황도 市의 경계가 되는 강이다. 오늘날 민족사학 계열의 다수설 입장은 난하(灤河)가 패수가 된다.
한편 위당 정인보는 고려하(高麗河)를 패수(浿水)로 보았다. 오늘날 고려하의 정식 명칭은 구하(狗河, Gouhe River)로 구하(狗河)는 호로도 市 남쪽에서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북한 학계는 그보다 약간 북쪽에 있는 대릉하(大陵河)를 패수로 본다. 리지린, 임건상이 대표적인 인물이며 북한 학계의 동향(動向)을 전하는 한국의 박경순 평론가도 같은 입장이다. 패수대릉하설(浿水大陵河說)은 1960년대 이후 북한 학계의 공식 입장이다. 신용하 교수도 대릉하를 패수로 본다. 대릉하는 금주 市와 반금 市의 경계가 되는 강이다. 이는 대릉하 서쪽이 금주 市이고 대릉하 동쪽은 반금 市라는 뜻이다.
리지린은 패수(浿水)에 관한 최초의 문헌인 『수경(水經)』 「수경조(浿水條)」의 “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于海”라는 기록을 근거로 하여 현재의 요동과 요서 지역에서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하류에 가서 다시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강은 대릉하(大陵河) 하나밖에 없으며 또한 대릉하의 옛 명칭이 백랑수(白狼水)였으므로 패수는 곧 대릉하(大陵河)라고 주장한다.
특히 한대(漢代) 루방현(鏤方縣)이 대릉하 유역에 있었음을 고증하여 이 같은 견해를 제시하였다. 『사기』에 따르면 패수는 요동고새(遼東故塞)와 고조선의 중심지인 열수(洌水)의 사이에 있다. 요동고새(遼東故塞)를 진장성(秦長城)의 동쪽 끝에 있는 것으로 보고 열수(洌水)를 요하(遼河)로 파악한 견해에 의하면 패수는 자연스레 대릉하(大陵河)로 비정된다.
리지린에 의하면 패수(浿水)는 루방현(鏤方縣)에서 흘러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동남쪽으로 흘러서 패수현(浿水縣) 옆을 지나서 서쪽 혹은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증지현(增地縣)에 이르러 동남쪽으로 흘러서 바다에 들어가는 강이라고 한다. 『수경(水經)』과『설문해자(說文解字)』 그리고 『한서』「지리지」의 패수 내용을 모두 충족시키는 패수(浿水)는 대릉하(大陵河)와 소릉하(小凌河)밖에 없는데 그중 대릉하가 유력하다는 것이다.
한편 단재 신채호와 복기대 교수는 요하(遼河)를 패수로 비정하였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요하(遼河)는 오늘날 반금 市에서 바다로 접하는 것이 있고 영구 市에서 바다와 접하는 것이 있다. 전자를 쌍태자하(雙太子河)라 하고 후자를 대요하(大遼河)로 불린다고 하였다. 신채호가 패수로 비정한 요하는 혼하(渾河)와 태자하(太子河) 물줄기를 만나 영구시(營口市) 방면에서 발해만으로 들어가는 대요하(大遼河)를 의미한다.
신채호는 불조선의 서쪽 끝이 헌우락(軒芋樂)이자 어니하(淤泥河)가 흐르는 곳이라고 하였는데 그곳은 해성현(海城縣) 서남쪽 65리 지점이라고 하였다. 그곳은 오늘날 대요하(大遼河)로 불리는 곳으로 영구 市에서 바다로 흐르는 강을 말한다. 신채호의 주장은 『동국문헌비고』 편찬(1770) 이래 (어)니하(淤泥河)로 불리던 대요하(大遼河)가 패수(浿水)라는 조선왕조의 공식 입장을 재확인한 것으로 보아야겠다.
『환단고기』에서는 패수(浿水)를 어떻게 비정하고 있을까? 『환단고기』에서 패수(浿水)는 번조선과 관련된 내용이다. 『환단고기』의 고조선 강역도(疆域圖)에 의하면 위만조선(衛滿朝鮮)이 멸망할 당시 번조선 서남쪽 끝의 하천 명(名)이 조백하(潮白河)로 기록되어있다. 이는 위만조선(= 번조선) 시기의 패수(浿水)가 조백하라는 것을 뜻한다. 위만조선의 치소인 왕험성(王險城)은 오늘날 하북성 창려현(昌黎縣) 일대로 난하(灤河) 동쪽인 지금의 진황도市 서쪽 끝에 있었다. 한편 창려현(昌黎縣)은 패수로 추정되는 조백하에서 동쪽으로 100여km 지점에 있다.
이와 아울러 위만조선의 동북쪽 경계는 구려하(句麗河)에 이르렀다고 한다. 여기서 구려하(句麗河)란 요하(遼河)를 말하는데 반금 市에서 바다로 접하는 쌍태자하(雙太子河)를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근거로 위만조선의 강역은 조백하(潮白河)에서부터 쌍태자하(雙太子河) 까지였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위만조선의 영역에 세워지는 한사군(漢四郡)이 이 지역을 벗어나서 설치될 수 없었음을 뜻한다. 이는 한반도(韓半島)는 물론이고 요동 지역에도 한사군(漢四郡)이 존재할 수 없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구려하(句麗河) 건너편은 진조선의 법통을 계승한 북부여(北扶餘)의 영역이었다.
이상의 내용을 도표로 표시하면 아래와 같다. 아래 도표는 겨레얼살리기국민운동본부 사무총장인 이찬구 박사가 작성한 것이다.
위에서 패수논쟁(浿水論爭)을 살펴보았다. 조선 초기에 점화된 패수(浿水)의 위치 비정(比定)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패수논쟁으로 불붙고 그것이 일제강점기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고 있는데 지금까지도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현재도 논쟁이 진행 중이며 앞으로도 계속 진행될 것이라고 본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올라간다”는 옛말이 있다. 제대로 된 비유(比喩)가 맞는지 모르겠으나 사람들의 주의, 주장이 제각각이니 결론에 이르지 못한다는 뜻으로 쓰이는 내용이다. 패수논쟁(浿水論爭)도 이것과 유사하다. 학자들의 주의, 주장이 서로 달라 패수의 위치 규명이 어려워진다. 이렇게 된 연유는 패수의 위치와 관련된 근거를 원전(原典)이 아닌 후대의 주석서(註釋書)에서 찾으려 하는 경향이 크기 때문이다.
문제는 패수(浿水)의 주석서(註釋書)라는 것들이 역도원의 『수경주(水經注)』를 필두로 원전(原典)의 내용을 크게 훼손시켜 왔다는 점이다. 『수경주(水經注)』이래 『수서(隋書)』, 『신당서(新唐書)』, 『통전(通典)』 등의 중국 사서(史書)들은 한결같이 『수경주(水經注)』가 원전(原典)인 양 『수경주(水經注)』에 나타난 내용을 떠받들고 있다. 조선의 학자들은 이렇게 훼손된 사서(史書)를 통해 패수를 규명할 수밖에 없었는데 여기에 요(遼, 916~1125)나라 역사와 관련된 『요사(遼史)』「지리지」의 내용도 포함 시켜 패수를 분석하였다. 이처럼 조선의 사가(史家)들은 진흙땅 속에서 패수의 진실을 규명해내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악조건의 토양(土壤)에서 결론을 도출하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패수(浿水)의 진실을 제대로 규명하기 위해서는 초심(初心)으로 돌아가서 패수의 내용을 전하는 원전(原典) 하나에 집중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제 패수의 내용을 전하는 원전(原典)인 『수경(水經)』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수경』은 패수의 물줄기 모양에 중점을 두어 패수(浿水)를 묘사하고 있다. 패수의 위치를 알려주는 최초의 문헌인 『수경(水經)』「패수조(浿水條)」에 다음과 같은 18글자가 적혀 있는데“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于海”이것을 한글로 풀이하면 “패수는 낙랑(樂浪) 루방현(鏤方縣)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임패현(臨浿縣)을 지나 동쪽 바다로 들어간다”는 내용이 된다.
패수(浿水)의 위치와 관련된 다른 문헌들은 대부분이 『수경(水經)』에 근거하고 있고 또 주석(註釋)을 통해 원전(原典)인 『수경(水經)』의 내용을 훼손할 우려가 있으므로 원전(原典)인 『수경(水經)』의 내용만 집중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수경』의 편찬자가 누군지 와 관련하여 사서에는 전한(前漢) 말기의 상흠(桑欽)이라는 인물로 기록되어 있으나 그보다 후에 다른 사람에 의해 편찬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분명한 것은 어느 시기에 누가 『수경』을 편찬하였든 지에 상관없이 그 시기에는 위만조선이 망하고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된 때였다.
『수경』에서 전하는 지명(地名)은 3개이다. 낙랑(樂浪), 루방현(鏤方縣) 그리고 임패현(臨浿縣)이다. 여기서 『수경』이 전하는 내용은 낙랑군 루방현과 낙랑군 임패현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낙랑군(樂浪郡)은 25개의 현(縣)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25개의 현명(縣名) 중에 루방현(鏤方縣)이라는 곳은 있고 임패현(臨浿縣)이란 곳은 없다. 그렇다고 낙랑군에 임현(臨縣)이나 패현(浿縣)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임패현(臨浿縣)은 어느 군(郡) 소속의 현(縣)인가? 결론은 어느 곳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지명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수경』의 문구를 잘못 해석하였을 수도 있다. 임패현(臨浿縣)이 아니고 과임패현(過臨浿縣)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과임패현(過臨浿縣)이란 지명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패(浿)를 패수와 연계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수경』과 같은 내용을 전하는 『설문해자(說文解字)』에 패수현(浿水縣)이라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말로 번역된 임패현(臨浿縣)은 패수현(浿水縣)으로 보아야 하며 과임패현(過臨浿縣)이란 패수현 바로 옆을 지나간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한다. 따라서 『수경(水經)』이 전하는 내용은 “패수는 낙랑군(樂浪郡) 루방현(鏤方縣)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낙랑군(樂浪郡) 패수현(浿水縣)을 지나 동쪽 바다로 들어간다”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낙랑 25군에 속하는 패수현(浿水縣)이라는 지명이 위치 미상이라는 점이다. 다만 북위 시절에 편찬된『십삼주지(十三州志)』에서 “패수현(浿水縣)은 낙랑군 동북쪽에 있고 루방현(鏤方縣)은 낙랑군 동쪽에 있다”라는 기록을 근거로 패수현(浿水縣)의 위치를 대충이나마 추정할 수 있게 된다. 앞에서 잠시 언급되었지만 『십삼주지(十三州志)』에서 전하는 지리지의 내용이 대릉하(大陵河) 서쪽 지역에 국한되는 사항이므로 『십삼주지(十三州志)』에서 전하는 패수(浿水), 패수현(浿水縣) 그리고 루방현(鏤方縣)은 대릉하(大陵河) 서쪽에 관련된 이야기가 된다.
『수경(水經)』에서 패수(浿水)와 관련하여 언급되는 낙랑의 루방현(鏤方縣)과 임패현[(臨浿縣) = 패수현(浿水縣)]이라는 지명은 그곳이 정확히 어디인지 오늘날 규명이 안 되고 있다. 이는 패수의 위치를 추정해 볼 수 있는 최초의 문헌인『수경(水經)』을 통해서 패수의 위치 규명이 어렵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윤내현 교수는 패수(浿水)의 정보를 부득이 『한서』「지리지」<요동군> ‘번한현’편(篇)에서 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패수의 위치를 논한 최초의 문헌인『수경(水經)』을 통해 패수(浿水)가 규명되지 못하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앞에서 잠시 언급이 이루어졌듯이 패수의 위치를 논한 최초의 문헌이『수경(水經)』이 맞지만 『수경』에서 전하는 패수가 조선과 중국의 경계를 뜻하는 패수가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패수의 위치를 논한 최초의 문헌은『수경(水經)』이지만 패수(浿水)를 최초로 언급한 것은 그보다 앞서 편찬된 『사기(史記)』이다. 그리고 『사기』에서 전하는 패수는 조선과 중국의 경계를 뜻하는 패수가 맞다. 이런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패수를 처음으로 언급하는 『사기(史記)』의 내용을 살펴보고 그곳에서 패수의 위치를 추적해 나가는 것이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는 『수경』을 통하는 것보다 더 바람직한 접근법이 될 수 있다. 이하는 패수란 지명이 언급된 『사기 조선 열전』의 내용이다.
진(秦)이 연(燕)을 멸한 뒤에는 진번(眞番)과 조선(朝鮮)을 요동외요[(遼東外徼,요동 바깥의 요(徼)]에 소속시켰는데, 한(漢)나라가 일어나고 그곳이 지키기 어려우므로 요동의 옛 요새(遼東故塞)를 수리하고 패수(浿水)를 경계로 하여 연나라에 소속시켰다.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한(漢)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들어가자 만(滿)도 망명하였다. 1000여 명의 무리를 모아 상투를 틀고 만이(蠻夷)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도망가 요동의 요새(塞)를 빠져 달아나 패수를 건넌 후에 진(秦)나라의 옛 공지(空地)인 상하장(上下鄣)에 살았다.
섭하가 돌아가는 길에 국경인 패수(浿水)에 이르러 마부를 시켜 마중 나온 조선 비왕(禆王)인 장(長)을 찔러 죽이도록 하고 즉시 강을 건너 요새(塞) 안으로 달려 들어간 뒤, 천자에게로 돌아가 조선 장수를 죽였다고 말하였다.
좌장군(左將軍)도 조선(朝鮮)의 패수(浿水) 서군(西軍)을 쳤으나 깨뜨리고 전진할 수가 없었다.
태자(太子)를 보내 사죄하려 할 때 말 5000필과 군량미도 함께 보냈다. 10,000여 명이 무기를 지니고 막 패수를 건너려 할 때 사신과 좌장군은 그들이 마음이 변할까 두려워하여 태자에게 말하기를 “이미 항복하였으니 마땅히 사람들에게 무기를 버리라고 명해야 한다.”고 하였다. 태자 또한 사자와 좌장군이 자기를 죽일까 의심하여 패수를 건너지 않고 돌아왔다. 위산(衛山)은 천자에게 돌아와 알리니 천자는 위산을 죽였다.
좌장군이 패수(浿水) 위쪽의 군사(浿水上軍)를 격파하고 전진하여 왕험성(王險城) 아래에 이르러 그 서북을 포위하였다. 누선(樓船) 또한 합세하여 왕험성 남쪽에 주둔하였다. 우거(右渠)가 성을 굳게 지키므로 수개월 동안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이상이 사마천의 『사기』「조선 열전」에 나오는 패수 관련 전문이다. 반고의 『한서』「조선전」은 『사기』「조선 열전」을 그대로 전재(轉載)하였다. 다르다면 『사기』에 나오지 않는 낙랑(樂浪), 진번(眞番), 임둔(臨屯), 현도(玄菟)라는 한사군(漢四郡)의 명칭이 나온다는 점이다. 패수와 관련해서는 『사기』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적어놓았으므로 『사기』와 다를 게 없다.
조선과 중국의 경계로 거론되는 패수가 3세기 말인 280년에서 289년 사이에 어환(魚豢)이라는 사람에 의해 저술되었다는『위략』에도 나타난다. 『위략』은 당나라 때 유실되어 (原本)이 전해지지 않으나 후대에 이르러 흩어진 기록들을 한데 모아서 각각 집본(輯本)이 편찬되었다고 한다. 『위략』은 『사기』에서도 언급이 안 되는 BC4세기 무렵의 고조선을 조명하는 저술로 우리나라 상고사(上古史)를 살피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료이다. 『위략』의 내용은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동이전(東夷傳)에서 인용되어 전해지고 있다.
한편『삼국지』는 서진(西晉) 사람인 진수(陳壽,233~297)가 280~289년 사이에 편찬한 중국 삼국시대에 관한 정사(正史)이다. 이 책은 위서(魏書) 30권, 촉서(蜀書) 15권, 오서(吳書) 20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각은 본기(本紀)와 열전(列傳)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위서」의 제30권이 ‘오환선비동이열전(烏丸鮮卑東夷列傳)’이므로『 삼국지』「위서」 동이전이란 『삼국지』「위서」에서 동이족 부분을 다루는 마지막 권(卷)을 말한다.
그리고『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을 줄여 『위지 동이전(魏志東夷傳)』이라고도 한다. 『위략』과 『삼국지』가 모두 서기 280년대에 편찬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삼국지』가 『위략』의 내용을 인용하는 것으로 보아 『위략』이『삼국지』보다 약간 앞서서 편찬되었다고 추정된다. 편찬 시차(時差)를 13세기 후반의『삼국유사(1281)』와 『제왕운기(1287)』 정도로 보면 되겠다.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 나오는 동쪽 오랑캐(?)는 부여(夫餘), 고구려(高句麗), 옥저(沃沮), 읍루(揖婁), 예(濊),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辰) 그리고 왜(倭 = 일본)이다. 『위지 동이전(魏志東夷傳)』은 3세기 이전의 동이족(東夷族) 상황을 전하는 사료이다.
『위지 동이전(魏志東夷傳)』에서 『위략』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는데 고조선과 관련하여 집중적으로 거론되는 곳이 마한(馬韓) 편(篇)에 수록되어 있다. 『위지 동이전(魏志東夷傳)』 마한(馬韓) 편(篇)에서 패수(浿水)와 관련된 『위략』의 인용 부분을 살펴보자. 여기에는 그 유명한 진개(秦開)의 북벌(北伐) 기사(記事)가 들어있다.
'한(漢)'이 '노관(盧綰)'을 '연왕(燕王)'으로 삼자, '조선(朝鮮)'이 '연(燕)'과의 경계를 '패수(浿水)'로 삼았다. '관(綰)'이 모반하여, '흉노'로 들어가고, '연(燕)'나라 사람 '만(滿)'이 망명하여, '호(胡 = 북방 오랑캐)'의 옷을 입고, 동쪽으로 '패수(浿水)'를 건너, 이에 이르러, '준(準)'에게 항복하였다.
이것이 『위략』에서 전하는 패수(浿水) 내용이다. 한나라 초기에 패수(浿水)를 경계로 삼았고 위만이 이 강을 건너 준왕에게 도망쳤다는 것이 패수와 관련된 내용 전부이다. 반면 『사기』에서는 이것에 더하여 한나라 중기인 한무제(漢武帝) 시기에 위만조선을 정벌하면서 패수를 함께 묘사하고 있다.
내용을 정리하자면, 조선과 중국의 경계로 거론되는 패수(浿水)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조선 열전」과 반고(班固)의 『한서』「조선전」 그리고 어환(魚豢)의 『위략』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반고의 『한서』「조선전」은 사마천이 편찬한 『사기』「조선 열전」의 복사판이고 어환의 『위략』은 내용이 소략(疏略)하다 보니 『사기』「조선 열전」 하나만 가지고 패수(浿水)를 접근해도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제『사기』「조선 열전」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자.
진(秦)이 연(燕)을 멸한 뒤에는 진번(眞番)과 조선(朝鮮)을 요동외요[(遼東外徼,요동 바깥의 요(徼)]에 소속시켰는데, 한(漢)나라가 일어나고 그곳이 지키기 어려우므로 요동의 옛 요새(遼東故塞)를 수리하고 패수(浿水)를 경계로 하여 연나라에 소속시켰다. 이 내용이 뜻하는 바는 요동의 옛 요새 예컨대 연(燕)의 장새(障塞)인 요동고새(遼東故塞) 바깥에 패수(浿水)가 있으며 그 패수 바깥에 요동외요(遼東外徼)가 있었다는 것이다.
만(滿)이 동쪽으로 도망가 요동의 요새(塞)를 빠져 달아나 패수를 건넌 후에 진(秦)나라의 옛 공지(空地)인 상하장(上下鄣)에 살았다. 이 내용은 위만이 동쪽으로 도망가 요동의 옛 요새인 요동고새(遼東故塞)를 거쳐 패수를 건넌 후 요동외요(遼東外徼)라고 불리는 진(秦)나라의 옛 공지(空地), 예컨대 진고공지(秦故空地)인 상하장(上下障)에 정착하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BC202년부터 BC195년의 상황을 묘사하는 내용이다.
섭하(涉何)가 돌아가는 길에 국경인 패수(浿水)에 이르러 마부를 시켜 마중 나온 조선 비왕(禆王)인 장(長)을 찔러 죽이도록 하고 즉시 강을 건너 요새(塞) 안으로 달려 들어간 뒤, 천자에게로 돌아가 조선 장수를 죽였다고 말하였다. 우거왕(右渠王)과의 교섭이 결렬된 후 한나라 사신 섭하(涉何)가 돌아가는 길에 국경인 패수(浿水)에 이르러 마중 나온 조선 관리를 죽이고 강을 건너 요동고새(遼東故塞)로 도망쳐 들어갔다는 내용이다. 이는 조선의 패수 바로 건너편에 요동고새(遼東故塞)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부터는 한무제(漢武帝)의 조선 침략 내용이다.
좌장군(左將軍)도 조선(朝鮮)의 패수(浿水) 서군(西軍)을 쳤으나 능히 깨뜨려 전진할 수가 없었다.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 역시 조선(朝鮮)의 패수 서쪽 군대를 쳤으나 실패해서 진격할 수 없었다.
우거(右渠)는 태자(太子)를 보내 사죄하려 할 때 말 5000필과 군량미도 함께 보냈다. 10,000여 명이 무기를 지니고 막 패수를 건너려 할 때 사신과 좌장군은 그들이 마음이 변할까 두려워하여 태자에게 말하기를 “이미 항복하였으니 마땅히 사람들에게 무기를 버리라고 명해야 한다.”고 하였다. 태자 또한 사자와 좌장군이 자기를 죽일까 의심하여 패수를 건너지 않고 돌아왔다. 위산(衛山)은 천자에게 돌아와 알리니 천자는 위산을 죽였다. 말 5,000필과 함께 10,000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패수(浿水)를 건넌다 함은 패수가 생각보다 수심도 얕고 폭도 좁은 작은 강이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말 5,000필과 10,000여 명의 무리가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만약 패수의 수심이 상당하고 폭도 넓은 강이었다면 도강(渡江)하려는 위치가 패수의 하류가 아닌 중상류 지역이었다고도 추측해 볼 수 있다.
좌장군이 패수(浿水) 위쪽의 군사(浿水上軍)를 격파하고 전진하여 왕험성(王險城) 아래에 이르러 그 서북을 포위하였다. 누선(樓船) 또한 합세하여 왕험성 남쪽에 주둔하였다. 우거(右渠)가 성을 굳게 지키므로 수개월 동안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여기서 좌장군(左將軍)은 순체(荀彘), 누선(樓船)은 누선장군(樓船將軍)인 해군 사령관 양복(楊僕)을 뜻한다고 본다. 패수(浿水) 위쪽의 군사로 표현된 패수상군(浿水上軍)은 패수 상류에 주둔한 군대를 지칭한다고 본다.
『사기』「조선 열전」에 패수서군(浿水西軍)과 패수상군(浿水上軍)이라는 기록이 있다. 좌장군(左將軍)이 조선의 패수 서쪽 군대(朝鮮浿水西軍)를 쳤으나 깨뜨리고 전진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에 보이는 패수서군(浿水西軍)이나 패수 위쪽 군대(浿水上軍)라는 표현에 대해 이를 군사편제로 인식하면서 위만조선에 고도로 편제된 군사조직 체계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란 견해가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패수서군(浿水西軍)을 문맥상“군(軍)”자를 “조선(朝鮮)”자 뒤에 배치하여 “좌장군(左將軍)이 조선군을 패수 서쪽에서 쳤다”로 해석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이에 따르면 조선군은 한군(漢軍)의 선발부대를 첫 전투에서 크게 격파한 후 한나라의 영역인 패수 서쪽으로 진격하였고 이에 한나라 좌장군(左將軍)이 패수 서쪽에서 조선군을 패수 쪽으로 몰아내려 하였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패수상군(浿水上軍)도 “패수 위쪽의 군사”나 “패수 상류군”으로 해석한다. “상(上)”에는 “변측(邊側)”의 뜻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패수상군(浿水上軍)의 “패수상(浿水上)”을 “패수가(= 강가, riverside)”를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좌장군(左將軍)이 패수가에서 조선군을 격파했다는 뜻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한편 김종서 박사는 패수서군(浿水西軍)과 패수상군(浿水上軍)을 같은 군대로 본다. 『사기』「조선 열전」에서 전하는 내용은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가 조선(朝鮮)의 패수 서쪽 군대(浿水西軍)를 쳤으나 실패해서 진격할 수 없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위쪽의 군사(浿水上軍)를 격파하고 전진하여 왕험성(王險城) 아래에 이르러 그 서북을 포위하였다고 해석한다. 패수 서쪽에 주둔한 군대가 패수 상류에 있는 군대라는 것이다. 이 말은 패수 서쪽은 상류가 되고 패수 동쪽은 하류가 된다는 뜻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패수는 동쪽으로 흐르는 강이 된다.
『사기』「조선 열전」에서 전하는 패수(浿水)의 내용을 모두 살펴보았는데 패수(浿水)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특별한 단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사기』「조선 열전」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연(燕)의 장새(障塞)이자 요동의 옛 요새인 요동고새(遼東故塞) 바로 건너편이 패수(浿水)이고 이곳을 건너면 조선(朝鮮)의 영역인데 이곳에 요동외요(遼東外徼) 라고 불리는 진(秦)나라의 옛 공지(空地)가 있다. 진고공지(秦故空地)라고도 불리는 진(秦)나라의 옛 공지(空地)인 상하장(上下障)에 위만이 정착하였다. 위만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도망쳐 오면서 건너 강이 패수(浿水)이므로 패수 서쪽은 한나라, 패수 동쪽은 조선의 영역을 뜻한다.
패수가 지도상에서 수평(-)으로 흐르는 강이었다면 패수의 남쪽과 북쪽을 기준으로 영역이 구분되었을 것이다. 패수의 동서를 기준으로 영역이 구분되는 점으로 보아 패수는 지도상에서 수직(l)으로 흐르거나 아니면 가파른 사선(斜線, = ↗, ↘ ,↙,↖)으로 흐른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패수(浿水)는 한반도에 있는 강이 될 수 없다.
패수의 후보로 거론되는 압록강, 청천강, 대동강은 지도상에서 수평은 아니나 수평에 가깝다고 평할 정도로 각도(∡)가 완만한 형태를 띤다. 압록강, 청천강 그리고 대동강은 남서쪽으로 흐르는 강이 아니라 서남(西南)쪽으로 흐르는 강이다. 이 말은 압록강, 청천강 그리고 대동강의 물줄기 흐름이 시계의 시침(時針)으로 7시가 아닌 8시 방향이라는 것이다.
압록강(鴨綠江)을 예로 들자. 사람들은 압록강 서쪽에 중국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열에 아홉 혹은 열은 압록강 북쪽에 중국이 있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압록강이 지도상으로 각도가 완만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청천강(淸川江)과 대동강(大同江)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내용이다. 강을 기준으로 서쪽은 한나라 땅이고 동쪽은 조선의 영역이라고 추정할만한 강은 요하(遼河) 동쪽에 없다. 그런 강은 요하(遼河)에서부터 시작해 그 서쪽에서 찾아야 한다. 다시 강조(强調)하지만 만약 강(江)의 동서(東西)를 기준으로 영역이 구분되어야 한다면 패수(浿水)는 요하를 포함해 요하(遼河) 서쪽인 요서(遼西) 지역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한편『사기』에서는 패수(浿水)의 물 흐름이 어떠한지에 대해 방향 표시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사기』를 통해서 패수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지 아니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는 것을 암시하는 내용이 있을 뿐이다. 위만이 동쪽으로 도망갔다는 내용이 그나마 구체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패수서군(浿水西軍)과 패수상군(浿水上軍)을 같은 군대라고 보고 이것에 근거해 패수가 동류(東流)한다고 추론(推論)하는 것은 다소 무리한 해석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제 패수의 물 흐름에 대해 살펴보자. 첫 번째는 패수(浿水)가 한반도에 있어 강의 물줄기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른다고 가정해보자. 압록강, 청천강, 대동강은 서남(申: 시계 기준 7시 30분~8시 30분 방향)쪽으로 흐르는 강이다. 패수가 서남쪽으로 흐를 정도로 각도가 완만하다면 패수의 남쪽과 북쪽을 기준으로 영역이 구분된다.
예컨대 청천강 이북은 중국이고 청천강 이남은 조선이 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청천강 서쪽은 중국이고 청천강 동쪽은 조선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사기』에서 패수의 서쪽은 중국이고 패수의 동쪽은 조선이라고 묘사하였으므로 한반도에서 서남쪽으로 흐르는 압록강(鴨綠江), 청천강(淸川江) 그리고 대동강(大同江)은 『사기』에서 전하는 패수(浿水)가 될 수 없다.
『사기』에서 패수의 서쪽은 중국이고 패수의 동쪽은 조선이라고 묘사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런 내용에 부합하려면 패수가 서쪽으로 그것도 남서(未: 시계 기준 6시 30분~7시 30분 방향)쪽으로 흘러야 한다. 그런 경우에는 패수의 서쪽과 동쪽을 기준으로 영역을 구분하게 된다. 이를테면 패수의 서쪽은 중국이고 그 동쪽은 조선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반도에는 각도가 가파르게 남서쪽으로 흐르는 강이 없다. 따라서 『사기』에서 묘사되는 패수(浿水)는 한반도에 없다고 보아야 한다.
『사기』를 통해 얻은 단서 중 또 다른 하나는 패수(浿水)가 오늘날의 한강(漢江)이나 요하(遼河)처럼 큰 강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우거왕(右渠王)의 아들 태자(太子)가 말 5,000필과 함께 10,000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패수(浿水)를 건너가려 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패수는 말이 건너갈 수 있을 정도로 수심이 얕고 폭도 좁은 작은 하천 예컨대 중랑천(中浪川) 급 정도의 작은 강이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사기』 그 어디에도 패수를 건너가고 건너옴에 있어서 배를 탔다는 내용이 없는 것으로 보아 패수는 규모가 작은 하천이었을 것이다.
사마천의『사기』를 통해 얻은 작은 결론 중의 하나는 패수(浿水)의 서쪽은 중국이고 패수의 동쪽이 조선이라고 규정할 경우 패수가 만약 서류(西流)한다면 그런 강은 한반도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이며 중국대륙 에서조차도 그런 강은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기』에서 전하는 패수(浿水)는 동류(東流)한다고 보아야 한다. 다만 그것이 동남쪽(↘)으로 흐르는지 아니면 동북쪽(↗)으로 흐르는지는 알 길이 없으며 분명한 것은 작은 규모의 강이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사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어느 정도 취합했다고 본다. 이제 패수의 위치를 처음으로 논한 『수경(水經)』의 내용을 한 번 더 살펴보면서 패수로 추정되는 강의 범위를 좁혀 나가보기로 하자. 『수경』의 내용을 다시 언급해보고자 하는 이유는 『수경』에서 전하는 루방현(鏤方縣)과 임패현[(臨浿縣), ☞ 패수현(浿水縣)을 뜻한다고 본다]의 위치 확인이 현재로선 어려운 상황이나 『수경』에서 패수가 동류(東流)한다고 전하였으므로 동쪽으로 흐르는 강을 살펴 패수(浿水)의 후보군을 좁혀나가 보고자 하는 것이다.
『수경』에서 패수(浿水)가 동쪽으로 흘러 바다에 이른다고 하였다. 『수경』에서 전하는 내용은 “패수는 낙랑군(樂浪郡) 루방현(鏤方縣)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낙랑군(樂浪郡) 패수현(浿水縣)을 지나 동쪽 바다로 들어간다”이다. 원문(原文)에서 전하는 임패현(臨浿縣)이란 지명은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 내용을 받아들여 패수현(浿水縣)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런데 루방현(鏤方縣)과 패수현(浿水縣)은 낙랑군(樂浪郡)의 25개 현(縣)에 소속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나 그것들이 어디에 위치하였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수경(水經)』에서 묘사하는 패수의 모습은 지도상으로 ⤷자 모양이 유력할 것이라고 본다.
이제『사기』와 『수경』이라는 원전에 근거하여 ⤷자 모양으로 흘러 동쪽 바다로 흘러가는 강에 대해 살펴보자. 그런 강은 중국에 황하(黃河) 외에는 없다. 황하는 수직으로 내려온 후 어느 시점에서 방향을 90도 틀어 수평으로 동류(東流) 하는 강이다. 수직으로 내려오는 동안 서쪽은 섬서성(陝西省) 지역이고 동쪽은 산서성(山西省) 지역이다. 그리고 수평으로 흐를 때 강의 북쪽은 산서성(山西省)과 하북성(河北省) 지역이고 강의 남쪽은 하남성(河南省)과 산동성(山東省) 지역이다.
만약 황하(黃河)를 패수로 추정하고 논(論)한다면 한나라가 대군을 이끌고 서쪽인 섬서성(陝西省)에서 동쪽인 산서성(山西省)으로 쳐들어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런 류(類)의 이야기는 성헌식 평론가가 옹호할만한 내용이다. 그러나 민족사학(民族史學)의 일반적인 견해는 황하(黃河)를 패수로 인정하지 않는다. 부풀림이 심하다는 『환단고기』도 황하(黃河)를 패수로 보지 않는다.
중국의 동안(東岸)에 이르는 강 중 황하(黃河)처럼 내륙에서부터 일관되게 동류(東流) 하는 강은 없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황하(黃河)는 내륙 깊숙한 곳에서부터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다가 내륙 어느 지점에서 시계의 시침(時針) 기준으로 방향을 3시 방향으로 급선회하여 동쪽으로 흐른 후 개봉(開封) 市 동쪽 20~30km 지점인 하남성(河南城) 난고현(蘭考縣) 지점에서부터 동북쪽인 2시 방향으로 흐르는 강이다. 그런데 위에서 논한 바와 같이 황하(黃河)는 패수가 아니다.
동류(東流) 하는 강 중 논의의 범주에 해당하는 강은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이 발견된 하북성(河北省) 창주(滄州) 市 일대를 포함하여 그 북쪽에서 중국의 동안(東岸)에 이르는 강이다. 금주 市부터 그 동쪽은 발해(渤海) 북안(北岸)이므로 그곳에 있는 강들은 남쪽이나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에 접하게 된다. 따라서 『수경』이라는 원전에서 전하는 동쪽 바다로 들어간다는 강은 창주 市, 천진 市, 당산 市, 진황도 市, 호로도 市 일대로 좁혀진다.
그런데 이 지역을 흐르는 강(江) 중에 전체적인 물줄기가 3시 방향으로 흐르는 강은 하나도 없다. 대부분의 강 물줄기가 동남(辰: 시계 기준 3시 30분~4시 30분 방향)쪽으로 흐르며 동북(寅 :1시 30분~2시 30분)쪽으로 흐르지도 않는다. 『수경』에서 전하는 패수(浿水)와 부합하는 강을 찾으려면 전체적인 물줄기가 동남쪽인 4시 방향으로 흘러내려 오다가 중류나 하류 어느 지점에서부터 남동쪽인 5시 방향으로 바꾼 후 마지막에는 정동(卯 : 2시 30분~3시 30분) 방향을 유지하면서 바다에 접해야 한다. 이 말은 수로의 흐름이 중하류에 이르러서는 ⤷자와 비슷한 모양을 띠어야 한다는 것이다.
패수(浿水)의 전체적인 흐름이 4시 방향으로 흘러나가겠지만 내용의 핵심은 어느 지점에서부터 수로(水路)가 5시 방향으로 가다가 3시 방향으로 흘러 바다에 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지만 위만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도망갔다는 『사기』「조선 열전」의 내용에 부합(수로가 5시 방향이면 강을 건너는 것은 동서 방면이 됨)되고 『수경』에서 전하는 동쪽 바다로 들어간다는 내용에도 맞아떨어지게 된다.
『수경』을 엄격히 해석할 경우 패수(浿水)는 하류에 이르러 3시 방향을 유지하여 바다에 접해야 한다. 이 조건을 다소 완화할 경우 정동(卯 : 2시 30분~3시 30분) 방향을 유지하면서 바다에 이르러야 하고 이 조건마저 완화할 경우 동남(辰: 3시 30분~4시 30분)쪽으로 흘러 바다에 접해야 한다.
『수경』에서 전하는 패수(浿水)의 조건을 아무리 완화한다고 하여도 남동(巳: 4시 30분~5시 30분)쪽으로 흘러 바다에 접하는 강은 패수 후보군에서 제외된다. 『수경』에서 전하는 내용에 근거하여 패수의 수로를 살피자면 패수(浿水)는 적어도 하류에 이르러서는 2시에서 4시 방향 사이에서 동쪽으로 흐르다가 바다에 접하는 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창주 市, 천진 市, 당산 市, 진황도 市, 호로도 市 일대로 흘러 들어가는 강을 다음과 같이 8개의 범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패수(浿水)의 첫째 조건은 『사기』「조선 열전」에 근거하여 패수의 중하류 지역이 동남쪽인 5시 방향으로 흘러가야 한다. 이는 위만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강을 건너갔다는 내용을 따른 것이다. 중하류 지역에 5시 방향의 수로가 발견되지 않으면 그 강은 패수의 후보군에서 제외되어야 한다고 본다.
패수(浿水)의 두 번째 조건은 『수경』에서 전하는 내용에 따라 패수가 동쪽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함은 그것이 수평을 유지한 채 3시 방향으로 동류(東流)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류에 이르러 그것이 4시 방향인 동남쪽으로 흐를 수도 있고 2시 방향인 동북쪽으로 흐를 수도 있다.
ⓐ부터 ⓓ는 중하류에 이르러 물줄기의 흐름이 4시 30분에서 6시 사이의 방향을 유지하는 강이다. 그리고
ⓐ는 하류에 이르러 3시 방향을 유지하여 바다에 접하는 강이다.
ⓑ는 하류에 이르러 2시 30분~3시 30분 방향을 유지하여 바다에 접하는 강이다.
ⓒ는 하류에 이르러 3시 30분~4시 30분 방향을 유지하여 바다에 접하는 강이다.
ⓓ는 하류에 이르러 4시 30분~5시 30분 방향을 유지하여 바다에 접하는 강이다.
ⓔ부터 ⓗ는 중하류에 이르러 물줄기의 흐름이 3시에서 4시 30분 사이의 방향을 유지하는 강이다. 그리고
ⓔ는 하류에 이르러 3시 방향을 유지하여 바다에 접하는 강이다.
ⓕ는 하류에 이르러 2시 30분~3시 30분 방향을 유지하여 바다에 접하는 강이다.
ⓖ는 하류에 이르러 3시 30분~4시 30분 방향을 유지하여 바다에 접하는 강이다.
ⓗ는 하류에 이르러 4시 30분~5시 30분 방향을 유지하여 바다에 접하는 강이다.
ⓐ는 패수(浿水)의 조건에 결격사유가 전혀 없는 경우이고 ⓑ와 ⓒ는 후보군에 포함 시킬 수는 있으나 패수의 조건에 다소 미흡한 경우이다. ⓓ 이후부터는 패수의 후보군에 포함시킬 수 없는 경우이다. 학계에서 패수의 후보지로 거론되는 강이 천진 市에서부터 시작되니 창주 市는 그 범주에서 배제하고 발해만을 기준으로 천진 市에서부터 그 동북쪽인 호로도 市까지 있는 모든 강을 해부해보기로 보자.
필자가 지도를 통해서 천진 市에서부터 호로도 市에 이르는 모든 강의 수로(水路)를 조사해 보았다. 패수(浿水)의 후보가 될 수 있는 강의 목록은 아래와 같다. 괄호 안의 숫자는 남쪽에서부터 북쪽에 이르는 강의 번호를 뜻하고 그 옆에 표기된 괄호 안의 알파벳은 강의 등급을 의미한다. 등급이 ⓐ, ⓑ, ⓒ인 경우에만 패수의 후보 자격 요건을 충족시킨다.
①-ⓕ독륙강(獨六江, Duliujian River)은 천진 市 서부를 관통해 발해로 유입하는데 물길의 흐름이 내륙에서부터 바다에 이르기까지 시계의 시침(時針) 기준으로 3시 30분 방향이다. 독륙강(獨六江)은 예전에 구수(滱水)로 불렸던 당하(唐河, Tanghe River)와 내륙에서 만난다. 당하(唐河)는 내륙에 위치한 보정(保定) 市 남쪽에서 동류(東流)하는 강으로 내륙에만 존재한다. 당하는 어느 지점에 이르러 독륙강에 합류하여 바다로 연결된다. 김봉렬과 이찬구 박사는 보정(保定) 市 일대를 흐르는 당하(唐河)로 비정한다.
그런데 『수경』에서 전하는 패수(浿水)는 바다에 접하는 강으로 묘사되어 있으므로 내륙에만 존재하는 당하(唐河)는 패수의 자격 요건에 미달한다고 본다. 그리고 바다에 접하는 독륙강 역시 남동쪽으로 흐르지 않고 일관되게 동남쪽을 유지하므로 패수 자격에 부합하지 않은 강이다. ②-ⓕ해하(海河, Haihe River)는 천진(Tianjin) 市 정중앙을 관통해 발해로 유입하는데 해하(海河) 역시 물길의 흐름이 일관되게 3시 15분 방향이다.
③-ⓑ영정하(永定河, Yongding River)와 ④-ⓑ조백하(潮白河, Chaobaihe River)는 서로 다른 강이다. 그러나 조백하가 천진 市 중앙 동부를 관통해 바다에 이르기 전에 하류에서 영정하를 만난다. 그런 연유로 영정하와 조백하를 하나의 조합으로 묶어 볼 수 있다. 조백하는 한때 조선하(朝鮮河)라고 불렸다고 한다.
『환단고기』 편찬자와 심백강, 황순종 박사가 조백하를 패수로 비정하고 김종서 박사는 영정하를 패수로 비정한다. 조백하(潮白河)는 동남쪽인 5시 방향으로 흐르는 강이며 하류에서 3시 30분 방향으로 흐르는 영정하(永定河)와 만난다. 영정하-조백하를 하나로 묶어서 보자면 영정하-조백하는 ⓑ의 범주에 속한다. 패수의 유력한 후보지가 될 수 있는 강이다.
⑤-ⓓ창하(昌河, Changhe River)는 당산 市 동쪽을 관통해 발해로 흘러 들어간다. 창하는 일관되게 물길의 흐름이 5시 방향을 유지한다. ⑥-ⓑ난하 (滦河, Luanhe River)는 진황도 市 서쪽 끝을 관통해 바다로 들어가는데 중하류 지역에서는 물길의 흐름이 4~5시 방향을 보이다가 하류에 이르러서는 물길이 3시 30분 방향으로 완만하게 흐른다. 한편 난하 서쪽은 당산 市이다. 김경선, 장도빈, 문정찬, 윤내현, 이덕일 등 민족사학 진영의 상당수가 난하를 패수로 비정한다. 난하패수설이 민족사학 진영의 다수설 입장이다.
⑦-ⓔ음마하(飲馬河, Yinma River)는 내륙에서부터 일관되게 동남쪽인 3~4시 방향을 유지하며 흐르다가 진황도 市 서쪽인 창려현(昌黎縣) 남쪽을 거치면서 수평인 3시 방향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간다. ⑧-ⓒ동사하(東沙河, Dongsha River)는 진황도 市 서쪽인 창려현(昌黎縣)의 북쪽에서 5시 방향으로 내려오다가 창려현(昌黎縣) 서쪽에 이르러 동남쪽인 4시 방향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⑨-ⓐ양하(洋河, Yanghe River) 역시 진황도 市 서쪽을 관통해 바다에 들어가는데 내륙에서부터 4시와 6시 사이에서 방향을 거듭하다가 하류에 이르러 3시 방향인 수평의 형태로 바다에 들어간다. 양하는 다른 강들에 비해 굴곡이 매우 심해 중하류에서 ㄴ자와 U자 모양을 자주 띠기도 해 『사기』와 『수경』에서 전하는 패수와 아주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최동환 평론가가 양하를 패수로 비정하였다.
⑩-ⓑ(북)대하(北戴河, Bei Daihe River) 역시 진황도 市 서쪽을 관통해 발해로 들어가는데 내륙에서 5시 방향으로 흘러 내려오다가 하류에 이르러 ㄴ자 모양을 띠어 3시 30분 방향으로 흘러 바다에 접한다. 오늘날 북대하(北戴河)라고 불리는 대하(戴河)는 학계에서 관심을 가지고 보는 강이 아니다. 강의 수로만 놓고 보면 패수의 후보지로 삼을 수 있는 곳이다.
⑪신하(新河, Xinhe River)는 진황도 市 서쪽을 관통해 발해로 흘러 들어간다. 7시 방향으로 흘러내려 오다가 갑자기 4시 방향(⤷)으로 틀어 바다에 접한다. 수로(水路)의 내용만 놓고 보면 ⓒ평점으로 패수의 후보지로 삼을 수 있으나 강 길이가 10km도 안 되는 강이다 보니 패수의 후보군에서 제외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본다.
⑫-ⓓ탕하(湯河, Tanghe River)와 ⑬-ⓓ신개하(新開河, Xinkai River)는 진황도 市서쪽과 동쪽을 관통해 발해로 들어가는데 모두 북쪽에서부터 일관되게 남쪽 6시 방향으로 흘러 들어가므로 패수 후보군에서 제외된다. ⑭-ⓖ(대)석하(大石河, Da Shihe River)는 진황도 市북쪽을 관통해 산해관을 거쳐 발해로 들어가는데 내륙에서 4시 방향으로 흘러내려 오다가 하류에서 4시 30분 방향을 유지해 바다에 접한다.
산해관에서 동쪽으로 5km 정도만 가면 하북성을 벗어나 요녕성 호로도 시에 이르게 된다. 이제부터 요녕성(遼寧省) 호로도(Huludao) 市이다. ⑮-ⓓ구강하(九江河, Jiujiang River)는 호로도 市 가장 남쪽 지역을 관통해 발해로 흘러 들어가는데 강의 흐름이 내륙에서부터 일관되게 4시 30분 방향을 유지해 바다에 접한다. ⑯-ⓓ석하(石河, Shihe River)는 호로도 市 남쪽을 관통해 발해로 흘러 들어가는데 강의 흐름이 내륙에서부터 일관되게 5시 방향을 유지해 바다에 접한다.
⑰구하(狗河, Gouhe River) 역시 호로도 市 남쪽을 관통해 발해로 흘러 들어가는데 내륙에서 4시 30분 방향으로 흘러내려 오다가 하류에 이르러 남쪽인 7시 방향으로 바다에 접한다. 구하는 알파벳 범주에 포함되지 않은 강으로 패수 후보지에서 제외되는 강이다. 예전에 고려하(高麗河)로 불렸다고 하는데 정인보는 이곳을 패수로 비정하였다.
⑱-ⓓ장담하(長潭河, Changtan River)는 호로도 市 남쪽을 관통해 발해로 흘러 들어가는데 내륙에서부터 일관되게 4시 30분 방향을 유지해 바다에 접한다. ⑲-ⓑ장자하 (莊子河, Zhuangzi River) 역시 호로도 市 남쪽을 관통해 발해로 들어가는데 내륙에서 6시 방향으로 흘러내려 오다가 하류에서 ㄴ자 모양을 띠며 3시 30분 방향으로 흘러가 바다에 접한다. 수로(水路)의 내용만 놓고 보면 ⓑ평점으로 패수의 후보지로 삼을 수 있으나 이것 역시 강의 길이가 10km도 채 안 되는 강이다 보니 패수의 후보군에서 제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⑳-ⓑ육고하(六股河, Liugu River)는 호로도 市 남쪽을 관통해 발해로 흘러 들어가는데 내륙에서부터 일관되게 4시 30분 방향을 유지해 흘러 내려오다가 하류에서 ㄴ자 모양을 취하여 하나는 서북쪽으로 나머지 하나는 서남쪽으로 빠져나간다. 강의 수로(水路)만 놓고 보면 패수(浿水)의 후보지로 삼을 수 있는 곳이다.
㉑-ⓕ연태하(煙台河, Yantai River) 역시 호로도 市 남쪽을 관통해 발해로 흘러 들어간다. 내륙에서부터 일관되게 4시 방향을 유지해 흘러내려 오다가 하류에 이르러 3시 15분 방향으로 흘러 바다에 접한다. 육고하(六股河)와 마찬가지로 강의 수로(水路)만 놓고 보면 패수(浿水)의 후보지로 삼을 수 있는 곳이다.
㉒-ⓐ동사하(東沙河, Dongsha River)란 강이 호로도 市 관내에도 있다. 동사하(東沙河)는 호로도 市 남쪽을 관통해 발해로 흘러 들어간다. 동사하(東沙河)는 다른 강에 비해 굴곡이 심해 내륙에서 5시 방향, 4시 방향, 6시 방향으로 흘러내려 오다가 하류에 이르러 3시 방향(⤷)으로 흘러 바다에 접한다. 동사하(東沙河)는 ⑨-ⓐ양하(洋河)와 함께 『사기』와 『수경』에서 전하는 패수와 아주 유사한 모습을 보이나 강의 길이가 20km가 채 안 되는 강이다. 아마 그런 연유로 동사하(東沙河)는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 같다.
㉓-ⓕ흥성하(興城河,Xingcheng River)는 호로도 市시내 남쪽을 관통해 발해로 흘러 들어간다. 흥성하(興城河)는 내륙에서 4시 방향, 3시 방향으로 흘러내려 오다가 하류에 이르러 3시 30분 방향으로 흘러 바다에 접한다. 최동환평론가는 이 일대에 위만조선(衛滿朝鮮)의 왕험성(王險城)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㉔자산하(慈山河, Cishan River) 역시 호로도 市시내를 관통하는 강으로 바다에 이르지는 못하고 하류에서 오리하(五里河)와 접한다. 강의 길이가 고작 10여 km에 불과한 작은 강이며 일관되게 2시 30분 방향으로 흐른다. 패수의 후보군에 포함될 수 없는 강이다.
한편 ㉕-ⓕ오리하(五里河, Wuli River)는 호로도 市시내를 관통해 발해로 흘러 들어가는데 내륙에서는 4시 방향을 유지하면서 흘러내려 오다가 하류에 이르러 2시 30분 방향으로 흘러 바다에 접한다. ㉖-ⓕ련산하(蓮山河, Lianshan River) 역시 호로도 市시내를 관통해 발해로 흘러 들어가며 오리하(五里河)와 비슷한 물줄기를 보인다. 내륙에서는 4시 방향을 유지하면서 흘러내려 오다가 하류에 이르러서는 2시 30분 방향으로 흘러 바다에 접한다.
이상이 천진 市에서부터 호로도 市에 이르는 하천의 목록이다. 패수의 후보 자격을 갖춘 ⓐ, ⓑ, ⓒ의 강 중 ⓐ는 양하(洋河)와 호로도 市로 흐르는 동사하(東沙河)인데 동사하(東沙河)는 강의 길이가 20km가 채 안 되는 강이어서 패수 후보로 적절하지 않은 강이다. ⓐ는 양하(洋河) 하나라고만 보아야 할 것 같다.
ⓑ는 영정하(永定河)-조백하(潮白河), 난하(滦河), 북대하(北戴河), 장자하(莊子河) 그리고 육고하(六股河)인데 장자하(莊子河)는 강의 길이가 10km가 채 안 되는 강이어서 패수 후보로 적절하지 않은 강이다. 따라서 ⓑ에 해당하는 패수 후보지는 영정하(永定河)-조백하(潮白河), 난하(滦河), 북대하(北戴河), 그리고 육고하(六股河)이다. ⓒ는 진황도 市로 흘러 들어가는 동사하(東沙河)이다. 『사기』와 『수경』이라는 원전 내용에 충족시키는 패수 후보지는 첫째가 양하이며 그다음은 영정하(永定河)-조백하(潮白河), 난하(滦河), 북대하(北戴河), 그리고 육고하(六股河)가 된다.
㉖련산하(蓮山河) 다음 차례서부터는 강이 동류(東流)하지 않고 바다에 이르는 경우로 『사기』와 『수경』이라는 원전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강이다. 첫 번째가 ㉗소릉하(小凌河, Xiaoling River)이다. 소릉하(小凌河)는 금주 市 시내를 관통해 남쪽으로 흘러 발해로 들어간다. 다음은 대릉하이다. ㉘대릉하 (大凌河, Daling River)는 요녕성(遼寧省) 서북쪽인 조양(朝陽, Chaoyang) 市 남쪽과 금주(錦州, Jinzhou) 市 동쪽을 경유해 남쪽으로 흘러 발해로 들어간다. 금주 市 동쪽 끝에 대릉하(大凌河)가 있으며 대릉하 건너편인 동쪽은 반금(盤錦, Panjin)市 지역이다.
㉙쌍태자하(雙太子河, Shuang taizi River)라고도 불리는 요하(遼河, Liao River)는 반금 市 북부와 서쪽을 경유해서 남쪽으로 흘러 발해로 들어간다. ㉚대요하(大遼河, Daliao River)는 영구(營口, Yingkou) 市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 내려온 후 서쪽으로 흘러 발해로 들어간다.
리지린(李址麟)의 『고조선 연구』라는 논문이 1962년에 출간된 후부터 북한 학계는 대릉하(大凌河)를 패수(浿水)로 규정하고 있다. 그 근거가 되는 문헌은 반고의 『한서』「지리지」<낙랑군> ‘패수현’에 관한 내용이다. 위에서 잠시 언급된 바 있는데 리지린은 대릉하가 하류에 가서 다시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는데 위만조선 시기에는 대릉하가 동류(東流)하여 바다에 이르렀을지 몰라도 지금의 대릉하는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따라서 현재의 시점에서 대릉하의 물줄기와 흐름을 놓고 규정하면 대릉하는 『사기』와 『수경』에서 전하는 패수(浿水)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강이 된다.
이런 강들의 물줄기와 흐름이 위만조선이 망하는 2100여 년 전에도 오늘날과 같았는지에 대해 장담할 수 없다. 이상에서 필자가 묘사한 강들의 물줄기 흐름은 현재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는 위에서 열거된 강 30개 모두가 규모가 작은 하천이라는 점이다. 30개 중 상당수의 강이 바다에 접하는 하류 지역에서조차도 그 강폭이 서울 중심부를 흐르는 한강보다 좁은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패수의 후보지를 선별(選別)하고 엄선(嚴選)하는 과정에서 큰 강은 그 범주에서 제외하려고 하였던 것이 필자의 계획이었는데 후보군에서 탈락시킬만한 강이 하나도 없어지게 되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발해만을 둘러싸고 있는 천진 市에서부터 영구 市에 이르기까지 패수(浿水)로 거론될 수 있는 강이 무려 30개나 된다. 여기서 ㉖번까지는 『사기』와 『수경』에서 전하는 패수의 범주에 포함되는 강이고 ㉗에서 ㉚까지는 『한서』「지리지」<낙랑군> ‘패수현’과 『한서』「지리지」<요동군> ‘번한현’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는 패수 후보지라고 생각된다. 『사기』와 『수경』에서 전하는 패수의 범주에 속하는 강은 ①독륙강(獨六江)부터 ㉖련산하(蓮山河)까지인데 이 중에 학계에서 패수로 거론되는 강은 ①독륙강(獨六江)의 내륙 수원(水源)인 당하(唐河), ③영정하(永定河), ④조백하(潮白河),⑥난하(滦河), ⑨양하(洋河), ⑰구하(狗河) 6개 정도이다.
학계에서 패수로 거론되는 강 6개 중 당하(唐河)는 바다에 접하지 않는 내륙에 있는 강이므로 패수의 후보로 적절하지 않다. 정인보가 패수로 비정한 구하(狗河) 역시 물줄기의 흐름이 『수경』과는 딴판이다. 이렇게 보자면 패수의 후보군은 영정하(永定河)-④조백하(潮白河),⑥난하(滦河), ⑨양하(洋河)로 좁혀지며 여기에 북대하(北戴河)와 육고하(六股河)를 추가시켜 볼 수 있겠다.
마무리 차원에서 위 내용을 정리해보자. 『사기』와 『수경』에서 전하는 원전(原典) 내용의 초심(初心)으로 돌아가 패수(浿水)의 위치를 정리해보자는 것이다. 『사기』에서 전하는 패수(浿水)로부터 유추할 수 있는 가장 큰 단서는 패수의 서쪽은 중국 땅이고 패수의 동쪽은 조선의 땅이라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패수는 해안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지점까지는 동남쪽(4시 방향)이 아닌 남동쪽(5시 방향)으로 흐르는 강으로 보아야 한다.
한편 『수경』에서 패수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가장 큰 단서는 동남쪽으로 임패현(臨浿縣)을 지나~ 에서 알 수 있듯이 패수가 동쪽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패수는 해안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지점부터 수평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동쪽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를 『사기』와 『수경』에 함께 묶어 패수의 흐름을 살피게 되면 패수(浿水)는 내륙에서 어느 지점까지 남동(巳: 4시 30분~5시 30분 방향)쪽으로 흐르다가 어느 지점 예컨대 하류에 이르러 정동(正東, 卯: 2시 30분~3시 30분 방향) 쪽으로 흘러 바다에 접하게 되는 강이다. 정동(正東) 방향에 부합하는 강이 없으면 동남(辰: 시계 기준 3시 30분~4시 30분 방향)쪽으로 흘러 바다에 접하게 되는 강을 패수의 후보군으로 삼을 수 있다. 물줄기의 흐름이 가파르게 내려오다가 어느 지점부터 수평을 유지하거나 완만하게 흘러 바다에 이르는 강이 패수의 자격 요건이라 할 수 있다. 위에 명기된 26개의 강 중 이것을 충족시키는 강은 ⓐ, ⓑ, ⓒ범주에 포함된 강이다.
③영정하(永定河)-④조백하(潮白河) 조합,⑥난하(滦河), ⑨양하(洋河), ⑩북대하(北戴河), ⑳육고하(六股河) 이렇게 5개의 하천이 『사기』와 『수경』에서 전하는 내용의 교집합(交集合)이 된다. 이 중에 학계에서 패수로 거론되는 강은 ④조백하(潮白河)-③영정하(永定河) 조합, ⑥난하(滦河), ⑨양하(洋河) 4개이다. 조백하와 영정하는 하류에서 하나로 합쳐지므로 이것을 하나로 규정할 경우 패수의 후보지는 바다에 접하는 강의 이름을 기준으로 ③영정하(永定河), ⑥난하(滦河), ⑨양하(洋河) 3개로 좁혀진다.
필자가 패수의 후보지를 세 곳으로 압축한 것은 『사기』와 『수경』에서 전하는 내용을 엄격히 해석하고 그중에서 학계에서 거론되고 있는 강을 지목하여 선별한 결과이다. 만약『사기』와 『수경』에서 전하는 내용을 엄격히 해석하지 않아 강이 내륙에서 남동쪽인 5시 방향으로 흘러내려 가지 않고 또 하류에서도 4시 방향인 동남쪽이나 2시 방향인 동북쪽으로 흐르지 않고 바다에 흘러 들어간다고 하면 위에 열거된 20여 개의 강이 모두 패수(浿水)의 후보지가 될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지금까지는 물줄기와 흐름을 기준으로 패수(浿水)를 살펴보았다. 『수경』에서 전하는 인근 지명을 함께 묶어 패수의 위치를 살펴보고자 하였으나 루방현(鏤方縣)과 패수현(浿水縣)의 위치 추정이 어렵다 보니 패수가 어떤 강인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다. 패수와 관련하여 『사기』「조선 열전」에 ❶요동고새(遼東故塞), ❷요동외요(遼東外徼) 그리고 ❸왕험성(王險城)이 나온다.
❶요동고새(遼東故塞)란 요동의 옛 요새 예컨대 연(燕)나라의 장새(障塞)를 말한다. 요동고새(遼東故塞) 코앞이 패수(浿水)이니 요동고새의 위치만 확인되면 패수의 위치는 바로 확인된다. ❷요동외요(遼東外徼)는 진(秦)나라의 옛 공지(空地), 예컨대 진고공지(秦故空地)인 상하장(上下障)을 말한다. 상하장(上下障)은 패수(浿水) 건너편에 위치하며 위만이 조선에 망명한 후 준왕(準王)의 윤허를 받아 정착해 세력을 키우던 곳이다.
요동외요(遼東外徼)가 패수(浿水) 바로 건너편에 있으니 요동외요의 위치가 파악되면 패수의 위치 역시 바로 확인된다. 그런데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지금까지 패수의 위치를 규명할 수 없는 이유는 ❶요동고새(遼東故塞)와 ❷요동외요(遼東外徼)의 위치가 확인이 안 되기 때문이다.
❶요동고새(遼東故塞)와 ❷요동외요(遼東外徼)의 위치가 확인이 안 되는 상황에서 패수의 위치를 추정해볼 수 있는 마지막 단서는 ❸왕험성(王險城)이다. 왕험성(王險城)이라고도 불리는 왕검성(王儉城)은 패수(浿水) 동쪽에 있었을 것이다. 왕검성 역시 위치가 확인이 안 되고 있으나 왕검성이라고 추정되는 지역이 몇 군데로 거론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왕검성을 기점으로 서쪽 어느 지점에 패수(浿水)가 있었을 것이라고 가름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왕검성 역시 위치가 확인이 안 되는 현 상황에서 설령 위치가 확인된다고 하더라도 왕검성이 패수의 위치를 규명하는데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지는 못한다. 그 이유는 왕검성이 패수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있었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패수와 왕검성의 위치를 함께 살펴본 사가(史家)들의 견해를 잠시 살펴보자.
❸위만조선의 치소인 왕험성(王險城)이 요동외요(遼東外徼) 바깥에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요동외요(遼東外徼)는 위만이 초기에 정착했다는 상하장(上下障) 지역을 말한다. 상하장 동쪽 끝에서 동쪽으로 더 가면 왕험성(王險城)이 있었을 것이다. 상하장 지역의 동서 길이가 어느 정도 되는지 그리고 상하장 끝에서 얼마를 가야 왕험성이 나오는지는 모른다.
이것과 관련하여 양하(洋河)를 패수(浿水)로 비정한 최동환 평론가는 상하장이 패수에서부터 동북쪽 100리까지의 땅이라고 추정하였다. 그리고 상하장 동단(東端)에서 100리를 더 가면 왕험성(王險城)이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崔 평론가는 패수에서 동쪽으로 200리(= 80km) 지점에 있는 호로도 市 관내인 흥성 市에 왕험성이 있다고 보았다.
민족사학 진영의 다수설 입장의 거두인 윤내현 교수는 패수를 난하로 추정하였다. 그리고 위만조선의 치소인 왕험성을 난하 중하류의 동부 연안에 위치한 조선현(朝鮮縣) 지역이라고 보았다. 조선현(朝鮮縣)은 낙랑군의 25개 현(縣) 중 하나인데 尹 교수는 조선현의 위치를 현재의 노룡현(盧龍縣) 북부 일대로 추정하는 것 같다.
노룡현(盧龍縣)은 행정구역상으로는 진황도 市에 속하나 진황도 市 서쪽 끝에 있다. 서쪽으로 조금만 가면 난하가 나오고 난하를 건너면 당산 市다. 尹 교수의 주장을 따르면 패수 바로 동쪽에 위만조선의 치소인 왕험성이 있게 된다. 한편 尹 교수는 위만조선과 시기적으로 병존하는 고조선의 치소(治所)를 창려현(昌黎縣) 일대로 보았다.
영정하(永定河)를 패수로 비정한 김종서 박사는 위만조선의 치소인 왕험성의 위치를 창려현(昌黎縣) 일대로 보았다. 창려현은 갈석산(碣石山)이 있는 곳으로 이곳 역시 행정구역상으로는 진황도 市에 속하나 진황도 市 서쪽에 있다. 창려현(昌黎縣)은 尹 교수가 왕검성의 위치로 비정한 노룡현(盧龍縣)에서 동남쪽으로 30~40km 지점에 있다. 영정하, 그리고 그 일대라 할 수 있는 조백하에서 창려(昌黎)까지는 거리가 140km 정도 된다. 국경인 패수에서 왕험성까지의 거리가 그 정도라는 것이다.
『환단고기』의 내용도 김종서 박사와 유사하다. 『환단고기』에서는 패수를 조백하(潮白河)로 보았으며 위만조선의 치소인 왕험성의 위치를 창려현(昌黎縣) 일대로 보았다. 김종서 박사와 마찬가지로 국경인 패수에서 왕험성까지의 거리를 140km 정도로 보았다.
『환단고기』보다 다소 급진적인 견해를 보이는 김봉렬 평론가는 패수를 구수(滱水)로 불렸던 현재의 당하(唐河, Tanghe River)로 비정한다. 당하(唐河)는 보정(保定) 市 남쪽에서 동류(東流) 하는 강으로 바다에 이르지는 않는다. 金 평론가는 보정(保定) 市 일대가 고조선의 중심지로 보았으며 이곳 만성(滿城) 일대에 왕검성이 있다고 보았다. 보정(保定) 市 만성(滿城) 일대는 당하(唐河) 바로 북쪽에 위치하므로 왕검성은 패수에서 무척 가까운 곳에 있는 곳으로 보았다.
패수(浿水)의 위치를 규명하는 데 있어서 초기 문헌인『사기』와 『수경』에 국한하지 않고 『한서』「지리지」에서 전하는 패수(浿水, 沛水)의 내용도 함께 고찰할 경우 패수의 위치는 소릉하(小凌河)에서부터 요하(遼河)까지 확대될 수 있다. 패수와 관련한 북한 학계의 공식 입장은 대릉하(大陵河)가 패수(浿水)라는 것인데 근거가 되는 사료가 바로 『한서』「지리지」이다. 소릉하(小凌河) 동쪽 지역을 패수로 비정하는 사가(史家)들은 상당수가 근거가 되는 사료를 『한서』「지리지」에서 구한다.
요하(遼河)를 패수로 비정한 사가(史家)들은 위만조선의 치소인 왕검성을 요하 동쪽에서 찾게 되는데 개평현(蓋平縣)이라고 불렸던 개주(盖州, Gaizhou) 市가 예전의 왕검성 자리라고 비정한다. 단재 신채호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박경순 평론가도 개주 市가 왕검성이 있었던 곳이라고 추정하는데 박 평론가는 평양 市에 있었던 것은 수도 왕검성이고 개주 市에 있었던 것은 부수도 왕검성이었다고 주장한다.
북한 학계의 거두인 리지린은 패수가 대릉하(大陵河)라고 주장하면서 왕검성은 개주 市에 있었다고 보았고 위당 정인보는 패수를 고려하(高麗河)로 불렸다는 구하(狗河)로 주장하면서 왕검성은 해성(海城, Haicheng) 市에 있다고 보았다. 정인보와 리지린은 패수가 왕검성에서 100km 이상 떨어졌다고 보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한무제(漢武帝)의 위만조선 정벌과 관련하여 원정대의 진격로(進擊路)를 살펴보자. 원정에 동원된 한나라의 병력은 57000명이었다고 전해지는데 이 중 5만의 육군은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가 이끌었고, 7 천의 수군은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이 이끌었다고 한다. 여기서 수군은 제(齊)에서 출발하여 발해(渤海)를 거쳐 조선의 왕검성을 향했다고 한다. 여기서 수군의 행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나라 해군 원정대가 옛 제(齊)나라 땅인 산동반도(山東半島)에서 출발해 바다 건너 왕검성으로 향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왕검성은 오늘날 하북성(河北省) 진황도 시 일대인 창려현(昌黎縣)을 뜻할 수 있고 한편으로는 요동 반도 서안인 영구(營口) 市나 대련(大連) 市를 뜻할 수 있다. 주류사학(主流史學) 입장에서 왕검성을 보자면 그곳은 평양(平壤) 일대가 될 것이다. 그런데 한나라 수군이 발해(渤海)를 거쳐 왕검성으로 향했다는 점으로 미루어 왕검성은 평양이 될 수 없다고 본다. 이유는 산동반도(山東半島)에서 평양으로 가려면 발해가 아닌 황해(黃海)를 건너야 하기 때문이다.
글을 마치면서
패수논쟁(浿水論爭)은 상고사(上古史)와 관련한 대표적인 역사논쟁(歷史論爭)으로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계속 진행될 것이라고 본다. 조선과 중국의 경계 예컨대 조선의 서변(西邊)을 규정하는 패수(浿水)는 천진 市 영정하(永定河) 일대에서부터 한반도 대동강(大同江)에 이르기까지 발해(渤海)만과 황해(黃海) 연안에 접하는 수십 개의 강이 패수(浿水)의 후보군에 등재(登載)될 수 있는 상황이다.
한편 여기서 패수(浿水)를 크게 세(3) 종류로 분류할 수 있는데 첫째는 조선과 중국의 경계를 의미하는 패수, 둘째는 낙랑군‧요동군과 관련된 패수, 그리고 마지막 셋째는 조선계(朝鮮系) 지명으로 고조선의 중심부를 흐른다는 패수이다. 세 번째의 패수는 고조선 시기에 열수(烈水)로 불렸고 삼국시대에는 패강(浿江)‧패수(浿水)‧패하(浿河)로도 불렸다. 여기서 패수란 대동강(大同江)을 뜻하며 조선과 중국의 경계를 뜻하는 강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패수(浿水)의 위치를 규명하는 데 있어서 그것과 관련된 1차 문헌인 『사기』와 『수경』에 근거하여 패수의 위치를 살피고자 한다면 패수(浿水)는 절대로 대릉하(大陵河) 동쪽에 위치할 수 없다. 이 말은 패수(浿水)가 한반도는 물론 요하(遼河) 동쪽인 요동(遼東) 지역에도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다.
『사기』와 『수경』에서 전하는 패수는 동쪽으로 흐르는 강이므로 패수는 천진 市에서 호로도 市 사이에서 찾아야 하며 필자가 그중에서 엄선해서 선별한 것이 ③영정하(永定河), ⑥난하(滦河), ⑨양하(洋河) 3개의 강이다. 『사기』와 『수경』 이외의 다른 문헌(文獻)도 논의의 범주에 포함 시키면 패수(浿水)의 위치는 대릉하(大陵河)에서 요하(遼河)까지 확대 가능하며 『수경』의 내용을 난도질한 역도원의 『수경주』를 수용하면 패수(浿水)의 위치는 압록강(鴨綠江)에서 대동강(大同江)은 물론 한강(漢江)도 그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
패수(浿水)의 후보지는 크게 3개의 권역(圈域)으로 나누어 접근되고 있다. 첫 번째는 ①독륙강(獨六江)에서 ㉖련산하(蓮山河)에 이르는 지역이다. 이 일대는 하북성(河北省) 천진 市에서부터 요녕성(遼寧省) 호로도 市에 이르는 지역으로 이 일대에서 바다로 흐르는 강은 대부분이 동남쪽 혹은 남동쪽으로 흘러 발해만 서안(西岸)인 바다에 접한다.
두 번째는 ㉗소릉하(小凌河)에서 ㉚대요하(大遼河)에 이르는 지역이다. 이 일대는 요녕성(遼寧省) 금주 市에서부터 요녕성 영구 市 이르는 지역을 말한다. ㉗소릉하(小凌河), ㉘대릉하(大凌河)는 내륙에서 아주 완만하게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어느 일정 지점에서부터 남쪽으로 흘러(↴) 발해만 북안(北岸)인 바다에 접한다.
㉙쌍태자하(雙太子河)와 ㉚대요하(大遼河)는 모두 요하(遼河)라고 불리는 강인데 전자(前者)는 반금 市 북쪽까지는 서남쪽으로 완만히 흐르다가 하류에 이르러서는 남서쪽으로 흘러 발해로 들어가고 후자(後者)는 서남쪽으로 흘러 내려오다가 영구 市에 이르러 방향을 동남쪽으로 튼 후 하류 끝자락에서 방향을 다시 서쪽으로 틀어 발해로 들어간다. ㉙쌍태자하(雙太子河)와 ㉚대요하(大遼河)의 기본 물줄기는 서남 혹은 남서 방향이다.
마지막 세 번째 권역(圈域)은 압록강(鴨綠江)에서 대동강(大同江)에 이르는 오늘날 평안도(平安道) 서해안 지역이다. 압록강, 청천강 그리고 대동강은 그 물줄기와 흐름이 서쪽으로 흘러 황해(黃海)로 들어간다. 이렇게 보자면 3개의 권역(圈域)은 ㊀발해만 서안(西岸), ㊁발해만 북안(北岸) 그리고 ㊂평안도 서안(西岸)으로 분류되는 셈이다.
조선의 강역을 논함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내용이 진개(秦開)의 북벌이다. 그런데 북벌(北伐)이란 단어는 중국왕조인 연(燕)에게 어울리는 표현이고 영토를 침탈(侵奪)당하는 조선(朝鮮) 에게는 진개(秦開)의 침략(侵略)이 적절한 표현이 될 것이다. 중국 사서에 의하면 진개의 침략(侵略)으로 조선은 영토를 상실한 것으로 묘사된다. 후대의 사가(史家)들은 그것이 BC300년 경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추정하는데 BC280~BC270년대에 일어났다고 보는 견해도 상당수다.
『사기 흉노 열전』의 기록을 수용하여 진개(秦開)의 동호(東胡) 격파를 고조선에 대한 침략(侵略)이라 규정하고 고조선이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에 이르는 1000여 리의 땅을 잃게 되었다고 받아들이면 패수(浿水)는 권역 ㊀인 발해만 서안(西岸)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①독륙강(獨六江)에서 ㉖련산하(蓮山河)에 이르는 지역을 뜻하는데 이 중 패수(浿水)의 유력한 후보지는 ③영정하(永定河), ⑥난하(滦河), ⑨양하(洋河) 3개가 될 것이라고 본다
『위략』의 내용을 받아들여 진개(秦開)의 침략으로 동호(東胡)는 1000여 리의 땅을 잃었고 조선은 2000여 리의 땅을 잃어 조선이 요하((遼河) 동쪽으로 후퇴하게 되었다는 내용을 받아들이면 패수(浿水)는 권역 ㊁인 발해만 북안(北岸)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 지역은 요하(遼河)로 통칭되는 ㉙쌍태자하(雙太子河)와 ㉚대요하(大遼河) 일대를 뜻한다.
이곳에서 전하는 내용의 핵심은 『수경』에 근거하여 동류(東流) 하는 강 중에서 조선과 한나라의 경계로 거론되는 패수(浿水)의 위치를 추적해 보자는 것이었다. 만약 『수경』에서 전하는 내용에서 벗어나 패수가 동쪽으로 흐르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한서』「지리지」에서 전하는 2개의 패수 중 하나는 『위략』에서 전하는 만번한(滿潘汗) 지역의 일대로 간주되어 쌍태자하(雙太子河)나 대요하(大遼河)가 조선과 한나라의 경계로 거론되는 패수(浿水)가 될 수 있다.
이 일대가 『위략』에서 전하는 만번한(滿潘汗) 지역이라 하였는데 학계에서는 만번한을 천산산맥(天山山脈) 서쪽 지역에 비정하고 있다. 천산산맥(天山山脈)은 길림(吉林)市에서 대련(大連) 市 사이에 이르는 산맥으로 요동반도(遼東半島)의 가운데를 관통하고 있다. 산맥 서쪽에 대요하(大遼河)가 있다.
한편 패수를 ㉗소릉하(小凌河)나 ㉘대릉하(大凌河)로 보는 견해는 진개(秦開)의 침략으로 조선이 2000여 리의 땅을 잃어 조선이 요하((遼河) 동쪽으로 후퇴하게 되었으나 연(燕) 소양왕(昭襄王, BC311~BC279) 사후 조선의 반격이 이루어져 ㉗소릉하(小凌河)나 ㉘대릉하(大凌河)까지 영토를 회복하였다는 것에 근거한다.
마지막 세 번째는 『사기 흉노 열전』과 『위략』에서 전하는 진개(秦開)의 내용을 뒤죽박죽 조합하여 조선이 1000여 리와 2000여 리, 도합 3000여 리를 잃어 조선이 한반도(韓半島) 남쪽으로 후퇴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것을 받아들이면 패수는 권역(圈域) ㊂인 평안도 서안(西岸)에 위치하게 된다.
진개(秦開)의 침략으로 고조선이 오늘날 하북성(河北省) 장가구 市 일대인 조양(造陽)에서부터 하북성(河北省) 양평(襄平)까지 1000여 리 혹은 조양(造陽)에서부터 요녕성(遼寧省) 요양(遼陽) 일대까지 2000여 리 혹은 조양(造陽)에서부터 한반도(韓半島) 북서쪽 일대까지 3000여 리의 땅을 상실하였다고 중국 사서(史書)에서 전하고 있는데 만약 고조선이 1000여 리의 땅만 상실하였다고 보면 패수(浿水)는 권역 ㊀인 발해만 서안(西岸)에 있다고 보아야 하며, 조선이 2000여 리의 땅을 상실하였다고 하면 패수는 권역 ㊁인 발해만 북안(北岸)에서 찾아야 하며 만약 조선이 3000여 리의 땅을 잃었다고 한다면 패수는 권역(圈域) ㊂인 평안도 서안(西岸)에서 찾아야 하는데 조양(造陽)에서 3000여 리 떨어져 있는 곳으로는 청천강(淸川江)이 가장 유력한 후보지가 된다.
필자는 진개(秦開)의 침략으로 조선이 조양(造陽)에서부터 양평(襄平)까지 1000여 리만 상실하고 그것이 위만조선(衛滿朝鮮)이 멸망하는 BC108년까지 유지되어 패수(浿水)가 권역 ㊀인 발해만 서안(西岸)에 있었을 것이라고 조심스레 추정해본다. 조선(朝鮮)이 1000여 리의 땅만 상실하였는지 아니면 2000여 리 혹은 3000여 리의 땅을 잃었는지는 역사적으로 규명이 안 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을 상고사(上古史)에 관심 있는 독자분들에게 위임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