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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세기란 BC200년부터 BC101년까지의 100년 동안의 기간을 말한다. 기원전 2세기 고조선(古朝鮮)에서의 무력충돌(武力衝突)이란 위만조선(衛滿朝鮮)이라는 나라가 생기는 BC194년부터 위만조선이 망하는 BC108년까지 87년의 기간에 벌어진 분쟁(紛爭)과 전쟁(戰爭)을 지칭한다.
우리나라의 역사교과서(歷史敎科書)에서는 위만(衛滿)이란 인물이 고조선의 준왕(準王)을 축출하고 위만조선(衛滿朝鮮)이라는 나라를 세웠다고 기록해 놓았다. 따라서 역사 교과서는 위만조선(衛滿朝鮮)이 고조선(古朝鮮)의 법통을 계승함은 물론 고조선 영역의 전체를 이어받는다고 묘사한다.
그런데 위만(衛滿)이 BC194년에 고조선(古朝鮮)의 준왕(準王)을 축출하고 위만조선(衛滿朝鮮)이라는 나라를 세웠으나 이것이 고조선(古朝鮮)의 멸망(滅亡)을 뜻하지 않는다고 보는 학계의 시각이 있다. 위만조선(衛滿朝鮮)이라는 나라가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고조선(古朝鮮)으로 간주 되는 단군조선(檀君朝鮮) 혹은 후조선(後朝鮮)이라는 왕조(王朝)가 BC194년 이후에도 여전히 존재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환단고기』의 편찬자와 단재 신채호 그리고 윤내현 교수는 위만조선(衛滿朝鮮)과 고조선(古朝鮮)이 같은 시기에 병존(竝存)하였다고 보았다. 이런 주장은 『환단고기』의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와 신채호의 삼조선론(三朝鮮論)에서 나타나는데 두 개념은 이름만 다를 뿐 실상은 같은 내용이다.
신채호의 삼조선론(三朝鮮論)을 예로 들자면 신채호는 자신이 주창한 삼조선론(三朝鮮論)에 입각하여 고조선(古朝鮮)을 3등 분하여 접근한다. 신조선(= 진조선, 진한, 신한), 말조선(= 막조선, 마한, 말한), 불조선(= 번조선, 변한, 불한) 3 연합체가 고조선(古朝鮮)을 구성하는데 종주국(宗主國) 격 (格)인 신조선은 만주(滿洲)를 다스리고 제후국(諸侯國)인 말조선은 한반도(韓半島) 그리고 다른 제후국인 불조선은 요녕성(遼寧省)과 하북성(河北省) 일대를 다스린다고 보았다.
한편 『환단고기』의 편찬자는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에 근거하여 고조선(古朝鮮)은 단군왕검(檀君王儉) 시절부터 나라를 3등 분하여 만주(滿洲) 일대인 진조선(眞朝鮮)은 단군(檀君)이 통치하고 한반도(韓半島) 지역인 막조선(莫朝鮮)과 지금의 요녕성(遼寧省)과 하북성(河北省) 일대인 번조선(番朝鮮)에는 부(副) 단군을 두어 관리토록 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환단고기』의 진조선과 번조선 그리고 막조선은 신채호의 신조선과 불조선 그리고 말조선을 의미한다.
신채호의 삼조선론(三朝鮮論)과 『환단고기』 편찬자의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에 의하면 위만이 찬탈하였다는 고조선(古朝鮮)이란 고조선 전체를 뜻하지 않고 고조선(古朝鮮)을 구성하는 3개 연합체 중 하나인 불조선(= 번조선)을 의미한다고 한다. 따라서 위만이 축출하였다는 준왕(準王)은 고조선(古朝鮮)의 단군(檀君)이 아니고 불조선(= 번조선)의 부(副) 단군 격(格)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부단군(副檀君)은 단군의 책봉(冊封)을 통해서만 왕위(王位)에 오를 수 있으므로 단군의 제후(諸侯)가 되는 셈이다. 위만이 준왕을 축출하고 위만조선(衛滿朝鮮)이란 나라를 세웠다는 것은 위만이 고조선(古朝鮮)의 제후국(諸侯國)인 불조선(= 번조선)만 멸망시켰다는 것이다.
따라서 위만조선(衛滿朝鮮)이라는 나라가 건립된 BC194년 이후에도 위만조선의 동쪽에는 신조선(= 진조선 = 북부여)이 건재하고 있었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신채호의 신조선은 『환단고기』 의 진조선(眞朝鮮)을 의미하는데 『환단고기』에 의하면 BC425년에 이르러 진조선(眞朝鮮)의 국호가 대부여(大扶餘)로 바뀌고 BC239년에 이르러서는 해모수란 인물이 대부여에서 북부여(北扶餘)란 나라를 세운다고 한다.
단군 고열가가 제위(帝位)를 버리고 입산수도(入山修道)함으로써 대부여(大扶餘)는 BC238년에 멸망하고 6년간의 오가(五加) 공화체제(共和體制)를 거친 후 BC232년에 이르러 해모수란 인물이 오가(五加)의 추대로 대부여(大扶餘)의 법통을 승계한 단군(檀君)으로 추대된다. 이때 진조선은 국호(國號)가 대부여(大扶餘)에서 북부여(北扶餘)로 바뀐다. 그리고 일부 사가(史家)들은 북부여(北扶餘)를 고구려(高句麗)의 전신왕조(前身王朝)로 이해하기도 한다. 북부여(北扶餘)를 고구려(高句麗)의 전신왕조(前身王朝)로 받아들이면 고구려(高句麗)의 사직(社稷)은 정확히 900년의 역사가 된다.
한편 윤내현 교수는 신채호와 『환단고기』 의 편찬자처럼 고조선을 3등 분하여 접근하지는 않으나 위만(衛滿)으로부터 축출된 준왕(準王)이 고조선(古朝鮮)의 왕이 아니었다고 보는 점에서 신채호 및 『환단고기』 편찬자와 견해를 같이한다. 윤내현 교수는 위만으로부터 축출된 준왕(準王)이 고조선(古朝鮮)의 제후국(諸侯國)이었던 기자국(箕子國)의 왕이었다고 보았다. 윤내현 교수의 기자국(箕子國)은 기자(箕子)의 후손과 관련된 왕조(王朝)였다는 점에서 『환단고기』 에 등장하는 번조선(番朝鮮)의 제후국인 수유국(須臾國)과 유사한 개념이다.
이상의 내용을 근거로 보자면 위만조선(衛滿朝鮮)의 등장으로 위만의 서쪽에는 한나라(BC202~AD8)가 있고 위만의 동쪽에는 북부여(BC238~BC37)가 위치하게 된다. 위만(衛滿)이 준왕(準王)을 축출하고 왕이 되었다면 위만의 통치 영역은 어느 정도가 되었을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위만에 의해 축출된 준왕(準王)의 통치권(統治權)이 서쪽과 동쪽으로 어디에까지 미쳤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위만에게 침탈당했다는 신채호의 불조선과 『환단고기』의 번조선 그리고 윤내현 교수가 상정한 기자국(箕子國)의 서단(西端)은 어디였고 동단(東端)이 어디였는지를 살피면 위만조선의 영역을 가름할 수 있게 된다.
주류사학(主流史學)에서는 위만조선(衛滿朝鮮)의 강역을 한반도(韓半島)인 평안도(平安道), 황해도(黃海道), 강원도(江原道) 지역 예컨대 38선 이북의 함경도 일부를 제외한 한반도(韓半島) 땅으로 규정하므로 위만조선의 서단(西端) 혹은 북단(北端)을 압록강(鴨綠江)이나 청천강(淸川江) 일대의 남쪽 지역으로 본다.
초기 민족사학(民族史學)을 대표하는 단재 신채호나 위당 정인보 등은 위만조선(衛滿朝鮮)의 서단(西端)을 요하(遼河) 동쪽으로 보며 리지린 이래 북한 학계의 공식 입장은 위만조선의 서단(西端)을 대릉하(大陵河) 동쪽으로 규정한다. 신용하 교수와 박경순 평론가도 대릉하(大陵河) 동쪽으로 본다.
한편 오늘날 민족사학(民族史學)의 다수설 입장에 선 윤내현 교수와 이덕일 박사 등은 준왕(準王)의 통치권이 미치는 서단(西端)을 하북성(河北省)의 난하(灤河) 일대로 추정한다. 위만조선(衛滿朝鮮)이 불조선(= 번조선) 내지는 기자국(箕子國)의 영역 전체를 복속하였다고 추정하므로 위만조선의 서쪽 끝은 난하(灤河)의 동쪽 지역이 된다고 본다.
그런데 『환단고기』와 민족사학(民族史學)의 소수설 입장은 고조선(古朝鮮)의 서쪽 끝이 난하가 아니고 조백하-영정하(潮白河-永定河) 일대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따른다면 위만조선(衛滿朝鮮)의 서쪽 끝은 난하(灤河) 서쪽 120km 지점에 있는 조백하-영정하(潮白河-永定河)의 동쪽이 된다.
그렇다면 불조선(= 번조선)과 기자국(箕子國)의 동단(東端)은 어디였을까? 기자국(箕子國)은 난하 유역의 작은 소국(小國)이었다고 윤내현 교수가 규정한 바 있으므로 이하에서는 기자국(箕子國)에 대한 언급은 논외(論外) 하기로 하자.
위만조선(衛滿朝鮮)이 불조선(= 번조선)의 영역 전체를 차지였다고 추정하므로 불조선(= 번조선)의 동단(東端)을 알게 되면 위만조선(衛滿朝鮮)의 동쪽 끝이 어디에 이르렀는지를 가름할 수 있게 된다. 신채호는 불조선과 신조선의 경계를 개원(開原)과 흥경(興京)으로 보았다. 개원 이북(以北)과 흥경 이동(以東)은 신조선의 영역이고 개원 이남(以南)과 흥경 이서(以西)는 불조선의 영역으로 보았다.
신채호는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의 침략으로 조선이 2000여 리의 땅을 빼앗겼다고 보았다.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에 이르는 1000여 리는 신조선이 상실한 영역이고 양평(襄平)에서 요양(遼陽)에 이르는 1000여 리는 불조선(= 번조선)이 상실한 영역이라고 보았다.
이 말은 진개(秦開)의 침략으로 불조선은 하북성(河北省) 창려현(昌黎縣) 일대에서부터 요녕성(遼寧省) 요양(遼陽) 市에 이르는 지역을 상실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난하(灤河) 동쪽에서부터 대요하(大遼河)의 서쪽 지역이 연(燕)나라에 귀속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개(秦開)의 침략으로 불조선의 영토는 크게 축소되었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신채호에게 불조선의 서쪽 끝인 서단(西端)은 대요하(大遼河)의 동안(東岸)이 되며 불조선의 동단(東端)은 신조선과의 경계인 개원(開原)과 흥경(興京)의 계선(界線)이 된다. 이것이 신채호가 본 진개(秦開) 침략 이후의 불조선 영역으로 추정된다. 위만조선(衛滿朝鮮)이 불조선을 찬탈하여 건립되었으므로 위만조선(衛滿朝鮮)의 영역은 한반도(韓半島) 지역은 논외로 하고 만주(滿洲)지역에서는 대요하(大遼河)와 개원(開原)-흥경(興京)의 계선(界線) 사이에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위만조선(衛滿朝鮮)의 영역이 동쪽과 북쪽으로 확장되었을 수 있으므로 대요하(大遼河)와 개원(開原)-흥경(興京)의 계선(界線) 사이라는 영역을 위만조선(衛滿朝鮮) 전성기(全盛期)의 영토로 규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상의 내용을 근거로 보자면 신채호가 보는 한사군(漢四郡))은 한반도(韓半島)에 설치될 수 없다.
위 이미지는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의 침략 사건 이후의 삼조선(三朝鮮) 강역을 추정해 본 지도이므로 BC200년대와 BC100년대의 상황을 나타낸다.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연(燕)나라의 불조선 침략으로 연나라와 불조선의 경계는 요하(遼河)가 된다. 신채호는 B280 년대로 추정되는 연나라의 침략으로 불조선이 하북성(河北省) 난하(灤河)의 동쪽에서 요녕성(遼寧省) 요하(遼河)의 서쪽까지를 상실하게 된다고 보았다. 불조선과 신조선의 경계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개원(開原)과 흥경(興京)의 계선(界線)이 경계가 되며 불조선과 막조선 역시 예전과 마찬가지로 압록강(鴨綠江)이 양자 간의 경계가 된다.
예전에는 패수(浿水)가 난하(灤河)로 규정되었으나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의 침략으로 조중(朝中) 간의 국경인 패수(浿水)는 요하(遼河)로 급속히 후퇴하게 되며 요하(遼河) 일대에 『위략(魏略)』에서 언급되는 만번한(滿番汗)이라는 지역이 있었다고 추정된다. 신채호의 주장을 따르자면 요하(遼河)는 진개(秦開)의 침략으로 조중(朝中) 간의 새로운 국경으로 부상하게 되는데 이 경계가 위만조선(衛滿朝鮮)이라는 왕조가 건립되는 BC194년은 물론 위만조선이 멸망하는 BC108년까지도 유지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위만이 불조선의 준왕(準王)에게 망명하기 위해 건너 들어왔다는 패수(浿水)와 한무제(漢武帝)의 사신인 섭하(涉何)가 위만조선과 교섭에 실패한 후 마중 나온 우거왕(右渠王)의 신하를 살해하고 도망쳐 건너갔다는 패수(浿水)는 같은 강으로 이 강은 요하(遼河)를 뜻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요하(遼河)란 오늘날 영구 市에서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대요하(大遼河)로 불리는 강을 뜻하는데 신채호는 이 강의 이름을 어니하(淤泥河)라고 불렀다. 어니하(淤泥河)라고 불리던 대요하(大遼河)를 패수(浿水)로 규정한 것은 신채호 개인만의 주장이 아니고 『동국문헌비고』 편찬(1770) 이래 조선왕조(朝鮮王朝)의 공식 입장이기도 하다.
위 지도에서 전하고자 하는 내용의 핵심은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의 침략으로 인해 신채호는 불조선의 영토를 이렇게 작아졌다고 추정한다는 것이고 이 영토가 고스란히 위만조선(衛滿朝鮮)에게 넘겨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채호가 본 위만조선의 영토란 요하(遼河)에서 압록강(鴨綠江) 사이의 요녕성(遼寧省) 일대가 되어 요동 반도(遼東半島)는 여전히 조선(朝鮮)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고 본 것이다. 다만 위만조선과 신조선 간에는 크고 작은 분쟁이 발생하여 요녕성(遼寧省) 일대에 그어졌던 경계가 남북(南北)으로 오르락내리락하였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지도에 삼조선(三朝鮮)의 치소(治所)를 표기해보았는데 신채호는 신조선의 도읍지인 아스라를 송화강(松花江) 유역인 하얼빈 市 일대에 위치한다고 보았으며 막조선의 도읍지인 펴라는 대동강(大同江) 평양 市 일대에 있고 불조선의 도읍지인 아리티는 대요하(大遼河)의 동쪽인 개평현(蓋平縣) 동북 지역인 옛 안시성(安市城) 자리라고 보았다. 개평현은 오늘날 영구 市 남쪽 20km 지점에 있는 개주 市를 지칭하는데 불조선의 도읍지라는 개평현은 위만조선의 치소(治所)로 계승되므로 신채호는 개주 市 일대를 왕검성(王儉城) 자리라고 비정한다.
『환단고기』에서는 진개(秦開)의 침략 사건 이후에도 번조선(番朝鮮)의 서쪽 끝을 조백하-영정하(潮白河-永定河) 일대라고 규정하므로 위만조선(衛滿朝鮮)의 서단(西端)도 조백하-영정하(潮白河-永定河)의 동쪽이 된다고 본다. 『환단고기』에서는 번조선(番朝鮮)의 도읍지인 안덕향(安德鄕)을 난하 서쪽에 있는 탕지보(湯池堡)라고 규정하는데 오늘날 하북성(河北省)의 지급시(地級市)인 당산 市 내에 있는 천안(遷安) 市 일대로 추정되는 곳이다. 그리고 위만(衛滿)이 치소로 삼은 왕험성(王險城)은 난하 동쪽인 하북성(河北省) 창려현(昌黎縣) 일대에 위치한다.
이제 『환단고기』에서 추정한 위만조선의 동변(東邊)을 살펴보기로 하자. 『환단고기』에서는 번조선(番朝鮮)과 진조선(眞朝鮮)의 경계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으나 『환단고기』 강역도(疆域圖)에 나타난 경계는 구려하(句麗河)를 기준으로 서쪽은 번조선, 동쪽은 진조선으로 규정한다.
서압록(西鴨綠)이라고도 불리는 구려하(句麗河)는 오늘날 요하(遼河)의 중상류 일대를 뜻한다. 요하(遼河)는 하류에 이르러 수로(水路)가 두 갈래로 나뉘어 바다에 이르게 된다. 첫 번째가 반금 市에서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서쪽의 쌍태자하(雙太子河)이고 두 번째가 영구 市에서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동쪽의 대요하(大遼河)이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요하(遼河)는 심양 市와 반금 市 사이에 즈음하여 물줄기가 두 개로 갈라져 하나는 서남 8시 방향으로, 다른 하나는 남서 7시 방향으로 흘러 발해로 들어간다. 서남 8시 방향으로 흘러 반금 市에서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서쪽의 강을 쌍태자하(雙太子河)라 부르고 남서 7시 방향으로 흘러 영구 市에서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동쪽의 강을 대요하(大遼河)라고 부른다.
발해만(渤海灣)에 접하는 쌍태자하(雙太子河)는 대요하(大遼河)의 서쪽 60km 지점에 있다. 고조선(古朝鮮) 시기에 구려하(句麗河)로 불렸다는 요하(遼河)는 오늘날 쌍태자하(雙太子河)와 대요하(大遼河)를 포괄한 개념이라고 본다.
번조선과 진조선이 구려하(句麗河)를 경계로 구분되었다면 위만조선과 북부여의 경계도 초기에는 구려하(句麗河)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요하(遼河)의 중상류 지역에 관한 이야기이다. 발해만(渤海灣)에 접한 요하(遼河)의 하류 지점에서는 사정이 달랐던 것 같다.
그렇다면 요하(遼河) 하류 지점에서 위만조선과 북부여 간의 경계는 어디였을까? 양자 간의 경계는 반금 市 일대를 흐르는 쌍태자하(雙太子河)가 될 수 있고 영구 市 일대를 흐르는 대요하(大遼河)가 될 수도 있는데 『환단고기』 강역도(疆域圖)에 나타난 경계를 기준으로 하면 쌍태자하(雙太子河)가 초기 시점인 BC194년의 유력한 경계선이 된다고 본다.
위만(衛滿)이 번조선(番朝鮮)을 침탈한 후 동쪽과 북쪽으로 계속 진격하여 번조선(番朝鮮) 영역 전체를 차지하려 하자 북부여(北扶餘)는 군대를 동원하여 위만의 북상을 막아 내보려고 하였으나 위만의 앞선 철제무기(鐵製武器)에 압도되어 공격을 제대로 저지하지 못하였다고 판단된다. 그 결과 전선(戰線)이 안정되었을 때 위만조선(衛滿朝鮮)과 북부여(北扶餘)의 경계는 대요하(大遼河)인 구려하(句麗河) 일대에서 옥신각신하며 유지되었다고 본다.
『환단고기』가 전하는 내용에 근거할 경우 위만조선의 멸망 시점에 위만조선(衛滿朝鮮)의 영역은 서쪽으로는 조백하(潮白河) 동안(東岸)이 되며 동쪽으로는 대요하(大遼河)의 서안(西岸)이 된다. 윤내현 교수 역시 위만조선(衛滿朝鮮)의 등장 이후 우거(右渠)에 이르러 그 영역이 요하(遼河)에 다다르게 되었다고 보는 점에서 『환단고기』와 견해를 같이한다.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신채호의 불조선은 위만조선에게 점령되고 위만조선(衛滿朝鮮)의 영역은 멸망 시점인 BC108년경에 대요하(大遼河)에서 개원(開原)-흥경(興京)의 계선(界線) 사이가 된다.
『환단고기』의 번조선(番朝鮮)은 위만조선에게 점령되고 위만조선의 영역은 멸망 시점인 BC108년경에 조백하(潮白河)에서 대요하(大遼河)인 구려하(句麗河) 사이가 된다.
윤내현 교수는 위만조선이 기자국(箕子國)을 점령한 후 동쪽으로 영토를 계속 넓혀 그 영역이 멸망 시점인 BC108년경에 난하에서 대요하(大遼河) 사이가 된다. 여기서 대요하(大遼河)는 요하(遼河)의 동쪽 하류를 의미한다.
『환단고기』 편찬자와 단재 신채호 그리고 윤내현 교수는 위만조선(衛滿朝鮮)이 고조선을 계승한 나라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위만조선이 고조선 영토의 전체를 복속하지 않았으며 위만조선이 민족을 배신(?)하고 한나라의 외신(外臣)을 자처하였기 때문이다.
당시의 상황은 한나라(前漢)의 재정ㆍ군사 지원을 받는 위만조선(衛滿朝鮮)이 번조선(番朝鮮)을 점령한 후 북부여(北扶餘)의 영역으로까지 침략해 들어오는 형국이었다. 따라서 단군조선(檀君朝鮮)의 법통을 이어받은 북부여(北扶餘)에게 위만조선이란 정치세력은 중국의 외신(外臣)으로 한나라의 괴뢰 정권(傀儡政權)이었던 셈이다.
위만이 BC194년에 번조선(番朝鮮) 왕조(王朝)를 찬탈하였는데 번조선이 찬탈 된 경우는 BC194년이 처음이 아니었다. BC323년에 수유국(須臾國) 출신인 기후(箕詡)라는 인물이 정변을 일으켜 번조선(番朝鮮)을 찬탈하고 번조선의 왕위(王位)에 오른 적이 있다.
이후 기후(箕詡, BC323) → 기욱(箕煜, BC315) → 기석(箕釋, BC290) → 기윤(箕潤, BC251) → 기비(箕丕, BC232) → 기준(箕準, BC221~BC194) 이렇게 6대에 걸쳐 번조선(番朝鮮)의 마지막 왕이라는 기준(= 준왕)에게까지 이어진다. 후대에 기자조선(箕子朝鮮, BC323~BC194)이라고 알려진 나라가 바로 번조선(番朝鮮)의 마지막 왕조(王朝)였던 셈이다.
기후(箕詡)가 BC323년에 정변(政變)을 일으켜 번조선(番朝鮮) 왕조(王朝)를 찬탈하고 번조선에 기자조선(箕子朝鮮) 혹은 기씨조선(箕氏朝鮮)이라는 왕조(王朝)를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기자조선(箕子朝鮮) 내지는 기씨조선(箕氏朝鮮)을 번조선(番朝鮮)의 마지막 왕조로 규정하는 이유는 기후(箕詡)가 번조선을 찬탈한 후 진조선인 대부여(大扶餘) 단군(檀君)의 윤허(允許)를 받아 왕위(王位)에 올랐기 때문이다. 기후(箕詡)의 번조선 찬탈(簒奪)이란 고조선이란 제국을 지탱하고 유지해가는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의 질서 내에서 이루어진 번조선 상층부의 정권교체(政權交替)였다.
그런데 위만(衛滿)의 번조선(番朝鮮) 찬탈은 그 성격이 달랐다. 만약 위만이 번조선의 준왕을 축출하면서 북부여(北扶餘) 단군(檀君)의 윤허(允許)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면 위만조선(衛滿朝鮮)이라는 왕조도 기자조선(箕子朝鮮)과 마찬가지로 번조선(番朝鮮)의 왕조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위만은 북부여 단군의 윤허를 구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처신하였다. 이 말은 위만조선은 번조선과는 근본이 다른 정치체제(政治體制)라는 것을 뜻하며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의 질서 내에 편입되어 있지 않겠다는 것을 뜻한다.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위만(衛滿)이 번조선(番朝鮮)의 종주국(宗主國)인 북부여(北扶餘)에 대항(對抗)하겠다는 뜻이다. 북부여에 대항하기 위해서 위만은 다른 한쪽의 지원을 받아야 했고 그 결과 위만은 한나라의 외신(外臣)이 되기를 자처할 수밖에 없었다. 위만은 총부리를 북부여가 있는 동북쪽으로 겨눌 수밖에 없었고 결국에는 북부여와 대결하는 국면으로 치닫게 되었다. 이처럼 위만조선(衛滿朝鮮)은 신채호의 불조선 혹은 『환단고기』의 번조선 혹은 윤내현 교수의 기자국(箕子國)을 침략하여 찬탈한 후 한나라의 외신(外臣)이 되어서 한나라의 지원을 받아 영토를 동북쪽으로 넓혀 나가게 된다.
이상과 같은 상황에서 『환단고기』에서 전하는 위만(衛滿) 관련 기사 중 무력충돌(武力衝突)과 관련된 부분을 살펴보기로 한다. 무력충돌(武力衝突) 내용의 대부분이 북부여(北扶餘)와 위만조선(衛滿朝鮮) 간의 분쟁이며 BC108년 이후는 북부여와 한나라 간의 분쟁 이야기다. 한편 『환단고기』에서 전하는 위만 관련 기사는 모두가 「북부여기」에서 전하는 내용이다. 『환단고기』에 의하면 북부여(北扶餘) 왕조(王朝)는 해모수 단군이 즉위하는 BC239년부터 고주몽(高朱蒙)이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로 바꾸는 BC37년까지 존속하는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제4왕조이자 마지막 왕조이다.
말이 나온 김에 고주몽(高朱蒙)에 대해 언급해보기로 한다. 주몽(朱蒙)은 북부여(北扶餘) 시조인 해모수의 차남되는 고진(高辰)의 증손자라고 한다. 따라서 주몽에게 해모수는 고조할아버지가 되는 셈이다. 주몽은 6대 북부여 단군인 고무서의 사위가 되며 BC58년에 장인의 뒤를 이어 북부여의 7대 단군(檀君)의 자리에 오른다. 그리고 20여 년 후인 BC37년에 국호를 북부여에서 고구려로 바꾼다. 따라서 북부여 왕조의 종말은 BC58년이 아닌 BC37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환단고기』에서 전하는 위만(衛滿) 관련 기사를 전하기에 앞서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 『환단고기』에는 위만조선(衛滿朝鮮)의 초기 시대(BC194~BC192)만 잠시 조명하고 BC191년부터 BC129년까지의 60여 년 기간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위만조선이라는 나라가 생긴 지 60여 년 후인 우거왕(右渠王) 시기(BC129~ BC108)에 대한 기록이 거의 전부를 차지한다. 『환단고기』에서는 우거왕(右渠王)의 아버지라는 위몽(衛蒙) 혹은 위모(衛某)의 재위 기간(BC161~BC129)과 우거왕의 할아버지인 위만(衛滿)의 재위 기간 중 BC191년에서 BC161에 이르는 기간을 전혀 조명하지 않는다.
『환단고기』에서 전하는 위만(衛滿)과 관련된 기사를 우선 살펴보도록 하자.
1대 북부여 단군 해모수 재위 19년인 BC221년에 기비(箕丕)가 훙서(薨逝)하자 아들 준(準)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번조선(番朝鮮)의 왕으로 책봉되었다.
기비(箕丕)가 BC221년에 사망하면서 번조선의 왕위(王位)가 기비(箕丕)에서 아들인 기준(箕準)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책봉(冊封)이란 기준(箕準)이 종주국(宗主國)인 북부여(北扶餘) 해모수 단군의 형식적인 임명 절차를 밟아 제후국(諸侯國)인 번조선(番朝鮮)의 왕이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역사서(歷史書)에서 준왕(準王)이라고도 불리는 기준(箕準)은 번조선(番朝鮮)이 위만에게 망하는 BC194년까지 28년간 재위(在位)에 머문다.
1대 북부여 단군 해모수 재위 31년인 BC209년에 진승(陳勝)이 병사를 일으키자 진나라 사람들이 큰 혼란에 빠졌다. 이에 연-제-조(燕齊趙) 백성 가운데 번조선(番朝鮮)으로 망명해 온 자가 수만 명이었다. 준왕(準王)이 곧 상하운장(上下雲障)에 나누어 수용하고 장수(將帥)를 파견하여 감독하게 하였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도 BC209년에 발생한 진승(陳勝)ㆍ오광(吳廣)의 난으로 연(燕)-제(齊)-조(趙)의 백성 수만 명이 북쪽으로 유입되어 들어갔다는 내용을 전한다. 상하운장(上下雲障)이란 상하장(上下障)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번조선(番朝鮮)이 연나라의 침략에 대비해 만들었다는 상운장(上雲障)과 하운장(下雲障)이라는 2개의 요새(要塞) 방어 지역을 말한다. 『환단고기』 에서는 상하운장(上下雲障)의 위치를 난하 서쪽인 조백하(潮白河) 일대로 보는데 민족사학(民族史學) 다수설 입장은 상하운장(上下雲障)의 위치를 난하(灤河) 동쪽에 위치하는 것으로 본다.
신용하 교수와 윤내현 교수는 상하운장(上下雲障)의 위치를 난하 동쪽인 오늘날 하북성(河北省) 창려현(昌黎縣) 일대로 본다. 한편 대릉하(大陵河)를 패수(浿水)로 규정하는 북한 학계와 박경순 평론가는 오늘날 대릉하(大陵河) 동쪽에 있는 요녕성(遼寧省)의 지급시(地級市)인 금주 市 내에 위치한 북진(北鎭, Beizhen) 市 일대에 상하장(上下障)이 있었다고 추정한다.
패수가 난하(灤河)인지 대릉하(大陵河)인지를 현재로선 확실히 규명할 수는 없으나 민족사학(民族史學) 다수설 입장에 의하면 상하운장(上下雲障) 혹은 상하장(上下障)이라는 곳은 패수(浿水)의 동쪽에 있었다고 본다. 상하장(上下障)이란 패수(浿水) 동쪽인 요동외요(遼東外徼) 라고 불리는 진(秦)나라의 옛 공지(空地)인 진고공지(秦故空地)를 말한다. 그리고 패수(浿水) 서쪽에는 연나라의 옛 요새인 요동고새(遼東故塞)가 있었다.
따라서 연나라의 요동고새(遼東故塞) 동쪽에 패수(浿水)가 흐르며 패수 동쪽으로 건너가면 진고공지(秦故空地)라고도 불리는 요동외요(遼東外徼) 에 이르게 되는데 바로 이곳에 상하장(上下障)이 있다는 것이다. 패수를 난하(灤河)로 규정할 경우 상하장(上下障)의 위치는 오늘날 진황도 市 일대가 되며 패수를 대릉하(大陵河)로 규정하게 되면 상하장(上下障)의 위치는 오늘날 금주 市 일대가 분명해진다. 한편 『환단고기』 에서처럼 패수를 조백하(潮白河)로 규정하게 되면 상하장(上下障)의 위치는 오늘날 천진 市 동쪽 일대가 된다.
1대 북부여 단군 해모수 재위 38년인 BC202년에 연(燕)나라 노관(盧綰)이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浿水)를 동쪽 경계로 삼았다. 패수는 지금의 조하(潮河)이다.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으로부터 BC202년에 한후국(漢侯國)의 연왕(燕王)에 봉해진 노관(盧綰)이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였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요동의 옛 요새란 패수(浿水)의 서쪽에 있었다는 연(燕)나라의 옛 요새인 요동고새(遼東故塞)를 뜻한다. 그리고 그곳까지를 한후국(漢侯國)인 연(燕)의 동쪽 경계로 규정하였다는 뜻이다.
『환단고기』에서 패수(浿水)로 규정한 조하(潮河)는 오늘날 북경 市 동쪽과 천진 市 북쪽을 흐르는 조백하(潮白河)를 뜻한다. 따라서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수리하였다고 하는 요동의 옛 요새(故塞)라는 연나라의 요동고새(遼東故塞)는 조백하(潮白河)의 서쪽에 위치하게 된다.
후대의 주석(註釋)에 의하면 요동고새(遼東故塞)의 위치는 하북성(河北省) 옥전현(玉田縣)의 서쪽에 있는 천진 市 북부 계현(薊縣) 일대라고 한다. 한편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민족사학(民族史學) 다수설 입장은 패수를 난하로 규정하므로 요동의 옛 요새라는 연나라의 요동고새(遼東故塞)는 난하(灤河)의 서쪽에 위치한다.
1대 북부여 단군 해모수 재위 45년인 BC195년에 연(燕)나라 노관(盧綰)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匈奴)로 달아나자 그 일당인 위만(衛滿)이 우리나라에 망명을 구하였다. 해모수 단군께서 이를 허락하지 않으셨으나 병이 들어 능히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셨다. 번조선(番朝鮮) 왕 기준(箕準)이 물리칠 수 있는 기회를 여러 번 놓치고 마침내 위만(衛滿)을 박사(博士)로 삼고 상하 운장(上下雲障)을 떼어 주어 지키게 하였다.
북부여(北扶餘)에서는 해모수 단군이 위만(衛滿)의 망명을 불허하였으나 번조선(番朝鮮)에서는 기준(箕準)이 실수하여 위만의 망명을 받아들였다는 내용이다. 번조선(番朝鮮) 왕 기준(箕準)이 상하 운장(上下雲障)을 떼어 주어 지키게 하였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상하운장(上下雲障)이란 지역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패수(浿水) 바로 동쪽에 있었던 지역이다.
민족사학(民族史學) 다수설 입장에서는 상하운장(上下雲障)의 위치를 오늘날 난하(灤河) 동쪽인 하북성(河北省) 진황도 市 일대로 보며 북한 학계에서는 대릉하(大陵河) 동쪽에 있는 요녕성(遼寧省) 금주 市 일대로 본다. 『환단고기』의 내용을 따르면 상하운장(上下雲障)의 위치는 천진 市 동쪽 일대가 된다.
1대 북부여 단군 해모수 재위 45년인 BC195년 겨울에 낙랑왕(樂浪王) 최숭(崔崇)이 낙랑산(樂浪山)에서 진귀한 보물을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馬韓)에 이르러 왕검성(王儉城)에 도읍하였다.
날로 커져만 가는 위만의 상하운장(上下雲障)의 세력에 위협을 느낀 인접 지역의 낙랑왕(樂浪王) 최숭(崔崇)이 바다를 건너 마한(馬韓)에 이르러 왕검성(王儉城)에 도읍하였다는 것은 최숭(崔崇)이 배를 타고 황해 바다를 건너 자신의 터전을 하북성(河北省) 일대에서 대동강 평양(平壤) 일대로 옮긴 후 그곳에 낙랑국(樂浪國)을 세웠다는 것을 뜻한다고 본다.
여기서 마한(馬韓)이라는 지역은 전라도(全羅道)에 있었다는 마한이 아니고 평안도(平安道) 평양 일대의 마한을 뜻한다. 신채호의 「전후삼한고(前後三韓考)」 라는 논문에 전삼한(前三韓)과 후삼한(後三韓)이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전삼한(前三韓)에서의 마한은 평안도(平安道) 일대의 지역을 뜻하고 후삼한(後三韓)에서의 마한은 전라도(全羅道) 일대의 지역으로 묘사한다. 위만조선의 멸망으로 한반도 북쪽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마한(馬韓) 세력이 평안도에서 전라도로 이주하였다고 본다.
역사책을 통해 설화(說話) 형식으로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여기서 낙랑공주의 낙랑이란 최씨 낙랑국(崔氏樂浪國, BC195~AD32)인 최숭(崔崇)의 낙랑국(樂浪國)을 지칭하며 한사군(漢四郡)의 하나로 알려진 낙랑군(樂浪郡)과는 별개의 정치세력이다.
2대 북부여 단군 모수리 재위 원년인 BC194년에 번조선(番朝鮮) 왕 기준(箕準)이 오랫동안 수유(須臾)에 있으면서 일찍이 백성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 모두 생활이 풍요롭고 넉넉하였다. 후에 번조선 왕 기준(箕準)은 떠돌이 도적 위만에게 패하여 바다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다.
수유(須臾)란 하북성(河北省) 승덕(承德, Chengde) 市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번조선의 제후국(諸侯國)이다. BC323년에 번조선(番朝鮮)의 왕이 되는 기후(箕詡)가 바로 수유국 출신이다. 수유국(須臾國)은 중국과의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해 번조선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했다고 한다. 전국칠웅(戰國七雄)의 하나인 연나라와 겨루며 고조선의 방패 역할을 했고, 대(大) 단군의 윤허를 받아 기후(箕詡)가 번조선을 통치했다.
한편 기후(箕詡)는 대부여(BC425~BC239, = 진조선)의 내정(內政)에도 개입해 해모수가 북부여(北扶餘)를 건국하는 데 힘을 보태기도 했다. 수유국(須臾國)은 기자(箕子)의 후손과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윤내현 교수의 기자국(箕子國)과 비슷한 개념이다.
그리고 하단의 기록은 BC194년에 위만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번조선(番朝鮮)의 왕 기준(箕準)이 바다 건너 망명을 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하북성(河北省) 진황도 市 일대인 창려현(昌黎縣)에서 해로(海路)로 한반도(韓半島)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기준(箕準)은 배를 타고 한반도의 마한 땅인 평양(平壤) 일대에 도착하였으나 앞서 도착해 터를 잡은 최숭(崔崇) 세력의 견제와 토착인들의 반발로 다시 배를 타고 남하하여 황해도(黃海道) 일대인 금마(金馬)에 정착하였으나 곧 붕어(崩御)한 것으로 추정된다.
2대 북부여 단군 모수리 재위 2년인 무신(BC193)년에 임금께서 상장(上將) 연타발(延佗勃)을 보내 평양(平壤)에 성책을 세워 도적 위만을 대비하게 하셨는데, 위만도 싫증이 나고 괴롭게 여겨서 다시는 침노하여 어지럽히지 않았다.
상장(上將) 연타발(延佗勃)은 고구려의 개국공신 연타발과 동명이인(同名異人)이다. 그리고 여기서 평양(平壤)이란 오늘날 해성(海城) 동북쪽에 있는 요녕성(遼寧省) 요양(遼陽) 市나 그 북쪽에 있는 심양(瀋陽) 市 일대로 추정된다고 한다. 위만이 번조선(番朝鮮)의 영토를 모두 복속한 후 급속히 동진(東進)하여 위만조선(衛滿朝鮮)이 북부여(北扶餘)의 영토를 잠식해 들어오고 있다는 내용을 묘사한다.
BC193년에 이르러 위만조선(衛滿朝鮮)은 북부여(北扶餘)의 영역이던 쌍태자하(雙太子河)의 동쪽을 침범한 후 동쪽의 대요하(大遼河)마저 뚫어 발해만(渤海灣) 일대를 완전히 장악한 후 요동 반도(遼東半島) 일대를 잠식해 들어가는 시점이라고 추정된다. 따라서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북부여(北扶餘)는 발해만 연안(沿岸) 일대를 위만조선에게 모두 빼앗겼다고 본다.
그런 까닭에 위만조선과 북부여 간의 전선(戰線)은 요하(遼河)를 사이에 두고 동서(東西)로 대치하는 것이 아니고 요동 반도(遼東半島) 북쪽 어딘가에서 남북(南北)으로 대결하는 구도였다고 보아야 한다. 더욱이 『환단고기』에서 평양(平壤)이란 지역을 요양(遼陽) 市나 심양(瀋陽) 市 일대로 추정하므로 대요하(大遼河) 동쪽인 영구 市 일대를 중심으로 북부여와 위만조선이 남북(南北)으로 대치하는 국면이었다고 본다.
위만이 이 정도로 영토를 넓혀놓았으니 더 이상의 영토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환단고기』 에서는‘싫증이 나고 괴롭게 여긴다’고 우회적으로 표현하였다. 위만이 넓혀놓았다는 땅을 『환단고기』 기준으로 보자면 서쪽인 조백하(潮白河)에서부터 동쪽인 구려하(句麗河)에 이르는 옛 번조선 영토(番朝鮮)와 북부여(北扶餘)의 영토인 발해만(渤海灣) 연안(沿岸)의 쌍태자하(雙太子河)와 그 동쪽인 대요하(大遼河) 일대 그리고 천산산맥(千山山脈) 서쪽인 요동 반도(遼東半島)의 서안(西岸) 지역이 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한편 구려하(句麗河)란 오늘날 요하(遼河) 중상류 일대를 지칭한다고 본다.
‘위만이 다시는 침노하여 어지럽히지 않았다’는 뜻은 더 이상의 영토쟁탈전(領土爭奪戰)이 후대에 이르지 않았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예컨대 위만의 뒤이은 위몽(衛蒙) 혹은 위모(衛某)의 재위기(在位期, BC161~BC129)에도 이 영토는 계속 유지되었고 위만의 손자인 위우거(衛右渠) 의 초기 집권 시절에도 이 영토가 유지되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이 시기의 위만조선 영역을 지도로 표현하면 아래와 같았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하늘색 부분은 민족사학 다수설 입장에서 『환단고기』 의 내용을 구성해 본 위만조선의 영역이다. 짙은 파란색 부분은 조백하(潮白河)와 난하(灤河) 사이의 120km 구간이다. 『환단고기』 에서는 이 지역도 번조선의 영역으로 규정하므로 이곳도 위만조선의 영토라고 추정한다.
전라도(全羅道)와 경상도(慶尙道)가 소백산맥(小白山脈)을 경계로 영역이 서(西)와 동(東)으로 구분되어 있듯이 요동 반도(遼東半島)도 남북으로 이르는 천산산맥(千山山脈)을 경계로 서쪽과 동쪽으로 구분되어 있다. 위만조선(衛滿朝鮮)이 한반도(韓半島)에 위치하였다고 전하는 막조선(莫朝鮮)이나 평안도(平安道) 일대에 터전을 잡은 낙랑왕(樂浪王) 최숭(崔崇)의 최씨 낙랑국(崔氏樂浪國, BC195~AD32)과 접촉이나 분쟁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위만조선이 점유하였다는 요동 반도(遼東半島)란 지역은 천산산맥(千山山脈)의 서쪽인 요동 반도의 서안(西岸) 일대에 국한되었다고 추정된다.
따라서 이하에서 계속 언급이 되겠지만 위만조선(衛滿朝鮮)이 장악하였다는 요동 반도(遼東半島)라는 지역은 요동 반도의 서해안(西海岸) 쪽을 지칭한다고 이해하여 주었으면 한다. 천산산맥(千山山脈)의 동쪽에서 압록강(鴨綠江)에 이르는 요동 반도(遼東半島)의 동부 지역은 북부여(北扶餘)의 영토였다고 추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2대 북부여 단군 모수리 재위 3년인 기유(BC192)년에 해성(海城)을 평양도(平壤道)에 부속시켜 아우 고진(高辰)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셨다. 이때 중부여(中夫餘) 사람들이 모두 식량 조달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겨울 10월에 수도와 지방을 나누는 법(京鄕分守之法)을 제정하여 수도는 천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려 위수를 총괄하고, 지방은 사방 네 개의 구역(四出)으로 나누어 (오가가) 진수(鎭守)하게 하셨다.
BC192년에 해성(海城)이 북부여(北扶餘)의 평양도(平陽道)라는 행정구역의 관할(管轄)에 속했으므로 해성(海城)을 포함한 그 이북(以北) 지역은 북부여(北扶餘)가 영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해성(海城, Haicheng)은 후술하겠지만 영구(Yingkou) 市와 안산(Anshan) 市 사이에 위치한 지역이다.
2대 북부여 단군 모수리의 아우인 고진(高辰)이라는 인물은 1대 북부여 단군 해모수의 차남이자 고구려(高句麗)의 시조(始祖)인 고주몽(高朱蒙)의 증조부라고 한다. 한편 『환단고기』의 전수자로 알려진 이유립(李裕岦, 1907~1986)은 중부여(中夫餘)를 요동 반도(遼東半島)와 평안도(平安道) 지역으로 추정하였다.
3대 북부여 단군 고해사 재위 42년인 계축(BC128)년에 임금께서 친히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남려성(南閭城)에서 도적 위만(衛滿)을 격퇴하고 관리(官吏)를 두어 다스렸다.
여기서부터는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右渠王)과 관련된 기사로 바로 위에서 전하는 내용으로부터 64년 후의 이야기가 된다. 남려성(南閭城)은 창해군(蒼海郡)의 치소(治所)로 추정되는 곳으로 『환단고기』 주석(註釋)에 따르면 오늘날 하북성(河北省) 창주(滄州, Cangzhou) 市 일대라고 한다. 이 말은 북부여(北扶餘)가 위만조선(衛滿朝鮮)의 서쪽 끝자락 혹은 옛 제(齊)나라의 영토에서 위만조선과 격전(激戰)을 벌였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위만조선(衛滿朝鮮)을 붕괴 직전까지 몰아간 중대한 사건이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북부여(北扶餘)가 창주(滄州) 市 일대에서 위만조선을 격퇴하고 그곳에 관리를 두었다는 내용은 당시의 시대 상황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고 본다. 『환단고기』에서 조선과 중국의 경계로 본 조백하(潮白河)는 창주(滄州) 市보다 훨씬 북쪽에 있다. 더욱이 『환단고기』에서는 창주 市 일대를 번조선(番朝鮮) 멸망 당시의 영역으로 보지 않는다. 게다가 이 당시에는 대요하(大遼河)의 동쪽에서 북부여와 위만조선이 남북(南北)으로 대치 중이었던 상황이므로 하북성(河北省) 남단(南端)에 위치한 창주 市는 논의에서 벗어나야 할 이야기라고 본다.
따라서 도적 위만을 격퇴하였다는 남려성(南閭城)이란 곳은 하북성(河北省) 창주(滄州) 市 일대로 볼 수 없으며 오늘날 대릉하(大陵河) 서쪽 너머에 있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는 게 일반적인 견해이다. 대체적인 중론(衆論)은 위 내용이 BC128년에 이르러 북부여(北扶餘)가 위만조선으로부터 요동 반도(遼東半島)를 60여 년 만에 수복(收復)했다는 것으로 해석한다. 60여 년 동안 요녕성(遼寧省) 일대에서 굳어져 왔던 북부여와 위만조선 간의 현상유지정책(現狀維持政策)이 북부여에 의해 타파(打破)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남려성(南閭城)이란 요동 반도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북부여(北扶餘)가 BC128년에 ‘남려성(南閭城)에서 도적 위만(衛滿)을 격퇴하고 관리(官吏)를 두어 다스렸다’는 내용은 북부여(北扶餘)가 요동 반도(遼東半島)를 장악한 후 위만조선을 대요하(大遼河) 서쪽으로 몰아냄과 동시에 요동 반도에 남쪽 담당 제후인 남려(南閭)를 두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북부여(北扶餘)가 BC128년에 남려성(南閭城)에서 도적 위만(衛滿)을 격퇴하고 관리(官吏)를 두어 다스렸다는 내용이 예군(濊君) 남려(南閭)의 한나라 투항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보는 해석이 있다. 위만조선의 과도한 간섭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예군(濊君) 남려(南閭)가 BC128년에 28만의 무리를 이끌고 한무제(漢武帝)에게 투항한 후 창해군(蒼海郡)이라는 지역을 하사받아 그곳에 집단이주하였고 창해군을 설치한 한무제는 팽오(彭吳)를 시켜 이곳에 이르는 통로 개척을 명하였으나 공비(工費)와 노동력이 막대하게 투입되자 창해군은 설치 3년만인 BC126년에 혁파되고 말았다는 것이 중국 역사서에서 전하는 내용이다.
한서(漢書)에는 예군(濊君) 남려(南閭) 등이 BC128년에 우거왕(右渠王)에게 반기를 들고 28만구를 이끌고 요동군(遼東郡)에 내속(內屬)하였다고 적혀 있고 후한서(後漢書)에도 예군(濊君) 남려(南閭)가 우거왕(右渠王)을 배반하고 요동군(遼東郡)에 내속(內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중국 역사서인 한서(漢書)와 후한서(後漢書) 모두 예군(濊君) 남려(南閭)가 위만조선을 배반하고 한나라에 투항한 것으로 묘사한다.
BC128년에 한나라는 위만조선(衛滿朝鮮)을 포위하기 위하여 북부여(北扶餘)의 남쪽 지역을 담당하는 제후 남려(南閭)를 재물로 꾀어 한나라에 복속시키고 요동 반도(遼東半島) 지역에 창해군(蒼海郡)을 두었다고 하는데 한나라의 창해군(蒼海郡)이 어떻게 설치되었는지 그 경위를 추적해보기로 하자.
한무제(漢武帝) 시기에 한나라의 주적(主敵)은 흉노(匈奴)였다. BC134년에 한무제는 승상사(丞相史) 엄안(嚴安)의 주청을 받아들여 위만조선을 공략하여 복속한 후 위만조선의 영토를 통해 흉노의 동쪽 지역으로 진격해 들어가는 작전을 수립한다. 여기서 엄안(嚴安)은 위만조선을 예주(濊州)라고 표현했다. 이런 계획에 따라 한나라는 예주(濊州)를 공략하기 위하여 위만조선의 배후 나라들과 통교하여 위만조선을 고립시키려 하였으나 이를 눈치챈 우거왕(右渠王)의 방해로 이 작전은 실패하게 된다.
위만조선(衛滿朝鮮)을 고립시키는 데 실패한 한나라는 방법을 바꾸어 흉노와 위만조선(衛滿朝鮮)을 개별적으로 접근하게 된다. 흉노에 대하여는 BC128년부터 대규모의 토벌군을 연달아 보내 인명 소모전을 감행하여 한나라와 비교해 인구가 한참 적은 흉노를 크게 위축시켰고 위만조선에 대해서는 북부여의 남쪽 지역을 담당하는 제후인 남려[(南閭) 원래 글자는 南黎]를 재물로 꾀어 한나라 편에 만들고 위만조선의 동쪽에 있는 요동 반도(遼東半島)에 창해군(蒼海郡)을 설치하여 위만조선(衛滿朝鮮)을 동쪽과 서쪽에서 포위하였다.
BC128년에 북부여 고해사 단군이 친히 군대를 동원하여 요동 반도(遼東半島)의 땅을 위만조선(衛滿朝鮮)으로부터 탈환하고 요동 반도를 담당하는 제후인 남려(南閭)를 두어 방어를 책임지도록 하였는데 남려(南閭)가 한무제(漢武帝)의 재물에 녹아 한나라 편이 되어 창해군(蒼海郡)이 설치될 수 있도록 묵인하였다. 요동 반도 일대인 창해군(蒼海郡)이 한무제(漢武帝)의 위만조선 침략진격로(侵略進擊路)가 될 수 있는 동방기지(東方基地)로 부상하게 된 셈이다.
여기서 핵심은 한무제(漢武帝)가 위만조선(衛滿朝鮮)을 고립시키기 위해 북부여(北扶餘)의 땅인 요동 반도(遼東半島)에 창해군(蒼海郡)을 설치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창해군(蒼海郡)은 한나라 땅이 아니며 위만조선의 땅도 아니다. 창해군(蒼海郡)은 북부여에 속한 땅이었다. 예군(濊君) 남려(南閭)가 북부여의 남쪽 지역을 담당하는 제후였으므로 예군(濊君) 남려(南閭)는 위만조선의 우거왕을 배반한 것이 아니라 북부여의 고해사 단군을 배반한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그런데 창해군(蒼海郡)이 요동 반도에 있었다는 창해군 요동반도설(蒼海郡遼東半島設)은 해석이 불가한 큰 결점을 내포하고 있다. 이 당시에 한나라와 요동 반도는 육로(陸路)로 연결되어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환단고기』를 기준으로 보자면 BC128년 이후 위만조선의 영역은 서쪽인 조백하(潮白河)에서부터 동쪽인 구려하(句麗河)에 이르는 옛 번조선 영토(番朝鮮)와 북부여(北扶餘)의 영토인 발해만(渤海灣) 연안(沿岸)의 쌍태자하(雙太子河)와 그 동쪽인 대요하(大遼河) 서쪽 지역이 된다.
한나라에서 요동 반도(遼東半島)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산동 반도(山東半島)에서 해로(海路) 즉 바닷길로 들어가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패수(浿水)를 조백하(潮白河)로 규정하든 난하(灤河)나 대릉하(大陵河)로 규정하든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패수(浿水)가 영구 市를 통해 바다로 빠져나가는 대요하(大遼河)가 되어야지만 비로소 한나라는 요동 반도와 육로(陸路)로 연결된다.
중국 사서(史書)에 한무제(漢武帝)가 팽오(彭吳)를 시켜 창해군(蒼海郡)에 이르는 통로 개척을 명하였으나 공비(工費)와 노동력이 막대하게 투입되었다는 내용을 전하는데 이 문구가 바다를 통한 운송(運送)의 어려움을 의미한다고 해석해 볼 수도 있다. 아무튼 창해군(蒼海郡) 요동 반도설(遼東半島設)은 이해가 잘 안되는 부분인데 창해군(蒼海郡) 요동 반도설(遼東半島設)은 이 부분과 관련하여 납득(納得)이 가도록 설명해줄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환단고기』에서는 BC128년의 남려성(南閭城) 사건을 창해군(蒼海郡)과 어떻게 결부하여 접근하고 해석할까? 『환단고기』 기사를 해석하는 후대의 주석(註釋)에 따르면 BC128년에 북부여(北扶餘)와 위만조선(衛滿朝鮮)이 하북성(河北省) 창주(滄州) 市 일대에서 큰 전투를 벌였는데 북부여의 승리를 확인한 예군(濊君) 남려(南閭)가 북부여에 투항하였다는 것이다.
북부여(北扶餘)는 예군(濊君) 남려(南閭)의 무리를 받아들여 창주 市 일대에 집단 수용케 하였는데 치소(治所)의 이름을 남려성(南閭城)으로 칭하고 그 일대 지역을 창해군(蒼海郡)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따르게 되면 예군(濊君) 남려(南閭)는 한무제(漢武帝)가 아니고 북부여 고해사 단군에게 투항한 것이 된다. 이처럼 『환단고기』를 해석하는 후대의 주석(註釋)에서는 남려성(南閭城)과 창해군(蒼海郡)을 하북성(河北省) 창주 市 일대로 보지만 일반적인 견해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BC128년의 사건을 요동 반도(遼東半島)와 관련된 내용으로 본다.
3대 북부여 단군 고해사 재위 44년인 BC126년에 위만이 창해군(蒼海郡)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위 내용은 출처가 불분명한 기록으로 『환단고기』에서 전하는 내용이 아니다. 위 내용은 위만조선(衛滿朝鮮)이 요동 반도(遼東半島)를 다시 점유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한편 BC126년에 위만조선(衛滿朝鮮)이 요하(遼河)의 동쪽 지방을 빼앗았다는 다른 주장도 전해지고 있는데 이것은 ‘위만이 창해군(蒼海郡)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는 것과 같은 기사 내용이라고 추정된다. 여기서 요하(遼河) 동쪽 지방이란 창해군(蒼海郡)을 뜻하고 창해군(蒼海郡)은 요동 반도(遼東半島)의 한 지역을 의미한다고 본다.
북부여(北扶餘)의 요동 반도(遼東半島)를 담당하는 제후인 남려(南閭)의 묵인하에 한나라는 북부여 땅인 요동 반도에 창해군(蒼海郡)을 설치하면서 위만조선(衛滿朝鮮)의 동쪽 지역을 압박하기에 이른다. 이에 큰 부담을 느낀 위만조선은 무력을 동원하여 요동 반도를 공격해서 그곳을 점령한다. 그 결과 요동 반도에서 창해군(蒼海郡)이란 한나라의 괴뢰(傀儡) 행정구역은 사라지게 된다.
BC126년에 한나라가 창해군(蒼海郡)을 혁파하였다고 중국 역사서에서 전하는데 위 내용을 기준으로 보자면 이는 혁파(革罷)가 아니고 위만조선에게 탈취(奪取)당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해석이라고 본다. 분명한 점은 창해군(蒼海郡) 설치가 위만조선과 한나라 간의 갈등으로 비화 되어 위만조선이 요동 반도를 공격해 다시 점령하게 되었으나 이곳은 한나라 땅이 아닌 북부여(北扶餘)의 영토였다는 점이다.
4대 북부여 단군 고우루 재위 원년인 신유(BC120)년에 임금께서 장수를 보내 우거(右渠)를 토벌하였으나 이로움은 없었다. 이에 고진(高辰)을 발탁하여 서압록(西鴨綠)을 지키게 하셨는데 고진이 병력을 늘리고 많은 성책을 설치하여 능히 우거의 침입을 대비하는 데 공을 세웠으므로 승진시켜 고구려후(高句麗侯)로 삼았다."
BC120년 고우루 단군께서 장수를 보내 위만조선(衛滿朝鮮)을 공격하였으나 소득이 없었다는 내용이다. 예컨대 북부여는 BC128년에 이르러 위만조선으로부터 요동 반도(遼東半島)를 60여 년 만에 되찾아왔으나 2년 후인 BC126년에 창해군(蒼海郡) 파동(波動)의 여파로 위만조선에게 요동 반도(遼東半島)를 다시 빼앗겼고 6년 후인 BC120년에 이르러 요동 반도(遼東半島)를 되찾기 위해 위만조선(衛滿朝鮮)을 공격하였으나 요동 반도(遼東半島)를 수복(收復)하는 데 실패하였다는 것이다.
요동 반도(遼東半島)를 사이에 두고 북부여(北扶餘)와 위만조선(衛滿朝鮮)이 남북(南北)으로 티격태격하는 상황을 연출하는 것으로 보아 영구(營口, Yingkou) 市와 대석교(大石橋, Dashiqiao) 市 사이를 계선(界線)으로 하여 북쪽의 북부여와 남쪽의 위만조선이라는 두 세력이 대치하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서압록(西鴨綠)을 요하(遼河)의 중상류 지역인 서요하(西遼河)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여기서 고진(高辰)이 지켰다는 서압록(西鴨綠)이란 지역은 영구(營口) 市 북쪽 20~30km 지점에 있는 대요하(大遼河)의 하류 지역으로 추정하는 것이 바람직한 해석이라고 본다.
한편 서압록(西鴨綠)이란 요하(遼河)를 뜻하므로 서요하(西遼河)도 서압록(西鴨綠)에 포함된다. 그리고 동압록(東鴨綠)은 압록강(鴨綠江)을 지칭한다고 한다. 참고로 고대에는 요하(遼河), 송화강(松花江), 흑룡강(黑龍江)도 압록(鴨綠)으로 불렸다고 한다.
고진(高辰)을 고구려후(高句麗侯)로 삼았다 함은 고우루 단군에게는 할아버지의 동생이 되는 고진(高辰)을 제후(諸侯)로 봉했다는 것이다. 참고로 고구려후(高句麗侯)는 고리군왕(槀離郡王) 으로 불린다고도 한다. 그런데 고진(高辰)이라는 인물이 BC192년과 BC120년에 72년의 긴 시차를 두고 함께 등장한다. 게다가 BC192년에 나오는 고진(高辰)과 BC120년에 나오는 고진(高辰)은 동명이인(同名異人)이 아니다.
BC192년에 나오는 고진(高辰)은 북부여(北扶餘) 1세 해모수 단군의 차남으로 묘사되어 있고 BC120년에 나오는 고진(高辰)은 북부여 2세인 모수리 단군의 아우라고 기록되어 있다. 같은 인물이 72년의 시차를 두고 등장하는 것이다. 『환단고기』 는 상식에서 벗어나는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이하에서 전하는 『환단고기』 의 기록은 모두 4대 북부여 단군 고우루 시기와 관련된 내용이다.
재위 3년인 계해(BC118)년에 우거의 도적 떼가 대거 침략해 들어오니 우리의 군대가 대패하여 해성(海城) 이북 50리의 땅이 전부 약탈당하고 점령되었다.
북부여(北扶餘)와 위만조선(衛滿朝鮮)이 영구(營口, Yingkou) 市와 대석교(大石橋, Dashiqiao) 市 사이를 계선(界線)으로 하여 북부여와 위만조선이 대치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위만조선이 기선제압 차 군대를 북상시켜 해성(海城) 이북 50리인 20km의 땅을 점령하였다는 것이다.
이 말은 위만조선이 해성(海城, Haicheng)은 물론이고 안산(鞍山, Anshan) 市 인근의 남쪽 지역까지 점령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참고로 위당 정인보는 고조선(古朝鮮)의 도읍지인 왕검성(王儉城)을 요동군의 험독(險瀆), 즉 요녕성(遼寧城)의 해성현(海城縣)으로 비정(比定)한 바 있는데 이곳이 바로 해성(海城) 市이다.
재위 4년인 갑자(BC117)년에 임금께서 장수를 보내어 해성(海城)을 공격했으나 석 달이 지나도록 함락하지 못하였다.
4대 북부여 고우루 단군께서 해성(海城) 일대를 탈환하려고 장수를 남쪽으로 보내 공격하도록 하였으나 석 달이 지나도록 해성(海城)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간의 내용을 요약해보면, BC128년에 북부여(北扶餘)는 60여 년 만에 위만조선으로부터 요동 반도를 탈환한다. 그러나 2년 후인 BC126년에 창해군(蒼海郡) 파동(波動)으로 인해 북부여는 요동 반도를 위만조선에게 다시 빼앗기게 된다.
BC120년에 이르러 북부여(北扶餘)는 요동 반도를 탈환하기 위해 장수를 보냈으나 요동 반도 탈환에 실패한다. BC118년에는 위만조선의 침략을 받아 북부여는 영구 市에서 안산 市에 이르는 해성(海城) 이북의 50리 땅을 위만조선에게 넘겨주게 된다. BC117년에 북부여는 빼앗긴 해성(海城)을 수복하기 위해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석 달이 지나도록 결실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재위 6년인 병인(BC115)년에 임금께서 친히 정예군 5,000을 거느리고 해성(海城)을 격파하고 계속 추격하여 살수(薩水)에 이르렀다. 이로써 구려하(九黎河) 동쪽이 모두 항복해 왔다.
구려하(九黎河) 동쪽이 북부여에 모두 항복해 왔다는 내용은 북부여(北扶餘)가 위만조선에게 빼앗긴 요동 반도(遼東半島)를 BC115년에 이르러 다시 찾아왔다는 것을 뜻한다. 살수(薩水)는 개평현(蓋平縣) 주남하(州男河)로 추정된다고 하는데 개평현은 오늘날 영구 市 남쪽에 있는 오늘날 개주(盖州, Gaizhou) 市를 말한다. 따라서 살수(薩水)는 개주(盖州) 市 일대에 흐르는 강으로 보아야 한다.
혹자는 살수(薩水)를 평안도(平安道)의 청천강(淸川江)으로 비정 하기도 하는데 이는 잘못된 해석이라고 본다. 참고로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이 612년에 수(隋)나라 대군을 물리쳤다는 살수대첩(薩水大捷) 역시 그 전장(戰場)은 평안도(平安道)의 청천강(淸川江)이 아니었다고 보는 게 오늘날 학계에서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살수대첩(薩水大捷)에서의 살수(薩水)를 개평현(蓋平縣) 주남하(州男河)로 추정할 수는 없으나 요녕성(遼寧省) 일대에 흐르던 하천이었다고 보는 것이 오늘날 학계의 대체적인 견해라고 한다.
한편 구려하(句麗河)는 오늘날 요하(遼河)를 뜻하는데 『환단고기』 에서 전하는 내용이 해성(海城, Haicheng) 市, 개주(盖州, Gaizhou) 市 일대와 관련되는 점으로 미루어 여기서 구려하(句麗河)는 요하(遼河)의 하류인 대요하(大遼河)를 뜻한다고 본다. 따라서 구려하(句麗河) 동쪽이란 대요하(大遼河) 의 동쪽을 의미하며 대요하(大遼河) 의 동쪽은 요동 반도(遼東半島) 를 뜻하게 된다. 이때부터 위만조선의 동변(東邊)은 멸망할 때까지 대요하(大遼河) 서쪽으로 유지되었다.
재위 7년인 정묘(BC114)년에 임금께서 좌원(坐原)에 목책(木柵)을 설치하고 남려(南閭)에 군대를 배치하여 뜻밖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환단고기』를 역주(譯註)한 종교인 안경전(安耕田)의 주석(註釋)에 따르면 좌원(坐原)이란 지명은 대릉하(大陵河) 상류에 있는 능원현(凌源縣)이 유력하다고 한다. 능원현은 오늘날 능원(凌源, Lingyuan) 市로 행정구역상으로는 요녕성(遼寧省) 조양(朝陽, Chaoyang) 市에 속하나 위치상으로는 하북성(河北省) 승덕(承德, Chengde) 市와 조양(朝陽) 市 중간에 있다.
북부여(北扶餘)가 구려하(句麗河)에서 서쪽으로 200km 이상 떨어져 있는 능원(凌源) 市 일대까지 진격하여 그곳에 목책(木柵)을 설치하였다는 것은 당시 상황에 부합되지 않는 이야기라고 본다. 게다가 안경전(安耕田)의 주석(註釋)에 따르면 남려(南閭)라는 지역이 하북성(河北省) 창주 市 일대라고 하였는데 이 역시 논리에 어긋나는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한편 좌원(坐原)이 태자하(太子河) 상류에 위치한다는 주장이 있다. 태자하(太子河)는 대요하(大遼河) 동쪽에서 서남쪽으로 흘러내려 가는 강으로 하류인 영구 市 일대에서 대요하(大遼河)와 만난다. 따라서 태자하(太子河)는 발해만(渤海灣)으로 직접 흘러 들어가는 강이 아니다. 태자하(太子河)의 상류는 오늘날 요양(遼陽, Liaoyang) 市와 그 동쪽 지역을 가리킨다. 따라서 좌원(坐原)은 요양(遼陽) 市 일대를 뜻할 수도 있고 요양(遼陽) 市의 동쪽 어딘가를 지칭할 수도 있다.
BC115년에 북부여(北扶餘)가 요하(遼河)의 동쪽 지역을 수복(收復)하였으므로 BC114년의 일인 좌원(坐原)의 목책(木柵) 설치는 북부여가 수복한 요하(遼河)의 동쪽 주변에 설치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본다. 오늘날 심양 市 일대로 여겨지는 평양(平壤)이라는 지역이 북부여(北扶餘)의 주된 요충지(要衝地)로 간주 된다고 할 수 있는데 북부여가 이 지역을 수호하기 위해 그 남쪽인 좌원(坐原)에 목책(木柵)을 설치하였다고 추정해볼 수 있다.
윤내현 교수는 고조선이 천도를 세 번 하였다고 주장하는데 마지막 도읍지인 심양 市 일대의 지명이 평양(平壤)이었다고 하며 평양(平壤)으로의 천도(遷都) 시기는 위만이 기자국(箕子國)을 찬탈한 BC194년 이후라고 추정한다. 이처럼 심양 시 일대는 BC2세기에 이르러선 고조선에게 무척 중요한 장소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심양 市 일대로 추정되는 평양(平壤)은 북부여의 중심지역으로 중부여(中夫餘)나 평양도(平陽道)의 치소(治所)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따라서 좌원(坐原)이 태자하(太子河) 상류 예컨대 요양(遼陽) 市에서부터 그 동쪽 어딘가에 있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는 내용이라고 본다.
그리고 남려(南閭)에 군대를 배치하였다 함은 요동 반도(遼東半島)에 군대를 주둔시켰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북부여가 요동 반도를 완전히 장악한 후에 그곳에 북부여의 남쪽을 담당하는 제후인 남려(南閭/南黎)를 두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남려(南閭)란 사람 이름을 뜻하지 않는다. 남려(南閭)란 북부여의 지역명(地域名)이 포함된 직책명(職責名)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북부여(北扶餘)의 방위체제(防衛體制)는 중앙은 단군(檀君)이, 동서남북은 4가(四加)가 각 1곳씩 맡아서 담당하였는데 북부여가 위만조선으로부터 요동 반도 지역을 빼앗기기 전까지는 남려(南閭)를 요동 반도 북쪽 어느 지점에 두었으나 위만조선으로부터 요동 반도 지역을 재탈환(再奪還)한 지 1년 후인 BC114년부터는 남려(南閭)를 요동 반도에 두고 창해군(蒼海郡) 파동(波動)이 재연(再演)되지 않도록 그곳에 군대를 주둔시켰다는 것이다.
재위 13년인 계유(BC108)년에 한(漢)나라 유철(劉撤)이 평나(平那)를 침범하여 우거(右渠)를 멸하더니 그곳에 4군(四郡)을 설치하였고 군대를 크게 일으켜 사방으로 쳐들어왔다. 이에 고두막한(高豆幕汗)이 구국의 의병을 일으켜 가는 곳마다 한나라의 침략군을 격파하였다. 이때 유민이 사방에서 호응하여 전쟁을 지원하니 군세를 크게 떨쳐 보답하였다.
위 내용은 한무제(漢武帝) 유철(劉撤)이 BC108년에 위만조선(衛滿朝鮮)을 정벌하여 멸하였다는 내용이다. 평나(平那)란 위만조선의 도읍지인 왕검성(王儉城)으로 오늘날 하북성(河北省) 창려현(昌黎縣) 일대를 말한다. 패수(浿水)를 대릉하(大陵河)로 규정할 경우 왕검성(王儉城)은 오늘날 요녕성(遼寧省) 금주 市 내에 있는 북진 市 일대가 된다.
한무제가 왕검성(王儉城)을 함락시킨 후 계속 동진(東進)하여 위만조선(衛滿朝鮮)의 영역 전체를 점령하고 그곳에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였다는 것이다. 이로써 한나라의 영역은 요하(遼河)의 서쪽에 이르게 되었으며 발해만(渤海灣) 연안(沿岸) 기준으로 보자면 대요하(大遼河)의 서쪽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천진 市 일대를 흐르는 조백하(潮白河)와 영정하(永定河), 당산 市와 진황도 市의 경계인 난하(滦河) 그리고 금주 市와 반금 市의 경계인 대릉하(大凌河) 유역도 이제는 한나라의 수중에 떨어지고 반금 市의 쌍태자하(雙太子河)에서부터 영구 市의 대요하(大遼河) 서부에 이르는 발해만(渤海灣) 연안(沿岸) 60km 일대도 한나라의 지역에 편입된 것이다. 이 말은 하북성(河北省) 전체와 요녕성(遼寧省)의 상당수가 한나라의 영역이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한무제(漢武帝)는 이것에 만족하지 않고 위만조선(衛滿朝鮮)의 영역 밖인 북부여의 영토도 침범하였고 이에 고두막한(高豆幕汗)이라는 인물이 의병(義兵)을 일으켜 유민의 지원을 받아 한나라의 침략군(侵略軍)을 격퇴해나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부터 전개되는 논의는 북부여와 한나라 간의 전쟁(戰爭) 관련 이야기가 된다.
『환단고기』의 내용을 근거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한나라가 위만조선(衛滿朝鮮)과 북부여(北扶餘)의 경계로 인식된 구려하(句麗河)를 넘어 동쪽으로 쳐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두막한(高豆幕汗)이 분연(奮然)히 일어나 구국 항쟁(救國抗爭)을 벌여나갔다는 것이다. 여기서 구려하(句麗河)는 오늘날 요하(遼河)의 중상류 지역이라고 추정된다.
BC108년 위만조선(衛滿朝鮮)이 멸망하던 바로 그 시점에 북부여(北扶餘)가 군대를 동원하여 요하(遼河) 넘어 서쪽으로 진군(進軍)해서 한나라와 대결을 벌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86년 전인 BC194년에 위만(衛滿)에게 빼앗긴 번조선(番朝鮮) 땅을 수복(收復)함은 물론 옛 번조선 땅을 침탈(侵奪)한 한나라의 침략군을 응징하여 패수(浿水)로 추정되는 조백하(潮白河)나 난하(灤河)의 서쪽으로 격퇴(擊退)시키는 방안을 추진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북부여에게 군대를 동원할 힘이 있었다면 그런 방안을 충분히 현실화(現實化)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당시에 북부여(北扶餘)가 한나라의 침략군(侵略軍)을 옛 번조선(番朝鮮)의 영토에서 내쫓을 수 있는 그런 힘을 갖고 있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요동 반도(遼東半島)를 사이에 두고 위만조선(衛滿朝鮮)과 대결 국면을 벌여온 북부여(北扶餘)는 그간의 전쟁으로 국력이 크게 소진(消盡)되어 있었다. 게다가 북부여의 국세(國勢)는 쇠퇴기(衰退期)에 접어들어 시들어가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시점에 서압록(西鴨綠) 출신인 고두막이라는 인물이 등장하여 한나라의 침략에 대항하면서 고두막은 북부여 백성들의 신망을 얻게 되었고 급기야는 4대 북부여 고우루 단군을 넘볼 정도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고두막이 고려말의 이성계(李成桂) 장군과 비슷한 상황의 반열(班列)에 올라 있었다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이처럼 자중지란(自中之亂)에 빠져있는 북부여로서는 한무제(漢武帝)의 위만조선 침략(侵略)과 정복(征服)을 남의 일인 양 수수방관(袖手傍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북부여가 자신의 영토를 침략당하지 않는 선에서 한나라의 동진(東進)을 용인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5대 북부여 단군 고두막 재위 3년인 을해(BC106)년에 동명왕 고두막이 스스로 장수가 되어 격문을 돌리니 이르는 곳마다 무적이었다. 한 달이 채 안 되어 군사가 5,000명에 이르렀다. 싸울 때마다 한나라 도적이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여도 스스로 무너졌다. 임금께서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구려하(句麗河)를 건너 계속 추격하여 요동 서안평(西安平)에 이르니 바로 옛 고리국(藁離國) 땅이다.
『환단고기』 에서는 BC108년에 한무제(漢武帝)가 위만조선(衛滿朝鮮)을 멸한 후 이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동진(東進)하여 북부여(北扶餘)를 침략했다는 식으로 묘사한다. 위만조선(衛滿朝鮮)의 멸망과 함께 북부여(北扶餘)와 한(漢)나라 간에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BC108년에 한나라 군대가 요하(遼河)를 넘어 동쪽으로 진군(進軍)해 들어왔으며 이 일대를 BC106년까지 2년간 점령한 것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한나라가 2년간 점령하였다는 요하(遼河) 동쪽이란 지역은 발해만이 있는 반금 市와 영구 市 일대가 아니고 보다 안쪽인 내륙(內陸)에 위치한 안산 市와 요양 時 일대라고 추정된다. 이처럼 북부여는 요하(遼河)의 동쪽 지역 중 내륙의 많은 부분을 한(漢)에게 점령당하였는데 한나라는 BC107년에 이르러 이곳에 현도군(玄菟郡)을 설치한다.
『환단고기』 에서는 BC106년에 이르러 동명왕(東明王) 고두막(高豆幕)이 구려하(句麗河)를 건너 한나라 군대를 추격하였다는 내용을 전하는데 이 말은 동명왕(東明王)이 한나라 군대를 구려하(句麗河) 바깥으로 쫓아냈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구려하(句麗河)란 심양 市 서쪽에 있는 요하(遼河) 중류 지역을 뜻한다고 본다. 그리고 북부여 군대가 한나라군을 추격하여 서안평(西安平)에 이르렀다고 한다.
서안평(西安平)의 위치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주류사학(主流史學)에서는 서안평의 위치를 압록강(鴨綠江) 바로 건너편인 단동 市 일대로 본다. 반면 『환단고기』 에서는 서안평(西安平)의 위치를 내몽골 임황(臨潢) 지역으로 본다. 오늘날 파림좌기(巴林左旗, 바린 좌기, Balin Zuo Qi)로 추정되는 곳이다. 파림좌기는 적봉(赤峰) 市 북쪽 150km 지점에 있다. 예전에 요(遼)나라의 도성이었던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가 바린 좌기에 있었다.
서안평(西安平)의 위치가 파림좌기(巴林左旗)라면 북부여(北扶餘)는 한나라 군대를 심양 市 서쪽에 있는 오늘날 요하(遼河)로 불리는 구려하(句麗河)의 서쪽으로 내쫓은 후 계속 추격하여 부신(阜新, Fuxin) 市를 거쳐 11시 방향으로 계속 북상하여 파림좌기(巴林左旗)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참고로 심양에서 파림좌기까지는 거리가 무려 400km 나 된다. 한나라 군대가 어떤 경로로 도주(逃走)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동선(動線)이 서북쪽인 내몽골 방향으로 도주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본다.
송화강의 북쪽 지역에 있었다고 알려진 고리국(藁離國)은 탁리국(橐離國), 색리국(索離國), 탁근국(卓斤國)이라고도 불리는 부여(扶餘)의 전신국가(前身國家)이다. 『환단고기』 에서는 고리국(藁離國)의 위치를 바이칼 호수(Lake Baikal) 부근에서부터 몽골 내부에 이르는 지역으로 규정한다. 부여를 건국한 동명왕(東明王)이 고리국 출신이라는 기록이 있고 백제(百濟) 또한 그 원류가 고리국(藁離國)에서 나왔다는 기록이 있다. 진수(陳壽, 233~ 297)의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 부여 편에서 고리국(高離國)이라고 하였다.
한나라 군대의 도주(逃走) 경로는 크게 2가지였다고 예상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내륙 지역을 통해 도주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연안 지역을 통해 도주하는 것이다. 내륙(內陸) 지역을 통한 한나라의 도주 경로는 구려하(句麗河) → 부신(阜新, Fuxin) → 조양(朝陽, Chaoyang) → 승덕(承德, Chengde)이 유력하며 연안(沿岸) 지역을 통한 한나라의 도주 경로는 구려하(句麗河) → 반금(撫順, Panjin) → 금주(朝陽, Jinzhou) → 호로도(承德, Huludao) → 진황도(秦皇島, Qinhuangdao)가 유력하였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글을 마치면서
이상의 내용이 북부여 시기(BC239~BC37)와 관련하여 『환단고기』 「북부여기」에서 전하는 북부여와 위만조선(BC194~BC108) 간의 무력충돌 그리고 북부여와 한나라(BC202~AD8) 간의 무력충돌에 관한 기록이다. BC221년부터 BC194년까지의 내용은 위만의 등장과 관련된 배경 이야기이고 BC194년부터 BC108년까지는 위만조선 시기에 위만조선과 북부여의 무력충돌의 내용이며 BC108년부터 BC106년까지는 북부여와 한나라의 무력충돌에 관한 내용이다.
『환단고기』에서는 위만(衛滿)의 집권기(執權期, BC194~BC161로 추정)와 관련하여 2개의 기사 내용을 전하는데 모두가 집권(執權) 초기인 BC193년과 BC192년에 관한 기사이다. 여기서 위만은 북부여(北扶餘)에 특별한 도발을 감행하지 않는 것으로 묘사한다.
2대 북부여 모수리 단군께서 BC193년에 평양(平壤)에 성책을 세워 도적 위만의 침략에 대비하게 하였고 BC192년에는 해성(海城)을 평양도(平壤道)에 부속시켜 고진(高辰)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는 게 내용의 전부이다. BC192년 이후의 기사 내용은 60여 년 후인 BC128년으로 넘어가므로 『환단고기』를 통해서는 BC191년부터 BC128년 사이에 위만이 북부여(北扶餘)에게 어떠한 도발을 감행하였는지를 알 수 없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BC193년 경에 즈음하여 위만은 번조선(番朝鮮)의 영토를 모두 접수함은 물론 북부여(北扶餘)의 남쪽 지역인 발해만(渤海灣) 연안(沿岸)을 공략하여 반금 市 일대인 쌍태자하(雙太子河)와 영구 市 일대인 대요하(大遼河)를 점령한 후 그 동쪽인 요동 반도(遼東半島)의 서해안(西海岸) 지역을 확보한 것으로 추정된다.
2대 북부여(北扶餘) 모수리 단군께서 오늘날 요녕성(遼寧省)의 요양(遼陽) 市나 심양(瀋陽) 市 일대로 추정되는 평양(平壤)이라는 곳에 성책을 쌓게 하였다는 점과 오늘날 해성(海城) 市인 해성(海城)을 지키도록 지시하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BC193년과 BC192년의 상황을 기록한 『환단고기』 기사는 북부여와 위만조선이 대요하(大遼河) 동쪽에서 남북(南北)으로 대치하고 있었다는 것을 가름케 한다.
예컨대 『환단고기』에서 묘사하는 북부여와 위만조선 간에 전장(戰場)의 흐름은 수당(隋唐)의 고구려(高句麗) 침공에서 나타난 바와 같은 동쪽으로의 진격(進擊)이 아니라 위만조선이 요동 반도(遼東半島)를 수중에 넣은 후 남쪽에서 북쪽으로 진격해 올라가는 형세였다. 따라서 북부여와 위만조선은 요하(遼河)라는 강을 경계로 동서(東西)로 마주하여 대치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환단고기』 기사에 의하면 위만조선(衛滿朝鮮)은 BC115년에 북부여(北扶餘)에게 대요하(大遼河)의 동쪽과 요동 반도(遼東半島)를 빼앗긴 후 나라가 망할 때까지 이 지역을 되찾아오지 못한다. 이 말은 위만조선의 동변(東邊)이 위만조선(衛滿朝鮮)이 멸망하는 BC108년까지 대요하(大遼河)의 서쪽으로 유지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정복하고 위만조선의 영역을 취했을 때 한나라의 동단(東端)은 위만조선이 멸망할 때의 동단(東端)이었던 대요하(大遼河)의 서안(西岸)까지가 된다. 윤내현 교수도 한나라의 동단(東端)을 요하(遼河)의 서쪽까지라고 보았다.
한나라의 동단(東端)이 대요하(大遼河)의 서안(西岸)까지란 뜻은 한나라가 요동 반도(遼東半島)를 취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환단고기』 기준에서 한나라가 취한 위만조선(衛滿朝鮮)의 영역은 하북성(河北省) 천진 市 북쪽 일대인 조백하(潮白河)에서부터 요녕성(遼寧省) 영구 市 일대인 대요하(大遼河)의 서쪽까지가 된다. 그리고 조백하(潮白河)에서부터 대요하(大遼河) 사이의 연안(沿岸)과 내륙(內陸) 지역에 한사군(漢四郡)이라고 불리는 한군현(漢郡縣)이 설치되게 된다.
『환단고기』 기준에서 요동 반도(遼東半島)라는 지역은 위만조선(衛滿朝鮮)의 멸망 후에도 여전히 북부여(北扶餘)의 영역에 속하므로 요동 반도에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될 수는 없다. 그런데 민족사학(民族史學) 계열에 속하는 역사가(歷史家)들 예컨대 최동환 역사평론가는 한사군(漢四郡) 중 일부가 요동 반도(遼東半島)의 서안(西岸)에 설치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견해는 한나라가 대요하(大遼河)의 동쪽으로까지 침범해 들어와 요동 반도의 서쪽까지를 점령하였다고 보는 시각이다. 예컨대 요동 반도(遼東半島) 중앙에 남북으로 길게 형성되어 있는 천산산맥(千山山脈)을 한나라와 북부여 간의 새로운 경계로 보는 것이다.
이상의 이야기는 『환단고기』 에 기록된 내용이다. 내용의 뜻풀이를 주해(註解) 또는 주석(註釋)이라고 하는데 이상의 내용은 가장 보수적(保守的)인 시각에서 접근하여 뜻풀이를 해본 것이다. 『환단고기』 에 기록된 내용을 급진적(急進的)으로 해석할 경우 북부여(北扶餘)와 위만조선(衛滿朝鮮) 그리고 북부여와 한나라 간의 전장(戰場)이 요하(遼河) 서쪽인 대릉하(大陵河)나 난하(灤河) 심지어 조백하(潮白河) 일대였다고 추정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전장(戰場)을 요하(遼河) 일대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본다.
이상의 이야기는 『환단고기』 에 근거한 내용이므로 논의의 바탕에는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가 그 근간(根幹)을 이룬다. 신채호의 삼조선론(三朝鮮論)처럼 『환단고기』 는 고조선(古朝鮮)을 3등 분하여 접근한다. 위만이 번조선(番朝鮮)을 침략해 멸망을 시켰어도 진조선(眞朝鮮)인 북부여(北扶餘)라는 왕조가 여전히 건재하므로 고조선(古朝鮮)은 계속 존재하는 것이다. 윤내현 교수도 위만조선(衛滿朝鮮)과 고조선(古朝鮮)이 시기적으로 병존(竝存)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정사(正史)에서는 고조선(古朝鮮)을 3등 분하여 접근하는 『환단고기』 의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 개념과 신채호의 삼조선론(三朝鮮論)을 인정하지 않는다. 정사(正史)에서는 번조선(= 불조선)과 막조선(= 말조선)이라는 정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의 조선(朝鮮)만 인정하므로 진조선(= 신조선) 하나만을 인정하는 셈이다. 따라서 정사(正史)에서 보는 진조선(= 신조선)은 단군조선(檀君朝鮮)을 뜻하거나 후조선(後朝鮮) 혹은 기자조선(箕子朝鮮) 내지는 기씨조선(箕氏朝鮮)을 의미하게 된다. 이처럼 정사(正史)에서는 하나의 조선(朝鮮)만 인정하므로 위만조선과 시기적으로 병존(竝存)하는 조선(朝鮮)이라는 정치 실체는 존재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환단고기』에서 위만조선 그리고 한나라와 대결 구도를 벌여왔던 북부여(北扶餘)라는 정치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고구려(高句麗) 혹은 고구려의 전신국가(前身國家)로 보아야 한다는 게 학계의 대체적인 중론(衆論)이다. 『삼국사기』「고구려 본기」끝에 수록된 사론에 “고구려는 진나라 한나라 이후부터 중국의 동북쪽 모서리에 끼어 있었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BC200년대에도 고구려(高句麗)란 나라가 이미 존재하였던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북한의 상고사(上古史) 인식도 한국의 주류사학(主流史學)과 마찬가지로 고조선을 3등 분하여 접근하지 않는다. 후조선(後朝鮮) 혹은 기씨조선(箕氏朝鮮)을 위만이 멸한 후 위만조선이 고조선(古朝鮮)을 대표한다고 보았다. 북한의 역사학자 리지린 이래 북한 학계의 공식 입장은 패수(浿水)를 대릉하(大陵河)로 규정하므로 위만조선의 서단(西端)은 대릉하(大陵河) 동쪽 지역이 되며 위만조선의 동단(東端)은 대체로 38선 이북의 한반도(韓半島) 동해안(東海岸)이 되고 도읍지인 왕검성(王儉城)은 대동강(大同江) 유역의 평양(平壤) 일대가 된다.
북한의 역사 학계는 『환단고기』에서 위만조선 그리고 한나라와 대결 구도를 벌여왔던 북부여(北扶餘)라는 정치 실체를 고구려(高句麗)로 규정한다. 북한의 공식 입장은 고구려(高句麗)의 건국(建國) 시점을 BC277년으로 본다.
한편 한국의 공식 입장인 주류사학(主流史學)에서는 위만조선 그리고 한나라와 대결 구도를 벌여왔던 북부여(北扶餘)라는 정치 실체에 대해 함구하므로 북부여(北扶餘)를 부인함은 물론 그것을 대신할만한 그 당시의 정치 집단을 인정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