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자 - <밤의 일기>
양귀자가 1985년 발표한 작품집 『귀머거리새』에 수록된 <밤의 일기>에는 당시 한국사회에 은밀하게 침투해있는 불안과 폭력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일상 속에서 교묘한 방식으로 또는 거림낌없는 방식으로 자행되는 폭력과 그러한 폭력에 무감각하고 회피하는 시민들의 무력감이 농밀하게 녹아있다. 폭력이 일상적인 얼굴로 등장하면 사람들의 대응방식은 ‘나만 아니면 괜찮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태도로 일관하지만, 그런 태도가 지배적일 때 폭력은 언제든 누구에게든 심각한 위협으로 흉폭함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밤의 일기>는 3개의 사건을 통하여 우리 사회의 불안을 조명한다. 하나는 아파트에 든 강도사건으로, 피해자는 소리쳐 강도침입을 알렸음에도 모두가 외면하였고, 더구나 어느 한 집은 도움을 청하는 사람 면전에서 아파트 현관문을 잠그기까지 한다. 일상의 폭력은 나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면 다만 회피의 대상일 뿐인 것이다. 강도가 떠난 후 모인 사람들에 대해 피해자는 분노한다. 공포와 위험의 연대가 아니라 거짓위로와 자신의 다행을 확인하는 시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중요한 사회학적 개념이었던 ‘방관자 효과’의 소설적 구현이라고 할 수 있다. 분노한 피해자는 결심한다. “내가 막 문을 두들기려던 209호였던가요. 안에서 살그머니 문을 잠그더라구요. 그 순간 깨달았지요. 내 딸을 지킬 사람은 이 세상에서 오직 나 하나 뿐이라는 걸.” 비극적 ‘각자도생’을 재확인하는 현장인 것이다.
두 번째 사건은 도시 지하도 야바위꾼에게 폭력을 당한 두 젊은 여성이야기이다. 야바위꾼들이 항위하는 여성들에게 폭력을 가했지만 아무도 그것을 제지하지 않은 채 바라보기만 한 것이다. 허황된 일에 참여한 여성들을 비난하면서 야바위꾼들의 폭력을 누구하나 막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공개된 현장에서 벌어진 폭력에 대해 대처할 방법을 상실한 시민들의 무력감을 상징한다. 비대칭적인 힘의 차이 속에서 야바위꾼들의 폭력이 자행되는 현장은 우리 사회의 폭력의 일상을 생생하게 재현하는 구조의 상징이다. 더구나 그 장소가 바로 옆 파출소가 위치한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쉽게 벌어진 것이다. 작가는 우리의 빈약한 정의로움에 대해 문제를 던진다. “사람들의 저 은밀한 심중에 도사리고 있는 정의로움에 대한 한계는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일까? 그것의 한계에 의해 또 하나의 폭력이 공공연히 묵인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세 번째 사건은 갑자가 실종되었다 심각한 몸의 상처를 안고 돌아온 교사의 이야기이다. 교사는 실종되었고 돌아왔지만 그에게는 심각한 후유증과 트라우마를 남기게 되었다. 단기적 기억상실과 몸 곳곳에 남아있는 폭력의 흔적이 그를 변모시킨 것이다. 평소 역사와 문학에 관심이 많던 교사는 실종 이후 ‘테러리즘’에 대한 책에 몰두한다. 그것은 자신의 겪은 폭력의 실체에 대한 집요한 추적작업이었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그가 실종된 이유는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알 수 있다. 그것은 대부분 국가의 비밀공작에 의한 감시활동에서 시작되었음을. 체제에 위협이 된다고 자의적으로 판단한 사람들에 대한 감시라는 점을. 그것은 숨겨져 있지만 지속되고 있는 거대한 국가의 감시망이라는 사실을.
교사의 삶은 절대적으로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 그의 상처는 ‘군살’로 상징화된다. “발바닥에 돋아나는 군살만 아니라면 성가시게 달라붙어 거치적거리는 그 흠집만 아니라면 남편은 그날의 일을 다 잊었어도 좋았다. 밤마다 쉽게 잠들지 못하고 깨어서 새벽을 기다리는 그의 모습을 볼 수밖에 없는 까닭은, 잘라내도 잘라내도 솟아오르는 저 군살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밤의 일기> 속에 나타난 세 개의 사건 속에서 드러난 한국사회의 불안과 폭력의 흔적은 결코 흐릿하지 않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그것을 겪은 사람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심각한 문제로 인식되지 못한다. 하지만 폭력과 불안의 전파성은 은밀하지만 지독한 전염력을 갖고 있다. 개인에 대한 폭력이 어떠한 저항도 없이 손쉽게 지속되게 되면 폭력의 범위와 강도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20세기 최대의 비극이라 평가되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의 시작도 시민들의 무관심 속에서 확대되고 강화되었다. 독일인들은 나만 아니라면 폭력의 심각성에 눈을 감았던 것이다. 소설 속 폭력도 역시 언제든 손쉽게 눈을 돌리고 회피할 수 있는 성격이었는지 모른다. 인간이 지닌 공포에 대한 두려움과 성가신 일에 엮이기 싫은 자연스런 감정들의 단순한 결합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작은 회피와 무관심 그리고 때론 무력감의 결합이 그 사회의 폭력을 증대시키는 것이다. 사회학적 개념인 ‘깨진 유리창’ 이론 또한 작은 흔적이 사회 전체를 파괴할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한다. <밤의 일기>는 거대한 국가적 폭력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 속에서 이웃에 대한 연대와 폭력에 대한 저항이 얼마나 무력해질 수 있는가를 경고한다. 나의 안전에 대한 집착만이 사회를 지배할 때, 내 이웃에게 가해졌던 폭력은 결국 나에게 닥칠 수밖에 없음을 냉정하게 보여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