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의 <삼포가는 길> & <객지>
황석영이 70년대 초반 발표한 작품 속에는 산업화와 도시화의 변동 속에서 혼돈스러워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비애와 좌절이 담겨있다. 그것은 새롭게 급변하는 사회적 질서와 구조에 무력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아픔에 대한 반영인 것이다. <삼포가는 길>은 ‘삼포’라는 곳으로 가는 사람들의 동행을 통해 과거와 현실의 극단적인 단절을 제시한다. ‘삼포’가 고향인 정씨의 추억처럼, 그곳은 “정말 아름다운 섬이오. 비옥한 땅은 남아 돌아가구. 고기두 얼마든지 잡을 수”는 장소였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고향은 상실되고 없었다. 평안하고 따뜻한 인상으로 남아있는 고향은 이제 없는 것이다. “말두 말우 거긴 지금 육지야. 바다에 망둑을 쌓아 놓구 추럭이 수십대 씩 돌을 실어 나른다구.” 고향을 향한 발걸음은 흔들린다. 삶의 방향을 잃어버린 사람의 내면은 공허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때에 기차가 도착했다. 정씨는 발걸음이 내끼지 않았다. 그는 마음의 정처를 방금 잃어버렸던 때문이다. 어느결에 정씨는 영달이와 똑같은 입장이 되어 버렸다.” 어쩌면 그들의 심정은 북미를 떠돌던 불법 이민자들의 정서가 담겨있는 티시 히노호사의 <Donde voy(어디로 갈거나)>와 유사할지 모른다.
간척지 공사로 사라져가는 고향은 어떤 모습일까? 황석영의 또다른 작품 <객지>는 간척지 현장의 노동자들을 다루고 있다. 바다를 메워 육지를 만드는 작업은 고향을 빼앗긴 사람들에게 일시적인 생계의 수단을 제공한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녹녹치 않은 환경 속에서 임금착취와 인권무시를 경험하는 비참함과 함께 이루어진다. 공사시행사는 결코 노동자들과 직접적으로 상대하지 않는다. 중간 관리자인 십장이나 감독을 내세워 그들을 통제하는 구조인 것이다. “회사측에서는 하급 노무자의 직접적인 접촉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 합숙소의 운영을 십장에게 넘겨버린 거요. 회사는 인부들의 상부계급인 감독과 그 밑의 십장들만 상대하면 되니까. 십장은 회사측과의 중개역인 서기들을 통해 작업량과 노임문제를 결정”하는 구조인 것이다. 그런 비정상적인 체계 속에서 노무자들의 임금은 줄어들고 갖가지 방법을 통해 그들의 임금까지 빼앗기고 있던 것이다.
회사와 중간관리자들의 횡포에 시달린 노동자들은 결국 집단적 쟁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특히 그들이 분노한 것은 회사로부터 관리의 권한을 받아 노동자들을 압박하고 폭력까지 자행하는 ‘감독’이라고 불리는 집단이었다. ‘호가호위’라 했듯이 권력의 추종자들은 권력 그 자체보다 더 혹독하고 잔인하게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는 법이었다. 이러한 문제들은 결국 간척지 공사에서 발생한 사고를 계기로 폭발하고 집단적인 쟁의에 돌입한다. 노동자들이 집단적 분노를 접한 회사측 소장은 이 문제에 대해 일시적인 봉합을 시도한다. 임금인상과 감독들의 교체, 노동시간 단축과 같은 조건을 내세우고 쟁의중단을 요구한 것이다. 이러한 제안에 솔깃해진 사람들과 그것이 결국 회유에 불과하며 쟁의가 중단되면 다시 원상태가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대립이 생긴다. 하지만 생존의 불안은 노동자들의 분열을 가져오고 소수를 제외한 대다수 사람들은 파업을 중단한다.
이 과정에서 소장의 이중성에 주목하고 싶다. 소장은 유화적 제안을 통해 사태를 마무리하려 한다. 그것은 현재 상황이 노동자에게 가혹한 노동조건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선과 변화를 약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내면에는 다른 계획이 자리잡고 있었다. 우선 파업을 중단시키고 주동자들을 분열시킨 후 각개격파의 방식으로 다른 이유를 들어 노동현장에서 쫓아내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던 것이다. 노동개선의 조건은 다른 이유를 들어 축소되고 곤혹스러운 노동은 지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표면적이나마 노동자에게 필요한 조건을 알고있음에도 은밀한 방식으로 노동자들을 압박하는 소장의 이중성은 그것을 허용하고 장려하는 사회적 조건과 그것을 용인하는 권력의 작용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소장의 이중성은 그 댓가로 회사측의 인정과 충분한 대우를 약속받을 것이다.
<객지>의 노동자들은 고향을 상실하고 떠도는 자들이다. 어쩔 수 없는 생존의 필요성 때문에 부당함에 제대로 항의하지 못한채 살아가는 사회적 약자들인 것이다. 그들은 어디를 가나 “물건은 비싸지, 품삯은 형편없이 싸잖은가. 촌에가 땅파나 공사판에 오나 피차 일반”인 방향을 잃은 존재들인 것이다. 그것은 나이든 사람일수록 더 큰 비애로 다가온다. “그는 목씨나 자기네처럼 늙은 자들은 부랑노동자가 최후에 만나게 될 표본과 같은 놈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자기네는 젊은 축들의 비양거리는 말처럼 전표벌레가 되어버린 것이다.” <삼포가는 길>의 정씨처럼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객지>의 공사판을 떠돌고 있는 것이다. 제대로 된 인간적 삶을 포기하고 생존에 매달린 채로 점점 비참한 삶으로 추락하는 것이다.
<삼포가는 길>과 <객지>에서 묘사한 한국사회의 발전은 밝음보다는 어둠과 탐욕이 지배하고 있다. 그들의 기억 속에 남겨진 따뜻한 고향의 기억은 이제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에덴의 기억“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의 삶은 과거로 갈 수 없다. 기억은 사실을 은폐하고 과장한다. 현실의 고통의 강도가 클수록 과거의 기억은 아름다움으로 왜곡되어서 나타날 뿐이다. 변화의 악영향 속에서도 변화를 회피할 수 없다면 그것은 새로운 마음으로 그것을 응시하고 변화된 방식으로 응대하여야 한다. <객지> 속 노동자들의 분열 속에서 젊은 주동자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비극적 상황 속에서도 인간의 삶은 지속되고 회복되어야 한다는 ’휴머니즘‘적 자세일 것이다. ”그는 자기의 결의가 헛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믿었으며, 거의 텅 비어버린 듯한 마음에 대하여 스스로 놀랐다. 알 수 없는 강렬한 희망이 어디선가 솟아올라 그를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동혁은 상대편 사람들과 동료인부들 모두에게 알려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