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1. 1979년 <오늘의 작가상>의 수상작으로 선정된 『사람의 아들』은 70년대 말에 발표된 인간의 본질적 가치를 추구하는 일련의 작품들 중 하나였다. 사회적 체계와 정치적 억압에 대한 비판이 자유롭지 못하던 시절, 억압받고 고통받았던 청춘의 고민들은 ‘자아’에 대한 성찰, 삶의 번뇌, 궁극적인 가치 등에 대한 관념적이고 종교적이며 철학적인 문제를 통해 표출되었다. <사람의 아들> 속, 치열하게 이상적인 신의 모습과 종교의 역할을 고민하는 삶의 형태는 러시아 혁명 당시에 발간된 <어떻게 살 것인가>와 같이 시대적 상황에서 최선의 인간적 삶은 무엇인가를 추구했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2. 한 사내의 살해 현장에서 시작하여 살인자를 추적하는 추리소설의 형태로 전개되는 <사람의 아들>의 핵심적인 내용은 크게 두 개의 병행되는 이야기를 통해 형성된다. 하나는 현실의 기독교에 실망하고 새로운 신과 민중의 삶과 일치된 종교적 활동을 추구하는 민요섭과 조동팔의 행적을 통해 이루어지며, 다른 하나는 두 사람의 종교적 이상을 기록한 노트 속 인물인 ‘아하스 페르츠’의 구도적 여행을 통해 만들어진다. 민요섭은 뛰어난 신학생이었지만 현실의 기독교가 보여주는 물질적 탐욕과 고통받은 민중에 대한 무관심에 분노하고 기존의 종교적 지도자들과 갈등을 겪으면서 새로운 종교적 삶을 추구하는 인물이다. 우연하게 민요섭을 만난 조동팔은 민요섭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자이자 추종자로서 민요섭보다도 더욱 극단적이고 실천적인 성품을 지닌 인물이다. 민요섭의 죽음으로 시작된 수사과정 속에서 두 사람의 행동과 관계가 하나씩 드러난다.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여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돕던 그들은 자금이 부족해지자 범죄적 행위까지 벌이면서 사회적 실천을 지속한다. 하지만 시간의 경과 속에서 그들이 추구하는 종교적 실천은 금전적 어려움 뿐 아니라 신앙적 가치에 대한 견해 차이가 발생하면서 점점 갈등상황에 빠지게 된다. 결국 신학교를 자퇴하면서까지 새로운 신을 찾았던 민요섭의 방황은 “이제 너는 신앙할 수 있다. 절망했으므로, 살 수 있다. 죽었으므로..”라는 말과 함께 다시 기독교로 귀의한다. 하지만 민요섭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조동팔은 결국 그러한 변신을 용납할 수 없었으며 그들이 함께 추구했던 신을 포기했던 민요섭을 용서할 수 없었기에 그를 살해하는 비극적 사태로 마무리되는 것이다.
3. 그렇다면 민요섭과 조동팔이 추구했던 신의 본질적인 모습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민요섭과 조동팔이 남긴 노트를 통해 추정할 수 있다. 민요섭의 노트에는 예수와 동시에 태어나 ‘신의 아들’로서 신의 말씀을 실현하려는 예수와는 달리, ‘사람의 아들’로 인간의 고통과 아픔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인간의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아픔을 해결하는 것을 종교의 가장 큰 의미로 생각하는 ‘아하스 페르츠’라는 인물의 종교적 구도여행이 전개된다. 아하스와 예수의 가장 큰 차이점은 어린 시절 그들에 대한 기록에서 극명하게 차이가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아하스 페르츠가 육신을 가진 인간의 비참과 불행을 구석구석 더듬고 있는 바로 그 시각, 야웨의 아들은 성전에서 이름난 제관들이며 율법사들과 말씀을 다투고 있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거기에는 확실히 어떤 섭리의 재제가 있었다.”
4. 유대교가 보여주는 가르침과 실천에 실망한 아하스는 새로운 신을 찾아서 구도여행을 떠난다.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히타이트, 가나안과 페니키아, 바빌론, 페르시아, 인도, 로마 등 신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서 신의 실체를 탐색하였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아하스는 그를 감동시키는 새로운 신을 만났기보다는 모든 신들의 한계와 허상을 확인했을 뿐이다. 그것은 인간의 공포와 원망에 기원한 신격화였으며 인간의 무력감이 반영된 절망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실망감은 아하스를 다시 유대땅으로 귀환하게 만든다. “돌아가자. 헛된 헤맴은 이것으로 넉넉하다. 이제는 자기 속으로 돌아가 침잠할 때이며, 새로운 개인을 기다려 실체로서의 신과 마주할 때이다. 내가 신을 찾아 떠날 때가 아니다. 신이 나를 찾아올 때이며, 신을 뒤쫒을 때가 아니라 마중할 때이다.”
5. 아하스의 절망과 구도는 민요섭의 삶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아하스가 부정했던 유대교의 허상과 종교적 지향점은 그것이 고통받고 있는 현재의 민중들의 삶에 영향을 주지 못하고 고통도 해결해주지 못한 채 민중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아하스의 관점은 예수의 만남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아하스는 예수의 전도 여행에 등장하면서 예수와 논쟁한다. 아하스는 종교적 메시아는 민중들에게 빵과 기적과 권세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하며 그들의 삶을 실제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예수는 빵보다는 말씀을, 기적보다는 믿음을, 권세보다는 희생을 강조하면서, 민중들에게 어떤 희망도 제시해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민중들에게는 책임과 신에 대한 헌신만을 강조하면서 그들을 절망에 빠지게 만든다고 비판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하스는 예수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당신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없다는 절망과 죄책감이 분노의 팔매가 되어 당신의 머리 위에 떨어지기 전에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주어진 것을 모조리 누릴 수 있게 해주시오.”
6. 아하스는 민중들에게 책임을 지우는 종교적 가르침을 부정한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의 깨달음 또한 과도하다고 다음과 같이 비판하는 것이다. “저 해탈이란 이름을 가진 욕구의 선택도, 천 개의 작은 욕망을 버렸으나 그 모든 것을 다 합친 것보다 더 큰 욕구를 얻었다. 해탈을 향해 따오르는 그 치열한 욕구는 어쩔 것이랴. 만개의 번뇌는 껐지만, 그걸 위해 타오르는, 하나지만 만 개를 합친 것보다도 더 세찬 번뇌의 불길은 어쩔 것이랴.” 민요섭 노트의 등장하는 아하스의 종교적 구도는 조동팔이 기록한 <쿠아란타리아서> 속 신의 모습과 연결된다. 그 속의 신은 유대교의 야훼와 함께 세상을 창조한 신이다. <쿠아란타리아서>에는 야훼의 배신으로 사탄으로 몰려 사라진 존재를 복원하고 있다. 복원한 신은 말한다. “원래 우리는 일체이며 동격이었고, 우리를 연결하는 원리도 저 태초의 존재를 혼돈이 아니라 한 완성으로 설 수 있게 한 그 조화와 질서였다. 지혜없는 선과 마찬가지로 선 없는 지혜가 어찌 온존할 수 있겠는가?”
7. 민요섭의 아하스와 조동팔의 지혜의 신에 대한 기록을 통해 두 사람이 고민하고 추구했던 새로운 종교적 이상의 틀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의 행위를 죄와 선으로 구분하며 억압하지 않으며 인간의 행동 그 자체를 인정할 뿐 아니라 인간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지혜와 선의 조화를 학습할 수 있고, 사랑과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존재인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신은 인간의 구체적 어려움에 실질적 도움을 주고 인간이 무한히 발전할 수 있도록 이성의 힘을 키워주는 것이다. 하지만 민요섭은 “선악의 관념이나 가치판단에서 유리된 행위, 징벌없는 악과 보상는 선도 마찬가지로 공허하다는” 이유로 기독교에 귀환했지만, 조동팔은 민요섭의 결정에 분노하고 그를 살해하면서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 시각 이전에나 이 시각 이후에나 영원히 살아있는 것은 우리의 신뿐이며, 설령 아무도 느끼지 못하더라도 그 고독한 신성은 언제나 당신들의 머리 위에서 빛날 것이오.”
8. 어쩌면 민요섭과 조동팔의 고뇌와 방황은 종교적 허무에 대한 잘못된 판단에서 시작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종교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그릇된 전제에서 출발한 허황된 결정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 세계를 지배하는 정치적, 경제적 권력의 힘에 대한 무지에서 파생하는 왜곡된 관점이었을 것이다. 종교가 약자와 고통받은 자들의 삶에 궁극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힘은 물질적 자원을 활용할 수 있는 권력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종교는 다만 무력한 존재들이 현실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없을 때 스스로를 위안하는 요소로만 작용할 수 있다. 마르크스가 말한대로 ‘아편’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종교적 실천을 통해 인간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환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어쩌면 그것은 70년대 말 낭만적이고 순수했던 삶의 이상이 살아있던 시기의 고민이었는지 모른다. 그렇기에 그들의 치열한 분투가 안타까우면서도 아름답다. 현존하는 것의 모순을 고발하고 성취할 수 없음에도 추구하는 인간의 가없는 도전이 때론 즉각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없을지라도 이상적인 것에 대한 감동을 받은 누군가에 의해 또다른 변화를 추동할 수 있는 힘으로 작동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실패했고 무모했고 왜곡된 수단을 활용한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이상적인 것’에 대한 탐색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