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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과 6.25전쟁

6.25전쟁시 보여 준 미 고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솔선수범) 사례들

작성자남인우(47)해운대|작성시간26.06.16|조회수0 목록 댓글 0

맥아더MacArthur더글라스 맥아더, Douglas MacArthur
요약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군 점령기에 전후의 일본을 통치했으며, 6·25전쟁 초기 유엔군 최고 사령관직을 맡아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했다. 1930년 육군 참모총장으로 발탁되면서 대장으로 승진했다. 필리핀에서 군 고문으로 근무하다가 1937년 12월 미육군 현역에서 은퇴했다. 1941년 7월 현역으로 소환된 맥아더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필리핀에서 일본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전투를 수행했다. 1945년 4월 태평양지역의 미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1945~51년에 일본 점령 연합군 사령관으로 재직하면서 일본군의 해산, 군국주의자 제거, 경제복구 등을 지휘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주한 유엔군 사령관으로 발탁되었다. 말년에 기업인으로 활동하다가 1964년 84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맥아더 장군 (MacArthur Manila)
개요
제2차 세계대전중에 남서태평양 전역(戰域) 사령관이었고, 연합군 점령기에 전후의 일본을 통치했으며, 6·25전쟁 초기의 9개월 동안 유엔군 총사령관직을 맡았다.
초기생애
맥아더는 후에 육군 고위장교가 된 아버지 아서 맥아더와 그에게 큰 영향을 끼친 야심적인 어머니 메리 하디 맥아더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903년 웨스트포인트의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10년 동안 부관과 하급부대 장교를 지내고 이어 4년을 일반참모로 복무했다. 1914년에는 멕시코의 베라크루스를 점령한 미군 부대에서 몇 달을 지냈다. 1917~19년에 제42사단의 참모진에 배속된 맥아더는 제1차 세계대전의 프랑스 전투작전과 뒤이은 라인 지구 점령군의 전투에 참여하면서 참모장·여단장·사단장 등으로 직책을 바꾸어가며 활약했다.
1920년대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재임하면서 광범위한 개혁을 실시했고, 윌리엄(빌리) 미첼의 군법회의에 참석했다. 필리핀에서 2차례 사령관직을 맡았으며, 미국의 2개 군단을 통솔했고, 1928년에는 미국 올림픽 위원회의 위원장직을 맡았다.
1918년 준장으로 진급하고 7년 후에 소장이 된 맥아더는 1930년 육군 참모총장으로 발탁되면서 대장으로 승진되었다. 군의 최고수뇌로서 그후 5년 동안 그가 주력한 사업은 대공황의 타격으로 약해져가는 미육군의 군사력을 보존하는 일이었다. 그가 1932년 중엽 정규군 부대를 워싱턴으로 보내 '노병 보너스 군대'(Bonus Army of veterans)를 축출하자 사방에서 비난이 쏟아졌다.
1935~41년에 필리핀의 군사고문과 육군 원수로서 자금의 부족을 무릅쓰고 필리핀 방위군을 조직하는 데 전력했다. 1937년 12월 미육군 현역에서 은퇴했다. 맥아더는 1922년 루이스 크롬웰 브룩스와 결혼했지만, 아이를 갖지 못한 이 결합은 7년 후 이혼으로 끝났다. 1937년 잔 페어클로스와 재혼했고, 이듬해 마닐라에서 외아들 아서를 얻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임무
1941년 7월 현역으로 소환된 맥아더는 12월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후 필리핀에서 일본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영웅적인 전투를 수행했다.
1942년 3월 남서태평양 전역 연합군 사령관직을 맡기 위해 오스트레일리아로 소환되었다.
그는 곧 뉴기니에서 공격을 개시해 1943년 1월 파푸아로부터 일본군을 몰아냈다.
1943~44년의 일련의 작전으로 맥아더군은 라에에서 샌사포어까지 뉴기니의 전략지점들을 장악하고, 애드미럴티 제도와 뉴브리튼 서부를 점령했다.
맥아더가 지휘하는 솔로몬 제도의 남태평양군은 일제히 북진해 라바울 시를 제압하고 많은 일본군 부대를 우회했다.
다음으로 타이완보다는 필리핀으로 진공해야 한다는 주장을 관철시킨 맥아더는 1944년 가을에 모로타이·레이테·민도로를 공격했다.
 레이테 작전이 시작되고서야 전폭적인 병참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이전의 계획들은 태평양함대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한 채 인원과 장비의 빈곤을 무릅쓰고 수행되었다.
맥아더는 태평양전쟁보다 유럽 전쟁을 우선시하고 자기가 담당한 남서태평양지역보다 중부태평양 전역을 우선시하는 상부의 결정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했다.
그가 가장 많은 희생을 치른 최대의 작전들은 1945년의 7개월간에 걸친 루손 전투에서 벌어졌다.
그해 봄에 그는 남부 필리핀과 보르네오의 재정복에 나서기도 했다.
그동안 뉴기니와 솔로몬 제도의 어려운 소탕작전은 오스트레일리아군에 일임했다.
그는 1944년 12월 육군 원수로 승진되고, 4개월 후 태평양지역의 미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45년 9월 2일 그는 도쿄 만[東京灣]에서 항복 조인식에 승전국의 대표로 참석했다.
1945~51년에 일본 점령 연합군 사령관으로 재직하면서 일본군의 해산, 군국주의자들의 제거, 경제복구, 자유주의 헌법의 기초(起草) 등을 독재적인 면은 있었으나 효과적으로 지휘했다.
또한 토지 재분배, 교육, 노동, 공중위생, 여성의 권리 등에서 상당한 개혁을 이루었다.
일본에 있는 동안 맥아더는 극동군 총사령관직도 맡았다.


6·25전쟁의 유엔군 사령관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맥아더는 즉시 주한 유엔군 사령관으로 발탁되었다.
부산 근방에서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한 후 9월에 대담한 인천 상륙작전을 감행하고 10월에 북한으로 진격했다.
북한군은 급속히 붕괴되어갔다. 하지만 11월 대규모의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 38선 이북에서 양단된 맥아더군은 서울 이남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2개월 후 맥아더가 지휘하는 부대들은 공세를 전환하여 북쪽으로 재진격했다.
1951년 4월 11일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이 상부의 명령을 거역하고 제한전을 수행하려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를 사령관직에서 해임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미국을 떠난 이래 처음으로 귀국한 맥아더는 처음에는 광범위한 국민적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해임에 관한 상원의 공개청문회가 있은 후 그 열광은 가라앉았다.
1944, 1948, 1952년에 공화당의 보수세력은 연이어 맥아더의 대통령후보 지명을 따기 위해 노력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맥아더는 1952년 레밍턴랜드사(社)의 이사회 회장직 제의를 수락했으며, 그후 회장의 직무를 보는 일 외에는 어쩌다 한번씩 공개석상에 나타날 뿐 뉴욕 시에서 은거생활을 보냈다.

그는 1964년 워싱턴 D. C.에서 타계하여 버지니아 주 노퍽에 묻혔다.
인격적인 면에서 맥아더는 불가사의했고 모순적이었다. 많은 사람에게 고압적이고 도도하며, 이기적이고 잘난체하는 사람으로 비추어졌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 특히 그의 사령부 직원들이 보기에는 다정하며 용기있고 가식이 없으며 겸손하기까지 한 사람이었다. 그가 우수한 지능과 보기 드문 통솔력을 갖추었고 의무·명예·조국을 위해 전력을 다하는 사람이었다는 점에는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동의한다.


맥아더 장군이 몇살 때 6.25 한국전에 참전했는지 아십니까?]

그는 1880년생입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그의 나이는 만으로 70세 였습니다.
그가 집무실 벽에 걸어놓고 즐겨 읽은 ‘청춘’이란 시를 옮겨 봅니다.

​"청 춘" /새무엘 울만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을 뜻하나니 ...
[출처] #맥아더장군이몇살때6ㆍ25한국전에참전했는지아십니까?#청춘#윤정선생의사람사이야기#인도네시아#사진작가MarinanTobing|작성자 평생학습장

 

[만물상] 워커 장군 75주기

안용현 논설위원 2025.12.22.

 

미 육사를 졸업한 월튼 워커(walker)는 1차 대전 때 기관총 중대장으로 지옥 같던 참호전에서 살아남았다. 2차 대전이 터지자 패튼 장군의 기갑부대 선봉장이 됐다. 패튼과 함께 독일 본토까지 진격했다. 워커의 부대는 진격 속도가 빨라 ‘유령 군단’으로 불렸다. 패튼은 워커에게 “내 군단 중 자네 부대가 가장 공격적”이라며 중장 계급장을 직접 달아줬다. 패튼이 1945년 12월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워커는 가슴을 쳤다.

▶6·25 발발 한 달여 만에 한국은 국토의 90%를 잃었다. 일본의 미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이 한국에 왔다. 미국이 한국 정부의 망명을 검토할 정도로 전세가 급박했다. 워커는 “지휘관은 어디서 싸울지를 결정해야 한다”는 패튼 말대로 최전선을 직접 둘러보고 낙동강에 최후 방어선을 쳤다. 사기가 바닥인 미군 앞에서 “버티거나 죽거나(Stand or die)”라고 했다. 국군에겐 “내가 미국인이지만 죽더라도 이 나라를 지킬 것”이라고 했다. 워커는 미친 듯 전선을 달리며 구멍을 막아냈다.

 

▶워커 전술은 ‘기동 방어’였다. 적은 병력으로 긴 전선을 막으려면 기동력이 중요했다. 호남을 휩쓸던 북한군 6사단에 마산이 뚫릴 뻔했지만 해병 여단을 긴급 투입해 불을 껐다. 공격으로 방어했다. 혈전이 벌어진 다부동 지역은 백선엽 장군의 한국군 1사단에 맡겼다. 최근 방한한 워커 장군 손자가 “할아버지와 백 장군은 아버지와 아들 같았다”고 했다. 워커가 낙동강에서 버티지 못했으면 맥아더의 인천 상륙도 없었고, 한국도 없었을 것이다.

▶미군은 전투화를 ‘전투 부츠(combat boots)’ ‘군용 부츠(military boots)’라고 한다. ‘워커’로 부르는 것은 한국군이 유일하다. 영어 ‘걷는 사람’에서 나온 콩글리시로 보이지만, 워커 장군과 관련 있다는 얘기도 있다. 전쟁 초 전투화 상자를 보고 한국 노무자가 ‘이거 이름이 뭐냐’고 했는데 미군이 책임자 이름을 묻는 줄 알고 ‘워커’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워커 부대는 낙동강을 건너 북진해 평양에 사령부를 차렸다. 중공군 개입만 없었으면 통일을 이뤘을 것이다.

▶워커 아들도 대위로 참전해 낙동강에서 싸웠다. 1950년 12월 워커 장군은 아들이 받은 훈장을 직접 달아주려고 군용차를 타고 의정부 쪽으로 달렸다. 그런데 국군 트럭과 충돌했다. 지금의 도봉역 부근이었다. 5년 전 패튼처럼 교통사고였다. 워커 장군이 묻힌 미 알링턴 국립묘지엔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라는 글이 적혀 있다. 오늘(23일)이 워커 장군 75주기다.

일러스트=김성규

 

☆ 워커 장군(1889-1950) ☆ < 그의 전사지를 찾아서 >
                   
1950년 8월 낙동강 전투 ! 사수냐, 죽음이냐 

금방이라도 한반도 전체를 집어삼킬 듯한 북한군의 공세 앞에 낙동강 방어선은 대한민국의 마지막 보루였다.
대한민국은 제주도나 서사모아의 어느 섬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이때 미 8군 사령관 워커(Walton Harris Walker) 장군은 '우리는 더 이상 물러설 수도 없고 이상 더 물러설 곳도 없다.'고
하며 낙동강을 성공적으로 방어하였다.

1950년 7월 29일 그가 예하 사단에 하달한 제 8군 사령부의 작전 명령 일부를 소개한다. 
"사수 아니면 죽음(stand or die)" ​
​"우리는 시간과 싸우고 있다. 더 이상 후퇴, 철수, 방어선 재조정은 없을 것이다. 더 이상 퇴각할 곳은 없다. . . 
부산으로의 후퇴는 역사에 남을 대학살이 될 것이다. 우리는 끝까지 싸워야 한다. . .
우리는 함께 싸울 것이다. 만약 우리 중 일부가 반드시 죽어야 한다면, 우리는 모두 함께 싸우다 죽을 것이다. 
나는 우리가 이 방어선을 지킬 것이라는 것을 모두가 이해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잊혀진 전쟁, 잊혀진 영웅에게 우리는 이제 기억해야 할 전쟁, 잊지 말아야 영웅이 워커 장군이다. 
그는 1912년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하고 세계 1차 대전 때 기관총대대 중대장으로 참전하여 은성훈장을 받았다. 
제 2차 세계대전 때는 조지 패튼 장군 휘하에서 군단장을 맡아 연합군의 선봉에 서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불법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하자 미8군 사령관으로 한국에 급파 되었다. 
그는 평소에는 조용한 성격이었으나 전장에 나서면 그의 애칭인 '불독'처럼 집념과 투지가 넘치는 군인이었다. 
지프와 경비행기로 최전방을 쉴 새 없이 누비던 그의 집념은 마침내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내게 된다. 

낙동강 방어선은 국가존망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구축한 대한민국 최후의 저지선이었다.
아군은 한때 영산, 다부동, 영천, 포항을 동시 돌파 당하는 백척간두의 위기를 맞기도 하였지만 45일간의 사투 끝에 북한군의 집요한 공격을 격퇴하였다.
그 결과 대한민국의 최대 위기를 극복하고, 맥아더 원수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때까지 시간을 버는 데에 성공함으로써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어 서울 수복을 거쳐 평양 탈환, 압록강까지 북진을 끝까지 지휘한 워커 사령관 !
공산주의 앞에서 불안과 공포에 떨던 대한민국에 희망을 안겨준 구국의 영웅 워커 장군 ! 

그러나 1950년 12월 23일 성탄절을 이틀 앞두고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다. 
워커 장군의 외아들 샘 워커 대위는 한국전 최전방의 소총 중대장으로 참전, 중공군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방어하였다. 
이 공로로 은성무공훈장을 받게 되었고, 워커 장군은 전방 시찰과 함께 이를 축하하기 위해 가던 중 지금의 서울 도봉동 596-5번지 현장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즉, 이날 오전 10시경 워커 장군 일행이 탑승한 두 대의 지프차가 의정부 근처에 있는 미 제9군단 예하 24사단 전투지휘소를 향해 이동하던 중이었다.
그때 한국군 제6사단 2연대 수송부 정비대 민간 수리공(문관) 박경례(27세,무면허)가 수리를 마친 닷치 쓰리쿼터(4/3톤)의 시험주행을 위해 트럭을 출발시키던 중, 마주오던 워커 중장과 부관, 운전병, 호위병 네 사람이 타고 있던 지프의 측면을 들이받아 지프가 균형을 잃고 전복되었다. 
워커는 앞유리창 밖으로 튕겨나가 땅바닥에 부딪치면서 즉사하고 말았다. 사고 운전자는 과실치사로 3년의 징역형을 받았다.

현재 1호선 도봉역 2번 출구 맞은편 아파트 대로변에 워커 장군전사지(戰死址)라는 초라한 표지석이 놓여 있다. 
그러나 지나가는 그 어느 누구도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실제로 사망한 장소인 도봉동 596-5 번지는 이곳에서 140여 미터 떨어진 이면 도로변 조그마한 2층 상가 건물이 위치하고 있다. 
위대한 전쟁 영웅의 전사지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평범하고 쓸쓸하다. 바로 옆에 두고도 늦게 찾은 나의 잘못을 꾸짖어본다. 

아버지의 유해는 의전부대에 맡기고 바로 전장으로 돌아가 싸우겠다는 아들 샘 워커에게 맥아더는 직접 알링턴 묘지에 가서 안장시키도록 명령했다. 
워커 장군은 대장으로 추서되었고, 아들 샘 워커 대위는 훗날 미군 역사상 최연소 대장이 되었다. 
아버지를 머나먼 한국 땅에서 잃고도 다시 전선으로 돌아가자고 했던 샘 워커, 참된 군인의 길을 보여준 아버지와 아들, 이들이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표상이다.

워커 장군이 아들과 함께 했던 6.25 전쟁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이름 붙인 곳도 많이  있다. 
서울 워커힐 호텔, 서울 워커힐 아파트, 캠프워커, 대구시 남구에 있는 주한 미군 육군 비행장 캠프 워커, 미국 육군이 워커 장군을 기리어 명명한, M41경전차 워커 불독, 6.25 전쟁 초기 미8군 사령부였던 워커하우스(부산부경대학교 내), 워커 장군 전사지 표지석(서울 도봉동) 등.
워커힐 호텔은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그 워커힐이 워커 장군이라는 군인을 기리어 지어진 명칭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워커는 맥아더와 비교하면 철저하게 잊혀진 인물이다. 

북한군의 화마로부터 대한민국을 구한 특급 소방수 워커 장군 ! 
인천상륙작전에 많은 병력이 동원되고 열세한 병력으로 한쪽이 터지면 다른 쪽의 병력을 빼서 틀어막는 전략을 쓰다보니 특급 소방수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그나마 방호산이 지휘하던 인민군 6사단이 마산 쪽으로 측면 기습을 시도하는 바람에 이 전략도 무너질 뻔했다. 
어렵고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2013년 10월 워커 장군의 손자인 월튼 워커 2세와 샘 워커 2세가 서울 광진구 워커힐 호텔에 위치한 할아버지의 추모비에 헌화했다. 
제1회 한미 동맹상 시상식에 할아버지를 대신한 손자들은 워커 장군을 기억하고자 애쓰는 한국인에게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6.25 전쟁 속에서 꽃피운 혈맹의 기억을 후세에 물려주기 위해 새긴 워커 장군의 추모비.
이들과 함께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켜낸 워커 장군 ! 
그 이름은  대한민국과 함께 영원히 빛날 것이다. 

        ※ 6.25. 70주년 호국 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2020.  6.    20.         無生 

                                            [출처] 워커 장군(1889-1950)|작성자 bum4703

 

워커 장군의 외아들인 24세의 샘 워커 대위

 

12026년 4월 14일 화요일 아침.

 

며칠 전, 하버드 박사 과정을 포기하고 한국 전쟁에 참전해 28세의 나이로 전사한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의 이야기를 썼다. 글이 나간 후 많은 분들이 "이런 분이 계신 줄 몰랐다", "너무 부끄럽고 감사하다"는 메시지를 보내주셨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 반응들이 내게는 조금 충격적이고 씁쓸하게 다가왔다. 우리가 매일 숨 쉬고 밥을 먹으며 당연하게 누리는 이 나라의 평범한 일상이, 실은 남의 나라 청년들의 찢어지는 피와 눈물 위에 세워진 기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철저하게 잊고 살았구나 싶어서 말이다.

 

그래서 오늘은 그 먹먹한 부채감을 조금이라도 덜어보고자, 교과서가 가르쳐주지 않았던 또 다른 기가 막힌 사연 하나를 더 써볼까 한다.

 

1950년 여름, 6.25 전쟁 초기.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 앞에서 대한민국은 멸망 직전이었다. 임시 수도 부산이 지척인 낙동강 방어선. 미 제8군 사령관 월튼 워커(Walton H. Walker) 중장은 후퇴를 입에 올리는 미군과 한국군 지휘관들을 모아놓고 권총을 빼들며 그 유명한 명령을 내린다.

"Stand or Die (버티거나, 아니면 죽어라)."

"우리가 여기서 밀리면 수백만의 한국인들이 바다로 쫓겨나 학살당할 것이다. 덩케르크는 없다. 더 이상의 후퇴는 없다."

그는 그 절망적인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며 기어이 대한민국의 숨통을 살려냈다.

우리가 아는 서울 워커힐(Walkerhill) 호텔의 이름이 바로 이 장군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것은 익히 알려진 유명한 일화다.

 

그런데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 있다. 당시 그 끔찍한 전장에는 8군 사령관인 아버지 워커 장군뿐만 아니라, 그의 외아들인 24세의 샘 워커(Sam S. Walker) 대위도 미 제24보병사단의 중대장으로 소총을 들고 최전선에서 함께 뒹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미국 최고의 장성이 자신의 귀한 외아들을 가장 위험한 사지로 밀어 넣은 것이다.

 

비극은 1950년 12월 23일에 찾아왔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황이 다시 악화되던 매서운 겨울, 전선을 시찰하러 이동하던 워커 장군의 짚차가 서울 도봉구 부근에서 한국군 트럭과 충돌해 전복되었다. '낙동강의 영웅' 워커 장군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도쿄에 있던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큰 충격에 빠졌다. 그는 최전방에서 중대장으로 전투를 지휘하고 있던 워커 장군의 아들, 샘 워커 대위에게 특별 지시를 내린다.

 

"부친의 유해를 모시고 당장 미국 본토로 귀환하라."

 

아버지가 전사했다. 장례를 치러야 한다. 최고 사령관이 직접 귀국을 명령했다. 그 어떤 누구도 이 24살의 청년 장교가 짐을 싸서 미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비난할 수 없었다. 그것은 너무나 합당하고,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완벽한 '명분'이었다.

 

하지만 얼어붙은 참호 속에서 아버지의 부고를 전해 들은 청년 장교는, 그 달콤하고도 합당한 생존의 동아줄을 단칼에 찢어버린다. 샘 워커 대위는 맥아더의 귀국 명령을 거부하며 이렇게 타전했다.

 

"나의 부하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목숨을 걸고 악전고투하고 있습니다. 중대장인 제가 어찌 부하들을 이곳에 버려두고, 나 혼자 살아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저는 남겠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차가운 관을 홀로 태평양 너머 알링턴 국립묘지로 돌려보냈다. 아버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는 대신, 그는 다시 수류탄을 챙기고 눈 덮인 전방의 참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버지는 타국의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죽음을 불사했고, 아들은 자기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아버지의 장례식마저 포기했다. 그들은 대한민국이라는 이름 모를 나라에 총과 대포만 보낸 것이 아니다. 미국 상류 사회의 가장 고결한 도덕과 핏값을 함께 보낸 것이다. 이것이 얄팍한 이념 장사꾼들이 틈만 나면 훼손하려 드는 '한미동맹'의 진짜 밑바닥에 흐르는 묵직한 본질이다.

 

화사한 봄꽃이 피어나는 출근길. 우리가 숨 쉬듯 당연하게 누리는 이 4월의 아침은 아버지의 관을 태운 비행기가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조용히 눈물을 훔치고 다시 총을 쥐었던 24세 이방인 청년의 그 거룩하고도 고독한 뒷모습 위에 세워진 기적이다.

 

위기가 닥치면 특권 뒤로 숨기 바쁜 비루한 시대에, 진짜 어른이 짊어져야 할 '책임'의 무게가 가슴을 서늘하게 짓누른다.

 

[기록]

"My men are fighting hard. I cannot leave them. I will stay here."

[해석]

내 부하들이 악전고투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떠날 수 없습니다. 저는 이곳에 남겠습니다.

-1950년 12월, 부친상으로 인한 귀국 명령을 거부하며 샘 워커 대위가 맥아더 장군에게 타전한 내용

ㅡ박 주 현

*** 6.25전쟁에 참가했던 우리 노병들은 지금도 그를 잊을수가 없습니다.


 

https://youtu.be/mY7lpEbelvo

[출처] 한국 전쟁의 숨겨진 영웅, 월튼 워커 장군|작성자 역사상식채널

 

6.25 때 아들을 전쟁터에 보낸 미국 거물 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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