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는 알다시피 예수님의 수제자입니다.
수제자답게 예수님께서 잡혀 결박당하셨을 때도 여타 제자들처럼
도망가지 않고 몰래 숨어서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예수님이 문책당하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머물며
예수님이 어떻게 되나 그 결과의 끝을 기다리고 있었을 때
세 사람이 베드로에게 시차를 두고 다가와 예수의 제자가 아니냐며
거의 확신하는 눈빛으로 추궁합니다.
베드로는 아니라고 부인하다가 결국,
자신은 예수님과 전혀 상관없다고 저주하며 증명하려 합니다.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마태복음 26장 74절)
이 상황에서 예수님을 입으로 시인하면
베드로는 곧 죽은 목숨이라 판단했기에 저주하면서까지
본능적으로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려 합니다.
그 후 닭이 울며 날이 밝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닭이 울기 전 세 번 나를 부인한다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말씀을 강력히 부인하며 자신은 결코,
예수님을 배신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다짐했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대로 닭이 울기 전 세 번 부인했음을 깨닫자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마음에 찔림이 와 대성통곡합니다.
이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을 뿐, 아직 거듭남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고
자기 의가 자신을 지배하는 일반적인 보통 사내였습니다.
베드로의 이런 모습을 보고 어떤 생각이 떠오르십니까...
베드로의 이런 모습이 평범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아니... 베드로는 우리의 일반적인 모습보다 더 나은 모습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잡힐까 두려워 도망쳤을 때,
베드로는 수제자답게 의리가 발동되어 끝까지 따라갔을 정도입니다.
우리는 베드로급도 안 되고
도망간 여타 다른 제자들과 동일하다는 게 맞는 표현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는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이미 예수님은 인간의 나약한 마음을 다 알고 계셨으며
이들의 미래를 다 보고 계셨으므로 측은하게
너희가 나를 부인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지금 이 현실에서...
이 시대의 교인들에게도 역시 똑같이 물어보면 백이면 백 모두
예수님을 결코, 부인하지 않는다고 강하게 맹세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러하듯 똑같이 행동했을 겁니다.
누구나 나에게 아무 해로운 일이 없을 때는 부담 없이 아주 간단하게
예수님을 시인하며 너무 사랑한다고 미사어구까지 곁들여 고백합니다.
그러나... 위기가 닥치면 180도 돌변하는 게 인간의 원래 모습입니다.
일제 강점기 때 입만 열면 예수님을 시인하고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목사님들과 신자들이 일제의 서슬퍼런 칼날 앞에 베드로처럼
굴복하여 예수님을 부인하고 신사참배에 참여했습니다.
신사참배 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예수님을 배신하고 부인한 것입니다.
입으로는 부인 안했다고 하면 부인 안 한 것일까요?
입보다 더 무겁고 책임 있는 것이 행동입니다.
이들은 행동으로 예수님을 강력히 부인했습니다.
그 당시 이렇게 목사와 신자들이 몸으로는 신사참배를 계속하면서
입으로는 예수님을 시인하고 사랑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얼마나 참담한 일입니까...
그래도 일제 강점기 때는 지금보다 영성이 더 좋을 때였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입술로는 시인하는 한편 행동으로는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지금 교인들을 상대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과연.. 나는 당당하게 그들의 칼날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할까요?
입으로 시인만 하면 구원받는다는데 과연 예수님을 배신할까요?
지금... 입으로 시인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분들이 있다면
이 시간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양심에게 물어보십시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진짜 솔직하고 양심적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문자적인 입술의 고백을 원하시는 게 아닙니다.
즉, 육의 입술이 아닌 영의 입술로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육의 입술로는 못하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육의 입술로는 하늘에 뜬 별이라도 따다 줄 수 있다고
누구나 고백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부인하던 베드로도 두려움 없이 예수님을 시인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오순절 다락방에서 성령으로 거듭나 육이 죽고 영이 살아납니다.
많은 군중을 대상으로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살아있는 말씀을 전합니다.
그 말씀을 듣고 군중들이 나는 어이할꼬 애통하며
강력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천직이 어부요, 배움이 짧아 요즘 말로 무지하던 베드로가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그들에게 엄청난 말씀을 뿜어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당시 기득권들의 눈 밖에 나 제사장 앞으로 끌려갑니다.
서슬 퍼런 그들 앞에서 또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아주 담대하게
강력한 말씀을 뿜어냅니다.
그들은 놀라워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사도행전 4장 13-14절)
무지했던 요한과 베드로를 바라보며 어찌 저 무지한 입에서
저런 엄청난 말씀이 쏟아져 나오는지 기이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배움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지식으로 해결하려던 그들에게
베드로의 이런 모습은 사회 보편적인 상식에서 벗어난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이한 일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미리 약속하신 바 있고 그대로 된 일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고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요한복음 14장 26절)
요한과 베드로는 성령을 받았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이들은 평소 지식이 없었으므로 바리새인들처럼
지식으로 증거한 것이 아닙니다.
순전히 성령의 능력으로 담대하게 말씀 전하고 행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믿음에서 나오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이 글에서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말씀이 나왔다는 것을
전하려는 것이 포인트가 아닙니다.
베드로가 성령을 받기 전후의 마음가짐을 전하려는 것입니다.
성령 받기 전에는 자신을 위협하는 사람들이 그토록 두려웠고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했으나 사실은 자신을 더욱 사랑했기에
자기 목숨을 위하여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았을 때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을 입었습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 앞에서도 전혀 기죽지 않고
예수님을 시인하고 전했던 것입니다.
돌에 맞아 죽는 걸 두려워 아니하고 담대하게 그들 앞에 우뚝 섯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하지 않으면 결코
일어나지 않을 상황입니다.
이는 그가 담대해서가 아니라, 베드로 안의 성령님께서 담대하게
만들어 주셨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밖으로 드러나는 진정한 믿음의 실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입술로 시인하는 것은
그저 평온할 때 인간의 감정에 의지하여 육의 입술로 시인하는 것으로
영적인 시인이 아닌, 혼적인 감정의 시인일 뿐입니다.
지금 교회에서 입으로 간단히 시인하면 그게 믿음이고,
거듭남이고, 구원받는다고 가르치고 또 그렇게 따르는 실정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로마서 10장 9-10절)
위 말씀을 너무 간단하게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발생하는 오류입니다.
위 말씀에서 의에 이른다는 구절을 유심히 살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의에 이른다는 말씀이 무슨 말입니까...
사람은 의로운 자가 단 한 명도 없는데도 의에 이르러야 한다고 합니다.
의에 이러러야 구원받는다고 합니다.
의에 이른 후 입술로 시인해야 한다고 합니다.
다음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로마서 3장 10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거듭남)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거듭남)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장 17절)
사람으로서는 의로운 자가 없기에 성령님과 인격적으로 접붙임 당해야
의롭게 된다는 뜻입니다.
회개=자기 부인=성령으로 거듭남=믿음=의롭게 됨
이것은 글만 다를 뿐 동시다발로 일어나는 똑같은 의미의 단어입니다.
자기 부인이 곧 회개이고 그게 곧 성령으로 거듭남이고
성령으로 거듭났기에 사람이 성령으로 의롭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영이시며 곧 의로운 하나님이시기에
의로운 성령님을 받으면 내가 의롭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아 의롭게 되어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즉, 성령으로 거듭나야 구원받는다는 확증의 고백이자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장 3절)
이렇듯 의에 이른다는 말씀을 간단히 넘길 문제가 절대 아닙니다.
그런데 아주 너무나도 간단히 의에 이른다는 말씀의 본질을 가르치지 않고
육의 입술로 시인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많은 교인들을
인위적으로 이미 거듭난 교인이요, 구원받은 천국 백성으로 만들고
더는 거듭남을 가르치지 않으며 부질없이 구원을 확신하게 만들어
순진한 교인들을 멸망의 길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란 성경 속의 말씀은 분명히 성령으로 거듭난
초대교회 성도들을 상대로 하여 더욱 담대히 믿음의 길을 가면서
구원을 확신하라는 말씀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입술로...
이렇게 간단하게 시인한 교인들이 과연
거듭나기 전 제사장의 뜰에서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의 상황이나,
일제 강점기 때처럼 칼날을 들이대고 신사참배 하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입술로 시인하면 다 죽인다고 했어도 과연 그들 앞에서
간단히 입술로 또박또박 예수님을 시인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지나친 비약일까요?
이천 년 전...
예수님을 사랑하고 시인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또한, 사실 입으로 시인하다 많이 죽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예수님을 입술로 시인하는 것과 지금 평화의 시대에
아무 부담감 없이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을 동일시하면 안 됩니다.
초대교회 당시는 성령을 받아 담대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함부로
입술을 열어 예수님을 시인하는 고백을 할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그 당시는, 예수님이 이단으로 몰려 그분을 추종하던 많은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에게 잡혀가서 돌에 맞아 죽던 시대였습니다.
스데반 집사님도 담대하게 예수님을 시인하다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바울 사도 역시 사울이었을 때 예수님 추종자들을 잡아드리는
행동대장이었으나, 성령을 받고 오히려 바리새인들의 원수가 되어
시시때때로 목숨이 노려지는 신세로 전락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처럼 성령을 받지 않으면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이고,
또한 베드로처럼 성령을 받으면 담대하게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후 거듭난 베드로의 담대한 고백...
그것이 바로 의에 이르러서 입술로 시인한다는 말씀의 진실입니다.
거듭남과 구원은 매우 중요하기에 정확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수많은 교인들이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에 속아 밑도 끝도 없이
구원을 확신하며 지옥으로 가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지 않으면 그 누구도 의에 이를 수 없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령의 열매인 표징이 이론만이 아닌 삶으로
반드시 나타납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에스겔 36장 26-27절)
의에 이른다는 뜻을 바르게 가르치지 않고 뜬구름 잡듯 두리뭉실
육의 입술로 시인만 하면 거듭남이고 구원받았다고 가르치는 선생들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무서운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마가복음 7장 6-7절)
가르치는 선생이 성령으로 거듭났다면 절대 그렇게 가르칠 리 없습니다.
거듭남이 없으니 자신도 모르고 또 여태 그의 선생으로부터 유전된
지식에 의존하여 그리 배웠기에 자신도 대를 이어가며
그리 가르치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고 있는 참담한 실정입니다.
거듭난 선생이라면 무엇보다 먼저 진정한 거듭남을 가르쳤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듭남이 영적인 믿음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잘못 가르치는 목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마태복음 23장 15절)
이렇듯 예수님을 단순히 입으로 시인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말씀을
두리뭉실 가르치거나 알지 말고, 본질을 확실히 파악한 후
그 의미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 의미를 어정쩡하게 넘어가면 수많은 사람이 이를 오해하게 되고,
성경적이고 본질적인 시인의 의미를 모른 채 평생 잘못된 지식으로
신앙생활 하는 무서운 현상이 생기는 것입니다.
저 역시 예전에 성령으로 거듭남도 없이 단순한 입술의 고백으로
구원받는 줄 알았고 그게 믿음인 줄 알았습니다.
이러다 갑작스런 병이나 교통사고로 죽어도 구원받는 줄 알았습니다.
그때 제가 죽었다면 저는 무조건 지옥행을 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지금까지 살아있음으로 말미암아
진리를 알게 해주신 주님의 은혜에 너무나 감사할 뿐입니다.
지금 우리는, 거듭나기 전 베드로의 육신적 입술의 고백입니까...
아니면... 성령으로 거듭난 뒤 의에 이른 후의 영의 고백입니까...
주님은 지금도 여러분께 영의 고백을 듣고 싶어 하십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후, 영이 의롭게 되어 영의 입술로 주님을 시인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권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