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에서의 선악과 사건은 지금 이 시대에서도 진행형입니다
에덴 동편에 동산을 창설하신 하나님은 흙으로 지은 아담에게 동산 중앙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는다고 하셨고요. 이 말씀을 하셨을 때는 아직 여자가 지음받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하와가 아담의 갈빗대로 지음을 받은 다음에 여자가 들은 것은 뱀의 말이었습니다.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 하나님처럼 돼 선악을 분별할 줄 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크게 두가지 차이점을 볼 수 있는데 바로 아담이 들었던 먹지 말라와 뱀이 가르쳐준 먹으라의 차이였습니다. 오늘날 이런 두 부류의 사람들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한 부류는 남자(아담)이며 다른 부류는 여자(하와)입니다. 남자는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먹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고 또 다른 한 부류는 스스로 먹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먹는다는 그 먹음은 어떤 것을 먹음을 말하고 있을까요? 바로 성경은 그 먹음의 대상이 식물(음식)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사람이 먹는 그 식물(음식)을 비유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먹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 식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4:20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사람이 먹는 음식물에 대하여 깨끗하고 부정한 것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그 식물은 바로 말씀을 먹음인데 그 말씀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정하게 먹음과 부정하게 먹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광야 40년의 생활에서 백성들에게 식물을 주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만나와 메추라기 등이었습니다. 식물을 먹음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먹느냐의 차이인데 정하게 먹음은 먼저 못먹는다로 가르치신 후에 먹여주셔서 먹는 먹음과 두 번째는 먹지 말라고 한 금령을 어기고 스스로 따먹는 내가 먹음의 차이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에게 말씀을 먹여주심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실까요? 바로 아들이라는 자를 통로로 삼고 먹여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은 아들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아들이 신약성경에서 살려주는 영으로 온 아들인 예수였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45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렇다면 하와가 먹은 그 먹음은 어떤 먹음이었을까요? 바로 들은 것으로 먹는 그런 신앙이었습니다. 뱀에게 가르침을 받아서 먹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와가 먹은 것은 실상 먹지 못하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먹지 못하였다는 것일까요?
바로 생명과를 먹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담(하와)이 에덴에서 쫓겨난 이유가 명시돼 있는데 그것이 바로 생명과를 먹고 영생할까 싶어서 하나님께서 에덴에서 쫓아내었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와가 먹은 것은 무엇을 먹었다는 말일까요? 말씀을 먹으면 영생한다는 본인 스스로의 생각을 말하는 것입니다.
창3;22-23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이 에덴 추방사건에서 볼 수 있는 바는 여자가 먹는 그 선악과는 생명나무 실과를 못먹었다를 가르칠려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교인들이 성경을 통해서 영생을 얻기 위하여 힘쓰고 애쓰는 것이 바로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에덴 동산으로부터 추방된 첫아담(하와)은 스스로 먹은 선악과가 제대로 된 생명과를 먹은 것이 아니기에 반드시 하나님의 보내신 자(아들)를 통해서 먹음을 당해야 만이 제대로 된 생명과를 먹는다는 말인 것입니다.
말씀은 내가 봐서 이해하고 깨달았다고 해서 생명과를 먹은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스스로 먹은 증거들이 신약에서 나오는데 바로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왔음에도 예수님은 제쳐두고 성경에서 영생을 얻기 위해 성경을 연구했던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영접하고 그 안에 속하여 예수의 가르치는 말씀을 먹어야 함에도 자기들이 이해한 것으로 영생을 얻을려고 하는 하와의 신앙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 유대인들의 모습이 오늘날도 동일하게 그 성경을 알면 영생이라고 생각하는 그 이해로 사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생명과를 먹지 못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어느 시대나를 막론하고 한 사람을 사사로 선지자로 예수로 천사로 세워서 말씀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보내신 자의 일러주는 말로 사는 것이 제대로 된 생명과를 먹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제자들에게 먹여주는 생명과가 일러주는 말이었습니다.
요한복음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육신은 무익하다고 합니다. 바로 이 육은 육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와의 생각으로 사는 모든 사람들이 이 육으로 사는 자들인데 바로 성경에서 영생을 얻을려고 성경을 공부해봐야 그것으로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보내신 자 즉, 아들, 예수, 천사로 일러주는 말로 살아지면 그것이 생명과를 먹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일러주는 말이 바로 생명 즉, 생명과를 먹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수 없는 교회 수 없는 목사님들이 말씀을 전하고 있지만 모두가 자기가 본 생각(하와의 들음)으로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목사님들을 부정해서 죄송하지만 예수님 때에도 마찬가지로 수많은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성경으로 영생 얻을려고 하였던 것과 비교하면 거기서 거기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런 사실을 말해도 아예 들을려고 하지도 않고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을 이단으로 매도해 버리고 있지요.
디모데후서 4: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선악과인 말씀(성경)을 자기 스스로 먹고 있으면서 이미 천국 천국은 따놓은 당상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스스로 먹은 것으로(자기의 옳다하는 것) 천국 간다고 하고 있지 않습니다. 반드시 예수라는 직분을 갖고 보내지는 그 사람을 통하여서 만이 천국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고 하였지요.
이런 말을 하니 또 이천년 전의 그 예수님을 믿어서 간다고들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천년 전의 예수님은 이천년 당시에 하나님의 보내신 자였지 지금 이 시대에 보내진 하나님의 사자가 아닙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오른쪽과 왼편으로 나눠지는 근거가 바로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냉수 한그릇 대접한 자들이 양들 편에 서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언제 우리가 이천년 전의 그 예수님에게 냉수 한그릇 대접한 적이 있나요? 아니라니까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그 예수님을 우리는 이 땅에서 또다른 예수로 보내지는 누군가를 만나야 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정한 이치이고 그 후에 심판이 있다고 합니다. 이천년 전의 그 예수님이 한번 죽어 부활했던 분이 왜 또 이 땅에 와서 죽을 이유가 있을까요? 모든 사람은 한번 죽음입니다. 그 죽음 후에는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를 보낸다는 것은 이천년 전의 그 예수를 보낸다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또 다른 예수가 보내진다는 말입니다.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다시 온다는 그 예수는 이천년 전의 그 예수가 보내진다는 것이 아니고 제자들이 예수가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심령상태가 어린 제자들도 장성한 자들이 되면 예수와 같은 자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장성하여 예수가 되는 그 때가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다시 오는 예수들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6:40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분명하게 제자들이 온전케 되면 그 선생 예수와 같게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절대로 이천년 전의 그 예수님이 다시 온다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라는 한알의 밀알이 죽어야 많은 열매(제자들=예수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예수가 오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기다리고 있는 그 이천년 전의 예수는 영원히 오지를 않습니다. 구원의 때는 지금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천년 전의 그 때가 아니라 지금입니다.
고린도후서 6: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안식에 들어갈 날은 남아 있는 것이지 이미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그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미 얻은 구원은 없습니다.
히브리서 4: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출처; 네이버카페 생명의 만나 남용모 목사
유튜브 남용모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