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단 한 순간도 내가 아닌 적이 없었으나 무엇 하나 잡아 둔 것도 없다는 사실을 불현 듯 깨달을 때가 있다. 그렇다 보니 나라는 我相은 지독하게 굳혀진 반면 주위 사물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를 보아도 그렇다. 인생활동기인 직장생활동안 이 아파트는 그저 숙식이 제공되는 보금자리이자 깔고 앉은 재산목록으로만 알고 있을 뿐 이 장소가 내게 무엇을 선사하고 있는지는 알려고도 않았다
그러다 은퇴후 아파트단지가 시간을 때우는 주 공간으로 바뀌면서 그동안 몰랐던 자연의 속삭임들이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물론 이렇게 된 것도 인연이 작용하여야겠지만 내게는 늙은 리트리버와 함께 하는 아침저녁의 산책시간이 그 인연줄이었다. 작은 아들이 일년 남짓 양육을 맡겨둔 반려견 모모다
모모는 밀양의 한 농가에서 생후 석달 째에 입양한 수컷이다. 어릴 적 들판에서 뛰놀던 잠재의식의 발로인지 12살 넘은 고령의 나이에도 유난히 풀냄새 맡기를 좋아한다. 처음엔 무심코 지나쳤다가 녀석이 꽃이 달린 풀무더기에 특히 집착하는 걸 알아챘다
자연스레 나의 눈길 또한 그 풀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다. 콩알 크기의 꽃들이 다발로 뭉쳐 앙증맞은 느낌이 들긴 하였지만 그저 이름모를 야생화 종류이겠거니 하였다가 정작 아는 바가 하나도 없음에 문득 난 대체 이 세상에 대해 아는 게 얼마나 되나란 후회섞인 자각이 들었다
해서 여태 해본 적이 없던 작업을 시도하였다. 사진을 찍어 AI에게 물어보리란 결심이다. 설마 인공지능이 사진만으로 식물들의 정체까지 알 수 있을까란 의구심으로 무장한 채~. 그런데 놀랍다. 제미나이에 사진을 올렸더니 이름은 물론이거니와 학명과 섭취가능여부, 꽃말에다 생태학적 특징까지 알고 싶은 모든 정보를 망라해준다
첫 번 째 시도부터 충격을 준다. 이름이 큰개불알꽃이다. 작지만 참으로 귀여운 꽃무리의 이름에 웬 개불알이 들어갔을까 의구심이 증폭돼 좀 더 세밀하게 물었더니 꽃이 지고난 후 맺히는 열매가 꼭 개불알을 닮아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설명이다
꽃이 작은데 큰 개가 붙은 이유를 물었더니 이보다 작은 꽃무리의 야생화에 작은개불알풀도 있다는 추가설명에 머리가 환해진다. 1930년대 일본인 식물학자의 작명이라는데 꽃 자체의 아름다움을 넘어 생태적 본질을 통한 작명인 것 같다. 조금 더 파고 들어가 보니 쥐불알풀도 있어 야생화의 세계 또한 점입가경이다
이를 시발점으로 시나브로 단지내 혹은 주위 산책길에서 마주치는 야생화나 식물들에 관심을 가지고 촬영과 AI검색의 분석루틴을 밟기 시작하였다. 꽃과 풀뿐만 아니라 나무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 과정에서, 들은 상식만으로 알고 있다 믿었던 오동나무의 실체도 파악하게 되었다
청사포를 조망하는 다리곁에는 20미터가 넘는 대형 활엽수가 한 그루 있는데 평상시 이름도 모른 채 무심코 지나쳤으나 알고보니 이 大物이 바로 오동나무였던 것이다. 나무에 피어있는 보라색 초롱꽃 뭉치들이 예뻐 확인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알게된 상황이다. 더해서 평소 봉황 운운하던 벽오동은 오동나무와는 사촌지간도 아니라는 점과 길이 8미터가 넘어야 교목(喬木)이라 이름하고 아니면 관목이란 지식도 챙겼다
시장에서 국거리로 사 무심코 끓여 먹었던 머위(머구)가 실은 아파트 단지 곳곳에 흐드러지게 군락을 이루고 있음을 이제는 안다. 잎이 뽀족해 침엽수임은 알겠으나 이름은 몰랐던 나무가 눈주목이었는데 눈자가 왜 붙었나 물어보니 기어서 눕듯이 옆으로 자라는 특성 때문이란다. 주목은 원래 엄청 키가 크는 교목이나 눈주목은 옆으로 풍성하게 퍼지는 특성 때문에 아파트단지 조경수로 자주 선택된다는 설명이다. 이같은 경우로 눈향나무도 있고 눈측백도 있으며 눈주름잎도 있단다
이런 식으로 아파트단지 안팎 식물들의 주민등록부엔 내가 찾아낸 이름들이 느린 템포로 차곡차곡 쌓여갔다. 황금측백나무, 광나무, 명주나무, 샨스타데이지, 광대나물, 보라사랑초, 얼룩자주달개비, 잔개자리 등등
대개 세상을 산다는 건 목표를 세운 뒤 실행하고 넘어지고 극복하고 판단하고 이루어내는 시스템 전부를 아우르는 과정이라 본다. 이같은 일반적 시각으로 본다면 요즘 나의 이 사소한 행위는 돈이 되기는 커녕 보람찬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한가지 좋은 점은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난 요즘 이렇게 식물들 이름을 알아내 마주칠 때마다 속으로 그 이름 불러주며 친한 체를 한다. 세상사는 방식을 자연에 안겨드는 길로 바꾸어 보는 것이다
老子 어르신은 ‘이름을 이름지운다 해서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名可名 非常名)’라 선언하셨다. 까마득한 후학의 어줍잖은 행위가 쓰잘떼기없는 짓임을 일찌감치 훈계하심인데 그럼에도 이름으로부터 시작해 볼 작정이다. 사랑하는 이도 처음엔 이름으로 부르다가 사랑이 무르익을 즈음엔 이름마저 필요없는 절대 교감의 순간이 찾아오지 않는가
이처럼 이름을 몰라 사소한 것처럼 보이던 사물들이 이름을 알고나니 중요하지 않은 존재들이 없다. 세상은 모든 사물이 연결돼 손잡고 노는 쉼없는 잔치판이라는 걸 이제사 안다. 기력 넘치던 좋은 시절 다 흘려보내고 70이 넘은 할배 되어서야 세상이 하나란 걸 얼핏 보았으니 늦게나마 철들 징조인가 보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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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박찬용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15 이런 이런~!
남자끼리 불알 얘길 하는데
상스럽다고 눈을 부라리면 안되지요!
사실 이번 일련의 행보에서 첫번 째 건져낸
야생초의 이름이 큰개불알꽃이다 보니
순간 서토가 떠올라 절로 미소가 지어집디다
말이 나온 김에 이 꽃에 대해 덧붙이자면
글 하나 소재는 충분히 될 정도로 정보가 쌓이데요
최근들어 누가 작명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야생화를 봄까치꽃이라 하더군요
이른 봄 까치 울 때쯤 가장 먼저 핀다해서
붙였다는데 난 오히려 원래 이름이 더 친근합니다
중국은 할머니가 옷가지의 헤진 곳을 기워놓은 자국이란 뜻으로
婆婆納(파파납)이라 한답니다. 꽃이 중간부분이 딱 그렇게 보이는데
이 또한 매우 직관적으로 잘 지은 이름같더군요
영어명은 Birds' eye Speedwell인데 꽃 모양이
새의 눈동자 같아서이고 길가에 흐드러지게 피다 보니
여행자들의 눈에 자주 띄는고로 여행의 안녕을 기원하는
스피드웰(페어웰의 옛 영어)이 붙었다는 설명도 있고요
중국은 또 이 풀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해서 安樂草라 부르기도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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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박찬용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15 박찬용
이왕 불알 얘기가 나왔으니 이와 관련한 야생화들 좀 볼까요
어른주먹만한 크기로 복주머니를 닮은 보라색 꽃이 있는데
얘가 바로 개불알꽃입니다
또한 개불알민들레가 있으며 발로 툭 차면 먼지가
풀썩 터져 나오는 말불알버섯도 있지요
보통 박주가리라 부르는 덩굴식물의 본 이름은 소불알이랍니다
또 쥐불알풀도 있고 섬지역에서 주로 발견되는 여우불알도 있답니다
앞서 얘기한 개불알풀가운데 유독 위로만 자라는 특성의 풀도 있는데
해서 이 친구는 선개불알풀이라 하네요
불알은 부끄러움이나 배척 대상이 아니라
생명이 약동하는 자연의 형태학적 예술품입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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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김의철 작성시간 02:50 new
박찬용
해당 단어에 대한 일수선사님의 긍정적인 인식에
평안함과 고마운 마음이 우러나는군요.
그간에 이 지역에서 때로..소신껏 주깨지 못한 은근한
스트레스 마저 잇었는데 말이지요. 감사- ^^ -
답댓글 작성자박찬용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8:40 new
김의철
어부인은 평안하시지요? -
답댓글 작성자김의철 작성시간 1시간 29분 전 new
박찬용
안부 고맙습니다.
수영장에도 함께 꾸준히 나가는 등 자구 노력을 기하고 있으나
워낙에 노화에 따른 증세라..확고한 호전의 기미가
아직까지는 잘 다가오지 않고 있습니다.
정히 어려우면 수술로 결과를 낼 수 밖에 없는듯 함에도
당사자가 수술을 매우 주저하고 있어.. 애로가 있네요.
하기야 이런 일들이 결국 노인들의 일반적 애로일 것이라..
이를 당연한 일반적 상황으로 여겨..보다 큰 활동을 함께 하지못하는
만년의 아쉬운 마음을 차분히 다잡아 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