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conomist, 2002.9.10 653호
기업들 무차입 경영 붐…도그마化, 산업의 활력 떨어뜨릴 수도
글 이필재 기자 (jelpj@econopia.com)
“‘부채율 0%’ 신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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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무차입 경영을 하는 기업 네 곳을 골라 소개한 한 경제신문의 기사 제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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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은 말이다. 벌어들인 만큼 투자하기로 마음먹는다면 부채율 0%는 많은 기업들이 달성할 수 있는 현실적인 목표이다. 부채율 0%는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신화가 돼 가고 있다. 무차입 경영이 선(善)으로 통하고, 경영의 도그마가 돼 가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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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들이 앞다퉈 ‘빚이 없다’고 발표하는가 하면 ‘앞으로 은행 돈을 쓰지 않기로 했다’고 선언하는 기업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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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봄 한국은행이 내놓은 ‘기업경영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말 당시 매출액 20억원 이상 2천1백75개 제조업체 중 회사채를 포함해 장·단기 차입금을 쓰지 않은 무차입 기업은 1백57사로, 전년도보다 28% 늘어났다. 우량 기업들이 무차입 경영을 표방함에 따라 대기업 대출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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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차입 경영은 기업의 왕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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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차입 경영은 은행 등 외부로부터 조달하는 타인자본(부채)을 지렛대로, 자기자본이익률(ROE)을 높이는 ‘레버리지 효과’를 외면함으로써 수익력을 극대화할 기회를 무산시킨다. 예를 들어 1백원의 자본을 들여 10원의 순익을 올렸다고 치자. 이 때 투하자본을 전액 자기자본으로 충당했다면 ROE는 10%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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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만일 자본의 절반인 50원이 타인자본이라면 ROE는 20%로 뛰어오른다. 따라서 차입금 등의 금리 코스트보다 높은 수익률을 올릴 수 있다면 타인자본을 적극 활용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수익률이 이자율보다 높을 땐 부채를 많이 끌어쓸수록 많은 이익을 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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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중엔 삼성전자처럼, 무차입 경영을 표방하지는 않지만 현금이 넘쳐나 사실상 무차입 상태인 기업들도 있다. 이들은 현금자본을 제대로 운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 엄격히 말해 무차입 경영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없다. 물론 타인자본을 지나치게 많이 도입하면 불황 때에 금리 부담 등으로 저항력이 약해지는 게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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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부채의 적정 규모는 얼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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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최적의 재무구조에 관한 여러 가지 이론들이 나온다. 그러나 부채율이 0%인 것이 최적의 구조라고 주장하는 이론은 없다. 부담할 수 있는 범위에서 어느 정도 남의 돈을 쓸 때에 최적의 자본구조가 나올 수 있다는 것. 레버리지를 어느 정도 일으켜야 기업의 가치를 끌어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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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범 사이버펄스네트웍 전무(공인회계사)는 무차입 경영이 뜨는 것은 차입금에 지나치게 의존했던 과거의 경영 관행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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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관리체제 이전엔 부채비율이 5백∼1천%인 회사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레버리지를 너무 많이 한 거죠. 이런 취약한 자본구조는 IMF 체제를 초래한 주요한 요인이 됐습니다. 그러다 보니 파산을 원천적으로 막고 안정을 기할 수 있는 무차입 경영이 좋아 보이게 됐죠. 부채를 끌어들이지 않는 건 기업이 더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는 기회, 기업 가치를 끌어올릴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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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만 추구할 때 더 이상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고 그런 점에서 무차입 경영은 성장 포기 모델이라는 것이다. 사실 IMF 체제 이후 지난 5년 동안 상당수의 기업들이 재무구조가 안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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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차입 기업이 늘고 있는 것은 저성장 기조와도 관련이 있다. 영업활동으로 금융비용보다 많은 이익을 내기가 힘들다 보니 기업들이 새 투자를 꺼리고 있고, 기업들의 이런 스탠스가 자발적인 무차입 경영인 양 비쳐진 측면도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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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후식 대우증권 경제분석파트장은 그러나 지금이야말로 투자에 나설 때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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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력이 없는 기업의 무차입 경영은 의미가 없어요. 급성장 중인 동아시아 특히 중국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서는 중국이 못 만들어 내는 제품들을 만들어 수출해야 합니다. 반도체·TFT-LCD·휴대폰·컴퓨터 주변기기 관련 기술의 수준을 세계시장의 흐름에 맞춰 끌어올려야 돼요. 중국이 못 만드는 품목을 만들지 못하면 우리 경제는 급전직하의 위기에 몰릴 겁니다. 그러니 차입을 해서라도 R&D(연구·개발)에 투자를 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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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일본과 싱가포르의 접근, 중국과 아세안 국가들의 연합 움직임에 유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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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경제 여건에서 투자를 하더라도 과실을 수확하는 시점은 1년∼1년 반 후입니다. 캐시플로가 좋을 때 투자를 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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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상장사들(코스닥 등록 법인 포함)의 무차입 경영은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할 기회를 스스로 외면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극단적으로 말하면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배임’이라고까지도 할 수 있다. 투자의 기회를 놓침으로써 결과적으로 기회 이익을 날리는 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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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지금 같은 저금리 기조에선 남의 돈 쓰기도 좋다. 레버리지에 대한 부담이 작기 때문이다. 저성장기에 접어들었다지만, 12∼15%의 적정 이윤을 올리고 있는 산업들도 있다. 경기 확장기의 무차입 경영은 기업에 성장의 한계로 작용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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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차입 경영이 통하는 업종들도 있다. 경쟁이 치열하지 않는 내수용 업종이나 서비스 산업이 그 예다. 무차입 경영이 타당한 시절도 있다. 해외 여건이 나빠 내성을 길러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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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차입 경영은 확대 경영을 통한 고용 창출의 기회를 봉쇄한다는 점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무차입 기업은 신진대사가 잘 안 이뤄져 내부 시스템의 역동성이 떨어진다. 고용 창출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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갚을 능력이 있는 한 어느 정도의 리스크를 동반하는 차입 경영은 악이 아니다. 부채율 1백% 이하면 이론적으로는 언제든 갚을 수 있는 규모이다. 차입금의 규모만 놓고 보면 무리한 차입이라고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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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돈으로 사업을 벌이면 부도날 일은 없다. 그러나 적어도 상장사라면, 무차입 경영이 CEO(최고경영자)의 철학일 수는 있어도 기업의 목표가 될 수는 없다. 유통되는 주식의 가치를 끌어올리는 것도 CEO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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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차입 경영이 기업들의 모토가 되면 산업의 활력이 떨어진다. 실물과 금융간의 연결고리가 끊어지고 궁극적으로 디플레이션의 위험에 직면할 수도 있다.
기업들 무차입 경영 붐…도그마化, 산업의 활력 떨어뜨릴 수도
글 이필재 기자 (jelpj@econopia.com)
“‘부채율 0%’ 신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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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무차입 경영을 하는 기업 네 곳을 골라 소개한 한 경제신문의 기사 제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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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은 말이다. 벌어들인 만큼 투자하기로 마음먹는다면 부채율 0%는 많은 기업들이 달성할 수 있는 현실적인 목표이다. 부채율 0%는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신화가 돼 가고 있다. 무차입 경영이 선(善)으로 통하고, 경영의 도그마가 돼 가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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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들이 앞다퉈 ‘빚이 없다’고 발표하는가 하면 ‘앞으로 은행 돈을 쓰지 않기로 했다’고 선언하는 기업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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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봄 한국은행이 내놓은 ‘기업경영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말 당시 매출액 20억원 이상 2천1백75개 제조업체 중 회사채를 포함해 장·단기 차입금을 쓰지 않은 무차입 기업은 1백57사로, 전년도보다 28% 늘어났다. 우량 기업들이 무차입 경영을 표방함에 따라 대기업 대출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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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차입 경영은 기업의 왕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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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차입 경영은 은행 등 외부로부터 조달하는 타인자본(부채)을 지렛대로, 자기자본이익률(ROE)을 높이는 ‘레버리지 효과’를 외면함으로써 수익력을 극대화할 기회를 무산시킨다. 예를 들어 1백원의 자본을 들여 10원의 순익을 올렸다고 치자. 이 때 투하자본을 전액 자기자본으로 충당했다면 ROE는 10%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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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만일 자본의 절반인 50원이 타인자본이라면 ROE는 20%로 뛰어오른다. 따라서 차입금 등의 금리 코스트보다 높은 수익률을 올릴 수 있다면 타인자본을 적극 활용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수익률이 이자율보다 높을 땐 부채를 많이 끌어쓸수록 많은 이익을 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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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중엔 삼성전자처럼, 무차입 경영을 표방하지는 않지만 현금이 넘쳐나 사실상 무차입 상태인 기업들도 있다. 이들은 현금자본을 제대로 운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 엄격히 말해 무차입 경영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없다. 물론 타인자본을 지나치게 많이 도입하면 불황 때에 금리 부담 등으로 저항력이 약해지는 게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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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부채의 적정 규모는 얼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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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최적의 재무구조에 관한 여러 가지 이론들이 나온다. 그러나 부채율이 0%인 것이 최적의 구조라고 주장하는 이론은 없다. 부담할 수 있는 범위에서 어느 정도 남의 돈을 쓸 때에 최적의 자본구조가 나올 수 있다는 것. 레버리지를 어느 정도 일으켜야 기업의 가치를 끌어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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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범 사이버펄스네트웍 전무(공인회계사)는 무차입 경영이 뜨는 것은 차입금에 지나치게 의존했던 과거의 경영 관행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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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관리체제 이전엔 부채비율이 5백∼1천%인 회사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레버리지를 너무 많이 한 거죠. 이런 취약한 자본구조는 IMF 체제를 초래한 주요한 요인이 됐습니다. 그러다 보니 파산을 원천적으로 막고 안정을 기할 수 있는 무차입 경영이 좋아 보이게 됐죠. 부채를 끌어들이지 않는 건 기업이 더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는 기회, 기업 가치를 끌어올릴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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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만 추구할 때 더 이상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고 그런 점에서 무차입 경영은 성장 포기 모델이라는 것이다. 사실 IMF 체제 이후 지난 5년 동안 상당수의 기업들이 재무구조가 안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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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차입 기업이 늘고 있는 것은 저성장 기조와도 관련이 있다. 영업활동으로 금융비용보다 많은 이익을 내기가 힘들다 보니 기업들이 새 투자를 꺼리고 있고, 기업들의 이런 스탠스가 자발적인 무차입 경영인 양 비쳐진 측면도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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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후식 대우증권 경제분석파트장은 그러나 지금이야말로 투자에 나설 때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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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력이 없는 기업의 무차입 경영은 의미가 없어요. 급성장 중인 동아시아 특히 중국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서는 중국이 못 만들어 내는 제품들을 만들어 수출해야 합니다. 반도체·TFT-LCD·휴대폰·컴퓨터 주변기기 관련 기술의 수준을 세계시장의 흐름에 맞춰 끌어올려야 돼요. 중국이 못 만드는 품목을 만들지 못하면 우리 경제는 급전직하의 위기에 몰릴 겁니다. 그러니 차입을 해서라도 R&D(연구·개발)에 투자를 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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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일본과 싱가포르의 접근, 중국과 아세안 국가들의 연합 움직임에 유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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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경제 여건에서 투자를 하더라도 과실을 수확하는 시점은 1년∼1년 반 후입니다. 캐시플로가 좋을 때 투자를 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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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상장사들(코스닥 등록 법인 포함)의 무차입 경영은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할 기회를 스스로 외면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극단적으로 말하면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배임’이라고까지도 할 수 있다. 투자의 기회를 놓침으로써 결과적으로 기회 이익을 날리는 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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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지금 같은 저금리 기조에선 남의 돈 쓰기도 좋다. 레버리지에 대한 부담이 작기 때문이다. 저성장기에 접어들었다지만, 12∼15%의 적정 이윤을 올리고 있는 산업들도 있다. 경기 확장기의 무차입 경영은 기업에 성장의 한계로 작용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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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차입 경영이 통하는 업종들도 있다. 경쟁이 치열하지 않는 내수용 업종이나 서비스 산업이 그 예다. 무차입 경영이 타당한 시절도 있다. 해외 여건이 나빠 내성을 길러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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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차입 경영은 확대 경영을 통한 고용 창출의 기회를 봉쇄한다는 점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무차입 기업은 신진대사가 잘 안 이뤄져 내부 시스템의 역동성이 떨어진다. 고용 창출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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갚을 능력이 있는 한 어느 정도의 리스크를 동반하는 차입 경영은 악이 아니다. 부채율 1백% 이하면 이론적으로는 언제든 갚을 수 있는 규모이다. 차입금의 규모만 놓고 보면 무리한 차입이라고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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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돈으로 사업을 벌이면 부도날 일은 없다. 그러나 적어도 상장사라면, 무차입 경영이 CEO(최고경영자)의 철학일 수는 있어도 기업의 목표가 될 수는 없다. 유통되는 주식의 가치를 끌어올리는 것도 CEO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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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차입 경영이 기업들의 모토가 되면 산업의 활력이 떨어진다. 실물과 금융간의 연결고리가 끊어지고 궁극적으로 디플레이션의 위험에 직면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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