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보린원과 가마꾸라보육원 경성지부 그리고 한경직 목사- 자료 수집 중
이용교
(광주대학교 명예교수, 복지평론가)
영락보린원 홈페이지에 있는 연혁
https://www.borinwon.or.kr/intro/intro03.php
영락아동복지종합타운은 아동양육시설 영락보린원, 영락지역아동복지센터, 영락어린이집, 영락꿈나무 책 놀이방, 장남감도서관으로 구성되었다.
그중 영락보린원에는 현재 아동 49명이 살고 원장을 포함해 직원 41명이 일하고 있다. 영락어린이집에는 별도 아동이 이용하고 직원도 따로 있다.
영락보린원 주변에는 남산이 있고, 일제강점기인 1943년에 조선총독부는 2만2천여평에 ‘경성호국신사’를 설치했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이 신사는 폐쇄되었다. 후암동에서 남산에 있는 경성호국신사로 올라가는 참배길에는 108계단이 있다. 평양에서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1938년)되었던 ‘숭실학당’이 해방후 경성호국신사 터의 일부인 2천여 평을 매입했다. 숭실학당(숭실학교, 현 숭실대학교)는 1897년 베어드 선교사가 평양에 설립한 학교이었다. 기독교정신을 지키기 위해 폐교를 감수했던 숭실학당이 신사 터의 일부를 매입하여 학교를 다시 열었다. 지금은 관련 시설 일부가 숙명여자대학교 외국인 기숙사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https://blog.naver.com/gohnlee/224144333763
108계단 밑에는 후암동(두텁바우) 일대는 과거 전생서(典牲署)라는 관청이 있었고, 현재 영락보린원이 있다. 전생서는 조선 시대, 나라의 제사에 쓸 양이나 돼지 따위를 기르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이었다. 태조 때 설치한 전구서(典廐署)를 1460(세조 6)년에 고친 것이며 1894(고종 31)년 갑오개혁 때 없앴다. 그곳에 일제 강점기에 가마꾸라보육원 경성지부가 설치되어 운영되었고, 해방후인 1947년부터 서울보린원(오늘날 영락보린원)이 운영되고 있다. 보린원의 아동과 직원들은 한국전쟁기에 제주도 등으로 옮겨졌다가 서울 수복 이후 다시 돌아와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가마꾸라 보육원의 원장 소다 가이찌(曾田 嘉伊智, 1867-1962)는 “한국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렸고, 그와 그의 부인 우에노(上野, 1878-1950)는 양화진외국인 묘지에 묻혀있다. 두 사람 관련 글을 인용한다. https://blog.naver.com/goodnews-34/223897742866
[인용문] 한국고아의 아버지-소다 가이찌
이땅을 위해 헌신했던 많은 선교사들이 묻혀있는 양화진외국인묘지에 안장된 유일한 일본인이 있다. 바로 소다 가이찌(曾田 嘉伊智, 1867-1962)와 그의 부인 우에노(上野, 1878-1950)이다.
소다 가이찌는 1867년 일본 남서부 야마구찌 현에서 출생하였다. 21세 때 고향을 떠나 일찍 개항된 나가사키로 가서 탄광에서 일하며 초등교사 자격증을 얻어 교사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25세 때 노르웨이 화물선 선원이 되어 홍콩에 가 영어를 익혔고, 청일전쟁으로 일본이 승리하여 대만이 일본 식민지가 되자 그곳에서 독일인이 경영하는 공장에서 일했다. 1899년 어느 날, 술에 취해 길에 쓰러져 있는 그를 한 조선인 청년이 근처 여관에 데려다 주고 여관비까지 지불해 주었다.
이 인연으로 1905년 한국에 와서 서울YMCA의 전신인 황성기독교청년회 학관에 일본어 교사로 취직하였고, 여기서 종교부 총무 월남 이상재를 만나 그에게 깊은 감화를 받아 기독교를 접한다. 그리고 일본인 초등학교인 히노데소학교(일신초등학교의 전신) 교사이자, 숙명여고와 이화여고에서 영어교사를 하고 있던 독실한 기독교 신자 우에노 다끼(上野, 1878-1950)와 결혼을 하게 되면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 마침내 소다는 YMCA 일어 교사직을 관두고 일본인 경성감리교회 전도사가 되어 매서인을 겸하며 복음전도에 투신한다.
그러던 중 한일병탄 소식을 접한 소다는 일제의 무단정치에 분노하였다. 그는 105인 사건을 조작했던 데라우찌 총독과 일본인 경성기독교회(해방 후 덕수교회) 장로인 대법원장 와다나베를 찾아가 "죄 없는 조선사람을 즉시 석방하라"고 항의하기도 하였다. 이 일로 소다는 일본인 사회에서 배신자란 말을, 조선인으로부터는 스파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으나, 변함없이 조선인과 조선 교회를 사랑했다. 이것이 일본 교계에 알려져 중구 회현동에 일본인 메도디스트처치(현, 강남 반포동 남산교회)가 설립되어 무보수 전도사로 사역하게 되었고 전국적으로 일본인을 상대로 교회들이 많이 설립되었다.
▲ 우에노 다끼 여사
한편 1921년 소다 가이찌 부부는 고아사업기관인 일본 가마꾸라(鎌倉) 본부로부터 경성지부 책임자로 임명받았다. 이들은 가마꾸라보육원(현 영락보린원)에서 조선인 고아들과 함께 생활하며 정성껏 돌보아 "소다는 하늘의 할아버지, 우에노는 하늘의 어머니"라는 호칭을 얻었다. 고아원이 경제난으로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을 때, "소다 선생 내외분이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업입니다.
우리나라 동포를 대신하여 감사드립니다."라는 익명의 편지와 거금 1천 원이 마당에 놓여있었다고 한다. 또 어느 날은, 일본헌병대가 고아들에게 항일교육을 했다며 소다를 체포하였는데, 그가 돌본 고아가 독립투사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을 알고 그는 무척 기뻐했다고 한다. 이뿐 아니라 3.1운동으로 그가 존경하던 이상재 선생과 YMCA의 지도자들이 투옥되자 소다는 대법원장을 찾아가 이들의 석방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1943년 원산의 일본인 교회에 교역자가 없어 소다 전도사가 무보수로 가게 되었다. 그의 나이 77세 때였다. 서울에서 고아원을 운영하는 부인과 떨어져 원산에서 자취하며 목회하였다. 그 후 조선은 해방을 맞이하고 1947년 소다는 일본으로 귀국하여 "오 하나님, 인류가 범한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하고 다녔다. 부인 우에노 여사는 고아들을 돌보기 위해 서울에 남아 있다가 1950년 1월 74세로 한국에서 별세하였다. 소다는 부인의 죽음에 대해 "그녀는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봉사의 생애를 마쳤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아니 그의 영혼은 늙은 남편과 같이 여행하면서 힘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는 나대신 한국 땅에 묻혔습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한국사회사업연합회 주관으로 거행된 부인의 장례식 후 소다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계속해서 일본인 회개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늘 한국으로 가고 싶어 하는 그의 사정을 알게 된 일본 아사히신문사와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의 주선으로 1961년 내한하여 영락보린원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62년 3월28일 95세의 나이로 한국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장례식은 사회단체연합장으로 2천여 조객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회당(의사당)에서 거행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일본인에게 처음으로 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
▲ 선교사 기념비
이처럼 소다 가이찌를 서울 YMCA 교사로, 원산교회 전도사로, 가마꾸라 보육원장으로 40년간을 한국에서 살며 수천 명의 고아들의 아버지가 되게 한 최초의 한 사람은 무명의 조선인 청년이었다. 우리 역시 만나게 되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할 것이다.
[출처] 한국고아의 아버지-소다 가이찌|작성자 주몽
한편, 한경직 목사는 1902년 12월 29일(음)에 평안남도 평원군 공덕면 간리에서 한도풍과 청주 이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곳은 평양 동북쪽으로 떨어져 있는 작은 마을이었으며, 마펫(Samuel A. Moffett)에 의해 복음이 전해진 지역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육촌형인 한병직 목사의 영향으로 기독교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목회를 시작할 때부터 세 가지 목표를 교회의 불가결의 사업으로 삼았다. 즉 전도사업, 교육사업, 그리고 봉사사업이었다. 그의 목회사역은 한국교회의 위상을 높였으며, 많은 목회자들의 이정표가 되고 있다.
[출처] 인격목회와 청빈목회의 대명사 한경직목사|작성자 성경환목사
https://blog.naver.com/kalos1079/222224117426
한경직 목사는 영락보린원뿐만 아니라 1951년 부산에서 천막 3동에 전쟁미망인 22세대 81명을 수용보호하였고, 이 시설은 1957년에 보건사회부로부터 재단법인 다비다모자원으로 설립허가를 받았다. http://www.davida.or.kr/sub05/sub02.php
또한, 그가 설립한 영락경로원 홈페이지에서 밝힌 내용은 영락보린원에서 밝힌 것과 연도(영락보린원 홈페이지는 1939년으로 기록)에서 차이가 있다. 영락경로원 홈페이지 내용을 인용하면, 한경직 목사가 1933년 신의주 제2교회에서 시무하면서 이웃에 어려운 아동들을 돌보다가 1941년 신의주 연사동에 “신의주보린원”을 설립하였다. 여기에 아동들과 더불어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을 위한 ‘노인관’을 건립하여 보호한 것이 노인복지사업의 시작이 되었다. 해방 후 남하하여 서울 중구에 교회를 세우고 다시 아동복지사업을 먼저 시작하였으며, 6.25전란으로 무의무탁한 노인들이 증가하자 1952년 양로시설을 다시 설립하여 시설명을 영락경로원이라 명하고 지금까지 기독교 정신에 따라 어르신들을 보호하게 되었습니다.
https://www.ynkrw.or.kr/intro/index.asp?prtPage=01
한경직 목사는 영락보린원, 다비다모자원, 영락경로원을 설립 운영하였고, 교육사업에 역점을 두었다. 즉, 그는 해방 후 이북에서 월남한 피난민 중에 많은 청소년들이 교육의 기회를 놓치고 길거리에서 방황하는 것을 보고, 뜻 있는 인사들과 함께 1947년 서울 신문로에 있는 피어선성서학원에서 대광중고등학교를 개설하고 중등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여성교육기관이었던 보성여자중고등학교를 1950년에 재건하고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53년에는 영락중고등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59년에는 학교법인 영락학원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고등교육기관이던 숭실대학을 1954년 영락교회에서 재건하고 초대학장으로 취임했다. 그 후 숭실대학 이사장을 비롯해서 서울여자대학 이사장, 영락여자신학교 설립자 겸 이사장, 장로회신학대학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자신이 관계한 학교들을 크고 훌륭하게 성장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