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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 역사와 인물]- 동학과 천도교의 사회복지와 주요 인물 - 이용교 글

작성자밝은얼굴|작성시간26.06.06|조회수1 목록 댓글 0

[사회복지 역사와 인물]- 동학과 천도교의 사회복지와 주요 인물
이용교 / 복지평론가, 광주대학교 명예교수
https://sasw.or.kr/hotissue/946121
우리나라에서 종교가 사회복지에 미친 영향은 널리 알려졌다. 조선 후기 이후 천주교, 기독교(개신교), 불교 등의 복지활동은 많이 연구되어 왔다. 그런데, 동학과 천도교가 우리나라 사회복지의 사상, 제도 등에 미친 영향이나 주요 인물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

조선에 천주교 등 서양 종교와 문물이 도입되면서 1860년에 수운 최제우는 동학(東學)을 창시하였고, 이후 동학은 천도교(天道敎)로 이어졌다. 천도교 3세 교조(교주) 손병희는 1919년 3・1운동을 할 때 민족지도자 33명의 중심에 설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그러나, 천도교는 독립운동을 주도하였기에 일제의 탄압을 받았고, 세력이 약화되면서 그 영향력은 위축되었다. 필자는 동학과 천도교가 사회제도에 미친 영향과 주요 복지활동과 인물을 소개하고자 한다.


1) 동학은 자생적 복지 사상을 정립하였다

한국 사회복지학은 서구의 기독교적 박애 정신과 미국·유럽식 복지국가 제도를 이식받아 발전해 왔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그런데, 이 땅에 외래 복지 사상이 유입되기 전, 한국 사회에는 엄격한 봉건적 신분제와 외세의 침략이라는 다중적 모순 속에서 인간 존엄성을 수호하려는 자생적이고 주체적인 사상과 실천의 흐름이 존재했다. 그 중심에 동학이 있었다.

동학은 조선 후기 외세의 침략과 봉건 체제의 모순 속에서 탄생한 민족 종교이자 사상이다. 동학은 종교적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민중의 고통을 치유하고 평등한 공동체를 지상에 구현하려는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사회개혁 운동이었다. 동학과 천도교는 개항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재까지 한국 고유의 자생적 사회복지 실천과 복지국가 이념의 뿌리 역할을 해왔다.

이 땅에 동학·천도교는 인내천(人乃天)과 사인여천(事人如天)의 고유 사상을 바탕으로 자생적 복지 이념을 정립하였다. 나아가 동학농민군의 폐정개혁안을 통한 갑오개혁의 제도적 견인, 천도교소년회를 필두로 한 인구집단별 민간 사회사업 거점(시설) 구축, 소파 방정환 등 선구적 인물들의 약자 옹호 실천을 이룩하였다.


2) 동학은 인간과 하늘을 동일시하는 평등주의에 기초한다

서구 사회복지의 기본 가치가 개인주의와 기독교적 박애(자선)에 기반한다면, 동학은 인간과 하늘을 동일시하는 철저한 신인합일(神人合一)적 평등주의에 기초한다. 동학의 인내천과 시천주(侍天主) 사상은 “사람이 곧 하늘”이며 “내 안에 한울님(하늘)을 모시고 있다”는 사상이다. 이는 신분, 성별, 연령과 관계없이 모든 인간이 한울님(하늘)을 내재한 존엄한 존재임을 선언한다. 이는 현대 사회복지실천의 최우선 가치인 보편적 인간 존엄성, 인권 의식과 궤를 같이한다.

동학의 제2세 교조인 해월 최시형이 정립한 사인여천은 “사람을 대할 때 하늘처럼 대하라”는 실천 원리로, 복지이용자를 시혜의 대상이 아닌 존중받아야 할 주체로 인식하는 현대 사회복지의 이용자 중심주의 혹은 강점 관점의 원형이다.

후천개벽 사상은 고통과 차별이 만연한 기존의 사회질서를 해체하고, 모든 이가 결핍 없이 상생하는 지상천국을 건설하겠다는 유토피아적 이상향을 제시함으로써 현대의 복지국가 이념 혹은 사회정의 실현의 사상적 동력을 제공하였다.

3) 동학은 아래로부터의 제도 개혁의 동력이었다

동학은 민초의 자발적 연대인 포접제(包接制)를 통해 국가 복지제도의 한계를 보완하고, 폐정개혁안 등을 통해 국가적 차원의 제도 개혁을 뒤에서 밀어붙이는 압력 단체의 역할을 수행했다. 동학의 고유 조직망인 포접제는 종교적 전파 체계인 동시에, 강력한 민간 사회적 안전망이었다. 지역사회 내에서 기근, 질병, 상례・장례 등 재난이 발생했을 때 포와 접을 중심으로 공동의 자원을 동원해 빈민을 구제하는 등 ‘지역사회 기반 복지’의 선구적 모델을 보여주었다. 상해임시정부 김구 주석은 청년 시절에 동학의 접주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1894년 동학농민군이 전주화약을 체결하며 정부에 제시한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은 단순한 농민들의 요구 사항을 넘어, 갑오개혁(甲午改革)이라는 국가 제도 개혁을 이끌어 낸 결정적인 기폭제이자 설계도였다. 농민들의 아래로부터의 요구(동학)가 국가의 위로부터의 개혁(갑오개혁)으로 어떻게 이어졌는지 그 유기적인 영향을 3가지 핵심 축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개혁 기구 설치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의 기세에 놀란 조선 정부는 농민군의 요구를 일부 수용해 개혁을 단행하지 않으면 체제가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감을 가졌다. 전주화약 직후, 정부는 농민군이 지적한 폐단을 스스로 고치겠다며 자주적 개혁 기구인 교정청(矯正廳)을 설치했다. 이 교정청의 개혁 방향이 바로 동학의 폐정개혁안이었다. 이후 일본의 내정 간섭으로 교정청은 폐지되고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가 설치되면서 본격적인 갑오개혁이 시작되지만, 교정청에서 검토되던 동학의 개혁 요구 사항들은 군국기무처의 개혁 법안에 대거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농민들을 달래기 위해서는 그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둘째, 폐정개혁안 내용이 직접적인 법제화로 달성되었다. 동학의 폐정개혁안 중 상당수는 갑오개혁을 통해 조선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인 법률로 제정되었다. 특히 사회적·경제적 평등 부문에서 두 개혁은 완벽하게 궤를 같이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신분제와 차별 철폐, 여성과 아동 인권 보장, 형벌제도의 개선, 제정과 세제 개선 등이었다.

신분제와 차별 철폐로 폐정개혁안의 “노비 문서를 불태울 것”, “칠반천인의 대우를 개선할 것”은 갑오개혁의 신분제 공식 폐지(공·사노비 해방), 백정의 평민화, 문벌과 신분 차별 타파로 귀결되며 사회적 배제를 해소했다. 여성과 아동 인권 보장으로 “젊은 과부의 재가를 허용할 것”은 갑오개혁 법안에 그대로 반영되어 과부의 재가 자유와 조혼 금지 조항으로 법제화되었다. 형벌제도 개선으로 “죄인 본인 외에 가족에게 죄를 묻지 말 것”은 연좌제 전면 폐지와 고문 금지로 이어져 인권 복지의 진전을 이루었다. 재정과 세제 개선으로 “무명잡세를 일체 거두지 말 것”, “탐관오리를 처벌할 것”은 탁지부로 전국의 재정 일원화, 은본위제 채택, 세금의 금납화(현금 납부)로 부정부패 방지를 약속했다.

셋째, 개혁의 성격과 한계에 영향을 주었다. 동학이 갑오개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추진 주체가 달랐기에 성격과 한계에서도 독특한 연결고리를 가진다. 갑오개혁을 주도한 개화파 관료(김홍집 등)들은 본래 정치·행정 체제 개혁(친군영 폐지, 관제 개편 등)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동학농민군이 목숨을 걸고 외친 덕분에 신분제 폐지나 과부 재가 허용 같은 과감한 사회·인권 개혁이 갑오개혁의 중심 과제로 포함될 수 있었다. 그런데, 동학 농민들이 가장 간절하게 원했던 경제적 요구는 “토지를 균등하게 나누어 경작하게 할 것(토지 평균 분작)”이었지만, 개화파는 지주 중심의 양반 관료 계층이었기 때문에, 동학의 요구 중 토지 개혁만큼은 수용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갑오개혁은 민중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지 못하는 한계를 남겼다.

4) 이용과 권익 옹호 중심의 거점을 운영했다

동학은 1905년 3세 교조 손병희에 의해 천도교로 개편되면서, 근대적인 복지시설 운영과 사회사업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복지정책은 시혜적이고 치안 유지(감시) 목적이 강했다. 이에 천도교는 정부(일제)의 지원 없이 순수 민간 자원으로 사회복지 제도의 기틀을 닦았다. 전국적인 천도교 교구망을 활용하여 재해를 입은 교인과 이웃을 구제하는 성금을 조직적으로 모금·배분했다. 천도교단은 수용·격리 중심의 서구식 거주 시설(예, 경성고아원)과 차별화된 ‘이용과 권익 옹호 중심의 다목적 복지 거점’을 운영했다. 천도교 중앙대교당과 전국 교구(교당)는 아동복지, 교육복지의 거점을 확보하고, 이주민 네트워크, 문화·언론 복지를 구현했다.

첫째, 천도교소년회는 아동복지의 거점이었다. 방정환, 김기전, 이정호 등 천도교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천도교 중앙대교당(경성 경운동 소재)을 본부로 삼아 1921년에 출범한 천도교소년회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이용형 아동복지 거점이다. 천도교소년회는 단순 구호를 넘어 어린이 문화 사업, 동화 구연, 상담 등을 진행하였고, 1922년 5월 1일에 어린이날을 제정하고 어린이선언문을 발표하였다. 1923년에는 서울 안에 있는 여러 소년단체에 속한 관계자들이 조직한 소년운동협회가 어린이날 행사를 개최하여 현대적 ‘아동 권리 옹호’의 기틀을 닦았다.

둘째, 천도교는 1900년대 초반 보성학교(현 고려대학교)와 동덕여학교(현 동덕여자대학교) 등 경영난에 처한 민족 교육기관을 인수·지원하였다. 또한, 전국 교구 건물(교당)을 야간에 ‘야학(夜學) 시설’로 개방했다. 이는 빈민 자녀와 여성 등 교육 소외 계층에게 기회균등을 제공하는 교육복지의 실천이었다. 또한 종합 출판 시설인 개벽사(開闢社)를 통해 잡지 개벽, 어린이, 신여성을 발행하며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언론·문화 복지 사업을 주도했다.

셋째, 천도교는 이주민 복지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일제의 수탈을 피해 만주와 간도로 이주한 조선인 빈민들을 위해 만주 지역에 천도교 전교실을 두고 구호물자를 전달하는 등 ‘재외동포 구호사업’을 펼쳤다. 해방 후 천도교 세력이 강했던 이북 지역에서는 공산 정권의 탄압으로 교단 기반의 복지시설이 대거 숙청당했다. 남한으로 내려온 천도교인들은 월남 피난민 구호 사업에 앞장섰다.

넷째, 천도교의 복지활동은 현대적 노인·정신건강 복지로 전승되었다. 1910~1920년대 전국 72개 대교구와 200개소의 지방교구 산하에 ‘공동 성미(誠米)’ 제도와 상호부조 조직을 두었다. 자식이 없거나 의지할 곳 없는 독거노인, 무의탁 노인들을 대상으로 지역 천도교인들이 직접 쌀과 의복을 지원하고 장례까지 치러주는 지역사회 기반 노인 돌봄을 수행했다. 교구 중심의 노인 상호부조 성미 제도는 해방과 분단을 거쳐 현대의 사회복지법인 천도교시천주복지재단으로 정착되었다. 재단 산하의 ‘궁을행복요양원’ 등은 노인요양시설로서 노인복지를 실천한다. 경주 용담정 등 수도원 시설은 해방 이후와 6·25 전쟁기를 거치며 고아와 미망인을 위한 임시 구호 활동을 전개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용담정(경주) 등 주요 성지에 ‘용담수도원’을 비롯한 영성 치유 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5) 동학과 천도교의 주요 지도자들은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동학과 천도교의 핵심 지도자들과 실천가들은 현대 사회복지학 관점에서 뛰어난 사상가이자 조직가, 옹호자였다. 그중 해월 최시형, 의암 손병희, 소파 방정환, 박래홍·이돈화 등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동학 2세 교조인 해월 최시형은 “밥 한 그릇의 이치를 알면 만사를 안다”는 이천식천(以天食天)을 통해 물질적 결핍과 굶주림 해결을 종교적 최고 가치로 두었다. 매 맞던 아내와 아이들을 한울님으로 극진히 모시게 하여 여성·아동 복지의 실천적 선구자가 되었다.

천도교 3세 교조인 의암 손병희는 교단의 거대한 자본을 민족 학교 운영과 인쇄소를 설립·지원하는 등 민족 기업, 사회운동 조직에 전폭 투입함으로써 근대적 민간 사회사업이 전개될 수 있는 재정적·조직적 인프라를 구축했다. 의암은 바로 그 인쇄소에서 기미독립선언문을 인쇄하게 하고 3·1운동을 주도하며 민족 자결권을 실천하였다. 그는 평민과 여성들에게 교육 기회를 보장하여 신분 상승의 사다리를 제공하는 교육복지를 제도적으로 정착시켰다. 천도교 자금을 사회운동에 대거 방출하여 근대적 사회사업이 태동할 수 있는 탯줄 역할을 했다.

소파 방정환은 손병희 교조의 사위이자 천도교소년회의 주역이었다. 그는 동학의 인내천 사상에 기반해 “어린이도 한울님”이라는 아동 존중 사상을 확립했다. 늙은이, 젊은이에 대응하는 ‘어린이’라는 호칭을 보급했다. 1922년 5월 1일 한국 최초로 ‘어린이날’ 제정과 “어린이에게 존댓말을 쓰자”는 내용이 담긴 ‘어린이선언문’을 세계 최초로 발표하는 등 소년운동을 통해 아동복지의 아버지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아동들을 위한 아동 극장, 동화 구연 대회 등을 개최하며 문화복지의 선구자가 되었다. 1923년 어린이 잡지인 월간 ‘어린이’를 창간했는데, 이 잡지는 서울 인구가 30만 명일 때 매년 10만 부씩 판매되는 등 유례없는 인기를 누렸고, 이원수, 마해송 등 아동문학가들이 기고하여 아동문학계의 발전에 공헌했다.


박래홍과 이돈화 등 천도교 청년·여성 운동가들은 천도교청년회(청년당)와 천도교여성회(천도교내수단)를 통해 사회운동을 펼쳤다. 박래홍은 천도교청년당의 핵심 인물로서 1920년대 불가촉천민으로 격리·차별받던 백정들의 신분 해방 운동인 형평운동(衡平運動, 1923년 창립)에 깊숙이 연대하였다. 이돈화는 천도교청년회 지육부장, 천도교청년당 중앙집행위원이었고, 개벽을 창간한 뒤 1926년 폐간될 때까지 주간·편집인을 역임하였다. 청년·여성 운동가들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는 빈민 자제와 여성들을 위해 전국의 천도교 교당을 개방하여 여성 야학과 해방 운동을 전개하며 소외 계층의 권익을 옹호하였다. 야학은 지식 전수를 넘어 빈곤 탈출을 돕는 이용시설(사회복지관의 초기 형태) 역할을 했다. 이는 사회복지실천론의 핵심인 사회적 배제 해소와 취약계층 옹호를 몸소 실천한 근대적 사회복지사(Social Worker)의 표상이다.


6) 동학과 천도교의 역사를 통해 복지를 발전시킨다

동학은 조선 시대의 엄격한 신분제와 불평등 속에서 “모든 사람은 하늘처럼 귀하다”는 강력한 인권 의식을 심어주었다. 서구의 복지 개념이 유입되기 전 인간 존엄성과 보편적 권리에 기반한 토착적 복지 사상을 확립했다. 동학농민군의 폐정개혁안에서 보듯 민중의 요구를 국가 제도(갑오개혁)로 환원시키는 주체적 제도 개혁을 이루었다.

이러한 사상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천도교의 복지 역사로 꽃을 피웠다. 천도교의 사회복지는 단순히 건물을 짓고 사람들을 수용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천도교당(중앙대교당 등)이라는 공간을 최초의 아동복지(천도교소년회), 취약계층 교육(야학), 지역 노인 구호의 ‘다목적 종합 사회복지관’처럼 활용하며, 한국 사회복지의 질적 표준(인권과 권리 중심)을 한 단계 끌어올린 역사를 지니고 있다. “사람이 곧 하늘”이며 “내 안에 한울님(하늘)을 모시고 있다”는 사상은 사회복지학이 추구하는 인간 존엄성과 보편적 권리의 든든한 토착적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자산은 오늘날 과도하게 제도화·관료화된 현대 사회복지 현장에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소외된 이웃을 하늘처럼 섬기는 사인여천의 가치와 민중 중심의 연대 정신은, 현대 사회복지가 잃어버리기 쉬운 ‘인간 중심의 따뜻한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데 귀중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 한국 사회복지학계는 서구 이론의 맹목적 수용에서 벗어나, 동학·천도교 복지 사상과 같은 자생적 유산을 발굴하고 현대적으로 계승하기 위한 학술적 논의를 심화시켜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구자헌, 한국사회복지사, 홍익재, 1984.
박광준, 한국사회복지역사론, 양서원, 2013.
천도교중앙총부, 천도교百年史, 천도교중앙총부 출판부, 2005.
천도교 https://www.chondogyo.or.kr
제미나이 https://gemini.google.com
https://www.chondogyo.or.kr/bbs/board.php?bo_table=sub62&wr_id=22
https://namu.wiki/w/%EC%86%90%EB%B3%91%ED%9D%AC
https://namu.wiki/w/%EB%B0%A9%EC%A0%95%ED%99%98


글쓴이/ 이용교(복지평론가, 광주대학교 명예교수) lyg29@hanmail.net
시민과 함께 꿈꾸는 복지공동체 http://cafe.daum.net/ewelf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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