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보이스타운이 청소년 보호와 자립에 미친 영향
이용교
(광주대학교 명예교수, 복지평론가)
1. 서론
박종삼 명예교수는 숭실대학교 사회사업학과 교수로 재직하였고, 월드비전 회장으로 일하면서 한국 사회복지계의 실천적 학자로 알려졌다. 그의 학문적 업적은 아동복지, 청소년복지, 교정복지, 상담, 기독교 사회복지, 국제복지 등 매우 광범위하다.
그런데, 그가 광주기독병원에서 치과의사와 원목으로 재직하면서 1966년부터 1994년까지 30여 년간 무의탁 비행청소년을 위해 ‘광주보이스타운(Kwangju Boys Town, 소년의집)’을 운영했다는 것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광주소년원을 퇴소한 청소년들이 갈 곳이 마땅하지 않고 다시 거리에서 살다가 범죄에 연루될 우려가 컸다. 광주보이스타운은 소년원 퇴원 후 마땅하게 갈 곳 없는 비행청소년 혹은 무의탁 청소년에게 보호를 넘어 ‘자립과 교육’의 기회를 제공한 혁신적인 공동체로 평가받았다.
필자는 1997년 3월부터 2026년 2월까지 광주대학교 교수로 일하면서도 간혹 광주보이스타운에 대한 소문을 들었지만, 당시엔 없어졌기에 관심을 갖지 못했다. 하지만, 2024년에 광주·전남을 기반으로 활동한 사회복지 인물을 연구하여 ‘사회복지 역사와 인물’ 책을 발간할 때, 광주기독병원에서 일하셨던 박교수님께 추천사를 부탁드렸다. 책 출판을 기념하여 책에 소개된 인물의 후손과 관계자들을 모시고 ‘복지개척자들에 대한 감사 행사’를 할 때, 박교수님은 경험을 증언했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양림동 일대에서 활동하였는데, 박교수님은 광주기독병원 고허번(Codington) 원장, 유수만(Nieusma) 치과의사 등과 함께 일했고, 그때 광주보이스타운을 창설하였다고 말씀하셨다. 필자는 ‘살아있는 화석’과 같은 박종삼 선생이 60여 년 전부터 광주지역에서 청소년복지를 개척한 역사를 잘 알지 못한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이에 필자는 박종삼 선생이 왜 광주보이스타운을 창설했고, 어떻게 운영하였으며, 보이스타운이 소년교정분야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탐색할 필요성을 느꼈다.
자료를 수집하면서 그의 일생이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한국 사회복지 역사와 밀접히 관련되어 흥미로웠다. 그는 1936년 황해도 신천군 북부면 서호리 왕촌마을에서 농부의 아들(4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나 일제통치, 해방 후 북한 공산통치, 한국전쟁과 북한에서 징병, 전후의 피난생활과 고학, 광주에서 치과의료와 사회선교활동, 미국에서의 석·박사 교육, 광주보이스타운 창설과 운영, 숭실대학교 사회사업학과 교수, 한국월드비전 회장, 은퇴후 한국교회사회선교연구소 등을 운영하고 있다(박종삼, 2020: 49). 그는 일생 동안 치과의사, 기독교 목사, 사회복지학자 등 다양한 삶을 살아왔는데, 청장년기에는 광주보이스타운의 창설과 운영에 열정을 쏟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보이스타운에서 성장한 청소년들이 자립하였고 1973년 이후에 숭실대학교에서 교육자로서 역할이 커지면서 1992년에 보이스타운의 자산은 무진사회복지재단으로 계승되었다.
한국전쟁기에 북한에서 피난 온 한 청년이 치과의사가 되어 광주기독병원에서 일하면서 30여년간 광주보이스타운을 운영하지만, 이에 대한 기록은 별로 남아있지 않았다. 필자는 한국을 대표하는 한 사회복지학자가 청년기부터 장년기까지 열정을 갖고 운영한 보이스타운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많지 않다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본 연구의 목적은 박종삼 선생이 무의탁 비행청소년을 위해 설립한 광주보이스타운의 설립 계기, 운영 실태, 주요 성과, 종료와 계승 등을 연구하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