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날학교와 이천영 목사 관련 학습 자료
이용교/ 광주대 명예교수, 복지평론가
새날학교
설립배경 - 광주고려인마을 자녀와 국제결혼자녀, 유학생, 외국인근로자, 북한이탈주민 자녀들의 한국사회 안정된 조기정착을 지원하고, 세계를 품은 지도자로 기르기 위한 광주CBS 후원으로 기업인, 의료인, 방송인, 종교인, 대학교수, 초.중.고 교사단체인 (사)선한교육과 고려인마을, (사)외국인근로자문화센터, 새터민센터 등이 협력하여 설립한 학교이다.
설립목적- 중도입국학생이 한국 학교 및 사회에 정착하여 자신의 꿈을 펼치고 세계를 품은 민주 시민으로서 공동체에 기여하는 삶을 살도록 한다
운영방침
가 쳬계적인 한국어 교육 프로그램을 집중적으로 운영하여 한국어 사용 능력을 높이고 조속한 한국 사회 정착 및 한국 교육 적응을 돕는다.
나 다양한 한국문화 체험학습을 통하여 한국 사회 적응력을 높이고, 한국 문화에 대한 긍정적인 가치관과 공동체적 태도를 함양한다.
다 서로 다른 국적과 문화 배경을 가진 학생들이 타문화를 이해하고 다문화를 포용하여 민주시민으로서 공동체에 기여하는 역량을 기른다.
나 중도입국학생이 한국 사회 속에서 건강한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도록 하고, 이중언어능력을 향상시켜 특기로 개발한다.
교육이념
이 땅에 주어진 자신의 소중한 삶을 위해 어떤 가치와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하며, 그 가치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어떤 모습이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고 국제적 인재가 되어 소외된 자의 이웃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교육한다.
[새날학교 연혁]
2007년 01월 새날학교 개교(광산구 평동주민센터 내)
03월 평동초등학교 잉여 교실로 이전
2008년 02월 평동초등학교 잉여 교실로 중등반 이전
2009년 02월 새날학교 이전 개교(구, 삼도남도 초등학교)
2011년 06월 광주시 교육청 다문화대안교육 위탁기관지정
2013년 02월 고등학교 위탁교육과정 신설
2012~25년 02~01월 초등 6회, 중등 14회, 고등 10회 수료식(초등 24명, 중등 147명, 고등 157명)
2026년 01월 중 15회, 고 11회 수료식(중등 1명, 고등 22명)
[학교 현황]
학교명: 새날학교
계열: 대안교육 위탁기관
학급수: 7
정원: 78
설립일: 2007.01.18.
소재지: 광주광역시 광산구 평동로 29 (삼도동 823-1)
2011년 6월 광주광역시 교육청 대안교육 위탁기관으로 지정. 정원 75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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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고려인마을
고려인마을은 고려인이 주로 다니는 교려인교회, 지역아동센터(바람개비꿈터공립지역아동센터), 고려인마을어린이집, 주민지원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곡동 일대에 있는 고려인마을의 구심체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인사말
저희 고려인은 일제 강점기 ‘국권을 회복하겠다’ 는 일념으로 가산을 정리한 후 어린자녀들의 손을 잡고 피눈물을 흘리며 정든 고향을 뒤로한 체 러시아 연해주와 북간도로 떠났던 여러분의 소중한 핏줄입니다.
그러나 1937년, 당시 스탈린 정권은 고려인을 ‘일본의 스파이’로 규정하고 수천 명의 지도자를 처형한 뒤, 중앙아시아의 척박한 땅으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이후 고려인들은 낯선 환경 속에서 삶을 이어가며 언어와 문화를 온전히 계승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지만, 빈손으로 황무지를 개척하며 한민족 특유의 끈질긴 생존력과 공동체 정신을 세계에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구소련이 해체되자 ‘뿌리없는 민족’ 이라며 태어나 자라온 땅에서 조차 또 다시 차별과 박해가 이어져 유랑의 길을 나서야 했습니다. 갈 바를 몰라 헤매다, 조상의 땅 대한민국으로 눈을 돌려 곁방살이라도 좋으니 ‘제발 살게만 해달라’ 며 살며시 들어와 애원했으나, 국가는 ‘가난하고 헐벗은 동포는 필요없다’ 며 온갖 법률을 적용, 불법체류자라는 이름으로 또 다시 문밖으로 내동댕이쳤습니다.
결국, 일제강점기 친일하면 ‘백년이 유복하고’ 나라를 찾겠다고 독립운동에 뛰어들면 ‘가문이 멸족’ 한다는 옛말이 새삼 피부에 와 닿아 피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지금은 아무도 관심을 기울여주지 않는 고려인의 후손이지만 황무지를 개척했던 조상들의 피가 흐르기에 조상의 땅 광주에서 새롭게 시작하려 합니다.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했던 선조들의 자랑스런 한민족의 후손이기에 우리는 힘을 모아 이 땅을 개척해 나가려 합니다.
비록 힘은 든다 할지라도 저희는 ’선조들의 고귀한 민족정신’을 이어받아 마을공동체를 이루고, 자체적인 지원센터, 학교와 병원, 지역아동센터, 방송국, 미술관, 역사유물전시관, 고려인마을 특화거리 등을 설립, 운영하며 삶의 기반을 다져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들을 통해 우리는 ‘자랑스러운 한민족의 후예’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지역사회와 더불어 성장하는 마을공동체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004년 3월
고려인마을 대표 신 조 야
고려인마을 연혁(초기)
2002.06 : 고려인대모 신조야씨 어려움에 처한 고려인동포들을 틈틈이 돕기시작하다
2005.09 : 고려인공동체 산하 상담소 개소, 고려인동포지원사업 시작
2012.10 : 고려인마을 어린이집 개원
2013.03 : 고려인마을협동조합 설립
2013.05 : 고려인 대모 신조야씨, 광산구청장상 수상
2013.07 : 고려인마을 지역아동센터 개소
2013.10 : 광주광역시 >고려인주민 지원 조례<제정
2013.10 : 제1회 고려인의 날 행사
2014.04 : 비영리법인 고려인마을 설립허가(법무부장관)
2015.06 : 고려인마을종합지원센터 이전 개소
[고려인인문사회연구소]
https://www.koreancoop.com/sub.php?PID=0411&page=1&category=&searchText=&searchType=all
고려인관련 수많은 논문, 단행본 등을 볼 수 있는 연구소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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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마을 대표 신조야 관련 기사
[동포의 창] 고려인 대모 신조야 "고려인 아이들 한국 국적 갖는게 꿈"
연합뉴스 박현수 2026. 2. 14. 08:03
https://v.daum.net/v/20260214080317816
광주 고려인마을 대표 "한국 국민으로 당당히 살게 해달라" 호소
인구 소멸 시대의 대안…고려인 정착 지원 장벽 해소 촉구
(광주=연합뉴스) 박현수 기자 = 11일 광주 고려인마을에서 가진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신조야 대표는 "고려인 차세대들이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해 당당한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것이 마지막 꿈"이라고 강조했다. 2026. 2. 11. phyeonsoo@yna.co.kr
(광주=연합뉴스) 박현수 기자 = "스탈린은 우리를 장난감 알처럼 여기저기 던져놓았습니다. 죽거나 유랑하며 그저 버텨야 했던 세월이었죠. 하지만 이제는 그 유랑을 끝내고 싶습니다. 광주 고려인마을은 단순한 정착지가 아니라 100년 넘게 헤맨 우리 동포들이 비로소 찾은 진짜 고향입니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곡동, 일명 '고려인마을'에서 만난 신조야(70) 사단법인 고려인마을 대표의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간절했다. 우즈베키스탄 출신인 그는 2001년 한국 땅을 밟은 이후, 20년 넘게 국내 거주 고려인들의 권익 보호와 정착을 위해 헌신하며 고려인들의 '대모'로 불린다.
신 대표의 활동은 2002년 광주 평동공단에서 이천영 목사(현 고려인마을 이사장)를 만나면서 시작됐다. 산업단지 근로자로 일하던 그는 임금 체불과 인권 침해를 직접 겪으며 어려움에 부닥친 동포들의 현실을 몸소 경험했다. 일요일마다 고려인 노동자들에게 무료 급식을 하던 이 목사와 인연을 맺으며 봉사의 길로 들어섰다.
"한민족이라는 핏줄이 저를 붙잡았던 것 같아요. 목사님은 다른 외국인들보다 우리 고려인들에게 특별히 더 마음을 쓰셨죠.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려인 사역을 자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자원 봉사자들과 포즈 취한 신조야 대표 (광주=연합뉴스) 박현수 기자 = 11일 광주 고려인마을에서 신조야(오른쪽서 3번째) 대표가 고려인들에게 전달할 기부받은 생필품을 들고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26. 2. 11. phyeonsoo@yna.co.kr
신 대표는 2년간 이 목사 곁에서 봉사를 이어갔다. 한국어가 서툰 고려인들이 난방비를 감당하지 못해 추위에 떠는 모습을 보고는 자신의 월급을 털어 기름을 사주며 그들의 손발이 됐다.
초기 정착 과정은 눈물겨웠다. 광산구 안청동 시골집에서 고생하던 고려인들을 데리고 "도시가스가 들어오는 주택가로 옮기자"고 결심한 것이 마을 형성의 출발점이었다.
"그때는 원룸도 없던 시절이었어요. 좁은 방에 2층 침대 4개를 놓고 여러 명이 함께 생활하며 월세와 공과금을 나눠 냈죠. 그렇게 모여 시작한 것이 지금의 거대한 공동체가 된 겁니다."
이후 이 목사와 힘을 모아 보증금 300만원을 마련해 전국 최초의 고려인센터를 세웠다. 현재 광주 고려인마을은 일자리를 따라 자연 형성된 다른 지역 고려인 마을과 달리, 신 대표가 한 명 한 명 직접 불러 모으며 주도적으로 조성한 결과, 현재는 가족 단위 이주가 주를 이루는 공동체로 자리 잡았다.
국내 귀환 고려인동포 간담회 (광주=연합뉴스) 박현수 기자 = 11일 광주 고려인마을에서 열린 재외동포청 주최 '국내 귀환 고려인동포 간담회'에서 신조야(왼쪽서 2번째) 대표가 김경협 재외동포청장과 나란히 앉아 있다. 2026. 2. 11. phyeonsoo@yna.co.kr
이 같은 공동체 기반은 위기 상황에서 더욱 힘을 발휘했다.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했을 때 신 대표는 피란길에 오른 고려인 동포 약 900명의 항공권 마련을 돕고 광주 정착을 지원해 주목받았다.
"광주가 일자리가 풍족한 곳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잘 압니다. 전쟁터에서 갈 곳 없는 동포들을 위해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했죠. 지난 11일 재외동포청장이 광주를 방문한 뒤 '국내에서 가장 모범적인 정착 사례'라고 극찬하셨을 때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현재 고려인마을에는 생활 밀착형 지원이 이뤄진다. 특히, 보육비 부담을 덜기 위해 자체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무료 법률 상담과 진료, 생필품과 장례 지원까지 촘촘한 복지 망을 갖췄다.
신 대표는 무엇보다 고려인 사회의 '정주 의지'를 강조했다. 한때는 돈을 벌어 돌아가려는 이들이 많았지만, 이제는 광주를 삶의 터전이자 고향으로 여기는 이들이 대부분이라고 설명한다.
"고려인들은 매우 성실합니다. 산업 현장에서 중요한 노동력을 담당해 왔고, 아이를 2~3명씩 낳으며 인구 위기 극복에도 기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도적 장벽은 여전히 높다. 가장 큰 어려움은 주거 문제다. "20년을 살아도 여전히 월세살이입니다. 공공임대주택은 한국 국적자 중심이라 접근이 어렵습니다. 매달 큰돈이 월세로 나가니 자산을 모으기 힘들고 빈곤이 대물림됩니다."
광주의 고려인들 소개하는 신조야 대표 (광주=연합뉴스) 박현수 기자 = 11일 광주 고려인마을 내 고려인문화관 '결'에서 신조야 대표가 고려인들이 광주로 이동 경로를 설명하고 있다. 2026. 2. 11. phyeonsoo@yna.co.kr
그의 시선은 이제 차세대를 향한다. 마을 학교와 어린이집을 채운 고려인 3·4세들이 당당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인정받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는 오랫동안 유랑을 강요받았습니다. 한국 정부의 정책 변화 덕분에 입국과 정착의 길이 열렸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신 대표는 마지막으로 정부와 사회에 호소했다.
"우리는 남의 나라 사람이 아닙니다. 이곳에 뿌리내리고 자녀를 키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대한민국 국적을 통해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행정 서비스에서도 차별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한민족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그것이 제 마지막 소망입니다."
phyeonso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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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고려인 동포의 고통
기자명 강혜민 기자 입력 2026.02.21
https://www.ok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539
전쟁 4년째…조국으로 몸 피한 3000명
불안정한 지위에 고통…난민 제도 개선을
벌써 4년이 흘렀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으로 시작된 양국 간의 전쟁이 좀처럼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다각도로 종전 협상이 시도되고 있지만 핵심 쟁점을 놓고 양측의 입장이 여전히 팽팽하다.
취임 전부터 당장 전쟁을 끝낼 것처럼 큰소리쳐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뾰족한 해결책을 내놓기는커녕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축출하고 그린란드 합병 야욕을 드러내며 오히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패권 본능을 부추기고 있다.
이미 많은 사람이 희생됐다. 최근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에 따르면 러시아군 사상자는 전사자 32만5000명가량 등 120만 명에 달한다. 여기에는 북한군 병사도 포함돼 있다. 우크라이나군도 약 60만 명이 죽거나 다쳤다. 유엔은 민간인 사망자와 부상자도 각각 1만5820명과 4만29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집을 떠난 사람은 훨씬 더 많았다. 우크라이나 국민 500만 명 이상이 고국을 탈출해 폴란드·루마니아·헝가리 등 인접국으로 옮겨갔고 약 710만 명은 국내 다른 곳으로 피란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난민 위기로 꼽힌다.
우크라이나에는 우리 동포도 거주하고 있다. 2024년 말 기준 1만2800명으로 대부분 고려인 3~5세다. 1860년대부터 러시아 연해주에 정착한 이들의 선조는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됐다가 1953년 스탈린 사후 거주·이전 제한이 풀리면서 농장 취업 등의 목적으로 재이주했다.
이 가운데 3000여 명이 피란처로 할아버지 나라를 택했다. 전쟁이 일어나자 법무부는 우크라이나 고려인에게 비자 신청 서류를 간소화하는 동시에 전쟁 전에 입국한 동포에게도 정세가 안정될 때까지 인도적 특별체류를 허용했다. 최근에는 체류 기간 연장이나 취업 분야 선택이 쉽도록 방문취업(H-2) 비자를 재외동포(F-4) 비자로 바꿔주기로 했다.
시민도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광주 고려인마을의 이천영 목사와 주민들은 항공료가 없어 발을 동동 구르던 우크라이나 동포 900명을 데려왔다. 성금 23억원을 모아 비행기표를 사주고 월세방을 마련해 주는가 하면 일자리까지 알선했다. 너머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지구촌동포연대, 대한고려인협회, 대한적십자사, 굿네이버스 등 시민·사회·종교·동포단체와 공공기관·기업·대학들도 정성을 모아 생필품을 전달하고 의료·교육 봉사에 나섰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뜨거웠던 관심이 식자 도움의 손길도 줄어들어 생계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더욱이 18세부터 60세까지 남성은 대부분 징집돼 전선으로 떠나고 노인, 여성, 미성년자만 남아 생활력도 취약한 상태다.
잠시 머물렀다가 전쟁이 끝나면 돌아갈 생각으로 왔다가 정착 단계에 접어들자 새로운 고민에 부닥쳤다. 일용직이나 아르바이트보다 경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일을 찾고, 자녀도 정상적인 교육 과정에 진입시키고 싶은데, 현실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처음엔 사지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여겼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전쟁 트라우마와 이산·실향의 아픔이 되살아나 견디기 힘들다.
우크라이나인 김잔나(38) 씨는 고려인 남편이 징집돼 딸을 임신한 상태에서 시부모·아들과 함께 2022년 10월 입국했다. 주변 도움으로 딸을 무사히 낳았으나 2024년 10월 남편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사자 연금을 받으려면 6개월마다 우크라이나를 방문해야 하기에 쉽지 않다. 노인과 아이들을 데리고 어떻게 살아나갈지 앞길이 막막하다.
우크라이나 고려인 박엘레아노라(45) 씨는 폴란드와 체코를 전전하다가 2022년 7월 두 아들을 데리고 할아버지 나라를 찾았다. 자동차 부품공장에 다니다가 말기 자궁경부암 진단을 받았다. 건강보험 덕에 의료비 폭탄은 피했지만 직장은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생 큰아들(17)은 생계비를 벌려고 방학 때 공장에서 일하다가 임금을 떼였는데도 불법취업 사실이 드러나 출국 조치를 당할까 두려워 신고도 못하는 형편이다.
이처럼 딱한 처지에 놓인 고려인은 수두룩하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펼쳤거나 도왔던 선조의 후손이자 우리가 보듬겠다며 데려온 동포들이다. 온정은 계속돼야 하지만 언제까지 민간의 도움에 기댈 수만은 없다.
우선 유독 까다롭고 오래 걸리는 우리나라의 난민 심사 기준과 절차를 대폭 개선해 하루빨리 이들에게 난민 지위를 인정해야 한다. 이와 함께 선진국처럼 위기에 놓인 이주민 가정을 긴급 지원하는 제도를 마련하고 독일·이스라엘·아일랜드·중국·일본의 사례를 본받아 귀환 동포를 적극 포용하는 정책을 펼쳐야 한다.
[이희용/언론인·이데일리 다문화동포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