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원 설립자 최애도 님이 홈페이지에 올린 ‘우리 평화인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모음집
평화원 최애도 설립자가 홈페이지에 ‘우리 평화인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2007년 10월 20일부터 거의 매주 8회를 집필하고, 2016년부터 9회 이후를 썼다. 9회부터는 내용도 짧아지고, 집필 간격도 매우 길어졌다. 14호는 2020년 3월 31일에 작성되었다. 글쓰기가 쉽지 않았던 듯 싶다. 모두 14편 모음이다.
http://www.phw.or.kr/bbs/board.php?bo_table=s5_2&wr_id=1
우리 평화인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하나.
최애도 0건 1,827회 07-10-20 10:33
저는 오늘부터 이 공간을 통하여 여러분에게 실제로 있었던 아주 흥미롭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드리려합니다. 이 공간이 어느정도 채워질때즈음이면 여러분들은 2,000여명의 아들딸들의 엄마인 저에 대하여 그리고 평화원에 대하여 더 나아가서는 우리나라 역사에 대하여 여러가지를 알게 될것이랍니다.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 들을 준비가 되었나요?
그렇다면 자~ 이야기속으로 떠나봅시다.
나는 1927년 3월 10일. 황해도 연백군 옥야리라는 아주 작고 양지바른 초가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님은 해주 최씨 후손으로 과거에 낙방한 후 작향하여 돌아가실 때까지 성실한 농부로 사셨고, 어머님은 정승반열 집안의 일곱 자매 중 맏이였다. 권위만 중시하던 여느 아버지들과는 다른 아버님 덕에 집 안팎은 늘 깨끗하였으며, 가지런한 밭고랑에서는 야채들이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던 것이 잊혀지지않는다.
고향 뒷동산 중턱의 40평 남짓한 초가집이 내가 다니던 교회다. 높은 종각 밑으로 늘어진 줄을 잡아당길 때마다 울리던 종소리는 나라없는 백성에게 평안을 주곤 하였다. 마음 따스하고 평화로운 교회였다. 출입문이 양쪽으로 나 있는데 한쪽은 남자가 다른 한쪽은 여자가 들어갔다. 따로따로 들어간 남자와 여자는 각각 다른 줄에 맞추어 앉았고, 남자와 여자 사이사이에는 나이 많으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앉으셨다.
나는 모태적부터 이 교회를 다녔다. 아홉살부터 나는 교회로 올라가는 길가에 코스모스, 과꽃, 봉선화, 채송화, 맨드라미등의 꽃을 열심히 심었고 친구들과 물을 주고 풀도 뽑아 주었다. 매일아침 먼저 뛰어가서 이꽃들을 둘러보고 물을 준 뒤 학교로 가는 것이 나의 일과였다.
당시 내가 다니던 소학교의 교장은 '스나가'라는 뚱뚱하고 심술궂은 일본사람이었다. 매달 오륙십 전의 월사금을 내야만 학교를 다닐 수 있어 대부분의 동네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지 못했고, 나는 그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스나가 교장이 일본역사를 가르쳤는데, 기독교를 박해하는 내용이 많았기 때문에 나는 그 시간이 제일 싫었다. 게다가 우리 나라 말을 하다 들키면 역사점수를 무조건 영점으로 처리했기 때문에 나의 역사점수는 늘 형편이 없었다.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교회 친구 이은애와 고광애다. 은애는 15세에 폐병으로 먼저 하늘나라로 갔다. 광해는 해방 후 우리 교회에서 아동부 선생을 하다가 6.25전쟁 후 남쪽으로 내려와 장로가 되었고 지금은 나처럼 아동생활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우리는 화장실 청소나 풀 뽑기 등 다른 아이들이 싫어하는 일을 선생님이 보든, 안 보든 열심히 하였고 신사참배 외에 벌받을 일이 없었다. 어린마음에도 예수믿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음주에 계속됩니다. ^^*
우리 평화인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둘.
최애도 1건 1,555회 07-11-01 11:34
우리 평화인 여러분 지난한주간도 잘 지내셨나요?
어휴~
저는 여러분에게 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서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렸는가 몰라요 ^^
자, 눈을 크게뜨고 준비되었나요? 그럼 이야기속으로~
그때의 농촌 생활이란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새벽부터 해가 질 때까지 쉼 없이 일해도 양식이 모자랐다.
겨울에는 볏짚으로 새끼를 꼬고, 가마니를 짜고 짚신을 엮어서 장날 장터에 내다 팔아도 쌀 한 되 사기가 힘들었다. 어린아이들은 이 마당 저 마당을 전전하며, 저희들끼리 놀다 배고프면 텃밭에서 오이나 참외를 따먹곤 하였다. 그때마다 입에서 가슴, 배까지 물이 흘렀고 그 자리에는 파리가 들끓었다. 아무데서나 졸고 있어도 돌봐주는 사람 하나 없었다. '나라 없는 게 이렇게 비참하구나'생각했던 나는 새벽마다 교회에 나가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하나님 의사가 되게 해주세요. 약 한번도 못쓰고 그냥 앓다가 죽는 사람들을 치료하게 해 주세요. 평생 글 한 자 모르고 밤낮없이 논밭에서 일하다 죽어 가는 아저씨, 아주머니들을 가르치게 해 주세요."
처음 기도하려고 교회에 갔을 때 나는 '악'하고 소리 지르며 도망을 갔다. 교회 문을 여는 순간 구 척이 넘는 까만 도포같은 옷을 입은 것이 내 앞을 딱 가로막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는 마음에 새벽마다 교회 앞에서 갈등하기를 십여 일 그러던 어느날 드디어 그 시커먼 것이 없어졌고 나는 교회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것이 무릎을 끓고 기도하려는 나를 뒤에서 잡아당기며 밖으로 끌어내기 시작하였다. 문을 통과할 때와 같은 시련을 무수히 겪은 후 그것에서 벗어날수 있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교회를 찾았고 눈물 흘리며 기도를 쉬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셨던 것처럼 내게도 응답해 주셨다. "나의 기도를 들어 주세요." 간구하는 순간, 눈을 뜰수없을 정도의 광채의 중심에 십자가가 있는데 그 빛이 내게 다가왔다. 난생 처음 보는 장면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다음주에 계속됩니다 *^^*
우리 평화인에게 들려주고싶은 이야기.~ 셋
최애도 2건 1,637회 07-11-09 12:16
여러분~
한주간도 하나님의 은혜속에 잘 지내셨죠?
지난주엔 제 이야기를 잘 읽어주시고
예쁜 코맨트도 남겨주어 제가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기쁜마음과 함께 자 이야기속으로 들어가볼까요?~
[단체 사진이 있음]
소학교를 마친 뒤 해주나 연안으로 유학을 가야했으나, 부모님이 여식을 보낼수없다하여 일 년 동안 집에서 쉬게 되었다. 그때 나는 어른들이 들에 나가면 동네 어린이들을 데리고 교회에 가서 풍금을 치며 동요와 찬송가를 가르쳤다. 무용도 하면서 책을 읽어주고 이야기도 들려주면서 아이들을 즐겁게 해 주었으며, 옷이 없는 아이에게는 내가 어려서 입던 옷을 가져다가 입혀주고 개울가에 데려가 세수나 목욕을 시키고 머리를 예쁘게 따주기도 하였다. 해 질 무렵 들에서 돌아온 부모님들이 아주 좋아하시는 것을 보면서 내 마음도 기쁨으로 가득찼다.
일 년 가까이 되었을 때, 최용환 감독의 부친인 전도사님이 면장에게 나를 데리고 가셔서는 '이 아이는 보통아이가 아닌 것 같습니다."하시는 거였다. 면장님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상장과 봉투를 하나 주셨다. 동네 어른들과 전도사님이 건의해서 상장과 상금을 주신것이었다. 당시 조선사람으로 면장상을 받는 것은 아주 귀한 일이라고 어른들이 말씀해주셨다. 그때 백원이라는 큰 상금을 받았는데 그 중 50원을 헌금하였다. 그리고 그해 봄 서울에 사는 둘째 오빠가 나를 데리러 왔는데, 상을 받을 때보다 더 기뻤다. 오빠를 따라 서울에 온 나는 여학교에 입학하였으니, 그리도 원하던 첫번째 소원을 이룬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첫 번째 응답이었다.
다음주에 또 만나요~
우리 평화인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넷
최애도 1건 1,547회 07-11-15 13:15
안녕하세요?
여러분!!
입동은 지났지만 이번주엔 싱그러운 가을날씨가 계속되니 춥지도 않고 참 좋네요.
너무 아름답고 상쾌한 이 자연을 창조하신 우리 주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오늘도 이야기속으로 여행을 떠나볼까요? ~
8`15해방, 1945년 8월 15일 정오. 라디오에서는 중대 발표가 있다고 했다.
나는 물론 온 백성이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한다는 천왕의 발표였다. 이렇게 쓰러질 일본, 그러나 그들이 스치고 지나간 우리나라는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다. 돌이켜보니 그들은 최후의 발악을 한 것이었다. 그들의 수탈은 물질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육체적 정신적인 데까지 이어졌다. 나는 가장 잔인한 수탈이 국어사용금지와 신사참배강요라고 생각하였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이 말씀이 늘 내 마음에 살아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는 이 일로 학교에서 퇴학을 맞았고, 정신대로 끌려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온 가족의 걱정 끝에 나는 간호학원을 가기로 하였다. 당시에는 간호학원을 마치고 자격시험을 보면 간호사와 산파 자격증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열심히 다녀 두 달 만에 자격시험에 합격하였고, 둘째 오빠의 주선으로 종로을구 구급 간호사로 일하게 되었다. 적군 비행기가 오면 공습경보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리고 대피소로 피했지만 구급의사와 간호사는 구급약품 가방을 둘러메고 다니면서 환자들을 치료해 주었다. 나는 기도 중 일부분이 응답받았다고 확신하였고, 다리에 부상을 입어 걸을 수 없는 지경에서도 폭격의 위험을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사명을 다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일본은 심판대에 서게 된 것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져 쑥대밭이 되었고, 이미 전세가 기울어져감을 눈치 챈 일본인과 일본은 먼저 교회와 교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토지를 빼앗고, 사람들을 교회에 모이게 한 후 집단살인을 저질렀다. 탄압은 독립 후 보복이 두려워 독립운동지도자인 다수의 기독교인들에게 가해졌다.
다음주에 계속됩니다.~
우리 평화인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다섯.
최애도 1건 1,504회 07-11-20 19:22
샬롬^^* 평화인 여러분~
어제 첫눈 내렸는데 보셨나요?^^*
첫눈이 함박눈인건 참 오래간만인것 같네요
내리는 눈이 너무 예뻐 아이들과 함께 오랫동안 창밖을 바라보았었답니다.~
밖은 참 춥고, 바람도 많이 불고 그랬지만
따스한 방안에서 우리의 마음은 참으로 좋았답니다.^^
그 편안했던 마음과 함께오늘도 이야기속으로 ~슝하고 떠나볼께요.
어느날 일본경찰이 찾아 왔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잡혀 갔는데 그곳에는 이미 훌륭하신 분들로 빼곡이 차 있었다. 고문을 당하면서 내가 끌려온 이유를 알게되었다. 반일 학생으로 퇴학당한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육체는 참으로 고통스러웠으나 마음속으로는 기쁘기 한이 없었다. 아무것도 아닌 내가 감히 이렇게 훌륭하신 어른들과 애국애족의 반열에 설 수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기뻤고, 고문을 받으면서도 감사할 수 있었다. 나는 옥중에서 천왕의 항복발표를 들었다. 발표가 끝나자 누군가 큰 목소리로 "대한민국 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서슬 퍼렇게 독이 올랐던 일본 관원들은 도망가기 바쁜데 반해 착하고 선한 우리 민족들의 눈은 강하게 빛나기 시작하였다.
1945년 10월부터 모든 학교가 수업을 시작하였다. 둘째 오빠는 나에게 이화여자대학교에 가기를 권하였으나 나는 기도에 따라 수도여의전 (현 고려의과대학 전신)에 가고 싶었다. 당시 이화여자대학에는 의과대학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어느 누구의, 어느 무엇의 간섭도 없이 오직 공부하는데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하던가. 2개월이 지날 무렵부터 몸에 이상이 왔다. 양의도 한의도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하였으나 몸은 점점 쇠하여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그냥 잠만 자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죽어도 부모 밑에서 죽어야 한다는 부모님을 따라 시골집으로 향했다. 한의가 좋다는 약이란 약은 다 먹었으며, 교회 전도사님과 장로님들, 목사님이 찬송과 기도로 늘 함께 해주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몽롱한 상태에서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흰색 가운을 입고 병원에 거만하게 앉아서 밀려오는 환자를 치료하고 있었고 책상 위에는 돈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정신을 차린 후 생각해 보았다. "내가 의사가 되면 정말 그렇게 될까?" 라는 의구심과 꿈속에서 본 모습이 떠나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의 부축을 받아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고, 주님은 "새 학기가 되면 신학교에 가라"는 응답을 주셨다.
새 학기가 시작되자 나는 감리교 신학교로 향했다.
다음주에 계속됩니다.
우리 평화인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여섯
최애도 0건 1,527회 07-12-08 09:52
1950년 6월 25일 주일이었다.
나는 정동교회 교회학교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런데 김준영목사님이 초죽음이 된 얼굴로 들어오셔서 "전쟁이 났다. 이북에서 개성까지 쳐들어 왔다."고 외쳤다. 학생들을 급히 집으로 돌려 보냈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기숙사는 술렁거렸다. 그리고 멀리서부터 총소리와 대포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당시 사감이셨던 최영희 장로님과 재핀, 모어 선교사님은 의논 끝에 우리에게 검은색 옷을 입고 얼굴도 검은색으로 가리고 뒷동산 숲속에서 밤이 샐 때까지 조용히 숨어 있으라고 하였다.
당시 기숙사는 충정로 산 중턱에 있었고, 뒷동산은 6월이라 한참 풀이 우거졌다. 아카시아 나무가 빽빽했는데 가시에 찔려도 아프다는 소리도 못하고 숨을 죽이고 있었다. 잠시 후 다시 채플실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우리는 겨우겨우 아카시아 가시에 찔리면서 암탉이 보금자리를 만들 듯 자리를 만들었는데 불평 한 마디 못하고 다시 그 험한 산을 내려가야 했고, 채플실에 모였다. 그런데 아무리 긴박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검게 칠한 얼굴과 찢어진 옷, 피부에 흐르는 피를 바라보면서 킥킥거리며 참던 웃음이 드디어 터지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사감선생님은 2,3일만 있으면 해결될테니 어디든지 가서 피해 있다가 다시 오라고 하셨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다시는 채플실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고, 나는 남으로 행하는 피난 행렬에 끼어 대구까지 갔다. 그곳에서 신학교 동창인 지금은 고인이 된 손홍수, 서명호, 이상주목사님과 힘을 합쳐서 '피난민 주택 알선 사무실'을 만들었다.매일 대구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방을 내놓지 않으려는 주민들에게 사정사정하여 방을 마련하고 우선 환자들과 노약자들을 입주시키는 일을 시작하였다.
다음주에 계속됩니다.~
우리 평화인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일곱
최애도 0건 1,515회 07-12-15 09:30
피난 시절 대구에서 '피난민 주택 알선'일을 하기 전의 일이다.
전쟁 직후 신학교 기숙사에서 나와 서울 명륜동에서 혼자 사는 고향언니 집으로 갔다. 그날 밤 명륜동은 서울로 쳐들어오는 인민군의 길목이 되었고, 밤새도록 쏘아대는 총소리에 한잠도 자지 못했다. 새벽녘, 조용해져서 밖에 나가 보니 앞집 곰탕집 판자문이 다 쓰러졌으며, 부글부글 끓고 있는 솥에 아군 한명이 꼬꾸라져 있었다. 거리에는 온통 국군의 시체로 가득 차있었다. 너무 끔찍해서 방에 들어가서 꼼짝도 못하다가 요란하게 두드리는 대문소리에 문을 열었다. "인민군 동무, 의용군이 필요하니 빨리 나오라우."라고 소리를 질렀다. 엉겁결에 "옷좀 제대로 입고 나올께요."하고는 방으로 들어가 방안에서 왔다 갔다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집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창밖으로 그들이 막다른 골목집 대문을 두드리느라 돌아서 있는 것을 확인한 뒤, 이때다 싶어 대문을 빠져나가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무조건 뛰었다. '사생결단'은 이런 때 사용하는 표현일 것이다. 명륜동 사거리를 지나 창경원 앞에 왔을 때 뛰던 길을 멈추고, 서울대병원 뒷마당 쪽을 보게 되었다. 아주 커다랗게 쌓인 더미, 모두가 시체였다. 밑바닥으로 굴러 떨어진 시체를 보니 퉁퉁 부어서 화계사 기둥만한데 한쪽편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 있고, 반대편에도 아주 큰 구멍이 뚫려 있었다.
나는 정신을 잃고 멍하니 울타리의 철장만 붙들고 있었다. 어느 순간 정신이 들고 보니 주위에 살아 움직이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긴장이 확 풀리며 땅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는데 하필이면 시체 위였다. 나는 기겁하여 일어서 또 뛰기 시작해 종로 경찰서까지 왔다. 이건 또 무슨 일인가? 경찰서 앞 길가 반공호 속에는 경찰들의 시체와 모자, 신들이 즐비했다. 이상하게도 군인이나 경찰의 손에 있어야 할 총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허공을 떠다니는 듯 한참을 정신없이 달려 도착한 곳은 감신대 밑 충정로 3가 언니 집이었다.
다음주에 계속됩니다.~^^*
우리 평화인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여덟
최애도 3건 2,640회 08-03-31 09:03
그러나 이곳에서도 숨을 수 없었다.
언니의 시어머니께서 예수쟁이가 있으면 우리 아들까지 잡혀가기 때문에 사돈처녀는 얼씬도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평소 사돈 할머니께서 언니보다도 나를 더 예뻐하시고 "사돈처녀 나하고 같이 살자."하셨는데......
'만일 사돈 할머니가 나오시면 큰일인데, 그래도 부모님 계신 곳으로 간다는 말은 하고 가야지'하며 초인종을 눌렀다. 언니는 반기면서도 차마 대문 안으로 들어오라는 말은 하지 못하였다. 내가 씁씁한 표정으로 떠나려 하니 언니는 잠깐 기다리라며 작은 배낭에 속옷과 먹을 것을 넣어서 어깨에 지워 주었다. 머나먼 길을 어떻게 걸어가냐며 울면서 안타까워하는 언니에게 오히려 나는 담담히 "그동안 죽을 고비를 넘어 이곳까지 왔어. 언니, 걱정하지 말고 잘 있어. 내가 무사히 가든지 못가든지 소식은 전할 수 없으니 언니와 형부가 무사하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사돈 할머니께도 안녕히 계시라고 전해 줘."라고 말하며 서울을 떠났다.
행렬을 따라 걸어서 구파발 벽제 고개를 넘어 문산을 거쳐 임진강에 도착하였다.
임진강 다리는 이미 끊어져 물에 잠겼으며 나눗배 한 척이 사람을 태워다 주었다. 나도 행렬 속에 끼어 차례를 기다렸지만 질서도 양보도 없는 형국이라 도저히 배를 탈 수 없었다. 안타까운 차에 어떤 사람이 " 당신은 누굴 기다리러 나왔소? 강을 건너러 왔소?" 물었고, 내가 그렇다고 하자 배 위에 던지다시피 밀어놓고는 어디론가 가 버렸다.
나는 짐짝같이 실려 건너편 나루터에 버려졌다.
순간 인민군이 총부리를 들이대며 "동무 왜 건너왔소?" 묻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무 말도 못하고 인민군의 얼굴만 뚫어지게 쳐다보는데 누군가가 "왜 넘어왔겠어. 김일성 수령이 좋아서 오는 게지." 대신 대답하였고, 그 인민군은 내 아래 위를 흟어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총대로 나를 밀며 가라고 하였다.
다음주에 계속됩니다.~
우리 평화인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아홉
운영자 0건 1,138회 16-08-12 17:49
오랫동안 연재를 기다리셨죠. 요즘 날씨가 너무나도 무덥습니다. 많은 여름을 지내봤지만 이렇게 무더웠던 적은 없었던거 같네요. 시원하게 선풍기 바람앞에서 읽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내 고향집은 6.25전에는 이남이었지만 이북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되돌아갈 수도 없는 처지다. 그러나 나를 이곳으로 보낸 하나님의 뜻이 있으리라 생각하며 삼일반동안 잠도 못자고 먹지도 못하면서 그리던 고향집에 도착하였다. 맨발로 뛰어 나오시는 어머니는 쓰러지려는 내 몸을 끌어안으시며 "왜 여기까지 왔니? 남쪽으로 피난 가지 왜 왔니?" 하면서 우셨다. 그때 누군가 내 등 뒤쪽에 서 있는 느낌이 들어 돌아보니 하얀 모시 바지저고리를 입은 젊은 청년이 서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으~음 저, 내무서 정치보위부 과장님이셔." 하며 당황스러워 하셨다. 알고 보니 나는 수배 대상으로 시가지 곳곳에 사진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나를 끌어안은 채 2~3일 좀 쉰 다음에 데려가라면서 제 발로 왔으니 도망은 안 갈 거라고 하셨다. 3일간 감시를 받은 후 내무소로 잡혀갔다. 그들은 호감 있게 대하며 동무의 과거가 어쨌든 지금 우리 정치로 들어왔으니 계속 감시만 할테니 그리 알고 돌아 가라는 것이었다.
우리집은 시가지 큰집으로 이사했고 전답이 많아져 대지주라 하여 공산당들이 큰 오빠를 잡아가 우리 논두렁에서 학살하고, 모든 것을 압수해갔다.뿐만 아니라 황해도연백은 국군이 북진하면서 60리 밖 용매도에 해병대가 주둔하고 육군이 강원도 산악지대로 북진했기 때문에 많은 양민이 학살당하고 있었다. 나는 내게 주신 사명이라 생각하고 용매도 해병대와 군민이 합심해 이곳을 지키기로 하였다. 국군 패잔병과 전직 경찰, 도망가지 못한 분들과 합세해 다량의 태극기를 만들었고, 젊은이 두 사람을 용매도 해병대로 보내 이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우리 평화인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열
운영자 0건 1,101회 16-09-12 08:57
그러나. 이 일이 발각되어서 우리집은 공산군 특별 자위대의 습격을 받았다. 군인과 경찰 출신들은 도망을 치고 나는 내무소로 잡혀 갔다. 내무소에서는 최고 악질을 잡아 왔다고 박수를 치며 사이렌까지 울렸다. 나는 피비린내와 역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유치장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알만한 분들이 피투성이가 된 채 주검으로 나뒹굴고 있었다. 이윽고 해가 지고 캄캄한 밤이 되자 한 사람씩 불러 고문을 시작하였다. 이름이 불려서 나갔던 사람들은 싸늘한 주검이 되어 유치장 콘크리트 바닥에 내던져졌다. 분명 내 이름도 불렀고 나도 물론 고문을 받으러 나갔을 것이며 모진 고문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모든 과정을 기억할 수 없다. 다만 내가 유치장 시멘트 바닥에 누워 있다는 사실만 기억할 뿐이다.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도 나를 붙들어 주셨고 기도할 수 있는 힘을 주셨다. "하나님 아버지, 하고 싶은 일이 많습니다. 이 생명 연장시켜 주시면 나를 위해 사는 것보다 이웃을 위해 살겠습니다. 살려만 주세요." 마치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와 땀으로 마지막 기도를 드리시듯 그렇게 기도하였다. 죽음앞에서 나의 기도는 참으로 엄숙하고 간절하였다.하나님 아버지는 내 기도를 들어주셨다.
우리 평화인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열 하나
운영자 0건 1,144회 16-09-27 18:20
그날 저녁 담당 사무관이 정치보위부 과장으로 바뀌었다. 그는 내가 삼팔선을 넘어 고생끝에 집에 도착했을 때 모시바지저고리를 입고 나를 바라보던 사람이었다. 심문을 받으러 간 내게 그 사람은 고문을 하는 대신 하나님이 누구인지 설명해 달라고 했다. 며칠을 그 사람과 토론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함께 있던 수십 명의 사람들이 불려 나갔고, 그 넓은 시멭느 콘크리트바닥에는 얼룩진 핏자국만이 남아 있을 뿐, 살아 있는 생물체라고는 나 혼자였다. 늦은 밤이 되어도 아무소식이 없었고, 캄캄한 밤이 너무나 무서웠다. 늦은 밤이 되어도 아무 소식이 없었고, 캄캄한 밤이 너무나 무서웠다. 한참이 지난 후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 소 달구지 소리 등이 났다. 알수 없는 공포감으로 떨고 있는데 문이 열리고 "동무 나오라우."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 소리가 반가워 얼른 일어나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다가갔다. 너무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다. 나를 죽일지도 몰랐지만 그때로서는 어쨌든 사람 목소리가 반가웠던 것이다. 그 사람은 성냥불을 켜서 내 얼굴에 들이댔다. 정치부 과장이었다.
평화인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열둘
운영자 0건 1,015회 20-03-31 10:54
그는 평소 입었던 모시 옷을 벗고 군복을 입고 있었다. 비행기 폭격 때문에 반딧불조차 번쩍이는 것이 위험한 때인데도 그 사람은 계속 성냥불을 들고 내 얼굴을 비추며 말했다. "동무, 우리는 북으로 후퇴하는 길이요. 그동안 동무와 주고받은 이야기들이 내 마음에 새겨졌소. 동무에게 한가지 묻겠는데 만일 내가 지금 후퇴하다가 도망쳐서 되돌아온다면 동무가 나를 살려 주겠소?" 나는 황급히 "그럼요, 염려 말고 오기만 하세요. 우리집 아시죠?" 라고 대답하였다. 나는 그가 나를 죽일건지 살릴건지 가늠할 수 없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내게는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그 사람은 나를 쳐다보며 "동무 집으로 가시오."라고 말하였다. 나는 가라고 한뒤, 아마 뒤에서 총을 쏘려나 보다 생각하며 공중에 붕 뜬 기분으로 뒤도 보지 않고 열심히 기도를 되뇌이며 급하게 걸어갔다. 그러나 끝까지 총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그가 타고 가는 듯한 차의 시동 소리만 요란하게 들렸다.
평화인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열셋
운영자 0건 1,114회 20-03-31 11:02
이렇게 나는 세번째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삶으로 인도를 받은 것이다. 상처가 거의 아물어갈 무렵 도망갔던 아군 패잔병, 경찰관, 용매도 해병대에 심부름 같던 사람들도 무사히 돌아왔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인민군과 빨갱이들이 모두 물러갔던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돌아왔으나 "내가 돌아오면 나를 살려 주겠느냐"고 두번 세번 물었던 정치보위부과장은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나는 기도한다. "하나님 아버지 비록 그가 운명하였더라도 그가 주님을 믿는 마음과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확신하였으므로, 그의 영혼을 거두어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후 나는 어머니의 권유로 피난 행렬에 끼여 대구까지 내려갔다. 그곳에서 수용소를 차렸고 가마니도 없이 맨흙 땅바닥에서 신음하던 병자들과 노인, 아이들에게 주택을 알선하였고, 입주시키는 일에 전력을 하였다.
평화인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열넷(마지막)
운영자 0건 2,288회 20-03-31 11:55
1951년 5월 4일, 부산 수정동에서 감리교 신학교 졸업반에 한하여 강의를 다시 한다는 통지를 받고 부산으로 갔다. 유형기 교장 선생님, 윤성범 박사님, 김용옥 박사님, 김폴린 선생님, 장기수 목사님과 한집에서 먹고 자면서 가족과 같은 분위기에서 열정을 다해 강의를 듣고, 배웠다.
1951년 7월 31일, 졸업식을 하면서 다시 한 번 '죽음의 문턱'마다 주께 드렸던 기도를 떠올렸다. 이후로 지금껏 살아오며, 나는 주께 드린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왔다. 지금의 평화원을 설립하여 버림받은 어린이들과 70년을 살았다. 유교에 젖은 파주지역에 기독교학교인 파주공업고등학교를 설립하여 매년 세례학생 400여 명을 배출하여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게 하고 있다. 내 일생에 처음 소유한 407평과, 건평 272평의 부동산을 내 아버지 하나님의 집으로 바쳐서 창원교회를 세웠다.수많은 역경을 거쳤지만, 그때마다 '나의 반석이시오. 구원자이신 주님'이 나의 생각과 믿음을 보시고 승리의 팔로 항상 붙들어 주셨다.
이제까지 나의 말과 행동이 언제나 주님 마음에 들기를 원하며 살아 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내게 주실 연단 속에서 주님의 은총과 성령으로 내 몸에 솟아나는 가시를 쳐 주소 다듬어 주셔서 '정금'같아지기를 원한다.
(연재를 마치며- 신학교 졸업후, 오늘에 이르기 까지 하나님의 은총과 성령으로 내몸에 솟아나는 가시를 쳐 주시며 다듬고 만져주신 수많은 기적과 역사는 다음을 기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