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적인 의무와 공허한 이데올로기
“구체적인 집단(collectivité)들을 위한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의 집단에 연결된 그들의 삶의 부분 안에서 (...) 모든 사람들을 위한 의무가 존재한다.” 시몬느 베이유의 <앙하신느망> 중에서
‘의무란 집단을 위한 의무가 아니라, 집단 구성원 개개인을 위한 의무’라는 시몬느 베이유의 사유에서 이데올로기를 배격하고 ‘실재론’의 관점을 견지하고자 하는 그녀의 생각을 잘 읽을 수 있다. 왜 의무가 집단을 위한 것이 아니며, 집단 구성원들 개개인을 위한 의무인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사회가 사회구성원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사회 구성원들이 사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다만 생존을 위해 사회를 형성한 것이 아니라,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사회를 형성하였다”라고 하였다. 즉 사회를 구성하는 이유가 개개인이 보다 인간답고 행복하게 잘 살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사실이 이러하다면 사회와 사회구성원 간의 우선순위는 ‘사회 구성원들’이 우선이다.
이러한 관점은 하나의 구체적인 예를 들면 금방 알 수 있다. 가령 ‘서울’에서 근무하는 한 경찰관은 ‘서울’에 대한 의무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서울에 사는 시민 개개인 모두에게 의무를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뉴욕’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한 종교인은 뉴욕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뉴욕에 사는 개개인 모두에게 봉사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데올로기가 강한 ‘공산국가’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중국 ‘장시성’에서 근무하는 한 공안요원은 ‘장시성에 사는 시민들 개개인에 대한 의무’보다는 우선적으로 ‘공산당에 대한 충성(의무)’을 고려한다. 하지만 많은 경우 ‘국가’ ‘도시’ 혹은 ‘이념’에 봉사한다는 것이나 이에 대한 의무를 이행한다는 것은 ‘막연하고’ ‘구체적인 행위’를 생각하기 어렵다. 구체적인 행위나 행동을 생각하게 되면 그 유일한 방법이 국민이나 시민들 개개인에게 의무를 다하고 봉사를 하는 길 밖에 없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의무’나 ‘봉사’는 개개인의 인격체에게 의무를 다하고 봉사를 하는 것이지, 이러한 구체적인 행위를 전재하지 않는다면 무슨 방법으로 국가나 사회에 의무를 다하고 봉사를 할 수 있을까?
그것이 아무리 매력적으로 보여도 이데올로기란 ‘이념이나 사상’ 때문에 개개인의 희생을 강요하고, 개개인에 대한 의무보다는 ‘사상’이나 ‘신념’에 혹은 실체가 없는 ‘집단성’을 우선적으로 내세운다. 그래서 이데올로기는 결코 인간 존재의 행복이나 구원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시민들 개개인의 권리나 인권, 시민 개개인의 행복이나 존엄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 어떠한 ‘정의감’이나 ‘애국심’이나 그 어떤 것도 공허한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개개인의 의무 –모든 시민은 시민인 한 자신만의 고유한 의무를 가진다-, 각자가 해야 할 의무를 생각하지 않고, 막연하게 ‘국가’나 ‘도시’의 의무를 말하는 것도 ‘이데올로기적이긴 매 한가지이다. 오늘날 너무나 자주 ‘국가가 책임져라’ ‘국가가 국민에 대한 의무를 다하라’라는 구호들을 볼 수 있다. 왜 구체적인 개인들의 구체적인 의무를 생각하지 않고, 구체적인 개인들의 개별적인 책임을 묻지 않고 막연하게 ‘국가’나 ‘도시’에게 책임을 묻고자 하는지 때로는 의아하다. 여기서 국가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대통령인가? 장관들인가? 경찰들인가? 고위 공직자들인가? 국가란 어떤 의미에서 모든 공직자와 모든 국민을 포함하고 심지어 국토를 포함하는 개념이 아닌가? “그냥 국가가 책임져라!”는 주장은 왜 하는 것일까? 그것이 너무 손쉬운 해결책이고 편한 방법이라서 일까? 하지만 너무나 편한 길, 그 길의 끝은 어디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