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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개념들

비탈길의 오류와 억울한 데카르트

작성자보스꼬|작성시간13.05.01|조회수1,230 목록 댓글 2

데카르트의 작은 오류와 후학들의‘위험한 비탈길의 오류’

그리고 억울한 데카르트

 

  논리학에서는 일상인들의 언어사용에서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면서 범하고 있는 오류들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는데 이 오류들 중에는 <위험한 비탈길의 오류>라는 것이 있다. 이 오류에 대해서 한 교양과목의 교재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원인과 결과 사이의 거리가 너무 먼 경우에 발생하는 인과적 오류이다. 즉 사건 A와 사건 B가 인과관계일 경우 그 사이에 또한 다수의 인과관계들이 연쇄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최초의 원인에 의해 한 번 미끄러지면 불가피하게 비탈길 아래까지 계속해서 미끄러질 수밖에 없다고 추론할 때 발생하는 오류이다.” -『논리와 비판적 사고』,

 

  그리고 이 책에서는 다음과 같은 예시를 제공하고 있다.

 

“만약 네가 일직 잠자리에 들지 않으면, 내일 면접시험을 망칠 것이다. 면접시험을 망치게 되면 취업을 할 수 없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너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생을 비참하게 마감할 것이다.”

 

  위의 예시에서 만일 실제로 일찍 잠자리에 들지 않았고 그리고 그의 미래에 그가 비참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한다면, 논증에 따라서 그가 인생이 비참한 이유가 어느 특정한 날에 잠자리에 일찍 들지 않은 원인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비참한 인생을 살게 된 이유에는 수 만 가지의 이유가 있을 수 있을 것이며, 이중에서 늦잠을 잔 것은 단 하나의 이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어느 특정한 날에 늦잠을 잔 사실은 그의 비참한 인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 따라서 만일 누군가가 위와 같은 추론을 하게 된다면, 그는 <위험한 비탈길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오류는 역사가들이 역사적 사실을 규명할 때 흔히 범하는 오류로서 최초의 원인과 최종 결과 사이에 어떤 기계적이고 필연적인 법칙이 작용하고 있다고 믿을 때에 발생한다. 이러한 오류의 대표적인 예 중의 하나가 ‘나비효과’라는 것이다. 태평양 이편에서 나비가 날개 짓을 할 때 발생한 작은 바람이 기상법칙의 필연적인 과정을 겪으면서 대서양 저편에 ‘태풍’을 야기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 ‘나비효과’라는 것인데, 사실상 이러한 나비효과는 이 세상을 하나의 거대한 기계라고 보는 한에서만 가능한 것이며, 또한 이 세계를 거대한 기계라고 본다 하더라도, 나비의 날개 짓이 태풍의 원인이라고 보는 것은 하나의 비유나 과장일 뿐 사실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태풍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태풍이 발생하기 위한 다양한 기상조건이 전제될 것이며, 이러한 조건들 중 단 하나라도 부족하다면 나비의 날개 짓이 아니라, 대형 선풍기를 틀어도 태풍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나비의 날개 짓이 정말 태풍의 원인이 될 수 있다면, 이는 마치 오늘 내가 기침한 것이 태풍의 원인이 될 수 있다거나, 바둑이의 방귀 소리가 대형 교통사고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이처럼 어떤 하나의 최초의 원인이라는 것이 ‘신이나 우주의 제일 원인’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원리이거나 ‘중력의 법칙’이나 ‘만류인력’과 같은 근본적인 자연의 법칙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하나의 사건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사건은 결코 t수세기가 지난 이후 발생하는 큰 사건의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현대의 철학자나 사상가들 중에는 현대의 문제점을 과거의 철학이나 사상 혹은 어떤 사건에서 그 원인을 찾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 가령 현대의 테러의 원인을 중세의 ‘십자군의 전쟁’에서 찾고자 하거나, 현대의 자본주의의 사회체제를 ‘청교도의 종교관습’에서 찾고자 하는 것 등인데, 그 중 하나가, 현대의 생태계의 위기를 ‘데카르트’의 사상에서 그 원인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사실상 데카르트는 인류에게 매우 중요한 하나의 사상을 제공해준 철학자이다. 하지만 좋은 것도 지나치면 병인지라, 이 점이 또한 그의 작은 오류(실수)를 낳은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그가 인간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인간은 사유하는 정신’이라고 진술한 것이다. ‘나는 사유한다, 고로 나는 존재 한다’라는 ‘코기토의 원리’는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지만, 가장 먼저 ‘나의 존재는 사유하는 것’이라는 것이며, 이는 인간의 존재란 곧 ‘사유하는 정신’을 말하는 것으로, 질료적이고 육체적인 것과 무관하게 순수하게 정신적인 존재로서의 ‘자아’를 상정한 것이다. 사실 인간존재의 이러한 정신성을 긍정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인간이 물질화되는 현대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비-인간화에 대해 인간의 존엄성을 확보하는데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가난하더라도, 비록 성공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사회적으로 매우 낮은 계층의 삶을 살아가거나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장애인이라고 하더라도, 나의 존재의 의미가 ‘소유’에 있지 않고 ‘나의 정신’ 즉 ‘나의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 등에 있다는 것은 모든 이들이 사유할 수 있는 정신을 지니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매우 존엄한 인간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매우 단순한 진술이지만, ‘나는 사유함으로 존재 한다’는 진술은 위대한 진술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렇게 훌륭한 사상을 남겨준 그가 왜 ‘생태계의 위기’를 낳게 한 최초의 원인자 취급을 받는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이러한 데카르트의 진술에서 망각한 작은 실수 때문이다. 인간이 사유하는 정신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나의 정신이 곧 나인 것은 아니다. 나는 사유하지만 동시에 감각하고 욕망하며 무엇을 의지한다. 요컨대 인간은 결코 정신과 육체로 나누어질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사유를 본질적인 것으로 그리고 육체를 ‘부수적인 것’으로 즉 정신의 명령에 따라서 움직이는 ‘자동기계’처럼 생각한 것이다. 사실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의 육체는 정신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자동기계’로 생각되어질 수 없다. 나의 육체가 ‘자동기계’가 아닌 것은 등산을 하는 중에 힘이 소진하면 아무리 내 정신이 ‘올라가야 한다’라고 명령 하더라도 주저앉고 마는 하나의 예로서도 충분히 논박할 수 있다.이러한 점에서 데카르트는 작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데카르트의 오류를 ‘생태계의 위기’의 첫 원인처럼 고려하는 것은 과장이고 억견이 분명하다. 데카르트가 생태계의 위기의 최초 원인자처럼 고려하는 사람들의 논의는 데카르트가 사유하는 정신이 육체를 도구적으로 지배하는 실체처럼 고려하였다는 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사유를 ‘도구적 이성’으로 이해하고, 도구적 이성에 대한 사유가 인간의 이익을 위해서 ‘자연’을 도구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정당화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현재의 ‘북한의 핵위협’은 핵기술을 처음 발견한 과학자가 ‘아인슈타인’이니, 그 책임이 아인슈타인에게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위험한 비탈길의 오류’가 아닐 수 없다.

  데카르트는 이성과 육체 사이의 어떤 존재론적인 사실에 대해서 견해를 말한 것이지, 결코 ‘인간 이성’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자연을 도구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고 말하거나 이러한 일들이 윤리적으로 타당하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비록 데카르트의 사유를 ‘도구적인 이성’이라고 할 수 있다할 지라도, 데카르트는 이성과 육체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견해로부터 ‘자연을 도구적으로 마음껏 활용할 수 있다’는 결론이 도출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해서 데카르트의 사유에는 ‘윤리학’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의 생태계문제는 본질적으로 윤리ㆍ도덕적인 문제이다. 구체적으로는 ‘자연의 재원’을 이용하여 최대한 ‘자본을 축척하고’ ‘경제적인 부를 산출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자본주의 윤리’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극대화 이면에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어떤 ‘소유욕’이 도사리고 있으며, 이러한 소유욕에 대한 무절제한 욕망의 추구가 결국 오늘날의 생태파괴라는 문제를 산출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소유욕에 그 수단을 제공한 것이 곧 ‘기술ㆍ기계’문명의 발전이다. 이러한 기술의 발전이 산업화 한 시초는 정확히 ‘영국의 산업혁명’에 있으며, 따라서 만일 ‘생태파괴’의 최초 원인자를 추구하자면 데카르트가 아니라 오히려 영국의 산업혁명에 정신적인 지주였던 ‘영국 경험론자’들에게서 찾아야 할 것이다. 데카르트는 영국의 경험론에 대립하였던 대륙 합리론의 대표자였다. 자신과 정 반대의 정신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과 대립하였던 철학자들의 잘못을 데카르트가 뒤집어쓰고 있다는 것, 이것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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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보스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5.03 자신의 잘못을 알게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진보>한다는 징표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렇게 조금씩 발전하는 것이 곧 의미 있는 삶이라고 생각됩니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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