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이중적 특성과 존재의식
"갈망(désir)은 자기-중심주의(auto-centrique)이면서 동시에 타아-중심주의(hétéro-centrique)이다.
만일 갈망이 그 자체에 있어서 마치 타아-중심주의처럼 나타난다면, 역설적으로 이는 자아-중심주의이다.
그런데 이러한 외관은 하나의 실재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자기 자신과 타인이라는 이러한 차원이 초월될 수 있다는 것도 잘 알 수 있다.
그것은 사랑(l'amour)에 있어서이며, 또한 종교적 사랑(charité)에 있어서이다."
= 가브리엘 마르셀, 존재와 소유(Être et Avoir) 중세서=
모든 인간적인 인간관계에 있어서 이 관계성을 특징짓는 첫 번째 요소는 ‘갈망’이다. 그것도 인간 그 자체를 갈망하는 것이다. 반면 순수하게 인간적인 관계가 아닌, 사회적 혹은 법률적 관계에 있어서는 그 관계성의 특성이 ‘인간’이 아니라, ‘사물’이거나, ‘돈’이거나 ‘업무’이거나 즉 어떤 ‘외적 대상’이다. 가령 사장에게 충성을 하는 어떤 직원의 상사에 대한 관계를 특징짓는 것은 ‘사장’이라는 인격체가 아니라, 회사에서의 자신의 업무이거나 의무이다. 반면 그것이 우정이거나, 사랑이거나 혹은 선후배의 관계이거나 간에 순수하게 인간적인 관계에 있어서 이 관계성을 특징짓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너’이다. 인간 그 자체가 목적인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 ‘갈망’은 이 중적인 양상을 띠게 된다. 그것은 ‘나 중심’이면서 동시에 ‘너 중심’이라는 이중성이다. 어떤 관계이든 이러한 이중성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 것은 순수한 인간관계라고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는 사랑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진정 사랑하는 이라면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그의 모든 행위는 ‘사랑하는 이를 위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즉 나의 모든 행위는 ‘너를 중심’에 놓아두고 행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너를 위한 것’이란 이러한 생각 자체가 ‘사랑하는 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지, ‘사랑받는 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너를 위한 행위’의 궁극적인 목적은 ‘너를 얻기 위해서’, 더 정확히는 너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 이다. 그래서 이러한 행위는 또한 ‘자기 자신을 위한’ 행위가 될 수밖에 없다. 사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든 순수한 인간관계에는 이러한 ‘이중성’이 도사리고 있다. 이를 가브리엘 마르셀은 인간의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é)’라고 한다. 이러한 상호주관성이 부정되거나 무시되는 그 어떤 인간관계도 이미 진정한 인간관계는 아니며, 이는 상대편의 ‘주관성’을 무시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일방적인 관계’이며, 상대를 ‘사물화’하는 관계가 된다. 현대사회에 하나의 문제로 등장하는 ‘스토크’라는 표현은 이러한 상호주관성이 무시된 채 일방적인 관계를 계속 요구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인간관계에서 ‘이중성’이 남아 있는 한, 이러한 관계는 ‘주체와 객체’ ‘자아와 타아’라는 매울 수 없는 간격이 발생하고, 이러한 간격이 남아 있는 한 인간관계는 무언가 불완전하고 불안하고 불-만족스러운 관계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일치를 요구하는 인간관계의 특성상 이러한 불안한 관계성을 넘어서고자 하는 것이 또한 인간의 한 ‘갈망’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간관계의 이중성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가?
놀랍게도 가브리엘 마르셀은 ‘사랑’에서 이러한 이중성이 초월될 수 있다고 하며, 특히 ‘종교적 사랑’에서 이러한 이중성이 극복될 수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이며, 그 방법은 또 무엇인가? 그것은 관계성에 대한 근원적인 변혁에 있다. 즉 ‘소유의식’으로서의 관계성에서 ‘존재의식’에로의 관계성으로 변환하는데 그 답이 있다. 소유의식이란 나와 너 사이의 관계가 주체-대상이라는 이원화에 기인된다. 내가 소유하는 그 무엇도 나 자신은 아니다. 나의 것이긴 하지만, 나는 아닌 것, 이것이 소유된 것이다. 반면 존재의식이란 ‘나와 너’ 사이이의 관계가 하나 된 관계를 말한다. 즉 더 이상 ‘주체-객체’ 혹은 ‘주체-대상’이라는 관계가 이니라, ‘내가 곧 너이고, 너가 곧 나인’이러한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장사꾼이 수익을 목적으로 구매한 고호의 그림은 소유의식의 대표적인 한 형태이다. 반면 고호에게 있어서 ‘자신의 그림’은 곧 자기 자신이다. 이는 존재의식의 대표적인 한 형태이다. 장사꾼에게 있어서 그림이 자신의 소유임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외적인 증서(구매확인서)’가 필요하겠지만, 고호에게 있어서 그림이 자신의 것임을 증명하는 그 어떤 외적인 증서가 필요 없다. 왜냐하면 그 그림은 '또다른 자기-자신'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소유의식을 가진 이들에게 있어서 어떤 대상이 자신의 것임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외적인 증표를 필요로 하는 외적인 관계이다. 반면 존재의식을 자긴 사람에게 어떤 것이 자신의 것임을 주장하기 위한 외적인 증표는 전혀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관계는 근본적으로 ‘내적인 관계’여서 자신의 것임을 주장하는 어떠한 외적인 증표도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랑도 이와 같은 것이다. 가령 결혼한 부부의 경우, 서로 내적으로 일치된 사람들에게 있어서 서로가 부부임을 증명하기 위한 ‘결혼 증명서’같은 것은 전혀 무용한 것이다. 이들의 삶은 존재의식에 기반 해 있는 것이다. 반면 서로 내적으로 일치되어 있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결혼 증명서’라는 것이 없다면, 부부 관계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함께 살고 있지만 남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본질적으로 소유의식에 기초해 있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만일 사랑이 소유의식에 기반 해 있다면, 이들의 사랑은 끊임없이 이를 보증해 줄 수 있는 외적인 징표를 필요로 하게 될 것이며, 이는 서로가 서로를 구속하게 될 것이다. 반면 이들의 사랑이 존재의식에 기반 해 있다면, 눈에 보이는 외적인 징표들은 이들의 사랑을 보증해 주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특히 종교적 사랑(charité)에 있어서 이러한 존재의식의 특성은 거의 절대적이다. 왜냐하면 신의 현존은 사랑하는 자의 내면 깊숙히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한 어떠한 외적인 징표도 신 앞에서는 무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인간적인 인간관계에서 이러한 원리는 동일할 것이다. 모든 인간은 소유의식과 존재의식의 사이의 어는 위치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존재의식에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 이것이 인간관계를 돈독히 하는 최선의 방법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