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의 목적론적 중지>란 윤리적 삶과 종교적 삶의 관계를 규명하는 하나의 용어이다. 일반적으로 "보다 큰 선" 혹은 "어떤 특수한 선"을 위해서 일반적이거나 보편적인 윤리적인 규범 혹은 관습을 중지한다는 것을 말한다. 학자들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을 번제의 제물로 바치려고 한 행위>를 윤리의 목적론적인 중지의 대표적인 예로 들고 있다. 자신의 아들을 바치고자 한 아브라함의 행위는 일반적이거나 보편적인 윤리적인 법칙들로는 도저히 정당화 될 수 없는 것으로,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신의 명령에 대한 순종이라는 믿음의 행위로만 설명될 수 있다. 키르케고르는 이를 <믿음의 역설> 혹은 <부조리>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윤리의 목적론적인 중지는 인간적인 삶의 범주에 초월적인 영역 혹은 신성한 영역을 가정할 때만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윤리의 목적론적인 중지는 현실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가령 현행범을 어긴 사람이 자신의 억울함을 주장하기 위해서 사찰이나 성당으로 피신할 경우 경찰들은 그 사람을 잡기 위해서 함부로 사찰이나 성당에 침입할 수가 없다. 이를 "치외법권"이라고 한다. 그리고 스님이 되거나 수녀가 되는 것도 합리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윤리적인 관습'을 어기는 것으로 일종의 <윤리의 목적론적인 중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특정한 종교적인 신념에 근거하여 <양심적인 병역거부>를 선언하는 사람도, 그것이 진정 양심의 발로라고 한다면 <윤리의 목적론적인 중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가끔 수도자들은 신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을 습득하기 위해서, 일종의 수련의 방법으로 의도적으로 비윤리적이고 비-합리적인 행동을 명령한다. 가령 나무를 거꾸로 심어라든가 비가 오는데, 물을 주라든가 하는 등을 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절대순명'의 이름으로 따르는 것이다. 즉 수도자들은 장상의 명령이 아무리 불합리하여도 푸념하지 않고 순명을 하는데, 이를 통해서 신의 명령이 이루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도원의 삶이나 교회에서의 삶이라고 하더라도, 특수한 경우, 즉 신의 명령에 따른 사명감에 의한 것이 아닌한 매사에 이러한 <윤리의 목적론적인 중지>를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은 '신의 이름'을 빌어서 폭력과 이기주의를 실행하는 것이 되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즉 <윤리의 목적론적인 중지>는 어떠한 경우에도 일반적인 삶의 원리나 윤리도덕의 한 법칙으로 삼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윤리의 목적론적인 중지는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세례'나 '할례' 등과 같은 특정한 종교적인 율법에 해당하는 <신법>에 의한 대부분의 행위가 일종의 <윤리의 목적론적인 중지>라고 볼 수 있다. 윤리의 목적론적인 중지에 해당하는 다른 경우는 대다수의 <예언자의 행동>을 윤리의 목적론적인 중지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언자들은 자기민족 혹은 자기백성의 잘못을 질책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위는 대부분의 문화에서 비-윤리적인 것으로 치부되고 있다. 아버지가 죄를 지었다고 아들이 아버지를 고발하는 행위는 '지탄받는 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받지 못한다"는 말도 있다. 이러한 예언자적인 사명은 교회가 세상에 기여하는 가장 고유한 역할 혹은 기능이며, 세상의 부패를 막는 '소금의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다. 즉 <윤리의 목적론적인 중지>가 가장 빛을 발하는 곳은 교회의 예언자적인 역할에서 일 것이다. 하지만 오늘 날 세상에 죄악이 만연하여도 종교는 자신의 예언자적 역할을 잘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오늘 날은 더 이상 진정한 <윤리의 목적론적인 중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만큼 아브라함이 그러했던 것처럼 신앙인들이 신의 음성을 듣고 행하는 일이 극히 드물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