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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개념들

베르그송의 "지속과 직관"

작성자보스꼬|작성시간12.05.03|조회수1,095 목록 댓글 0

 

‘지속과 직관’

 

  진리를 인식하는 방법에 있어서, 경험적 방법과 합리적 방법이 있다. 근대 영국의 철학자들은 경험과학적 방법을 중시하였고, 독일, 프랑스의 대륙의 철학자들은 합리적인 방법을 중시하였다. 어떤 것의 ‘참됨’, ‘진리성’을 고려함에 있어서 전자는 사태에 대해서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감각적이고 검증 가능한 것들에 대해 보다 더 중요성을 부여하였고, 후자는 우리들의 감각은 진실을 통찰하는데 불완전 한 것이라 판단하고, 사유하는 이성의 추리 추론에 보다 더 큰 의미를 부여하였다. 이 두 가지 방법은 어느 것이 보다 우월한 것인가, 혹은 어느 것이 보다 더 적합한 것인가 하는 문제라기보다는 기질상의 문제이며, 인간이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서 어느 것도 간과할 수 없는 두 가지 방법의 차원이다.

  가령 공룡이라는 생물이 과거에 존재 했을 것임을 아무리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잘 설명한다 하여도 만일 공룡의 뼈나 공룡화석 같은 구체적인 증거 자료를 전혀 확인할 수 없다면 우리는 공룡의 존재에 대해서 쉽게 수긍하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살인’과 관련된 분명한 증거들 -칼, 밧줄, 복면, 죽은 사람의 귀중품 등-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만일 살인을 한 시간과 장소에 그 사람이 실제로 있었다는 그리고 왜 그럴 죽여야 했던가에 대한 납득할 만한 해명이 없다면 우리는 그를 살인자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즉 구체적인 경험적 사실들과 합리적인 이해는 항상 진리를 추구하는데 두 가지 기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경험론도 합리론도 경우에 따라서는 진리를 추구하는데 여전히 불완전한 방법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진정 나를 사랑하는가?”라는 문제에 있어서, 경험적 사실 만으로는 통찰이 불가능하다. 그 사람이 아무리 나에게 많은 선물을 했다고 해도, 아무리 자주 나에게 다가와 친근감을 표현했다고 해도 그러한 외적인 사실들만으로 그가 나를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고 이해시킨다 해도, 왜 그가 나를 사랑하고 있는지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완벽하게 설명해 준다 해도 이것이 그가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는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진리 인식에 있어서 또 다른 하나의 방법 -사실 베르그송에게 있어서는 유일한 방법이겠지만 -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그것이 곧 ‘지속’을 통한 ‘직관의 방법’인 것이다.

그렇다면 ‘지속’은 무엇이며, 직관은 또 무엇인가? 베르그송은 강물위로 유유히 날고 있는 새를 보고 있는 한 사람을 가정하면서 이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이 상황에서 베르그송은 세 가지의 지속을 말하고 있다. 우선 “지속이란 어떤 것이 단절되지 않고 계속 된다”는 뜻이다. “시간의 흐름”이란 사실상 베르그송에게 있어서는 ‘어떤 것이 지속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어떤 상태나 상황 운동과 움직임들이 지속하고 있다.

흐르는 강물 위를 날고 있는 새를 바라보는 사람의 경우 세 가지 지속(흐름)이 가정된다.

 

① 강물의 흐름, 새의 비상, 나의 내적인 속삭임(인식들)은 세 가지의 다른 흐름(flux)이며, 이 경우 나의 흐름은 세 가지 다른 흐름(지속)들 중 하나로 고려 될 수 있다.

 

② 강물의 흐름과 새의 비상이 나의 의식에 포착된다는 한에서 이들은 지속일 수 있다. 왜냐하면, 나의 의식에 포착되지 않는 것은 단순한 사태이며 ‘지속’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경우 나의 내적인 지속과 내가 의식하고 있는 외부의 지속이라는 두 가지 차원의 흐름을 고려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강물의 흐름과 새의 비상은 전체적으로 하나의 풍경으로 고려될 수 있기에...

 

③ 그러나 외부의 대상이 지속이기 위해서는 이들은 나의 의식에 포함되어야만 한다는 의미에서 즉 나의 기억의 일부라는 의미에서 나의 지속과 외부의 지속은 ‘동시성’이며 공동실존을 지닌다. 즉 사실상 나의 유일한 ‘지속’이 외부의 두 ‘흐름’을 포괄하고 있으며, 동시에 나의 내적인 흐름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 경우 나의 내적 흐름과 외부 대상들의 흐름을 동시에 수렴하고 있는 세 번째 의미의 흐름을 고려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간단히 도식화하면, 강의 흐름(지속 1) - 새의 비상(지속 2) - 나의 내적인 인지(지속 3) = 강의 흐름+새의 비상 (하나의 외부풍경으로서 지속 1)+나의 내적인 인식(지속2) = 나의 지속(종합적인 하나의 흐름) 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베르그송의 분석은 마치 옛 선비들이 말하는 ‘몰아일체’ 즉 대상과 주체가 완전히 하나가 되어버리는 그러한 경지의 인식일 것이다. 시의 창작에서는 이러한 것을 ‘감정이입’이라고 하겠지만, 단순히 감정을 이입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과 감정을 공유한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지속의 개념은 우리가 더 이상 대상을 분석하고, 추론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대상(자연풍경)과 인식주체(나)가 공동의 실존을 가지게 된다는 의미에서 ‘동시적으로 알게 되는’ 그러한 앎이다. 단김에 공동의 실존을 통해서 어떤 것을 이해하는 것. 이것을 베르그송은 ‘직관’이라고 하는 것이다.

  진리인식의 직관적 방식에서 가장 긍정적인 점은 ‘인식대상’을 왜곡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상을 감각의 차원에서나 이성의 차원에서 재단하거나 평가하지 않고, 대상이 가진 실존과 나의 실존이 하나의 공동의 실존을 회복하게 된다면 -이것이 가능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 이는 대상을 가장 있는 그대로 왜곡 없이 이해하는 것이 될 것이다. 중세철학자들은 어떤 사람의 행위가 ‘선인가 악인가’하는 것은 ‘외적 행위의 양식’으로서는 판단할 수 없고 오직 그 사람의 ‘내적인 의도’만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인간이 어떻게 다른 인간의 내적인 의도를 파악할 수 있을까? 그러나 만일 이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곧 ‘지속’을 통한 ‘직관적인 방법’을 통해서가 아닐까?

베르그송이 말하는 ‘나의 지속’은 다른 대상의 지속을 드러내는 능력이요, 다른 대상의 지속을 포함하면서 나의 지속과 하나이게 하는 것이다. 즉 지속의 특성은 본질적으로 다양성이면서 하나인 것이다. 다양성이면서 동시에 하나이게 하는 이 지속의 특성을 베르그송은 ‘동시성(simultaneite)’이라고 부른다. 아마도 보다 일반적인 용어로는 ‘공동의 실존’이라고 말하는 것이 보다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 서로 다양한 실존을 소유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서로 소통가능하고 서로 완전히 이해 가능한 일치된 실존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와 전혀 다른 실존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공동의 실존’을 회복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것은 빈-마음, 가난하고 겸손한 마음 즉 나의 판단이 틀렸을 수도 있다, 나는 그의 행위나 의도에 대해 알지 못 한다고 생각하는 ‘무소유’의 마음을 통한 진정한 소통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 아닐까?

우리들이 “~의 모임” “~회” “~위원회” “~그룹”이라고 고안하고 창조하고 부단히 새롭게 일을 벌이는 것도 그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이러한 ‘공동의 실존’을 회복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만일 진정한 소통을 거부한다면, 이러한 '모임'이나 '만남'들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소통을 거부하는 인간의 심리에서는 어쩌면 ‘공동의 실존’을 가지기를 거부하는 것이 아닐까? 더 나아가 이는 진실 혹은 진리를 알기를 거부하는 것은 아닐까?

 

 

=눈속의 동행, 화선지에 먹과 한국화 물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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