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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개념들

무 전제의 학문과 지적환경

작성자보스꼬|작성시간12.05.15|조회수658 목록 댓글 0

 

‘無 전제’의 학문과 ‘지적 환경’

  지난해에 모교의 ‘글쓰기 연수’에 참석한 적이 있다. 늘 약간의 의무감으로 참석하였는데, 당시는 철학과의 한참 선배이신 ‘어느 교수가 ‘글쓰기와 철학교육’이라는 주제로 발표가 있어서 내심 기대하며 참여 하였다. 그런데 거기서 늘 나의 마음한 구석에 짐처럼 자리 잡고 있는 ‘화두’를 다시 접하게 되었다. 그것은 “철학은 진정 전제가 없는 학문인가?”라는 것이었다. 철학을 한지 30년이 넘었지만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이 질문은 사실상 무의미한 질문이겠지만 그러나 그 담고 있는 의미가 현실의 문제들과 부딪힐 때 작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 아닌 문제’로 남아 있는 것이다. ‘철학이 無전제의 학이다’라는 말에는 철학자는 순수하게 자신의 이성적인 사고로부터 출발을 해야 하며,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기존의 어떤 진리들을 진리로 수용하면서 출발해서는 안 된다는 ‘주체적인 사유’ ‘자신으로부터의 사유’에 대한 촉구를 함의하고 있다. 아마도 이것이 근대철학의 정신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주체성’의 문제를 ‘無 전제’와 연결시키는 것은 ‘자세나 태도’의 문제를 ‘논리적인 방법론’과 연결시키는 범주의 오류를 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엄밀히 따져보면 ‘무전제의 학’이라는 말 자체가 하나의 자기모순을 담고 있는 용어이다. 왜냐하면 ‘무전제의 학’이란 ‘철학은 결코 어떤 전제를 가지고 출발해서는 안 된다’고 선언하는 것으로, ‘전제를 가지지 않는 학문이라는 조건’이 철학의 유일무이한 전제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즉 단순히 어떤 하나의 전제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가장 심각한 절대적인 전제를 가지고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無 전제’로서의 전제는 모든 ‘응용철학’들을 오류로 간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가령 ‘윤리철학’이라는 것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살아가야할 올바른 법칙이나 준칙’으로서의 ‘윤리’가 존재한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윤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윤리철학’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철학’이라는 언어도단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러한 관점에 대해 혹자는 ‘전제 없이 출발하여 우선 윤리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지 질문을 시작할 수 있다’고 반박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것이든 하나의 ‘윤리가 있을 수 있다’는 결론을 도출하려면 이러한 결론을 뒷받침하는 혹은 가능하게 하는 ‘전제’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즉 어떤 전제도 가정하지 않으면 어떠한 결론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정상적인 이성의 논리인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건, 인간의 사유가 최초로 출발하는 순간에는 어떤 식으로든 하나의 전제를 가지지 않으면 사유가 불가능하다. 이는 인간의 사유가 항상 ‘~에 대한 사유’ 그리고 인간의 의식이 항상 ‘~에 대한 의식’이라는 사유와 의식의 지향성에 의해서 필연적인 것이다. 내가 사과에 대해서 사유하기 위해서는 ‘사과는 과일이다’ ‘사과는 먹을 수 있다’ ‘사과는 몸에 좋은 것이다’라는 최초의 몇 가지 분명한 사실들이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러한 세 가지 모두를 전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과’라는 대상에 대한 최소한의 어떤 것 ‘사과는 자연의 나무에서 열리는 무엇이다’ ‘사과는 둥근 것이다’는 등의 전제가 있어야 한다. 만일 아무런 전제가 없다는 것은 ‘사과’라는 말 자체를 전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이는 단순히 ‘저기 무엇이 있다’고 만해야 할 것인데, 이 경우에도 엄밀히 보면 ‘무엇이 없지 않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따라서 전제 없이 출발한다는 것은 마치 빛이 전혀 없는 ‘깜깜한 밤’에 무엇을 보아야한다는 것과 같은 모순된 논리인 것이다. ‘무엇을 보다’는 말에는 이미 ‘빛이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마찬가지로 무엇을 ‘사유한다’는 말에는 이미 최소한의 어떤 분명한 ‘전제들’이 있다는 말이다. 즉 단적으로 말해 ‘전제 없이 사유하라’는 말은 ‘불을 켜지 말고 보라’는 소리와 같은 것이다. 결국 ‘철학은 無 전제의 학’이라는 명제는 그 자체 자기모순적인 명제인 것이다.

  어떤 것을 사유하기 위해서는 사유가 작동하기 위한 가장 일반적인 상식적인 지식들 즉 전제들이 주어져야만 하고 이것을 가브리엘 마르셀은 ‘지적인 환경’이라고 부른다. 이 지적인 환경들은 ‘상식적인 앎들’ 혹은 ‘감각적으로 분명한 사실들’ 혹은 누구나 인정하는 ‘믿음들’ 등이다. ‘삼각형의 세 각의 합은 180도’라거나 ‘양 지점의 최단거리는 직선’이라거나 혹은 ‘태양은 동쪽에서 떠오른다’는 앎들은 모두 상식적인 앎들이다. 그리고 ‘꽃은 아름다우며, 쥐가 썩어가는 모습은 역겨운 것이다’는 사실들은 감각적으로 분명한 사실들이다. 나아가 ‘사람들은 행복하기를 원하다’거나 ‘부모는 자식이 잘되기를 바란다’는 것은 누구나가 인정하는 ‘믿음들’이다. 이러한 ‘건전한 지적환경’이 부정된다면 인간적인 삶이란 존재할 수가 없으며, 또한 철학도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가끔은 데카르트 같은 철학자가 이러한 건전한 지적 환경자체를 의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이러한 지적환경을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다 분명한 사실들을 획득하기 위한 방법론적인 의심(방법적 회의)’이지 의심을 위한 의심이 아니다. 그 어떤 철학자들도 이러한 건전한 ‘지적환경’을 부정하면서 철학을 시도할 수는 없다. 한때 희랍철학자들 중 ‘궤변론자’들이 이러한 건전한 지적 환경을 부정하려고 한 적이 있다. 그들은 ‘날고 있는 화살은 날지 않는다’고 하고, ‘경주에서 한 번 뒤쳐진 토기는 결코 거북이를 앞지를 수 없다’고 하기도 하였다. 중국의 명가들도 이와 유사한 진술을 하였는데, 그들은 ‘동쪽은 동쪽이 아니다’거나 ‘오늘 가서 어제 온다’는 이상한 말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말들은 사실상 건전한 상식을 부정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일상인들의 관습적이고 습관적인 어떤 선입견을 부수기 위한 것일 뿐이다. 그리고 이들이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도 사실은 어떤 전제들 혹은 어떤 지적 환경을 통해서 논리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결국 철학이 정상적인 철학이기 위해서는 건전한 지적환경에 기초하고 있어야 하며, 이러한 건전한 지적 환경에 기초한 철학은 건전한 ‘전제’들 위해서 출발하고 있다. 만일 그 누구도 상식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전제들로서 출발하거나 아무런 전제도 없이 출발하는 정신이 있다면 이는 모든 소통이 단절된 사유로 철학자들은 이를 ‘독단주의(Solipsisme)’이라고 한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독단주의’는 건전한 하나의 사상이라고 보기는 힘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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