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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개념들

존재로서의 善 그리고 소극적인 惡과 적극적인 惡

작성자보스꼬|작성시간12.05.27|조회수393 목록 댓글 0

<존재로서의 善 그리고 소극적인 惡과 적극적인 惡 >

  중세의 철학자들은 선과 악에 대한 독특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그들은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나 존재하는 만큼은 ‘선’하다고 생각하였는데, 이는 존재와 선을 동일시하거나 최소한 ‘호환’되는 개념으로 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중세철학자들은 ‘존재’를 선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한 것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自然惡’에 대해 생각해보자. 태풍이나 지진 등이 발생하여 사람을 해치는 경우, 사람을 해치는 것이므로 이는 일종의 악이다. 이를 자연악이라 한다. 그리고 좀 더 고차적인 자연적인 악이 있을 수 있다.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어떤 일정한 ‘자연법’의 법칙을 통해서 존재한다. 가령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속담은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를 가지는데, 일정한 원인은 일정한 결과를 유발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이러한 상식적인 법칙이 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콩 심은데 콩이 나지 않고, 기형적인 콩이 나거나, 열매를 맺지 않는 콩이 나거나 할 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콩이 정상적으로 맺히긴 하지만 독을 포함한 콩이 맺혀서 사람들을 해칠 수 있다. 이러한 경우는 - 그 원인은 알 수 없다할지라도 - 정상적인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것으로 모두 자연악이다. 이러한 자연적인 악의 경우를 제외하고 ‘자연’이란 인간을 이롭게 하는 것으로 모두 선한 것이다. 라틴어에서 ‘선한 것’을 ‘bonum’이라고 하는데, 이 ‘보눔’의 개념 안에는 윤리적으로 선한 것 뿐 아니라 ‘좋은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자연의 일정한 법칙에 따라서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한 존재하는 것은 모두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송이 들꽃은 그 자체 우리에게 아무런 실용적인 가치가 없지만, 보기에 좋은 것이어서 역시 ‘bonum’ 즉 ‘선’인 것이다. 심지어 ‘파리’나 ‘위계양’ 같은 것도 자연적으로 즉 자연의 법칙에 합당하게 존재하는 것이라면 좋은 것이다. 만일 파리가 한 마리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구더기가 죽은 동물들을 먹어치우지 못하기 때문에 아마도 지구는 온갖 미생물이나 전염병으로 인해 멸망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위’가 탈이 났는데, 전혀 아프지 않다면 결국 사람들은 위가 망가져서 더 이상 살 수가 없을 것이다. 이처럼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정상적인 것은 그 자체로 ‘좋은 것’ 즉 ‘선한 것’이다. 그래서 ‘존재’는 곧 ‘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이 ‘존재하는 만큼 선한 것’이란, 존재하다는 것의 의미를 이러한 자연적인 선의 개념에서 바라본 것이다. ‘병’이란 ‘건강’의 不在이므로 병은 그 자체 하나의 ‘자연악’이며, 반면 건강은 그 자체 하나의 ‘자연선’인 것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은 살아 있는 만큼 ‘선한 것’이며, ‘병이 든 만큼’ 자연적인 악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마찬 가지로 어떤 사람이 나이나 위치에 걸맞은 어떤 윤리적인 덕목을 잘 갖추고 있다면 이는 도덕적인 선이다. 반면 어떤 사람이 응당히 지녀야할 도덕적인 덕목을 갖추고 있지 않다면 이는 그 자체 윤리적인 하나의 악이라고 볼 수 있다. 가령 전혀 마을 사람을 사랑하지 않거나 구성원들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마을 이장이 되어 있거나, 단체장을 맡고 있다면 이 사실 자체가 일종의 ‘윤리적인 악’인 것이다. ‘악’이란 꼭 행위로 어떤 결과를 유발하는 것이 아닌, ‘악한 결과’를 가능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모든 것은 일종의 윤리적인 악이라고 볼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소극적인 악’의 개념 혹은 ‘존재론적인 악’의 개념이다. 매일 같이 남을 속이고 거짓말을 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은 비록 오늘은 아직 아무도 속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남을 속이고자 하는 습성을 가지고 살기에 이는 ‘소극적인 악’이라고 볼 수 있다. 만일 악마가 존재한다면 - 사실 순수한 악이란 존재할 수가 없지만 - 그가 악마라는 이유로 그는 아무에게도 현실적인 악을 행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의 존재 자체가 (소극적인) 악일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인간은 존재한다는 이유로 ‘선’ 그 자체이겠지만, 또한 완전한 인간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인간은 정도의 차이를 달리하여 소극적인 악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누구이건 한 인간을 ‘나쁜 사람’이나 ‘악한 사람’으로 규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존재하는 만큼 그에게도 ‘선한 구석’은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수많은 사회악은 특수하게 인간의 의지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다. 한 인간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타인의 이익을 해치는 경우를 ‘적극적인 악’이라고 한다. 즉 의도적으로 악을 유발시키는 행위를 적극적인 악이라고 하는데 대개의 사회적인 악은 이러한 ‘적극적인 악’이라고 볼 수 있다. 적극적인 악은 인간의 나쁜 의지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라는 점에서 가장 심각한 것인데, 그것은 한 인간의 나쁜 의지는 타인의 나쁜 의지를 유발하는 전염병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이유가 불명확한 ‘묻지마 범죄’의 경우 대개 타인으로부터 당한 억울한 감정을 또 다른 타인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복수의 감정’으로부터 발생한 것이어서 악한 의지에 의해 발생한 또 다른 악한 의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 사회의, 한 마을의, 한 단체의 독재자는 가장 심각한 악을 유발하는 사람이다. 한 사람의 강도는 한 번에 한 사람에게만 해를 끼치지만, 한 독재자는 한 번에 구성원 대다수에게 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구성원 전체를 아프게 하는 이러한 독재자는 동시에 여러 구성원들의 복수의 감정을 유발하게 되고, 이러한 구성원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아픔을 끼치게 되기 때문이다. 선진국일수록 지도자의 덕목으로 능력 보다는 도덕적으로 훌륭한 인품을 꼽고 있는데, 한 사람의 선한 덕망있는 지도자는 구성원 전체를 선하고 덕망있는 사람으로 만들지만 그 반대는 끔찍하기 때문이다.

  프랑스 말에 ‘똘레랑스(tolerance)’라는 것이 있다. 이는 나와 다른 것, 이해할 수 없는 문화나 습성 혹은 감정적으로 거북한 어떤 태도나 행위 등을 ‘인내하고’ ‘참아주고’ ‘수용하는’ 정신적인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가령 아프리카 흑인들이 시끄럽게 전철에게 떠들거나 혹은 중국인들이 버스 안에서 음식을 먹거나 해도 ‘저들의 문화가 달랐으니 그렇겠지’ 하며 관용을 베푸는 것이다. 이러한 ‘똘레랑스’의 정신은 한 개인이 소유한 ‘소극적인 악’에 대한 용서의 정신을 유발한다. 소극적인 악이란 의지와 무관하게 자신이 처한 환경이나 상황 때문에 발생한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즉 ‘나 역시 저러한 환경이나 상황에 처해 있었다면 저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고 생각하는 ‘너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관대한 마음을 가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어에는 똘레랑스와 동시에 역시 ‘엥똘레랑스(in-tolerance)’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참을 수 없음’ ‘용서할 수 없음’ ‘수용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엥똘레랑스’의 정신이 적용되는 곳은 대개 ‘적극적인 악’의 경우이다. 즉 의도적으로 혹은 의지적으로 타인이나 공동체의 ‘선’을 해치는 행위에 대해서는 용서할 수 없다는 정신이다. 이는 적극적인 악에 대한 불관용의 정신으로 ‘프랑스 혁명’의 정신이며, ‘레지스탕스’들의 정신이었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수많은 적극적인 악들을 묵과하면서 작은 소극적인 악에 대해서 열을 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자신의 나쁜 의지, 의도적으로 공동체의 선을 해치는 ‘이기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적극적인 악’에 대해서는 불문하면서도 문화적 습관이나, 상황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발생하게 되는 작은 소극적인 악들에 대해서 열을 올리는 것이다. 수많은 직원들과 그 가족들을 죽음의 사지로 내몰면서도 자신의 '의도적인 악'은 보지 못하고, 살기위해서 저항하는 이들이 창문을 부셨다고, 책상을 부셨다고 그리고 작업을 방해 하였다고 고소를 하고 엄청난 벌금을 물리곤 하는 악덕기업가들 혹은 정 반대로 어떻게든 회사와 직원들의 삶을 살리려고 온 마음을 다해 동분서주하는 기업과 직원들의 마음을 몰라주고 회사야 파산하든 말든 오직 자신들의 안위와 이익을 위해 고액의 연봉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요구를 하며 파업을 주도하고 회사를 파국으로 몰고가는 귀족노조들이 그 예일 것이다.    

  비록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적극적인 악을 용서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이 적극적인 악은 그 자체의 원리에 의해서 보다 큰 적극적인 악을 전염시키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도덕적인 사람이나 한 사회나 한 단체의 지도자가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오늘 나의 행위가 의도적으로 타인의 선을 해치는 것이 아닌가?’라고 묻는 것이다. 성경에는 ‘손이 죄를 짓게 하면 손을 잘라버리고, 발이 죄를 짓게 하면 발을 잘라버리고...’라는 무시무시한 말이 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이는 지극히 당연한 진리일 것이다. 만일 나로 하여금 적극적인 악을 유발하게 하는 것이 ‘돈’이라면 ‘돈’을 버려야 할 것이요, 그것이 ‘명예’라면 ‘명예’를 버려야 할 것이며, 그것이 ‘권력’이라면 권력을 버려야 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나는 그 ‘돈’이나 ‘명예’ 혹은 ‘권력’ 때문에 결국 내 존재를 상실하고 말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선, 그것은 곧 나의 존재이다. 내가 나의 마음 속에 이웃과 타인을 사랑하는 선한 마음이 가득할 때, 나의 존재는 풍요로울 것이나, 그 반대라면 내가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한다 할 지라도 나는 껍대기만 가진 내면이 텅빈 '비-존재'가 되어 버릴 것이다. 부자이지만 존재가 매마른 사람 보다는 가난하지만 풍요로운 존재를 가진 자가 행복한 것임은 너무나 자명한 진리임에도 경쟁사회에서는 우선 남보다 앞서고자 하고 남보다 많이 소유하기 만을 원한다. 그래서 한국사회는 경제발전은 자랑하지만, 행복지수에서는 늘 부끄러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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