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철학적 개념들

키르케고르 사상의 중요개념 1 : 실존에 관하여

작성자보스꼬|작성시간22.08.07|조회수953 목록 댓글 0

『죽음에 이르는 병』 2쇄 출간하면서, 말미에 추가한 ‘키르케고르 사상의 중요개념’입니다.

 

  ※ 저작권 문제로 복사는 할 수 없도록 하였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 부록 : 키르케고르 사상의 중요 개념들 1

- 실존에 관하여 -

 

󰋪 실존 (existence)

  실존은 본질(essence)에 대립하는 용어이다. 본질이란 ‘핵심적인 것’ ‘규정된 것’ ‘무엇(what)에 해당되는 것’ 혹은 ‘사전적인 정의’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본질은 다양한 개별자들로부터 공통된 것을 추상한 것을 의미하거나 다양한 개별자들에게 공히 ‘이상적인 모델’이 되는 것을 지칭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본질은 항상 구체적인 한 개별자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반면 ‘실존’이란 구체적이고 실재하는 한 개별자의 ‘실제적인 상황’ 즉,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그리고 다양한 관계성 중에 존재하는 개별자의 양태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존이란 항상 변화와 운동 중에 있는 것이며, 왔다 갔다 하는 것이며, 안정되지 않고 흔들리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실존이란 본질적으로 규정이나 체계가 불가능한 것이며 항상 진행형 중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분명하고 확고한 본질의 개념’에는 대립하는 개념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고 하였고, 가브리엘 마르셀은 실존으로 인간을 고찰한다는 것은 “문제를 안고 있는 인간(l’homme problèmatique)”으로 인간을 보는 것이라 한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점 더 적극적으로 ‘실존은 가능성이고 실현해야 할 과업(사명)’이라고 말하고 있다.

  실존은 또한 ‘진실한 것’ ‘의미를 가진 것’ ‘소중한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현재의 존재를 채우고 있는 것은 나에게 의미가 있는 것, 나에게 소중하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그런 한 이것이 현재의 진실한 나의 (내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존은 항상 이상적인 존재로서의 ‘본질’과는 거리가 있으며, 그럼에도 또한 궁극적으로는 그 이상적인 모습(본질)을 지향하고 있다. 그래서 실존은 근본적으로 ‘실현 중에 있는 것’ 또는 ‘변화의 과정 중에 있는 것’으로 나타나며 ‘가능성의 것(le possible)’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즉, 인간을 실존으로서 고찰할 때 인간은 ‘실현해야 할 과업’처럼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인간의 실존이 실현해야 할 것은 ‘자아의 형성’이며 이는 또한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의 일치,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의 일치, 다시 말해 ‘신과 인간의 일치’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키르케고르는 이러한 실존의 진리를 마주할 때 인간은 ‘공포’를 느끼기도 하고 때로는 ‘전율’을 느끼기도 한다고 통찰하고 있다.

 

󰋪 실존의 3단계

    인간의 실존이 궁극적인 목적(télos)을 지향하는 것이라는 차원에서 실존은 본질적으로 상승하는 것처럼 나타나고 여기에는 3가지의 단계를 가진다. ‘실존의 3단계’는 ‘삶의 3단계’와 일치한다. 왜냐하면 각 실존의 단계에서는 각각에 해당하는 고유한 삶의 형태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실존의 양태는 ‘심미적 실존’ ‘윤리적 실존’ 그리고 ‘종교적 실존’이다. 인생에 있어서 실존적인 것의 첫 단계는 심미적 실존인데, 심미적 실존이란 자신의 삶에서 의미가 있거나 가치 있는 것은 곧 심미적인 것 혹은 미학적인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윤리적 실존의 단계인데 여기서는 ‘올바름’ ‘정의로움’ ‘선과 악’ ‘양심의 가책’ 등이 그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가치로 그리고 진정 의미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 삶이다. 하지만 이러한 윤리적인 실존의 단계에서도 인간의 가장 깊은 실존의 문제(구원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는 오직 인간과 절대자 사이의 올바른 관계정립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가 자각되고 부각되는 단계가 종교적인 실존의 단계이다. 물론 이러한 세 단계의 실존은 마치 서로 다른 3개의 실존이 하나에게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것처럼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편의상 그렇게 분석하는 것이며, 인간의 실존은 항상 하나의 실존이며, 3가지의 실존은 하나의 실존이 가지는 질적인 특성 혹은 다양한 양태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윤리적 실존의 단계에서도 심미적 실존의 문제는 여전히 존속하며, 종교적 실존의 단계에서도 ‘심미적 윤리적 실존의 문제’눈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다만 종교적 실존에서는 앞선 두 가지 실존의 문제가 절대자 앞에선 단독자의 관점에서 문제가 부각된다. 예를 들어 윤리적 실존에서 문제가 되었던 범죄(crime) 행위가 절대자 앞에서 문제가 될 때는 ‘죄(sin)’의 문제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 심미적 실존 (esthetic existence, l’existence esthétique)

  심미적 실존에서의 삶의 양태는 ‘심미적인 것’ 혹은 ‘미학적인 것’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자신에게 의미가 있거나 가치가 있는 것은 감각적 혹은 감성적인 것이다. 주로 감성적인 것에 있어서 매력이 있는 것 혹은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면서 만족하는 삶의 양태를 말한다. 아직 윤리적인 삶에 대한 각성이 이루어지지 않은 단계로 ‘올바름’ ‘선악의 개념’ ‘정의감’ 또는 ‘양심의 가책’ 등이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행위나 삶에 대한 책임성의 개념이 결여되어 있다. 그럼에도 단순히 생존을 위한 삶이나 생물학적인 차원의 삶보다는 훨씬 높은 것이며, 의미가 있고 온 마음을 다해 추구할 무엇이 있다는 차원에서 동물적인 것보다 훨씬 고상한 것이다. 그리고 키르케고르에게 있어서는 비록 겉으로는 윤리적 차원의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 지라도 즉, 정의감을 말하고 선악에 대해서 논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체계적이고 탁월한 사상을 제시한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자신의 개별적인 삶과 무관하거나 자신의 삶의 원리가 될 수 없다면 여전히 심미적 차원의 실존에 머물고 있다고 보고 있다. 왜냐하면 실존이란 한 개별자의 내밀한 존재의 양태, 자신의 개별적인 삶의 질적인 특성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완벽한 체계를 갖춘 헤겔의 ‘역사철학’을 여전히 심미적 단계에 머물고 있다고 비꼰 것이다.

 

󰋪 윤리적 실존 (ethical existence, l’existence éthique)

  윤리적 실존의 단계에서는 한 개인이 자신의 인생에서 참된 자유의 개념이 등장하고 진정한 자기 존재를 외면하는 것을 멈추고 책임감 있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단계이다. 가령 예술가의 경우 다만 미적 경험에만 매료되지 않고 책임감을 가지면서 ‘좋은’ 혹은 ‘훌륭한’ 작품을 산출하고자 노력하게 된다. 윤리학자라면 다만 선과 악 혹은 정의나 권리 등에 대해서 ‘논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자신의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삶 안으로 데려와 자신의 ‘삶의 고민으로 그리고 선택의 노력으로’ 이루고자 하는 책임성 있는 삶을 가지고자 한다. 여기서 자유의 개념이 강하게 부각되는데 ‘훌륭한 것’이나 ‘윤리 도덕적인 것’을 자신의 삶으로서 ‘선택’하여야 하는 기로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 선택은 오직 자신의 자유의지에 달린 문제이기 이러한 선택 앞에서 망설이는 자는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고 또 자유롭지 못함을 느낄 수도 있다. 키르케고르는 이러한 선택의 어려움 혹은 자유에 대한 책임성의 무게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스스로 자유의 문제가 부각되지 않는 심미적 실존으로 퇴행하기도 한다고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아무리 윤리적인 삶을 충실히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여전히 실존의 공허를 체험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인간의 자아란 본질적으로 ‘정신’이 되는 것에 있으며, 이는 무한, 영원, 절대 등과 같은 형이상학적 지평으로 열려 있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윤리적 실존만으로는 ‘구원’을 보장할 수가 없는 것이다.

 

󰋪 종교적 실존 (religious existence, l’existence religieux)

  종교적 실존의 단계에서는 인간 실존이 가장 심오하고 근원적인 문제가 삶의 문제로 부각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충분히 정신적(영적)으로 되어 구원의 문제를 자각하는 단계이다. 이는 한 개별자와 절대자와의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면서 진정한 정신(spirit)으로 거듭 태어나는 단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종교적 삶이란 충실하게 교회에 가서 저녁기도를 드리거나 교회가 명하는 율법을 잘 따르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하여 나의 실존에 깊이 관여하시는 절대자(하나님)의 손길을 수용하는 것을 말하며, 진정으로 유한자와 무한자, 시간적인 존재와 영원한 존재와의 관계가 올바르게 정립되는 단계이다. 이러한 때에 인간은 비로소 ‘정신’으로서의 자아를 충만하게 정립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키르케고르는 여기서 인간의 자유가 가진 그 의미가 극에 달하며 이를 ‘선택하는 것은 광기’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이러한 자유 앞에서 느끼는 중압감을 표현하기 위해서 ‘공포와 전율’이라는 개념을 고안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공포와 전율’ 앞에서 굴복하여 자아정립을 회피하는 혹은 절대자를 외면하는 정신을 ‘죽음에 이르는 병 즉, 절망’이라고 표현하였다. 반면 믿음을 통하여 절대자와의 관계를 올바르게 정립하는 자는 진정한 해방 (죄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체험하고 신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며, 자신의 삶을 신적 사랑의 삶으로 이끌어 가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