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다임과 이데올로기
패러다임이란, 영어의 ‘paradigm’을 말하는데, 어떤 한 시대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테두리로서의 인식의 체계, 또는 사물에 대한 이론적인 틀이나 체계를 의미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패러다임은 특정한 한 시대의 견해나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이론적 틀’을 의미히며, 시대가 바뀌면 이러한 패러다임도 바뀔 수밖에 없다. 그래서 ‘패러다임’은 일종의 잠정적인 진리 혹은 유행사상 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위키벡과에서는 이 용어가 토마스 쿤이 과학적 진리의 특징을 설명하면서 사용하였다고 말해주고 있다. “토마스 쿤은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이론 체계가 변화하는 과정을 과학혁명의 단적인 예로 제시하였다. 쿤은 이러한 과학 이론의 변화는 어느 한 이론이 그르고 다른 한 이론은 옳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당대 사회 전체가 갖는 신념과 가치체계가 변화한 것이며, 문제 해결 방법이 달라진 것이라 파악한다. 이러한 개념에 따르면 현대의 표준 모형 역시 하나의 패러다임일 뿐 절대적인 진리는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위키백과-
과학의 진리가 본질적으로 패러다임 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과학은 현상을 고찰하여 이러한 현상을 아우를 수 있고,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이론을 고안해 내기 때문에, 정립된 모델로 설명 불가한 새로운 현상이 발견되거나, 혹은 더 나은 설명의 구조가 발견되면 즉각 새로운 이론적 모델(패러다임)로 교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반면 철학에서는 인간의 사유를 통해 현상의 원인이 되는 불변하는 근본적인 원리나 법칙 등도 추구하기에 페르다임보다 더 확고하고 영속하는 “준 진리(quoisi veritas)”라고 할 수 있는 앎을 추구한다. 예를 들어 형이상학이 추구하는 것은 대개 이러한 준 진리라고 할 만한 것이다. “인간은 사유하는 존재이며, 도덕적인 존재이다.” “하나의 존재는 가능성과 현실성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등의 앎은 모두 진리라고 할 만한 변치 않는 앎들이다.
한 시대가 보다 철학적 특성을 상실하게 되면, 패러다임이 난무하여 서로 갈등과 대립이 일상화 되고, 보다 철학적 특성이 강하게 되면 자연 진리에 대한 추구가 강하며 대립과 갈등이 소멸된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이 진리인지, 무엇이 페르다임인지를 잘 구별할 필요가 있다. 진리는 상대적이 될 수 없는 것이며, 고수해야 하는 것이지만, 패러다임은 항상 상대적이고 다른 사유를 긍정하고 다양성을 긍정해야 한다. 한마디로 패러다임이 일반성의 지평에 있다면 진리는 보편적인 지평에 있다.
역사적 사실들을 혹은 현상들을 서로 연결하여 하나의 가치부여나 판단을 가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패러다임을 의미한다. 정치적으로 이러한 패러다임은 서로 대립하는 두 집단 가령 ‘좌파나 우파’에게는 당연히 반대되는 틀로서 등장할 수 밖에 없다. 이를 마치 진리인양 자신들의 패러다임을 진리처럼 고수하며, 타인의 주장을 거짓처럼 주장하게 될 때, 이것이 곧 ‘이데올로기(idee-ologie)’가 된다. 이데올로기는 본질적으로 정신 속에 있는 ‘이론적인 틀’ 혹은 ‘설명을 위한 가능한 모델’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이것이 마치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거나 존재했던 것과 동일시 할 때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를 진리처럼 간주할 때 다른 모든 가능한 사유나 이론적인 틀을 억압하는 도구나 수단이 되기에 매우 나쁜 것이며, 일종의 반-철학적인 것이 된다. 진리는 절대적인 것이며, 패러다임은 상대적인 것이다. 진리는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지만, 패러다임은 항상 상호 보완적이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사회가 ‘갈등 공화국’이라는 말을 듣게 되는 것도, 어떻게 보면 ‘패러다임’에 지나지 않는 이념이나 이론의 틀을 마치 ‘진리’처럼 서로에게 주장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똘레랑스란 이렇게 상대적인 진리나 상대적인 가치를 ‘인정하고 수용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 함께 힘을 합쳐서 함께 공생 공존하며, “함께 가자”라고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인간다움이 빛을 발하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