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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이야기

엘비라 이야기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

작성자보스꼬|작성시간17.07.21|조회수474 목록 댓글 0

=키르케고르의 엘비라 이야기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 =

 

나무들은 인간들보다는 훌륭하다. 왜냐하면 인간들이란 쑥덕거리지만, 나무들은 탄식하고 침묵을 지키니까?”

 

키르케고르의 이것이냐, 저것이냐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책에서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는 제목을 가진 장에서는 키르케고르의 특유한 풍자가 드러나 있다. 하지만 이 풍자는 참으로 아름다운 풍자이다. 그 풍자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영국의 어느 곳에서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는 묘비가 발견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묘에는 시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도대체 이 묘지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사람들은 너무나 궁금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들의 협회를 설립하고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누구였던가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여러 명의 사람들을 후보군에 올리고 그가 얼마나 불행하였던가를 따져보기 시작하였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들의 후부군 중에는 '니오베' '안티고네' '욥' '유다' '탕자의 아버지' 등이 나오고 그리고 <그림자 그림>에서 소개했던 세명의 여성들을 소개하는데, 그 중에서 두 번째로 나오는 한 여성이 유독 동정심을 유발하였다. 그녀의 이름은 엘비라이다.

    엘리바는 오페라 돈 조바니에 나오는 돈나 엘비라이다. 엘비라는 원래 수녀였으나, 돈 후안이 그녀를 유혹하여 수도원의 평화에서 이끌어 낸 비극적인 인물이다. 돈 후안은 그녀를 유혹하였고 그녀는 그의 사랑을 믿고 그와 함께 살기 위해 일체를 단념하였다. 하지만 돈 후안은 그녀를 떠났다. 돈 후안이 그녀를 속였고, 그녀에게서 일체를 약탈하고 불명예 속에 던져 넣은 사기꾼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래서 엘비라에게는 증오와 절망과 복수의 감정이 가득 차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엘비라의 모습은 독자들이 상상하는 엘비라의 모습이다. 만일 보다 더 큰 어떤 힘이 돈 후안을 그녀에게서 빼앗아 갔다면 그녀는 그를 증오하거나 그에 대한 복수심을 가질 수가 없다. 그녀의 비극은 사건의 원인을 알 수 없다는 것에 있다. 숨겨진 엘비라의 진정한 모습은 어떤 것일까? 저자는 숲속을 헤매는 엘비라를 만난다는 설정을 한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위엄이 넘치고 당당한 시선과 그녀의 매우 고귀한 정열을 발견한다. 그리고 외친다. 불쌍한 엘비라! 나무들은 무엇인가를 찾아냈을까? 나무들은 인간들보다는 훌륭하다. 왜냐하면 인간들이란 쑥덕거리지만, 나무들은 탄식하고 침묵을 지키니까?” 돈 후안에게 버림받은 엘비라가 어찌하여 위엄 넘치는 당당함을 지니고 있으며, 또 그녀가 지닌 고귀한 정열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왜 나무들은 사람들 보다 위대하다고 하는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어렴풋하나마 후일 키르케고르의 다른 저서들에서 등장하게 될 믿음의 기사의 전형(前形)을 볼 수 있다. 비록 버림을 받았지만 그녀는 돈 후안을 진정으로 사랑하였다. 그 사랑은 진실이었다.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하였고, 자신의 영혼의 구원보다 더 소중한 것이었다. 엘비라는 그 사랑 때문에 명예와 일체의 것을 포기하였다. 그런데 돈 후안은 불성실하였다. 아니 알 수 없는 이유로 떠나 버렸다. 이제 그녀는 모든 것을 상실하였다. 그녀가 속세를 택하였을 때, 그녀는 천국을 잃었고, 돈 후안이 그녀를 버렸을 때, 그 속세마저 잃었다. 그녀는 세상에서 죽은 것이다. 만일 이것이 신의 명령과 약속 때문이었다면 그녀는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기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외형적으로 그녀의 포기는 한 남자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비록 속임수의 희생양이 되고, 버림받았다 해도 그럼에도 그녀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고귀한 것은 그녀 자신의 사랑이었다. 돈 후안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무엇 때문에 그녀를 떠났는지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녀에게 있었던 그 사랑은 순수한 것이었고 진실한 것이었고, 세상 그 어떤 사람에게서도 볼 수 없는 고귀한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 그녀로 하여금 위엄과 고귀함을 느끼게 해 준 것이었다. 나무들이 위대한 것은 바로 그 침묵에 있다. 왜냐하면 아직 그녀의 내면에 무엇이 있는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일체의 것을 상실한 그녀에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은 오직 두 가지 가능성에 있다. 하나는 윤리적인 범주 밑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여기서 윤리적인 실존과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른 하나는 돈 후안에 대한 그녀의 사랑을 즉 비애를 간직하고 사는 것이다. 하지만 윤리적인 범주로 나아간다는 것은 돈 후안을 사기꾼으로 판단하는 일이며, 이는 그녀를 절망하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경우 그녀의 고귀한 사랑은 허상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절망을 피하고자 한다면, 그녀는 돈 후안에 대한 사랑을 놓지 말아야 한다. 저자는 여기서 엘비라가 비애를 간직하고 살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비애는 그녀의 영혼의 양식이 될 수가 있으며, 살아 있는 허다한 남편들보다 더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엘비라는 여기서 그 어느 것도 선택하지 못한다. 이 두 가지 가능성 사이에서 그녀는 끊임없이 망설이고 있다. 침몰하는 배 안에서 무엇을 진정으로 구해야할 지를 알지 못하는 선원처럼 그녀는 두 가지의 가능성 사이에서 망설이고만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그녀의 비극적 삶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엘비라보다 훨씬 동정심을 유발한 더 불행한 한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는 칭호를 받을 만한 사람이다. 키르케고르는 이 사람은 아직 이름도 모르는 알려지지 않는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이 알려지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그는 어떤 친구도 자신에게 매어두지 못하고, 어떤 여인도 그를 사랑하지 못하고, 어떠한 동정도 그의 고통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어떤 눈도 그의 아득한 비애를 꿰뚫지 못하고, 어떠한 귀도 그의 은밀한 탄식을 듣지 못하는 그러한 사람이다. 그 보다 더 세상을 사랑한 사람이 없었지만, 누구도 그 사랑의 비밀을 알지 못하였고, 살아 있는 인간은 누구도 그의 사랑에 응답하지 못한 고독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들이, 희망을 상실한 사람들이, 임종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온 세상의 불행한 사람들이 그를 통해서 위로를 받고, 그에게 의지를 하고, 그대를 통해서 행복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바로 그 사람이다.

   이제 빈 무덤의 주인이 정해졌다. 연설자는 이제 하나의 역설적인 결론을 이끌어낸다.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했던가? 아니지.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미상불 아무도 자기 자신에게 줄 수가 없는 신들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보라, 언어도 맥을 못 추고, 사상도 혼란에 빠졌다. 가장 불행한 사람을 제외하고 과연 누가 가장 행복한 사람일 수 있으며, 가장 행복한 사람을 제외하고 누가 가장 불행한 사람일 수 있겠는가?” 이러한 역설은 신약 성경에서 말하는 바로 그 역설과 동일한 것이다. 연설자는 끝끝내 이 가장 불행하고 가장 행복한 영광스런 이름을 밝히고 있지 않다. 하지만 조금만 지각 있는 독자라면 그 이름이 누구를 암시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무덤의 주인은 사라졌고, 우리는 빈 무덤 앞에 서있다. 우리들의 평화와 안식을 그리고 모든 상처의 치유와 온갖 종류의 행복을 나아가 땅에서의 죽음과 더 이상 회상을 통한 불행이 없기를 소원할 수 있는 그 무덤의 주인이 당신은 누구라고 생각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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