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욕과 목욕
김혜순
흙도 목욕을 한다고 한다 흙도 몸에 물을 끼얹고 싶어 한다고 한다
메말라 쩍쩍 갈라지는 흙처럼 창가에 앉아 저녁의 찬 흙을 생각한다 저녁이 되면 가라앉을 수 있을거야
생각하는데 두 손이 쩍쩍 갈라진다 두 손을 흙빗자루처럼
담벼락에 기대어 놓는다 마당이 나쁜 예감처럼 가지런하다 곧 어릴 적 앓았던 늑막염의 기침이 휘몰아칠 것만 같다
흙을 접으면 흙이 된다고 한다 흙을 펴면 흙이 된다고 한다 시간도 이와 같다고 한다 펴나 접으나 같다고 한다
어제와 내일이 다 흙이다 어떤 감정들은 흙이다 흙은 앞으로 도래할 흙의 감정이다 흙을 손에 올려본다 흙 속에 누워본다 불을 켜든 켜지 않든 어둡긴 마찬가지다
눈을 뜨고도 눈을 더 뜨고 싶었는데 꿈에서 본 것은 눈을 뜨고 본 것인가
흙도 목욕을 한다고 한다 몸에 물이 척척 달라붙도록 몸이 신발에 척척 감기도록 목욕을 한다고 한다
젖은 흙을 뭉쳐서 마음이 될 때까지 뭉개고 있는 사람
나는 흙 너머로는 갈 수가 없다 흙이 얼어붙었다가 녹으면서 한 생이 저문다
나는 몸이 뿌옇게 날아오르는 창가에 앉아 젖은 몸이 아스팔트에 착 달라붙는 상상을 한다
뚜쟁이 경찰 세리들이 내 환멸을 밟고 간다 눈꺼풀을 닫은 흙이 그치들의 신발을 붙잡는다
내가 이 기억에 갇힌 지 얼마나 될까 다시 몸이 부옇게 솟아오른다
흙이 목욕을 기다린다 누가 나에게 속속들이 물을 끼얹어 모욕하나
나는 아스팔트에 착 엎드려 자동차 바퀴를 몸 위에 받아도 되겠다
하늘을 나는 저 새를 묻으려면 한 삽의 흙이 필요하다
큰 거울을 사벽에 펼치고
그 거울로 하루 종일 출렁거리는 까만 수면을 들여다본다
-<피어라 돼지, 김혜순 시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