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주의 시세계
시간의 영매들
문학평론가 - 허혜정
태고로부터 인류의 의식을 지배해 온 것은 강렬한 물활론적 관념이다. 바람은 바람의 신에 의해 불고, 강물은 강물의 신에 의해 흘러간다. 하늘에 흩뿌려진 별무리는 그곳에 상주하는 요정이 방향을 잡는다. 하지만 근대로 오면서 물활론적인 관념 속에서 이해되던 자연의 만상은, 신이라는 확고한 작동자가 다스리는 크리스탈 같은 천체 속에 배치된다. 이를테면 뉴튼의 관성의 법칙에 의하면 지구의 순환운동은, 쉬지 않고 달리는 자동차처럼 태양이라는 중심을 선회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전에는 신의 영역에 속했던 자연법칙에 의해 우주는 일종의 기계장치처럼 움직이며, 신은 우주의 운동의 동인이자 자연원리라 불리는 운동법칙을 만들어낸 작동자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차갑고 기계적인 논리가 지배하는 현대 세계에서, 무수한 시인들이 사회적 저주와 파문을 무릅쓰고 열광적으로 ‘신비’를 추구해온 것은, 차가운 이성논리에 대한 불복이며 존재의 의미망의 거부이다.
김경주의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랜덤하우스 중앙)가 보여주는 것은, 차갑고 기계적인 우주가 아니라, 인간존재조차 한 부분으로 포함하고 있는 살아 있는 우주의 영원성과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적 직관력이다. 그의 시 속에 드러나는 생명계에 대한 강렬한 지각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식이 아니라 우리가 ‘시적 직관’이라고 부를 만한 신비의 순간에 태어난 것으로 여겨지는데, 시인은 어떤 ‘감각의 빛’으로 찾아와, 신의 거처이기도 한 ‘불가시의 세계’를 보여주기를 간구한다. 시적 상상력을 고양시키는 시신(詩神)에 대한 이러한 희구는 오래도록 시인들의 의식 근저에 자리잡고 있는 신념이기도 하다. 어쨌든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는 우주와 생명의 신비를 더듬고자 하는 시인의 갈망이 얼마나 강렬하고 깊은 것인지를 감동적으로 보여주는 시집이다. (김경주의 시집은 가을에 내가 읽었던 시집들 중 가장 아름다운 시집이었다. 그의 섬세한 언어와 통찰력 있는 메시지를 약간이라도 세밀하게 짚어보기 위해 한 권의 시집만을 다루게 된 것을 독자가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시집 속에서 시인이 추구하는 우주의 신비는 바람, 음악, 절대의 빛깔과 같은 것으로 표현된다. 어떤 의미로서 명확히 포착되지는 않지만 존재를 전율하게 하는 아름다운 음향 혹은 색채는, 의식의 억압을 폐기한 말들이 우연히 맞닥치는 충격, 그리고 그러한 메시지를 매질같이 건네주는 영매적인 시인을 가능케 한다. 사물과 생명에 대한 강렬한 ‘공감’을 통해 존재의 신비를 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존재의 역사로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해보고자 하는 언어들은 그의 시집이 가진 강렬한 매혹의 근원이 된다. 자신의 영혼을 물과 공기, 바람과 돌멩이에 나누어 줌으로써 우주에 자신을 던져 넣는 샤먼적 감수성은 그의 시를 깊이 가로지르는데, 이는 현실만이 아니라, 현실 저 너머에 맞춰진 시선과 질문을 통해 잘 포착된다. 이를테면 시 「파이돈」에서 그는 “캄브리아기 생물들의 절대음감”을 듣는 “새들의 눈은 그런 해저 안의 동굴을 바라보는 건 아닐까”(「파이돈」)라고 질문을 던진다. 그의 수많은 시편들 속에서 화자는 인간존재와 동물/식물 같은 존재의 경계를 넘나든다. 인간은 자연의 영역 속에 신비로운 감각의 세포덩어리로 존재하며, 자연은 인간존재가 파악한 인식의 우주를 삼켜버릴 만큼 깊고 거대하고 신비롭다. 그러한 신비를 좇아가는 시인은 엑스타시에 빠진 듯한 샤먼처럼 일종의 망아적 가사상태에 빠지는데, 자연신과 인간의 완전한 합일은 죽음에 의해서 달성되며, 인간의 궁극적인 거소는 궁극적으로 고요하고 무감각한 사물의 세계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비정한 무생물의 고요 속에 유한한 삶을 초극해보려던 의지조차 사라진 그 극점을 통과하여, 자연의 영원한 순환질서에 순종하는 것은 존재의 운명이다. 비록 죽음 너머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인간은 알 수 없지만, 시인은 ‘직관’에 의해 죽음 너머의 생을 확인하고 확신할 수 있다. 때문에 자연으로 복귀하는 사멸의 순간은, 존재의 꺼풀을 벗어던진 삶의 무한한 연속이며, 이러한 인식은 ‘환생’에 대한 시인의 신념과도 맥을 같이한다. 현생이 그 너머의 생으로 연결될 수 있다면 이는 영원한 생명으로 이해되는 신의 속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신성한 순환의 굴레와 흔적들을 발견하는 시인의 직관은 시간과 장소를 초월한다. 시인들이 불가시적인 세계를 인식하기 위하여 ‘감각의 빛’이 고양되기를 바라는 것도 ‘위대한 존재’에 대한 인식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에 대한 인식은 존재의 시간 안에 갇힌 인간적 시간에서, 영원한 순환원리를 간직하고 있는 자연적 시간으로 이동할 때 가능해진다. 때문에 죽음은 생의 단절이라기보다 신비로운 세계로의 복귀이며, 그의 시에서 자주 발견되는 환생과 같은 순환질서 의식도 이에 바탕을 둔다. 김경주는 삶을 영원한 시간적 유동과정의 일부로 본다. 또한 태초의 생물과 식물, 동물을 ‘진화’라는 인식의 도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각 시간의 속성이 뒤섞여 있는 연결체 혹은 ‘인연’이라는 시간적 맥락 안에서 보려하고, 과거 현재 미래를 거대한 시간의 연쇄 고리로 이해한다. 이를테면 물고기에서 새로, 혹은 연체동물로 변화하는 생물들에 생명의 숨결을 부여하는 것은 그 어떤 영원한 신성이다. 그리고 그 각개의 생명들을 신경처럼 연결해주는 것은 아픔의 감각이다. “밀물이 번지는 염전을 보러 오는 눈들”(「저녁의 염전」)은 모두가 태초의 생의 바다 앞에 마주서,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느끼는 슬픔을 머금고 있다. 그렇게 살고, 아파하고, 슬퍼하는 생명들은 탄생과 죽음이라는 순환원리에 의해 끝없이 형태를 바꾸지만 근본적으로 불변인데 그 이유는 바로 그 존재들이 영원히 생동하는 우주의 일부이며, 신의 현현이기 때문이다. 빼어나게 아름다운 한 편의 시를 읽어보기로 하자.
외로움이라는 인간의 표정 하나를 배우기 위해 산양은 그토록 많은 별자리를 기억하고 있는지 모른다 바바게스트 하우스 창턱에 걸터앉은 젊은 붓다가 비린 손가락을 물고 검은 물 안을 내려다보는 밤, 내 몸의 이역(異域)들은 울음들이었다고 쓰고 싶어지는 생이 있다. 눈물은 눈 속에서 가늘게 떨고 있는 한 점 열이었다
― 「내 워크맨 속 갠지스」 부분
인간의 표정을 배우기 위해 별자리를 바라보고 있던 양처럼 ‘젊은 붓다’는 궁극적으로 무상(無常)한 연기(緣起)의 법칙을 배우기 위해 수많은 생을 거쳐 왔다. 그는 토끼로 태어나기도 했고, 코끼리가 되기도 했으며 고뇌하는 인간으로 태어나기도 했다. 즉 성자로 완성된 붓다는 그가 각개의 생에서 불살랐던 번민과 열정의 흔적들을 감추고 있는 존재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삶의 형상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지만 일체의 법은 영원으로 우주를 관통하고 있다. 죽음과 삶의 경계를 끊임없이 건너오게 한 것은 생명이 짊어질 수밖에 없는 고통이며, 그래서 “내 몸의 이역(異域)들은 울음들이었다.”
하지만 화자는 음악을 들으며 그 고통을 잠시 잊는다. ‘워크맨’ 속에는 ‘갠지즈’ 강처럼 음악이 흐르고, 그 강물의 음악처럼 모든 생은 자신의 인연을 따라 흘러가는 삶의 도정에 실려 간다. 죽음이라는 것도 생사의 윤회 고리를 따라가는 순환질서에의 순응이다. 다시 태어남은 곧 번민으로부터의 놓여남, 즉 신성한 순환원리를 내재한 자연으로 복귀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우주의 일부로서 신의 현현을 보여주는 자연물들은 인간존재의 시간적 흔적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다른 생물들의 흔적을 존재 안에서 발견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존재를 비존재와 섞어버림으로써 존재를 상실하는 죽음도 인간존재의 소멸점이 아니라 영원한 삶의 시발점이다. 생로병사라는 순환원리는 영원히 지속되고 있지만, 산 자와 죽은 자를 구별하고, 삶과 죽음을 나누어놓는 것은, 우리의 인식이 만들어낸 벽이자 한계일 뿐이다.
어쩌면 벽에 박혀 있는 저 못은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깊어지는 것인지 모른다
이쪽에서 보면 못은
그냥 벽에 박혀 있는 것이지만
벽 뒤 어둠의 한가운데서 보면
내가 몇 세기가 지나도
만질 수 없는 시간 속에서 못은
허공에 조금씩 떠 있는 것이리라
바람이 벽에 스미면 못도 나무의 내연(內緣)을 간직한
빈 가지처럼 허공의 희미함을 흔들고 있는 것인가
내가 그것을 알아본 건
주머니 가득한 못을 내려놓고 간
어느 낡은 여관의 일이다
그리고 그 높은 여관방에서 나는 젖은 몸을 벗어두고
빨간 거미 한 마리가
입 밖으로 스르르 기어나올 때까지
몸이 휘었다
못은 밤에 몰래 휜다는 것을 안다
사람은 울면서 비로소
자기가 기르는 짐승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 「못은 밤에 조금씩 깊어진다」 전문
삶이라는 한켠에서 ‘못’을 보면, “그냥 벽에 박혀 있는 것이지만/벽 뒤 어둠의 한가운데서 보면” “못은/허공에 조금씩 떠 있는 것이”다. 못은 삶의 경계에 얌전히 고정되어 있지만, 그 어떤 생명도 제자리에 머물지 못하듯 영원히 머물 수는 없듯 “낡은 여관”에서 화자는 못도 박혀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못이 허공 속으로 깊어지듯, 존재도 언젠가 “젖은 몸을 벗어두”는 날이 있는 것이다. 존재는 반듯하지도 영원하지도 않고, 슬픔에 “몸이 휘”면서 죽어가고 허공으로 돌아간다. 그것은 존재의 시간에서 자연의 시간으로의 이동을 의미한다. “나무의 내연(內緣)을 간직한/빈 가지처럼 허공의 희미함을 흔들”던 못처럼, 잠시 삶이라는 공간과 장소에서 울음으로 우주에 어떤 메아리 같은 음악을 남겨두는 것이다.
마치 “낡은 여관”에서의 잠처럼 인간은 존재에 갇혀 잠들고 꿈꾼다. 내가 혼자이고 버려졌다는 꿈에 고통 받는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며 꾸는 슬픈 꿈은, 살아 있는 우주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한 존재의 비참의 인식법일 뿐이며, 궁극적으로 우주는 어떤 것도 홀로 내버려두지 않고 버리지도 않는다. 우주는 모든 존재를 태아처럼 감싸 안고 있는 거대한 어미와도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는 존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은 고통과 아픔이며, 우주라는 어미의 모태에서 잘려나간 순간 혼자임을 느낀다. 태아가 간직한 자연의 꿈은, 탄생이라는 제의에 의해 중단된다. 인간적 시간이 자연의 세계에 침입하는 것이다. 우리가 ‘고통’으로 인식하는 탄생의 순간처럼, 자연적 시간과 인간적 시간의 단절과 갈등은 죽음에 대한 인간의 공포에서도 잘 나타난다. 본질적으로 죽음은 인간적 시간의 종말이며 자연으로의 귀속이다. 그 죽음의 순간을 ’장례‘라는 장대하고 아름다운 의식으로 거행하는 인류의 오랜 관습들은 인간적 시간과 자연적 시간을 융합시키고 영원으로 승화시킨다. 자연의 시간으로 누군가를 되돌려 보내는 애통한 이별의 감정이나, 홀로 남아 인간적인 시간 안에 머물러야 하는 존재의 고립감은, 근원적으로 존재가 귀속되어 있던 자연(신성)에서 버려진 ’실락원‘의 의식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존재가 영위해야 할 인간적 시간은 저주받은 낯선 곳을 헤매는 ’추방‘ 이후의 시간으로 체험되는 것이다. 영원과 순간, 어디에도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이중의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의 자의식을 김경주는 “나는 유배되어 있다 기억으로부터 혹은 먼 미래로부터”(「비정성시非情聖市」)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존재가 자연의 꿈을 간직하고 있던 유년이나, 어미의 모태를 아련히 기억하고 있는 물속의 시간은 가장 아름다운 순간으로 회상된다.
유년은 생의 르네상스다 내가 이슬람교도였다면 나는 하루 여섯 번 유년이라는 메카를 향해 절을 올렸을 것이다 어릴 적 나는 저수지에 빠져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한순간 너무 많은 것을 겪어버렸다 수면으로 가라앉으면서 바라보던 물 밖의 멀어지던 빛, 그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 학교에 가지 않고 물속에서 손바닥을 펴 죽은 새들을 건져올리며 나는 그 열락을 기억해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까지 어머니의 젖맛이 기억나지 않아 나는 새벽에 자고 있는 어머니의 가슴을 물어본 적이 있다
― 「비정성시非情聖市」 부분
인간에게는 존재를 현실에서 격리시켜, 가장 내면적인 자아에 귀속시키는 능력이 있다. 태아라는 존재의 상태는 자연의 순환적 원형, 곧 인간의 시간에 의해 깨져버릴 불안한 꿈의 상태를 상징한다. ‘어머니의 젖맛’을 느끼고 있는 태아는 전적으로 자연의 지배하에 있다. 그 태아의 꿈이 죽어가는 순간을 우리는 존재의 탄생, 삶의 시간으로 받아들인다. 화자는 그 순간을 “그때 나는 한순간 너무 많은 것을 겪어버렸다 수면으로 가라앉으면서 바라보던 물 밖의 멀어지던 빛,”이라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문득문득 기억의 흔적들은 의식으로 밀려든다. “나는 그 열락을 기억해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까지 어머니의 젖맛이 기억나지 않아 나는 새벽에 자고 있는 어머니의 가슴을 물어본 적이 있다.” 시인은 어머니의 품처럼 안온했던 자연의 꿈을 ‘물고기’ ‘새’와 같은 감각으로 표현한다. 그는 하나의 존재와 개인이 아니라 그냥 자연 속에 섞여 있는 무의식의 생물이었다. 때문에 “엄마…그래 그 시간에 대해 물으면 나도 날고 있는 것이라네”(「맨홀」)라고 말한다.
하지만 태아와 유년의 상실, 그 충격과 슬픔을 시인들은 꿈꾸기로 보상받는다. 꿈꾸는 시간에 존재는 마치 태아처럼 세속적인 현실을 잊고, 자연 그 자체의 법과 충동에 따라서 움직이며, 자유로운 색과 소리, 언어의 흐름과 함께 한다. 꿈이란 자연의 가장 감미로운 은혜임과 동시에, 인간의식의 한계를 넘어선 특별한 비젼을 선물해주기도 한다. 시인은 그 비젼의 순간을 자주 색, 음향 등으로 표현하는데,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색(色) 하나를 찾기 위해” “자궁 안에 두고 온/자신의 두 손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外界」) 태아의 잠이나 꿈꾸기는 존재의 상실이나 망각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적 인식을 넘어선 새로운 의식의 탄생으로 존재를 인도해 주기 때문이다. 꿈꾸는 자는, 태아의 눈처럼 현실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의식의 빛과 사물의 심원을 세심하게 관찰할 수 있는 다른 렌즈를 가지게 된다. 현실이 아무리 소란스러울지라도 꿈속에는 바깥의 소음과는 무관한 영원한 고요가 존재한다. 덧없는 무상 혹은 신성한 영속성과 같은 신비로운 세계를 체험함으로써 우리는 사물의 생명을 투시해 볼 수 있는 깊은 힘을 소유하게 된다. 꿈꾸기를 통해 얻어진 순간적인 직관은, 일상적 경험의 형태나 고정된 이미지들을 넘어섬으로써 사물을 일상적 의미나 해석의 타락으로부터 구해내기도 한다. 관념으로 가려져 본래의 광채를 상실해 버린 사물을 회복시키고, 의식이 관찰하고 분류한 것을 통합시키며, 정신의 논리에 의해 규정된 의미들을 새로이 반죽한다.
궁극적으로 시인의 꿈은, 그 신비로운 일순간 더듬게 된 존재와 우주의 원리를 어떤 음향과 빛깔로 전해주는 것일 터이다. 신성한 계시와도 절대음과 절대색을 발견할 때까지 놀라운 메시지의 영매로 자신을 열어두는 것이다. 그 순간이 언제인지는 모른다. 한 생을 건너 또 다른 생이 필요한 무한의 시간이 존재를 관류하여 흘러갈지 모른다. ‘나’라는 존재는 물고기로 짐승으로 생의 형태를 바꾸며 “시간의 영매들”로 살아갈지 모른다. 어쩌면 전생의 기억을 잃어버린 채로, 어느 생에서 갈망했던 무엇을 다시 더듬어갈지 모른다. 그렇게 예측하지 못할 신비로운 순간을 단 한 번이라도 체험한 자라면 정말로 “내가 살지 못했던 시간 속에서 순교할 것이다.”(「드라이아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