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SjsZDnScfqo?si=XHQGGBzNMD8tc2vz
주 안에서 기뻐하라. 빌립보서 4장 4~7절
율법으로 말씀을 대하면 하나님 앞에서 살아남을 자가 없습니다. 모든 말씀을 지켜 성취하시는 말씀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성도는 그분을 믿음으로 그분이 이루신 말씀 성취의 결과를 함께 누리는 자들입니다.
모든 말씀은 우리를 대신하여 홀로 말씀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성도는 각자 말씀을 지키는 자들이 아니라 모든 말씀을 지켜 그 성취의 효력을 공급하시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입니다. 성도가 말씀을 지키지 못해 받게 되는 저주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 값으로 청산되었습니다.
성도는 마땅히 죽어야 할 자신의 실상과 대신 죽은 예수님으로 인해 주어지는 생명의 혜택을 발견하는 순간, 기뻐하게 됩니다. 인간의 기쁨은 죽음의 공포를 피했다는 착각으로 잠시 주어집니다. 그러나 에덴의 바깥 어디에도 죽음의 공포를 피할 영원한 기쁨의 공간은 없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죽고 다시 사심으로써 인간들이 알 수 없는 새로운 기쁨의 차원을 십자가 안에 감춰두셨습니다. 십자가 안쪽에서 창조되어 공급되는 새로운 생명의 능력으로 성도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게 됩니다.
죄의 종에서 예수님의 종으로 신분이 변화된 성도는 개인적인 인생이 부인되면서 주님의 기쁨을 나타내는 주님의 것으로 기능합니다. 비록 세상에서 배제되는 고난을 받는다 해도 주님과 함께 있다는 그 자체로 기쁨을 누립니다. 성도는 머리카락같이 작은 일 가운데에서도 함께 하시는 주님을 발견하며 기뻐합니다.
세상이 죽음의 공포에 짓눌려 거짓된 기쁨의 돌파구를 찾을 때, 성도는 고난조차 주님과 함께 고난받는 특권으로 알아 감사하게 됩니다. 감춰진 생명의 세계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원천으로 늘 새롭게 생성되고 출몰합니다.
유대인들은 날마다 자기들의 죄 때문에 희생 제물을 죽이면서도 그 희생 제사의 실체가 예수님이신 것을 몰랐습니다. 성도는 오늘도 자신들이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기쁨을 누리며 하나님과 화목합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빌립보서 4장 4~7절
4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절,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절,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절,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이런 말씀을 대하면 좀 난감할 수 있습니다. 항상 기뻐할 수 없는 일상을 사는 우리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이죠. 얼마나 사는 게 괴롭고 힘든데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겠어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환경이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그런 여건이 아니잖아요.
결코 기뻐할 수 없는 삶의 환경으로 우리를 내치신 분이 주님이시잖아요. 주님이 에덴 바깥 동네로 우리를 추방하셨는데 에덴의 바깥은 결코 항상 기뻐할 수 없는 환경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감당할 수 없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의 단서가 붙어 있어요. 4절 말씀을 다시 보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거죠. 그러니까 주 밖에 있으면 기뻐할 일이 제한돼 있죠. 주 밖에 있을 때는 예를 들어 돈이 들어오면 기뻐하겠죠. 퇴근 시간 되면 기쁠 것이고 학생들은 방학을 기뻐할 것이고 뭐 그런 거잖아요. 그러니까 주 바깥에 있을 때는 우리 육체의 필요와 욕망을 따라서 그 육체의 욕망이 충족되는 순간에는 기뻐할 수 있어요.
그런데 ‘주 안에서 기뻐하라.’ 고 말씀하신단 말이죠. 그럼 주 안에서와 주 바깥의 차이가 무엇이기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시느냐 하는 겁니다. 사실은 ‘주 안에서,’라는 것도 우리가 항상 잊어버린단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의 자리가 ‘주 안,’인지 ‘밖,’인지 때로 우리도 몰라요.
우리도 그냥 21세기 자본주의 사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회사나 가정, 학교라는 어떤 특정 공간 속에서 우리를 파악하고 인식할 뿐이잖아요. 그런데 ‘주 안에서,’라고 하는 것은 보이지도 않고 감지되지도 않는 세계를 말씀하는 겁니다. 보이지도 않고 우리가 원할 때 느낄 수도 없는 그 ‘주 안,’이라는 세계를 참 우리가 이해하기 힘들죠.
그래서 이 ‘주 안,’이라는 이 특별한 세계는 오직 믿음으로만 확인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시잖아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거죠. 믿음은 보이지 않는 세계가 여전히 존재하는 증거가 됩니다.
실제 우리의 이성으로 인지하거나 감각으로 감지하는 세계는 정말 일부분이죠. 우리가 감각하고 인지하는 세계는 정말 얼마나 작은지도 비교할 수가 없어요. 전체를 알아야 비교라도 할 수 있죠. 제가 좀 심심해서 한 번 더 인공지능에 물어봤어요. 지금까지 관측된 우주의 크기에 비례해서 지구에 사는 우리 개인의 크기는 몇 프로나 되겠는지 그 크기를 비교할 수 있는지 물어봤어요.
인공지능의 대답은 현재까지 관측된 우주의 크기와 인간을 비례적인 크기를 계산하면 인간은 영이라는 거죠. 즉, 관측된 우주의 크기와 비교해도 인간은 없는 존재예요. 하물며 아직 관측할 수도 없는 우주의 범위와 비교하면 인간은 정말 숫자로 쓸 수도 없는 존재인 거죠.
그럼 우리가 안다는 게 뭡니까? 우리가 안다는 것도 사실은 다 허상이에요.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게 다 허상이라는 겁니다. 착시인 거죠. 지금 10대 소녀의 아주 어여쁜 얼굴에 한 30년, 50년을 더하면 주름지고 말라서 결국 흙으로, 항아리 속의 재로 사라지는 거란 말이죠. 그러니까 이 전체 역사로 봤을 때 인간의 그 백년쯤 되는 인생은 사실은 0, 즉, 없다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사실은 없는 것에 관심을 두고, 없는 세계를 보면서 애달파하고 괴로워하고 때로는 분노하는 겁니다. 우리가 인지하는 세계가 실상 없는 허상의 세계라면 그럼 실제로 있는 건 뭐냐는 거죠.
우리가 인지하는 세계는 허상이고, 우리의 감각과 인지를 넘어서서 실재하는 세계가 있다는 증거가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성경이 선언합니다. 그러니까 주님과 주님의 나라가 존재하는 증거는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인 거죠.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인식과 감각이 아니라 믿음으로 아는 겁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이 보이지 않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유일한 증거입니다. 천국을 보여달라는 사람들이 있는데 천국이 있다는 명확한 증거가 믿음입니다. 어떤 분들은 그 믿음을 갖고 싶어도 그 믿음이 주어지지 않아요. 믿음은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우리는 그 선물을 원하거나 바란 적도 없어요. 그냥 주님의 뜻대로 일방적으로 주어진 겁니다. 우리는 돈을 바라고 이 세상살이에 필요한 것들을 구했으나 주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가 바라고 욕망하는 것들이 우리에게 안식을 주지 못하고 더 큰 욕망과 불안을 불러 일으킵니다. 돈이 있으면 그 있는 돈을 지키려고 전전긍긍합니다.
‘주 안에,’ 있다는 것은 곧 믿음 안에 있다는 것이고 주님이 통치하시는 그 나라에 있다는 거죠.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주 안에 있다면 즉, 주님이 실제로 통치하시는 그 나라에 있다면 항상 기뻐하게 된다는 거죠. 믿음으로 주 안에 있음을 알게 되는 그 순간에 우리는 항상 기뻐하게 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 있음을 알게 되는 그 순간에 항상 기뻐하라는 이 말씀이 우리에게 적용이 되는 거예요.
항상 기뻐하라는 이 말씀을 율법으로 대하게 되면 아무도 이 말씀을 지킬 수 없어요. 우리는 육신의 욕구가 채워지고 자아의 욕망이 채워질 때 기뻐합니다. 아기 때는 젖 주면 좋아하고 좀 크면 친구들을 좋아하고 청년이 되면 이성을 향한 욕구가 채워지면 좋아한단 말이죠. 직장 구하고 돈 벌고 쓰는 재미에 빠지고 세상 자랑거리 있으면 좋아합니다.
몸의 욕구와 세상의 인간관계를 따라 생성되는 자아충족의 욕구가 채워질 때 우리는 기뻐하죠. 보이지 않는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항상 보이는 세계가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가잖아요.
이 말씀을 대할 때 법으로 대하게 되면 우리는 말씀을 주신 주님의 뜻을 오해하게 됩니다. 법은 지켜야 할 주체적인 존재로 우리 자신을 보게 하죠. 그리고 주체적인 자리에서 법을 주신 주님을 하나의 대상으로 보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순종해야 할 하나의 대상으로 보게 되면 아무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고 다 심판받고 죽을 수밖에 없어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상대하려고 하면 하나님 앞에서 살아남을 자가 아무도 없어요. 율법으로 모든 말씀을 대하면 우리는 모든 입을 틀어막고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있다는 진실을 발견하게 되죠.
그럼 어떻게 하나님을 대해야 하는 겁니까? 믿음으로 모든 말씀을 대하는 거죠. 어떤 믿음이에요? 내가 이 모든 말씀을 다 지켜 순종했다는 믿음이 아니고 나는 이 모든 말씀을 순종할 수 없는데 나를 대표하여 예수님이 모든 말씀을 순종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겁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대표 선수가 예수님이죠. 우리를 대표하여 인자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를 대표하여 이 모든 말씀을 다 성취하고 이루었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으로 말씀을 대하는 겁니다. 그럼 우리는 항상 기뻐할 수 없으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항상 기뻐하셨죠. 그렇게 우리를 대표하여 항상 기뻐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도 항상 기뻐하신 자로 하나님께 취급되고 인정되는 거예요. 그렇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모든 말씀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거예요.
어제 유럽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이 있었나봐요. 파리 상제르망과 아스날이 붙었는데 파리 상제르망이 이겼어요. 연장에서도 승부를 가리지 못해서 결국 승부차기로 파리팀이 이겼어요. 파리 팬들이 난리가 났어요. 그럼 파리 생제르망 팬들이 다 이긴 겁니까? 아니죠. 그 응원하는 팬들은 대표 선수 23명이 나가서 이긴 경기를 자기들이 이긴 것처럼 막 기뻐하고 난리 났어요. 대표가 이긴 승리에 함께 참여하는 거죠.
대표 선수들이 싸워 이긴 승리의 기쁨을 함께 누리는 것처럼 성도가 각기 개별적으로 모든 말씀을 다 지켜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인정받는 자들이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표한 인자로 오셔서 우리 대신 이 모든 말씀을 지키고 우리가 지키지 못한 말씀으로 인한 저주까지 십자가에서 대신 받고 피 흘려 죽임을 당하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죗값까지 다 치르신 거예요. 일사부재리의 원칙처럼 이제 우리를 정죄할 말씀도 없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모든 말씀을 대할 때마다 지키려고 애쓰는 말씀도 아니고, 지키지 못해서 정죄하는 말씀도 아니고, 우리를 대신하여 홀로 이 모든 말씀을 지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는 겁니다. 이 말씀을 지키지 못한 우리가 정죄와 저주를 받고 최후 심판받고 죽어야 하는데, 이 말씀을 지키지 못한 우리 불법의 책임을 예수님이 다 대신 짊어지고 예수님이 그 피 값을 치르고 죽으셨단 말이죠.
우리 대신 모든 말씀을 지키시고, 우리가 지키지 못한 불법의 저주를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받아내신 예수님의 흔적을 모든 말씀에서 확인하는 거예요. 이 말씀을 어김으로 죽어야 마땅한 내가 이 말씀을 대신 지키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살고 있음을 볼 때마다 우리는 항상 기뻐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살 만한 권리가 있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마땅히 죽어야 하는데 대신 죽임을 당하신 예수 안에서 살고 있다는 그 사실을 말씀을 통해서 확인하게 될 때, 모든 말씀은 법이 아니라 예수님이 다 이루어 놓으시고 그 이루심에 근거하여 공급하시는 은혜의 말씀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율법으로 말씀을 대하면 지켜야 할 부담과 조금이라도 지켰다는 자긍심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게 되지만 이 모든 말씀을 대신 지키신 예수의 은혜로 보게 되면 모든 말씀이 꿀송이처럼 단 말씀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우리가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대할 때, 언뜻 보면 참 인생의 고달픔과 깊이를 모르는 한가한 소리를 하는 것 같단 말이죠. 얼마나 인생이 괴로운데 이런 소리를 하느냐 말이죠. 그래서 잠깐 말씀 보겠습니다. 전도서 2장 2절을 잠깐 보게 되면, 사람들이 기뻐서 웃고 즐기고 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말씀합니다. 2장 2절, ‘내가 웃음에 관하여 말하여 이르기를 그것은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에 대하여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였노라.’
웃음은 미친 것이라고 하잖아요. 사람들이 기쁘고 좋아서 막 웃는데 그런 웃음은 성경대로 말하자면 미친 거예요. 예전에 주택가 어떤 집안에서 가족이 모여서 막 웃었어요. 지나가던 연쇄 살인범이 올라가서 그 웃고 있는 가족을 죽였잖아요. 이유는 참 어이가 없어요. 자기는 인생을 사는 것이 너무 괴롭고 힘든데 너희들은 뭐가 좋아서 그렇게 웃고 있느냐 하는 거였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가족이 그때 웃은 것은 티비에 나오는 개그 프로를 보고 웃은 거였어요.
그들도 너무 힘들고 괴로운 인생을 잠시 잊어보려고 개그 프로를 보면서 잠시 깔깔대고 웃었던 거예요. 직장 일도 힘들고 사는 게 힘들어서 잠시 쉬겠다고 개그 프로를 보고 그냥 웃었을 뿐이에요. 그런데 하필 지나가던 살인범이 듣고 올라가서 죽인 거예요. 미친 거죠.
우리가 왜, 언제 웃습니까? 우리는 즐거워 보자고 개그 프로를 보듯이 즐거워 보자고 돈을 벌고 성취를 이루려고 한단 말이죠. 그런데 우리를 기쁘게 하는 그 모든 것이 그냥 감각적으로 잠깐 우리를 속이는 미친 거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추방해 살게 하신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이에요? 하나님이 에덴에서 인간을 추방하신 이 세상은 가시와 엉겅퀴가 나는 고난의 땅이기에 남자들은 이마에 땀이 흘러야 살 수 있고 여인들은 아이를 잉태해서 해산하는 고통을 겪어야 살 수 있는 땅입니다. 이런 땅에서 기뻐할 것이 어디에 있냐 말이죠.
그런데 놀랍게도 가인의 성에는 음악이 있고 쾌락이 있어요. 성경대로 보자면 미친 성이죠. 아벨을 죽이고 방황하던 가인은 성을 쌓고 그 성안에서 여러 문화를 꽃피우며 죽음의 공포를 피하려고 했어요. 야발은 가축을 치고, 아우 유발은 퉁소를 불며, 두발가인은 각종 동철기구를 만들면서 삶의 안정과 재미를 누리려고 했죠. 라멕은 두 아내를 두고 삶의 보람과 기쁨을 누리려 한 겁니다.
요즘 시대의 사람들처럼 행복을 찾아, 기쁘고 즐겁게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다했어요.
그런데 안전하고 기쁘고 즐겁게 살기 위해 만들어놓은 모든 장치와 구조가 어느 날 와르르 무너지면서 그 두 배 세 배의 낙망과 슬픔과 허탈감으로 돌아오는 거예요. 전도서의 말씀처럼 미친 거죠. 여러분, 억지로 자신을 기쁘게 하려고 애를 써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마침내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전도서 2장 볼까요? 10절,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 11절,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솔로몬 왕은 뭐든지 다 해본 거예요.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다해봤다는 거죠. 놀러도 가보고 여행도 가보고 여인들도 만나보고 권력도 누려보고 다 해봤는데 그 결과는 뭡니까?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과 같은 행위라는 거죠. 무익하다는 거예요. 마지막은 요양병원을 거쳐 화장장이나 무덤이란 말이죠.
지난 화요일에 어머니가 고대병원에서 퇴원하셔서 요양병원에 다시 입원하셨는데 내성균때문에 격리 병실로 가셨어요. 거기 들어가는 순간 제가 너무 낙심되는 거죠. 그 병실에 계신 분들은 정말 무슨 이집트의 미이라 같아요. 제가 보기에는 현대 의학으로 숨만 붙여놓은 거죠. 더 놀라운 건 어머니 바로 옆 침상에 너무나 피부가 뽀얀 여자아이가 누워 있는데 너무 어려 보이는 여자아이가 의식도 없이 누워있어요. 이렇게 어린아이가 왜 이런 격리 병실에 의식도 없이 누워있을까 싶은 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어요.
그런데 사실 인생의 진실은 거기에 있는 거잖아요. 진실은 병들고 늙고 죽는 게 인생의 진실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이 흙덩이 육신 안에 담아놓으신 육체의 열정으로 미쳐 날뛰면서 자기를 기쁘게 할 쾌락을 찾아 헤매지만 풍선에 바람 빠지듯 진실은 바싹 마른 해골과 뼈입니다. 피부가 뽀얀 그 어린 여자아이의 머리에 누가 예쁜 머리핀을 꽂아 주고, 침상 옆에 마른 꽃도 한 묶음 갖다 놨어요. 가족들이 해줬겠죠. 그런데 헛된 거잖아요. 죽음의 질병 위에 머리핀을 꽂고 꽃다발을 둔다고 해서 생명으로 살아나겠습니까. 마른 뼈와 해골을 단장한다고 살아나겠어요? 사람들이 벌이는 일이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선언하신 인간의 진실은 죽음인데 가인은 자기가 쌓은 성안에서 죽음을 잊어버리고 거짓된 생명의 인식을 지속하기 위해 온갖 문화와 문명과 쾌락의 수단들을 만들고 발전시키는 거죠. 여러 명의 아내를 두고 퉁소를 불면서 목축 사업의 경제력을 일으키면서 두발가인은 청동 도구의 산업을 만들어 살아있는 환상을 지속하려고 한 겁니다. 그러나 그 결론은 뭐였나요?
‘나의 상처로 내가 소년을 죽였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지만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라는 탄식이었단 말이죠. 인류의 발전은 허상이고 점점 죄의 분량을 늘려 쌓아갈 뿐이고 탄식과 슬픔과 공포의 비극만 확대될 뿐입니다.
월드컵 공인구 하나 만들기 위해서 아프리카에 가난한 아이들이 많은 노동력을 탈취당한다고 하잖아요. 모두가 축제를 벌일 때 다른 쪽에서는 그 축제의 흥겨움과 지속을 위해 건강을 잃어가며 노동하는 가난한 자들의 눈물과 고통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걸 당연하게 생각한단 말이죠. 너희들은 산업기반도 없고 배운 게 없으니 노동력이라도 제공하라는 거죠. 그리고 그 노동 가치에 맞게 동전 몇 푼 던져주는 겁니다. 그리고 월드컵이라는 축제를 즐기겠다고 몇백만 원 비행기를 타고 수천만 원씩 돈을 쓰는 거죠. 이런 자본주의 체제를 우리가 뭐 어떻게 할 수 있나요? 우리도 이미 자본주의 혜택을 흠뻑 누리며 거기에 젖어있는데.
그게 지금 가인이 쌓은 성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성과 무관한 곳에서 자기 백성을 살게 하시죠. 인위적으로 부양해 놓은 축제의 현장에서 자기 백성을 이끌어 어디 양을 치는 광야에서 살게 하십니다. 그래서 택한 백성들은 억지 기쁨과 즐거움의 자리에서 내침을 당해서 광야로 가는 것이 차라리 복일 수 있습니다.
잠깐 그 앞에 전도서 1장 8절 말씀,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의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않는다.‘ 아무리 좋은 것을 봐도 눈은 또 다른 것을 원합니다. 아무리 좋은 소리를 들어도 귀는 또 다른 소리를 원합니다. 채워지지 않죠. 인간의 욕망은 채워지지 않고 자본주의는 끝없이 욕망을 채우기 위해 움직이고 그런 대상을 만들어내고 인간은 채워지지 않는 욕망으로 또 새로운 욕망의 수단과 도구와 상태를 원하고 요구하는 거예요.
내 욕망을 채워줄, 내 눈을 만족시켜줄, 내 귀를 채워줄 또 다른 뭔가를 내놓으라는 거죠. BTS가 신곡을 내놔도 귀가 안 찹니다. 세븐틴이 뭐 신곡을 내놔도 주아의 귀는 안 채워지죠. 또 다른 노래를 다른 춤을 다른 모습을 내놓으라고 한단 말이죠. 그래서 8절 말씀, ’모든 만물이 피곤한 것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다.‘ 모든 만물이 피곤한 거예요. 끝없이 요구하니까요.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부모는 자녀에게, 자녀는 부모에게 뭘 자꾸 원하고 요구하는 거죠.
하나님의 대책은 다 죽으라는 겁니다. 싹 쓸어버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먼저는 기쁘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기쁨의 정의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모든 인간은 기뻐할 수 없는 에덴 바깥으로 추방된 존재입니다. 지금 어차피 모든 인생은 기뻐하고 싶어도 기뻐할 수 없는 조건 속에 던져진 거예요. 단지 지금은 가인의 후예들이 인위적으로 기쁨을 부양하고 있어요.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기쁘지만 그 이면에 훨씬 더 많은, 77배나 벌을 받아야 마땅한, 소년을 죽여야만 살 수 있는 그런 저주와 죽음의 구조가 가인이 쌓은 성, 인위적으로 기쁨을 부양하는 가인의 성의 구조라고 하는 거예요.
자본주의 사회는 누군가가 그 이면에서 고통을 당하지 않으면 지탱이 안 돼요. 그럼 공산주의, 사회주의는 됩니까? 마찬가지죠. 모순적이에요. 자본주의로 가도 사회주의로 가도 인간 세상은 고통과 저주의 땅입니다. 에덴의 바깥은 어디나 괴로운 겁니다.
너나 나나 누구나 예외없이 괴로운 인생인데 거기에서 주님은 새로운 차원의 기쁨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잠깐 마태복음 5장 한번 볼게요. 마태복음 5장 11절 함께 보겠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기쁨이 무엇인지 주님은 지금 새로운 기쁨의 개념과 정의를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욕먹고 악한 말을 들을 때 복이 있는 것이니 그때 기뻐하라는 거죠. 이제 우리는 기쁨이 무엇인지 주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다시 정리해야 합니다.
돈을 벌고 쓰고 하는 것이 기쁨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욕먹고 박해받는 것이 기쁨이라는 거죠. 우리의 욕망을 순간순간 채워가는 것이 기쁨이 아니라 주님으로 말미암아 어떤 현상이 벌어질 때가 기쁨이라는 겁니다. 살아있는 기쁨인 거죠.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우리가 오늘 현재 우리의 자리에 있는 겁니다. 우리의 유능함과 노력으로 혹은 우리의 무능함과 게으름으로 현재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왜냐하면 성도 인생의 주인이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오늘 이 자리에 배치하신 겁니다.
지난주에 권사님이 하신 질문이 너무 좋았었어요. 이사야 43장 25절 말씀을 질문하셨어요.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주님이 주님을 위하여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말씀인데 죄 용서는 우리를 위해 하시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었어요. 그런데 성경은 주님을 위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거죠.
우리를 위한 죄 용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한 죄 용서라는 개념이 낯설게 다가왔던 거죠. 그러나 주님은 주님의 목적을 위해, 주님의 기쁨을 위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은 우리 좋으라고 용서하신 게 아니라 주님 좋으라고 용서하신 겁니다.
죄 용서에 관한 개념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의 하나가 노예 시장에 팔린 노예를 되사오는 개념이 있어요. 속전 즉, 몸값을 내고 노예로 팔린 그 노예를 살 때는 그 주인의 목적이 있는 거잖아요. 노예 입장으로 기쁠 수도 있겠죠. 그러나 그 노예를 사는 주인은 주인대로 목적이 있고 이 노예에게 시킬 일이 있으니까 사온 거란 말이죠. 주인의 쓸모와 용도와 목적과 필요를 위해 노예를 사온 겁니다.
마귀의 노예로 팔린 우리를 예수님이 십자가의 피 값을 지불하고 사신 것은 예수님의 목적을 위한 겁니다. 우리 맘대로 방종하며 살라고 사신 게 아니란 말이죠. 마귀의 종이었던 우리를 피값을 내고 사 오신 것은 예수님의 뜻과 목적을 위해서 사신 겁니다. 예수님의 종으로 신분이 변화된 이후에 성도 개인의 인생은 사라진 겁니다.
우리 개인의 이름은 천국 문서에서 삭제되었습니다. 주님께 소속된 주님의 종으로 신분이 변화한 겁니다. 이제 우리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존재하는 거죠. 우리 자신의 기쁨이 아니라 주님의 기쁨과 주님의 목적을 위해서 살고 죽는 거죠. 그래서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님께 속한 주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삶의 자리는 주님의 기쁨과 목적을 위해 배치된 겁니다. 어디에 살고, 무슨 일을 하고, 어디로 출장을 가고, 어디가 아프고 다 주님을 위한, 주님에 의한, 주님의 일들입니다.
우리 좋으라고 주신 삶이 아니라 주님이 좋으시려고 이렇게 우리를 살게 하시는 거죠.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맞이하는 모든 삶의 자리는 주님이 주님의 목적을 위해서 배치하신 자리이기 때문에 그 자리에 닥쳐오는 일들은 고통이든 괴로움이든 즐거움이든 그냥 당해야 합니다.
사도는 이런 성도의 삶을 군사로 표현하기도 했는데 군인은 지휘관의 명령을 따라 움직이잖아요. 지휘관이 배치한 자리에서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는 거죠. 지휘관이 배치한 그 현장에서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며 그 현장을 사수할 때 지휘관의 기쁨이 된단 말이죠. 그처럼 주님은 우리를 특정한 장소에, 특정한 시간 속에, 특정한 문화 가운데, 특정한 만남과 관계 안에 배치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그 자리에서 그냥 받아야 할 고난을 받고 있으란 말이죠. 실업자의 자리에 우리를 배치하셨으면 그 실업자의 자리에서 실업자의 고난과 어려움을 감수할 때 주님으로 말미암아 핍박과 모욕을 받는 거란 말이죠. 실업자의 자리에 배치하신 주님을 생각함으로 그 자리에 있으면서 실업자의 고난과 모욕을 받는 것이 성도에게는 기쁨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 자리에서 주님이 먼저 받으신 모욕과 괴로움을 받으면서 주님과 함께 있는 거예요. 그런 위치에서 주님과 함께 있는 그 자체가 상이라고 하는 거죠.
제가 군대 갈 때 처음에 헌병으로 주특기를 받았는데 신병교육대에 있는 동안 변경되었어요. 조교로 뽑혀서 마지막 신병교육대장 면접까지 했는데 갑자기 또 바뀌더니 결국 강원도 최말단 부대로 배치되었어요. 구타가 일상이고 물자가 부족해서 부대 인근의 건설회사 자재를 비내리는 밤중에 몰래 훔쳐 와서 부대에 필요한 뭔가를 해야 하는 아주 열악한 부대였죠. 제 후임 얘들이 군화 끈을 풀어서 목을 매요, 죽겠다고 맸는데 발견되어서 그냥 취사병으로 보내기도 하고 저는 그런 상황이 처음 엄청 당황스러웠어요. 그런데 어쨌든 대통령, 국방부 장관, 참모총장 등의 지휘 계통을 따라 주어진 자리고 최종적으로는 주님이 허락하신 자리니까 그냥 견디는 거죠.
우리 인생의 모든 자리가 그리스도 예수로부터 주어진 자리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그 자리에서 주어지는 모든 것을 허락하신 주님과 함께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잠깐 더 요한복음 3장 말씀을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3장 26절,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27절,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28절,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29절,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30절,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세례 요한을 따르던 제자들과 무리들이 예수님께로 많이 가버렸을 때 요한이 보인 태도입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는데 자기는 바로 그런 기쁨 즉, 그리스도의 형통을 기뻐한다는 거죠.
성도는 자기의 기쁨을 구하는 자들이 아니라 주님의 기쁨을 구하는 자들입니다. 주인이 자기 기쁨을 위해 종을 구입하듯이 주님은 당신의 기쁨을 위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기쁨을 구하는 자들이 아니라 주님의 기쁨을 구하는 자들입니다. 세례 요한은 그런 기쁨을 충만했다는 거죠.
비록 우리 계좌가 비어가도 주님께 유익이라면 기쁜 거죠. 하늘에서 주신 바가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 내 계좌의 돈을 어디 다른 곳으로 보냈다면 주님이 그쪽으로 가게 하신 것으로 볼 때 그때 우리에게는 기쁨이 충만한 겁니다. 주님께서 주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내 계좌의 돈을 빼서 그쪽으로 옮기신 것으로 볼 때 우리는 항상 주님이 행하신 주님의 뜻 안에서 기뻐하게 됩니다. 위에서 주시지 않으면 그 누구도 무엇을 받을 수 없어요.
그러나 자기중심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해할 수도 없는 거죠. 그때 주님으로 말미암아 모욕과 핍박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 모욕과 박해를 받을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말하죠. 네가 책임져야 할 너의 문제를 왜 자꾸 주님께 떠넘기느냐고 한단 말이죠. 그러나 참새 두 마리의 떨어짐도 주님이 허락하셔야 가능한 일입니다. 주님의 뜻 없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믿음이 없이 이런 말을 들으면 이게 얼마나 황당무계한 말입니까.
인간 세계에서는 모든 것의 인과율이 인간 중심으로 돌아가잖아요. 내가 원인이 되어서 내가 이룬 일이라고 생각하나 눈을 들어서 주님의 세계를 보게 되면 모든 인과가 주께로 다 집중돼 있습니다.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과 머리카락이 희고 검게 되는 것도 다 주님이 원인이 되어 일어나는 주님의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잖아요. 뭐가 진실이죠? 실제로 우리가 머리카락 하나를 검거나 희게 할 수 있습니까? 못하잖아요. 결국은 염색으로 가리고 속이는 거죠.
그런데 실제로 세례 요한이 이런 식으로 말하게 되면 따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불안하겠어요. 자기는 망해야 하고 주님만 흥하면 된다고 생각하니까 얼마나 불안해요. 따르는 제자들의 입장으로 보면 불안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게 주께서 우리를 인도해 가시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이런 과정으로 주님이 끌고 가시기 때문에 주님의 통치권 안으로 나를 맡기는 그 자체가 기쁨이라고 하는 거예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할 때 그 말씀이 우리에게 체감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주님의 결재 없이 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인생에 벌어지는 모든 일로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겁니다. 우리와 우리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이 주님의 뜻과 주님의 결재 가운데 벌어지는 일임을 알 때 우리는 이미 주 안에 있는 거죠. 그렇게 주안에 있는 진실을 보는 그 순간에 우리는 항상 기뻐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새옹지마를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합리화하고 위안 삼기도 하잖아요.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자기의 이익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인간중심의 이야기죠. 그러나 주님의 뜻을 떠나서 생각한다 해도 사람은 자기 인생의 내일 일을 알 수가 없어요. 뭐가 좋은지 뭐가 맞는지 아무도 몰라요.
주님이 하신 말씀은 뭡니까? 믿음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 그 믿음 안에 주님의 세계는 여전히 작동 중이고 우리가 아는 우리 몸 중심의 좁은 세계로는 알 수 없는 거대한 세계가 있는 겁니다. 그 믿음 안의 세계에서 참새 두 마리의 떨어짐도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떨어진다는 그 사실이 확인되는 거죠. 우리는 그 사실을 믿고 주와 함께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겁니다.
하나 더 그래서 더 말씀 볼게요. 야고보서 말씀 보겠습니다. 야고보서 1장 2절 말씀,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시험당해서 지금 너무 괴로운데 뭘 기쁘게 여기라는 거예요? 정말 미쳐 죽겠는데 지금 경제적인 시험, 건강에 대한 시험 관계의 시험, 삶의 복잡한 시험 때문에 너무 괴로워 미칠 지경인데 ‘형제들아 여러 가지 시험 만날 때 온전하게 기쁘게 여겨라.’ 이런 말씀이 마음에 들어오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세계 안에서 주님의 뜻 없이 벌어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3절 말씀,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 더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주님께서는 모든 걸 다 털어버리는 겁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이 작은 세상의 모든 가치와 논리를 다 털어버리는 과정이에요.
마귀가 들러붙어서 우리를 잡아끌고 있는 이 땅의 모든 가치관을 털어버리는 과정이 여러 가지 시험이에요. 그래서 주님께서 일으키신 사건임을 우리가 믿을 때, 지금은 다 이해할 수 없으나 이 모든 일을 기획하시고 진행하시고 이루실 분이 주님이라는 것을 믿을 때, 그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평화를 누리는 거예요.
아이들을 키울 때, 아빠 엄마가 아이들을 어디로 데리고 갈 때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부모를 믿는 믿음으로 불안해 하지 않아요. 설명이 필요 없어 오직 뭘 믿는 겁니까? 그냥 아빠 엄마가 나를 사랑하신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 사랑과 믿음 안에서 자세한 모든 과정은 다 몰라도 괜찮은 거잖아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 있을 때는 자세한 건 몰라도 상관없어요. 최종적으로 주님께서 주의 목적을 위해서 우리를 부르시고 이끄심을 믿기에 그 사랑의 믿음 안에서 어떤 상황에 있어도 항상 기뻐하게 되는 거죠. 부모가 아이들에게 집안 살림살이에 관해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그냥 부모의 사랑을 믿고 그 안에서 기뻐하며 살잖아요. 그처럼 우리도 십자가를 통해 확증된 주님의 사랑을 믿고 일상의 여러 가지 시험 중에도 기뻐하며 가는 겁니다.
우리가 자꾸 주님께 시시콜콜 설명을 원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이 인생의 주체적인 자리에 서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 확증된 그 사랑을 신뢰하고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하나 일상의 사건에 관한 설명을 원하는 것은 마귀에 미혹되어 선악과를 먹은 본성에서 나오는 거죠. 그러나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에게 주신 주님이 다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얼마의 돈에 생존이 달린 것처럼 안달하고 불평하는데 자기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돈에 왔다 갔다 흔들립니까, 그리고 그런 돈이 마침내 우리에게 행복이 되겠습니까. 십자가를 통해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자잘한 일상의 모든 것을 몰라도 기뻐하게 됩니다.
마귀가 우리를 시험하는 이 땅의 모든 시험은 다 어디가 뿌리예요? 잠깐 히브리서 2장 말씀봅시다. 마귀가 우리를 속이고 있는 그 갈고리가 어떤 겁니까? 히브리서 2장 14절,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음에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절,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 평생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사람들은 죽기를 무서워하는데 이 막연한 죽음의 공포 때문에 마귀에게 종노릇 한단 말이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예 친히 이 죽음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우리가 겨울에 눈 치울 때 삽을 눈 아래에 푹 집어넣어서 눈을 떠올리잖아요. 그렇게 주님은 아예 죽음 속으로 들어오신 거죠.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멸하시기 위해 가장 낮고 깊은 죽음의 자리로 푹 들어오셔서 그 죽음 자체를 던져버리시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겪으신 죽음의 공포가 가장 깊고 큰 공포예요.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시고 그냥 죽었으나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잔 받기 이전에 세 번 기도하셨는데 그건 뭐 때문이냐 하면 죽음과 죽음에 관련된 모든 저주를 던져버리기 위해 죽음의 가장 밑바닥으로 들어와 죽음 전체를 던져버리셔야 했기 때문이죠.
표면적인 죽음은 너무나 쉬워 보이나 그 죽음의 깊이와 죽음의 실상을 다 아시는 주님은 그 죽음의 가장 밑바닥에 들어와서 그 죽음 전체를 떠서 던져버리는 과정이기에 너무나 큰 고통이라고 하는 거죠. 죽음의 실상을 모르는 자들이 죽음을 쉽게 알아요.
그러나 몸에 작은 문제라도 생겨서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되면 자연히 살기 위한 본성에 휘둘리게 됩니다. 저희 아버님도 살아계실 때 툭하면 까짓거 인생 죽으면 끝이라고 자주 말씀하셨는데 담낭에 결석이 생겨서 너무 고통이 크니까 곧바로 119 불러서 응급실로 달려가셨어요. 평시에 그렇게 죽으면 끝이라고 담대하게 말씀하시던 분이 몸 안에 생긴 작은 돌 때문에 고통을 겪으시니까 본인이 먼저 응급실로 가시잖아요.
사람들은 죽음이 뭔지도 모르면서 죽음을 쉽게 생각해요.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의 실체를 아셨고, 그리고 자기의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멸하러 오신 분이기 때문에 죽음의 가장 밑바닥을 다 훑으신 겁니다. 이 사람의 죽음, 저 사람의 죽음, 모든 죽음의 저주를 다 훑어서 끌어안고 죽은 것이기에 주님의 죽음이야말로 모든 죽음의 그 총합, 모든 죽음의 무게를 감당하고 죽은 거란 말이죠. 마귀가 우리를 속이고 있는 그 모든 죽음의 위협에서 주님은 당신의 죽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겁니다. 성도는 주께서 이미 해결하신 죽음 안에 있기에 그 죽음조차도 성도에게는 위협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죽음을 이기신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지 않고 다른 예수를 바라보는 겁니다. 죽음의 공포에 짓눌려 다른 예수를 바라보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절 말씀 봅시다. 2절,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나 나는 3절,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4절,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죽기를 무서워하는 사람들은 살아야 한다는 환상에 붙들려 마귀의 간계에 넘어갑니다. 마귀는 늘 이 생존 세계의 삶으로 인간을 유혹합니다. 그래서 마귀가 만들어 제공하는 다른 예수를 따라가는 거죠. 다른 예수는 어떤 예수예요?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 죽음을 우회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예수입니다. 너는 안 망해, 넌 죽지 않아. 너는 망하지 않고 너는 잘될 거야 하는 식으로 전파되는 예수가 다른 예수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진짜 예수는 십자가의 여정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지날지라도 주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 사망한 음침한 골짜기 속으로 우리를 끌고 가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에요. 그 사망의 골짜기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이 바로 죽음으로 죽음의 세력을 이기신 예수님이심을 증거 하시는 겁니다. 주님은 주님 자신을 나타내고 증거 하시기 위해 우리를 구태여 사망의 골짜기로 인도하신다고 하는 거죠. 주님을 증거 하기 위해 다니엘 친구들을 풀무불에 던져 넣으신 겁니다.
다른 예수는 죽지 않고 다 잘될 거라는 환상을 전하지만 진짜 예수는 당신과 함께 십자가의 여정을 거쳐서 당신과 함께 영광의 길로 가자고 부르시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애초에 주님은 당신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박해하고 욕하고 미워하는 일이 있을 거라고 이미 선포하셨어요. 예수를 따라가는 길은 남들에게 미움받고 욕먹는 길이라는 사실을 이미 다 말씀하셨단 말이죠. 그런데 다른 예수는 예수를 믿음으로 존재감 상승, 예수를 믿음으로 더 인간다운 삶으로 발전되고 증진되고, 훌륭한 인격자가 되고, 사람들의 선망을 받게 되는 길로 간다고 선전한단 말이죠. 다른 예수고 다른 영이에요.
주님이 우리를 인도해 가시는 길은 십자가의 여정을 거쳐서 그다음에 받게 될 영광이라고 하는 거잖아요. 어차피 이 땅의 삶은 고통 총량의 법칙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이 땅은 이재용 회장이나 지금 은퇴하셔서 노후를 걱정하는 분들이나 인생에서 받는 고통은 똑같아요. 누구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어요.
에덴의 바깥은 어디나 고통스러운 곳입니다. 그런데 성도는 감사하게도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받는 특권을 입은 자들이고 성도 아닌 자들은 자기 자신의 생존을 위해 죽도록 애쓰다가 결국은 죽는 거란 말이죠. 그러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래서 마지막으로 고린도전서 1장 22절을 봅시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여러분, 왜 유대인은 계속 표적을 구하죠? 유대인은 고난받는 민족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은 자기 생존을 위한 표적을 늘 구해왔어요. 지금도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합니다. 유대인들은 오랜 세월 떠돌며 항상 생존의 위협을 받아았기에 언제나 생존을 위한 표적을 구해요.
그런데 생존을 위해 표적을 구하는 유대 민족 앞에 메시아가 왔는데 그 메시아가 생존을 위한 표적을 보여주지 않고 마지막에 자기가 십자가에 죽어버렸단 말이죠. 그러니까 생존을 구하는 유대인들 입장으로는 십자가의 예수가 거리껴지는 겁니다. 게다가 유대인들이 보기에 이 십자가는 좀 이상했어요. 23절 말씀,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오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늘날에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만 전한다면 사람들에게 껄끄러울 거예요.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십자가는 죽음을 가리키니까요. 그래서 많은 사람이 부활의 예수를 전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전하는 예수는 부활의 예수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입니다. 부활의 세계도 십자가 안에 속한 한 부분입니다. 십자가 떼고 부활의 예수를 말하게 되면 그건 다른 예수가 되는 겁니다.
모든 것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기점으로 생성되고 경영됩니다. 십자가의 원점을 제거하면 부활도 없고 천국도 없어요. 뿌리 없는 나무란 말이죠. 모든 것이 십자가의 예수에게서 생성되고 확장됩니다. 그 십자가는 비밀의 세계입니다. 그 안에 다 들어있어 있고 그 안에서 모든 것이 순식간에 생성되고 확인돼요.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이 십자가의 예수를 껄끄러워 한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어요. 갈라디아서 3장 13절 말씀 봐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자, 유대인들은 생존을 위한 표적을 구했는데 예수가 나무에 달려 죽었잖아요. 그런데 분명히 신명기 21장 23절 말씀에 근거하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라고 기록되어 있거든요. 신명기 말씀을 다 외우고 있는 유대인들이 볼 때는 나무에 달린 예수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가 명확한 거죠. 그러니 어떻게 하나님께 저주받은 그 예수를 메시아라고 믿을 수 있겠어요.
그 신명기 21장 23절 말씀을 성령으로 깨달아 알지 못하면 도저히 십자가의 예수는 믿을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문자로 아는 말씀은 도리어 죽는 길입니다. 그래서 문자로 성경을 아는 그 유대인들이 앞장서서 예수를 죽인 겁니다. 성경을 많이 아는 게 중요하지 않아요.
모든 성경은 성령 즉, 그리스도 예수의 영으로 기록하신 것이기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고난의 의미가 풀리지 않으면 성경 지식은 오히려 예수를 박해하고 죽이는 도구가 돼요. 나무에 달린 자마다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라는 그 신명기의 말씀을 아는 자들이 예수를 보니 저주받은 자를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 말이죠.
그런데 성령으로 그 말씀이 밝히 보이니까 그 십자가의 비밀이 풀리는 거죠. 성령이 임해야 비로소 나무에 달려 하나님께 저주받은 그 예수님이 바로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음으로 그 나무에 달리셨음을 알게 되는 겁니다. 이 십자가 저주의 비밀이 성령이 없이는 결코 보이지 않는 거예요.
우리가 성경을 볼 때마다 어디를 펼쳐도 저주받아 죽어야 마땅한 우리의 실상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가 죄인의 본성을 타고난 죄인이라는 진실과 예수님이 바로 그런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었음을 아는 진실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만 알게 되는 겁니다. 나무에 달린 예수를 보며 그 예수가 자기의 죄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나무에 달리신 것이 아니라 바로 나와 같은 죄인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나무에 달리셨다는 이 사고의 전환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만 가능합니다.
이 진실은 성경이 이미 증거하고 있지만 주의 영이 일깨워주지 않으면 대신 저주받은 예수님을 발견할 수 없어요. 그래서 결국 자기가 저지른 행위에 대해서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거죠. 그래서 어떤 이들은 자살까지 합니다. 가룟 유다가 그랬잖아요. 베드로도 예수를 세 번 부인했지만 자기가 예수를 세 번 부인하는 그 죄마저도 주님께서 대신 감당했다는 사실을 볼 때 다시 찾아오신 예수님과 재회할 수 있었던 거죠.
모든 성경 말씀은 끝없이 예수님이 우리 대신 받으신 저주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내용으로 꽉 차 있어요. 하나만 읽고 마치겠습니다. 이사야서 53장 1절,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안 믿죠? 믿을 수가 없어요. 2절,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 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러니까 우리가 봤을 때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께 뭐 흠모할 게 뭐 있습니까? 초라하고 비참하게 피 흘리며 죽어가는데 그렇게 멸시받고 아주 괴로운 모습으로 못 박혀 있는 그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누가 믿을 수 있겠어요. 그런데 그 십자가의 고난받는 예수님이 사실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하신 것이었음을 성경이 이미 말하고 있단 말이죠.
3절,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들에게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않았다. 4절,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지금 유대인들이 이 말씀에 딱 걸려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고난받은 것은 그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인데 매일 자기들의 죄를 대신하여 희생 제사를 드리면서도 그 희생제사의 실체적 원리를 몰랐던 거죠.
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오.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죄와 허물 그리고 그로 인한 저주의 심판을 대신 담당하여 나무에 달린 예수의 모습이 이미 이사야서에 기록되어 있지만 성령이 임하시지 않으면 이 비밀이 보이지 않는 겁니다.
원래 그 십자가의 저주는 우리가 받아야 하는 것이지만 우리 대신 십자가 저주를 담당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오늘도 우리는 온갖 생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주님이 대신 저주받으심으로 오늘도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건강을 누리며 삶의 다양한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오늘도 숨 쉬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버스 전철 타고 왔다 갔다 하면서 풍요를 누리는 겁니다. 이 모든 삶의 풍요가 우리 대신 형벌 받으신 예수님으로 인해 주어진 은총의 결과임을 아는 이들이 성령을 받은 성도입니다.
그럼에도 이 십자가 은혜를 모르는 자들은 지금 누리는 모든 혜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더 많은 것을 원하고 요구합니다. 주님이 받으신 그 끔찍한 저주의 십자가가 본래 우리의 자리인데 주님이 저주를 받으시고 우리는 삶의 평안을 누립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우리 대신 저주의 십자가에 오르신 주니 안에서 늘 새롭게 확인되고 실체화되는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의 자리가 예수님이 대신 죽은 희생의 피 위에서 마련된 자리임을 아는 순간, 우리는 기뻐하게 됩니다. 주님이 그 피로 마련해주신 새로운 삶의 영역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존귀하신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주님 바깥에서 세상을 보게 되면 기뻐할 일이 없고 늘 채워지지 않는 욕망으로 몸부림치게 되지만 지금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삶의 자리가 주님의 피로 마련된 신비한 은혜의 자리임을 알게 해 주시고, 주님의 피로 준비된 이 희생의 자리 위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도록 긍휼을 더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