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bFSzlUqrFCc?si=C2ur7tafoA2v8-Je
무엇에든지 완전한 길. 빌립보서 4: 8~9
성경은 인간들의 자기 발전과 자기완성을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성경은 오직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말씀을 통해 민족의 정당성을 주장했던 유대인들처럼 자기의 가치를 위해 말씀을 이용하는 자들은 다 멸망과 심판의 대상입니다.
무엇에든지 참되고, 경건하고, 의롭고, 정결한 삶을 요구하는 말씀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말씀대로 살아가는 척 외식하거나 실천할 만한 인간적인 교훈과 윤리를 추출하여 부분적으로 실행할 뿐입니다.
오직 이 말씀을 홀로 이루신 예수님이 그 성취의 효력을 우리에게 공급하심으로써 우리도 말씀을 지키는 자로 확증됩니다. 주님의 성취가 우리의 성취로 전환되는 것은 성령 안에서 우리의 몸이 주님의 몸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 값으로 우리의 몸을 속량하심으로써 우리 몸을 불법점거 중인 더러운 귀신들을 내쫓으시고 성전으로 기능하게 하십니다.
옛 뱀의 미혹으로 몸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우리의 자아는 날마다 주님의 이름으로 부인됩니다. 악령들은 자기 정체를 숨기기 위해 우리의 자아를 내세워 말씀을 지키게 함으로써 말씀의 주인이신 주님께 저항하게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 형상의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담기 위한 질그릇이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우상의 전으로 사용된 것처럼 오늘날의 교회도 다른 예수와 복음을 전파하는 불법 기지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희생으로 이뤄진 하나님의 의 앞에서 인간이 행하는 모든 의가 날마다 부인되지 않는다면 교회는 이미 사탄의 기지로 넘어간 것입니다.
사도는 우리가 행할 수 없는 말씀을 제시함으로써 인간의 의를 다 털어내고 이 말씀의 성취자이신 주님을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단번에 자기 몸을 십자가에 드림으로써 영원히 우리를 거룩하고 완전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에든 참되고 경건하고 옳고 정결한 그의 교회로 나타납니다.
성도는 자기의 연약함과 실패를 통해 더욱 주님의 십자가 희생의 가치를 발견하는 자들입니다. 주님의 완전한 성취 앞에 우리의 인간적인 의로움은 배설물처럼 노출되고 그의 십자가 희생의 가치만 날마다 더욱 새롭게 드러납니다.
무엇에든지 완전한 길. 빌립보서 4장 8~9절
8절,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9절,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무엇에든지 참되고, 무엇에든지 경건하고, 무엇에든지 옳고, 이런 말씀은 인간이 실천하기는 불가능한 기준이죠. 이런 말씀을 따르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여러분 속에 수용됩니까?
이런 말씀을 대하면 이대로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무엇에든지 참되고 경건하고 옳게 행하자고 가르치고 권면하는 분들이 아주 많아요. 그런데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서 지키려고 한다면 마치 거대한 바위에 자기 머리를 들이받는 거랑 똑같은 거예요. 자기 머리통으로 이 바윗돌을 깨뜨리려고 시도하는 거죠.
특히 경건의 단수가 높으신 분들, 경건의 검은 띠 유단자들이 이런 말씀을 지켜서 말씀의 고지를 정복하려는 시도를 많이 합니다. 그래서 무엇에든지 경건하고 참되고 옳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실천하려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그렇게 대하는 것 자체가 율법적인 안목으로 대하는 거죠. 율법적인 안목으로 모든 말씀을 대하면 말씀대로 살기 불가능하다는 결론, 그래서 결국 율법대로 살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저주와 심판이 합당하다는 결론이 나와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자신들의 인간적이고 종교적인 서실에 가치를 두고 점수를 주는 거죠. 나름대로 선하게 살려고 노력한 자신들의 정성과 헌신에 점수를 주고 그 가치로 하나님 보좌 앞에 서려고 시도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자기의 노력과 행위를 기준으로 타인과 비교하면서 상대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올리려고 하는 겁니다. 인간들끼리 상대적인 경건과 의의 기준을 가지고 서로 비교 우위에 서려고 애를 쓰는 거죠.
그런데 그런 것이 의미가 있습니까? 아침에 잠깐 영상을 보는데 어떤 목사님이 스타벅스를 가지 말아야 한다고 설교 시간에 강조하시는 거죠. 또 어떤 분은 지방선거 투표용지가 부족한 문제로 분노하십니다. 다들 각자의 선악 가치로 분노하고 자신들의 선과 의의 기준을 따라 행동하죠.
주아나 하윤이가 시험 기간에 보는데 선생님이 시험지를 나눠주다가 뒤에 앉은 아이들에게는 시험지가 모자란다고 나눠주시지 않았다면 그래서 시험을 보지도 못했다면 얼마나 화가 나고 또 그 부모님들은 또 가만히 있겠습니까? 마치 그런 것처럼 이번에 투표용지가 모자라서 투표하지 못한 분들이 얼마나 화가 나겠어요. 우리가 분노할 어떤 선과의 의의 기준이 각자 다 다르다는 거죠.
그러므로 어떤 사회적인 이슈가 있을 때마다 교회가 그 이슈에 따라 움직여서는 안 되는 겁니다. 스타벅스를 가지 말라는 둥, 참정권을 침해받았으니 잠실로 모이라는 둥 하는 식으로 이 땅의 가치에 휘둘리면 안 되는 거죠. 그렇게 되면 교회가 이 땅의 가치에 휘둘리는 한 집단이 돼버리는 겁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 땅의 선악 기준에 휘둘리는 집단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이 땅의 가치 기준에 따라 휘둘리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서 하신 말씀이 뭐였습니까?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시는 예수님이 너무 초라한 모습이라 빌라도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없었죠. 그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8장 36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주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 나라는 이 세상의 어떤 정권이나 어떤 시대 가치, 어떤 시대정신에도 휘둘리지 않고 고유한 하나님 나라의 기준을 따라 움직이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 기준은 늘 이 세상의 기준과 충돌하게 되죠.
성경대로 말하자면 이 세상에 속한 모든 나라는 다 짐승에게 속한 나라입니다. 다니엘이 보고, 사도 요한이 봤다시피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들이 있잖아요. 사자 같고, 곰 같고, 표범 같고, 뭐 그런 짐승들이 바다에서 올라왔는데 그런 짐승들이 다 이 세상의 나라들을 표현하는 것처럼, 이 세상의 모든 나라는 아무리 선과 의를 내세우고 아름다운 가치를 추구한다고 해도 하나님 나라에 대적하는 짐승의 나라입니다.
이 세상에 속한 모든 나라는 옛 뱀의 미혹을 따라 악을 버리고 선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이 땅에 낙원을 세우려고 하는 거죠. 그러나 문제는 내가 말하는 선과 네가 말하는 선이 다르고, 좌파가 말하는 선과 우파가 말하는 선이 다르다는 겁니다. 민주주의를 말해도 뭔가 좌파와 우파가 말하는 민주주의가 다르잖아요.
그래서 인간 세계에서의 선악 가치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래서 이 세상의 이슈를 따라 교회를 몰고 가는 것은 제가 볼 때 교회가 아닌 거죠.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을 국가라고 한다면 땅에서 올라온 짐승을 종교라고 보통 말하는데 종교의 세력이 국가의 세력에 휩쓸리고 있는 거죠.
그들은 국가적인 가치나 이념에 찬동하는 이론을 성경을 동원해서 말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하잖아요. 성경은 십자가에 죽임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근거해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사람은 민주주의로 사는 게 아니에요. 인간이 민주주의 하면 영생합니까?
마귀는 그때그때 어떤 특정한 가치관을 가지고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뭘 말하고 있는 거예요? 좌나 우나, 보수나 진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만 선포하고 있잖아요. 애초부터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인간을 추방하실 때는 에덴 바깥에서 인간들이 어떤 가치를 추구하고 이루고 산다 해도 하나님 보시기에 진노의 백성이라는 사실만을 성경은 선포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 땅의 가치에 충실했다고 해서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내세우려고 한다면 하나님의 심판밖에 받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공자 맹자 말하고 충효사상을 내세우고 부모를 섬겼다, 측은지심으로 이웃을 섬겼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을 인정하시겠냐 말이죠. 그런 모든 가치를 주님은 싹 밀어버리시는 거죠.
그래서 여기서 말씀처럼 무엇에든지 참되고, 무엇에든지 경건하고, 무엇에든지 옳고, 등등 이런 말씀을 보는 관점이 문제라는 거죠. 우리가 주체가 되어서 선악의 관점으로 말씀을 대하게 되면 다 자기 기준의 안경으로 성경을 보는 겁니다. 그럼 자기의 선과 의를 따라서 성경말씀을 끌고 와 인용하게 되는 거죠. 결국 자기 자신과 자기 집단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주장하기 위한 도구로 성경 말씀을 이용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이 각 개인과 집단의 입장과 주장과 이익을 위한 도구와 재료로 난도질당하고 갈가리 찢기는 거죠.
그러나 모든 성경은 무엇을 증거 합니까? 모든 성경은 무엇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를 증언하죠. 모든 성경은 어떤 집단을 말하지 않고 모든 성경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합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 합니다.
성경은 특정한 정치 이념을 말하지도 않고, 어떤 철학적인 가치를 말하지도 않고, 국가적인 이념을 말하지도 않고, 특정 집단의 정당성이나 이익을 대변하지도 않아요.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합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증언하고 그분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증언합니다.
다만 인간이 자신들의 이익과 정당성을 위해 성경을 도구로 끌어들이는 거죠. 그래서 율법적인 가치와 안목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항상 자신의 처지와 자기변명, 혹은 그 시대나 상황에 맞는 가치나 윤리나 행위규범을 위해서 성경 말씀을 뜯어내게 되는 겁니다. 지금까지 이천 년 동안 수없이 많은 인간과 집단이 성경의 특정 구절을 뽑아서 자기 자신이나 자기 집단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데 활용했어요.
심지어 북한의 김일성조차도 주체사상을 세우는데 성경을 이용했다는 말이 있잖아요. 김일성 어머니가 강반석이라고 굉장히 믿음이 좋은 여인으로 알려져 있어요. 그 외삼촌인가 하는 강양욱 목사가 주체사상의 핵심인 수령론과 사회정치적 생명체론에 영향을 끼쳤다고 해요. 수령 즉, 김일성을 절대적인 머리로 삼고, 인민을 그 지체로 묘사하는 수령론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를 머리와 지체로 설명하는 기독교의 교회론을 정치적으로 모방하여 우상화한 것으로 보잖아요.
많은 국가가 성경에서 끌어온 사상적 기반 위에 건국되기도 했습니다. 좁게 보면, 작은 가게를 하시는 분들도 네 시작은 미약하지만 나중은 창대하리라는 성경 말씀을 붙여놓는 식으로 성경을 자기의 뜻을 위해 끌어오는 거죠. 그러니까 이 성경은 이현령비현령이라는 말처럼 갖다 써먹을 데가 무궁무진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각자 자신들의 욕망을 따라 성경 말씀을 써먹는 거죠.
그러나 성경은 최종적으로 오직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성경을 인용할 때 그 성경 인용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느냐를 봐야 하는 거죠. 성경을 인용해서 그 집단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면 그건 성경을 잘못 쓰고 있는 도둑질하는 겁니다. 성경 말씀을 근거로 자기 교회가 옳다고 자기 교회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자들도 마찬가지로 하나님 말씀을 도둑질하고 있는 거예요.
말씀을 이용해 자기 집단의 정당성을 주장한 대표적인 사람들이 유대인들이죠.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경을 동원해서 자기 민족의 정당성을 늘 주장했거든요. 말씀을 근거로 자신들을 하나님이 택하신 선민이라고 믿고 주장하면서 다른 민족들을 경멸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이방민족의 손에 넘겨서 포로가 되어 끌려가게 하시고 그들이 자랑하는 성전은 돌 위에 돌 하나 겹치지 않게 철저히 파괴하셨어요.
성경을 통해 자신들을 증언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것처럼 성경을 통해 자기 자신을 증언하는 자들과 집단은 다 심판받게 됩니다. 말씀을 통해 자기 민족의 정당성을 주장했던 유대인들이 멸망했잖아요. 그처럼 성경 말씀을 동원해서 우리 교회는 옳다, 우리 진영은 옳다, 우리 집단은 옳다, 우리나라는 옳다, 나는 옳다는 식의 믿음과 주장은 다 하나님 말씀을 도둑질해서 쓰고 있는 도둑들입니다.
자, 그래서 우리가 오늘 본문과 같은 말씀을 정직하게 대하게 되면 이 말씀을 지켜 사는 것이 불가능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요. 정말 불가능한 기준이잖아요. 어떻게 사람이 무엇에든지 참되고, 무엇에든지 옳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지난 주에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봤잖아요. 우리가 어떻게 항상 기뻐합니까? 불가능한 말씀이잖아요.
마찬가지로 무엇에든지 참되고 경건하고 의롭고 정결하고 사랑받을 만하고 칭찬받을 만하고 이런 주님의 기준을 우리는 충족할 수 없어요. 될 수 없는 일이죠. 그러니까 인간 세상의 가치 기준을 가지고는 이 말씀 자체가 해석도 안 되고, 이 말씀에 도전해서 나름 자기의 인간적인 의를 쌓으려고 해도 결국은 한계가 다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안되니까 오히려 사람들이 그렇게 지키며 살아가는 척 외식하게 되는 겁니다.
자, 그래서 뭘 지금 뭘 말씀드리고 싶냐 하면 일단은 잠깐 로마서 12장 1절 말씀 봅시다. 로마서 12장 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일단 우리의 몸 자체가 이미 주님께 드려진 산 제물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몸의 주인은 누굽니까? 우리 몸의 주인은 주 예수님이에요.
방금 하영 자매 기도할 때, 물 한 모금 마시는 거, 한 번 숨 쉬는 거, 이게 다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고 고백했잖아요. 우리 몸 자체가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 몸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지금 자기의 소유된 몸이기 때문에 자기의 몸을 숨 쉬게 하고 자기의 몸을 마시게 하고 먹게 하는 거예요. 우리 몸은 우리 게 아니라는 거죠. 우리 몸은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몸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님 자신의 몸을 돌보시는 거죠.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이 지금 어머님이 항상 뇌경색으로 좌측 편마비를 앓고 계시잖아요. 팔도 움직이고 싶으시고 다리도 움직이시고 싶은데 몸이 말을 안 듣는 거잖아요. 그래서 내 몸이 왜 말을 안 듣지? 내 손이 왜 내 말을 안 듣는지 하시는데 처음부터 그 손과 발이 어머니의 손발이 아니었어요. 주님의 손발인데 우리는 자꾸 우리의 손발이라고 착각하는 거죠.
우리의 손과 발이, 우리의 몸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하시기 위해 가끔 우리 몸에 문제가 발생하게 하십니다. 함집사님 지금 손가락을 다쳐서 피아노를 못 치고 있잔하요.
그렇게 우리의 몸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그 순간이 바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숨을 쉬든 숨을 안 쉬든, 밥을 먹든 못 먹든, 주님이 주님의 몸을 관리하시는 거죠. 그렇게 우리 몸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우리의 소유권을 부인하고 주님의 소유권과 관리권을 인정할 때 우리의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거예요.
이미 우리의 몸은 예수님의 피 값으로 예수님께 이전됐어요. 마귀의 종이었는데 예수님이 그 피 값을 지불하고 사 오심으로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로 소유권이 넘어갔단 말이죠. 이 건물이 예전에는 미술 학원이 있었대요. 여기 지하에 그분들 나가고 지금 교회가 들어와 있잖아요. 우리의 몸이 예전에는 더러운 귀신의 집이었단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피 값을 지불하고 사 오심으로써 이제는 주님이 사시는 성전이 됐어요. 여기서 우리의 자아라는 건 없습니다. 그냥 귀신의 집이었다가 지금은 성령의 집으로 바뀐 거란 말이죠. 나의 몸이라는 개념 즉, ‘나,’ 라고 하는 개념을 성경은 인정하지 않는단 말이죠. 그럼 ‘나’라는 자아 개념은 더러운 귀신이 이 몸에 들어와서 자기 집을 삼을 때 나오는 개념이죠. 더러운 귀신은 자기 집의 문패를 자기 이름으로 내걸지 않습니다.
귀신은 우리의 몸을 불법 점거하고 자기 집의 문패를 우리의 이름으로 즉, 우리 자아의 이름으로 내거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항상 우리의 몸으로 인식하고 또 우리의 몸이라고 주장하죠. 상대의 몸을 볼 때도 그 몸이 상대방의 몸이라고 하는 겁니다. 자기 정체를 숨기고 인간의 몸에 은신한 귀신은 자기 정체를 계속 숨기기 위해 더욱 우리 자신을 강하게 인식하게 합니다. 그래서 내 인생은 내 것이고 내 몸도 내 것이라는 식으로 우리 자신의 주체성을 강조하게 되는 거죠. 그렇게 귀신은 인간의 몸 안에 숨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만유의 주님이라는 진실에 대항하도록 우리를 미혹하고 있는 겁니다.
자아의 개념이 언제 생겼어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나서 그 선악 가치가 들어오고 나서부터 자아의식이 생성된 거예요. 처음에는 자신들이 벗고 있는지 입고 있는지 그런 것을 신경 쓰고 판단하는 그런 주체적인 자아가 아예 없었단 말이죠. 왜냐하면 애초에 몸의 주인은 주님이었으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만드신 거잖아요. 아담의 뜻은 그냥 흙이죠.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그냥 흙이고 질그릇이에요. 그 첫 사람 아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흙으로 빚어진 질그릇 속에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담아서 그의 온전한 몸으로 창조해 내시는 겁니다.
그 목적을 따라 주님은 피 값으로 우리를 사서 주님 앞으로 소유권을 이전하시고, 주님의 필요와 목적을 따라 우리의 몸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게 바로 산 제물이라는 거죠. 살아있는 제물이죠. 몸은 살아있는데 그 몸의 소유권은 주님에게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아는 날마다 부인되고 죽는 거예요.
우리 몸이 아프든 건강하든, 밥맛이 좋든 나쁘든 간에 이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고, 주님의 목적과 뜻대로 사용되고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산 제물로 드리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몸을 쓰고 있으니 우리 몸의 현재 상태에 관해 우리가 개인적으로 어떤 가치와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는 거죠.
그런데 그다음 말씀 보세요. 2절 말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여기서 보면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하잖아요. 그리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하죠. 변화는 뭐죠? 이 세대를 본받는 데에서 돌이키는 변화를 말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아야 하는데 이 세대의 특징은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야,’라고 하는 것이 이 세대의 특징이에요. 내 인생은 내 것이고, 내 몸도 내 것이고, 내 머리카락도 내 것이고 하는 식으로 자기 몸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 이 세대의 속성입니다. 내 몸은 내 것이라는 의식이 이 세대의 속성이죠. 그래서 몸을 자기 맘대로 사용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몸을 관리하려는 거죠.
이 세대는 말씀을 볼 때도 자기가 주체가 되어서 말씀을 대하고, 자기가 주체가 되어서 말씀을 해석하고, 자기가 주체가 되어서 말씀을 적용하고 지키려고 합니다. 자기 주체성이 이 세대의 속성입니다. 그럼 이러한 세대에서 변화를 받으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어떤 변화를 말하는 겁니까? 우리 몸의 실상을 아는 거죠. 진실은 우리 몸의 주인이 우리가 아니라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몸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라 주님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몸에 대한 가치 판단을 우리가 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여기 나와 있죠.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선하시고 또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여기서 하나님의 뜻이 어떤 겁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보내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거죠. 개별적인 우리 자신의 가치를 믿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은 개별적인 우리의 가치를 믿지 말고 예수님을 믿으라는 겁니다. 우리의 자아는 우리 안에 침투한 귀신들이 만들어낸 허구의 자아이며 허구의 가치이기 때문에 우리를 속이는 거죠. 우리의 몸을 불법 점거한 귀신이 우리의 자아를 내세워 몸의 지배권을 행사하는 겁니다. 그러나 몸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귀신이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를 미혹할 때는 선악의 가치로 미혹하는 거예요. 우리의 몸에 우리 자신의 이름으로 문패를 내걸고 선악의 가치에 기반한 양심과 율법과 공자 맹자, 윤리와 도덕에 기반한 온갖 사회규범으로 우리를 단장하도록 미혹하는 거죠.
그 귀신이 우리의 몸에 우리 자신의 이름으로 문패를 내걸도록 한 것이 짐승의 표, 666이죠. 짐승의 이름이고 그 이름의 숫자인데 그게 또 사람의 숫자라고 하잖아요. 귀신들이 우리의 이름으로 문패를 내건 거죠.
그러니까 악하고 더러운 귀신이 인간의 몸을 점거하고 우리 인간의 이름으로 표를 내걸고 자기들의 이름을 그 뒤에 숨기고 선악의 가치로 온갖 율법적이고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일들에 집중하게 함으로서 어린 양 예수의 십자가 희생의 가치에 저항하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대의 특징은 선악과를 먹은 티를 팍팍 낸단 말이죠.
이 세대의 인간은 늘 무엇이 옳고 그름을 따지고 양심의 가책을 받고, 또 양심대로 살 수 없는 자신들의 한계를 이런저런 다른 가치로 가리고 덮죠. 측은지심이 있다고 하지만 상대적이고 선택적이죠. 그리고 우리 육신의 한계로 전체를 볼 수 없으니 우리의 행위도 언제나 부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대응해 갈 뿐인 거죠.
이 세대의 특징은 선악과를 먹은 존재이기 때문에 계속 선악의 구도 가운데에서 나름의 좌표를 찍어 나가는 거죠. 그러면서 나름 만족하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 뜻은 인간의 모든 가치 기준을 폐쇄하고 말소하겠다 철거하여 싹 지워버리고 그 아들로 인해 주어지는 그 아들의 의로만 새롭게 입히고 세우겠다는 것입니다.
이 단순한 기준 자체가 왜 이렇게 인간에게 받아들일 수 없이 어려운 문제냐 하면 이미 인간 내부를 점거하고 있는 악령들이 있기 때문이며 하나님이 그 악령들의 준동을 허락하셨기 때문이죠. 자 에스겔 8장을 잠깐 보면 택한 백성이라고 자부했던 이스라엘의 실상이 어떤 건지 보여주시는데 이건 주님의 영이 보여주시지 않으면 도대체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에스겔서 8장 3절, ‘그가 손 같은 것을 펴서 내 머리털 한 모숨을 잡으며 주의 영이 나를 들어 천지 사이로 올리시고 하나님의 환상 가운데에 나를 이끌어 예루살렘으로 가서 안뜰로 들어가는 북향한 문에 이르시니 거기에는 질투의 우상 곧 질투를 일어나게 하는 우상의 자리가 있는 곳이라.’
지금 하나님의 성신이 에스겔의 머리를 잡아서 들어 올려서 포로로 끌려간 바벨론 땅에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간 거예요. 북향 문에 이르니 거기에 뭐가 있더라? 질투의 우상 곧 질투를 일어나게 하는 우상의 자리가 있는 곳이라는 거죠. 예루살렘 성전 자체를 아예 지금 성령께서 뭐라고 규정하고 있는 거예요? 질투를 일으키는 우상의 자리가 있는 곳이라고 하는 거죠. 성전이 곧 우상의 자리였단 말이죠.
성령이 우리를 딱 깨우시면 오늘날 교회가 곧 우상의 자리라는 사실이 보입니다. 교회가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곳이라는 사실이 보이죠. 교회에 모인 사람들이 다 자기 욕망을 위해서 주여, 주여, 하면서 부르고 있으니 우상의 자리죠. 그 뒤에 말씀. 에스겔 8장 5절 말씀, ‘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제 너는 눈을 들어 북쪽을 바라보라 하시기로 내가 눈을 들어 북쪽을 바라보니 제단문 어귀 북쪽에 그 질투의 우상이 있더라.’ 북쪽은 지성소가 있는 곳인데 그쪽에는 또 질투의 우상이 있는 거죠. 이제 성소의 내부로 들어갈수록 점점 더 이스라엘이 은밀하게 섬기는 우상들이 나타납니다.
에스겔 8장 8절,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이 담을 헐라 하시기로 내가 그 담을 허니 한 문이 있더라 9절, 또 내게 이르시되 들어가서 그들이 거기에서 행하는 가증하고 악한 일을 보라 하시기로 10절, 내가 들어가 보니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우상을 그 사방 벽에 그렸고 11절,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 중 칠십 명이 그 앞에 섰으며 사반의 아들 야아사냐도 그 가운데에 섰고 각기 손에 향로를 들었는데 향연이 구름 같이 오르더라.’
장로 70명이 은밀한 방에 모여서 애굽에서나 볼 수 있었던 곤충들, 가증한 짐승들을 쫙 그려놓고 그 앞에서 우상숭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서 하는 기도가 얼마나 대단한 기도들인지 향연이 구름같이 오르더라는 거죠. 오늘날로 번역하면 예배당 기도실에 모여서 70명 장로들이 모여서 기도하는데 그 기도의 내용을 들어보니까 다 마음의 탐심을 따라 하는 우상숭배의 기도인 거예요. 그런데 얼마나 그런 기도를 열심히 하는지 향을 피우는 연기가 구름같이 피어오르듯이 그 기도의 열정들이 대단하다는 거죠.
그래서 에스겔 8장 12절 말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들이 각각 그 우상의 방안 어두운 가운데에서 행하는 것을 네가 보았느냐 그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지 아니하시며 여호와께서 이 땅을 버리셨다 하느니라.’
나름 자기들의 욕망을 따라 열정적으로 기도하는데 주님이 그들의 욕망을 채워주지 않으시니까 이제는 주님이 자기들을 버렸다고 생각하는 거죠. 주님이 우리가 하는 욕망의 기도를 다 들어주시겠습니까. 아니잖아요. 어떤 분의 말을 들어보니까 예전에 나가던 교회에 금요기도회에 한 집사님은 바닥을 떼굴떼굴 뒹군대요. 엄마 따라 시장 왔다가 장난감 안 사준다고 해서 바닥에 막 뒹구는 애들 있잖아요. 딱 그런 거죠.
자, 지금 예루살렘 성전의 실체를 성령께서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건데 어때요? 나름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는 자들이 성전에 모여서 하는 일의 실상을 성령께서 딱 보여주시니까 그들은 지금 집단으로 우상숭배를 하고 있고, 예루살렘 성전은 거대한 우상숭배의 중심지였다는 거죠. 그것을 주의 영이 보이시기 전까지는 몰랐어요. 왜냐하면 다 장로들이 앉아 있고 거룩하게 뭔가를 하고 있으니까 거룩해 보이는데 그 안에 내용은 탐심의 우상으로 가득했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겁니다.
에스겔도 이런 성전의 실상을 봤고 예레미야도 성령으로 성전의 실상을 봤잖아요. 예레미야도 성전 입구에 서서 이 성전이 여호와의 전이라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반복하잖아요. 여러분, 어떤 교회가 우리 교회는 말씀대로 사는 교회라는 말을 믿을 필요가 없어요. 교회는 십자가에 죽임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만을 이야기할 때 잠깐 교회 됨을 나타내고 드러내 보이는 거지, 집단적 정당성을 소유할 수 없어요.
약속의 땅에 세워진 성전이 귀신의 집으로 도용되었던 것처럼 오늘날의 교회도 귀신의 집으로 도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어요.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사도 바울이 그 내용을 이렇게 압축합니다. 사도가 고린도 교회를 세웠는데 그 고린도 교회가 우상숭배의 집단 서식지로 바뀐 걸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절,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3절,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4절,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고린도교회는 껍질만 남고 그 내부는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에 의해 장악된 겁니다. 껍질은 교회인데 내부는 이미 우상숭배의 서식지가 된 거죠. 껍데기는 고린도 교회인데 그 내부를 보니까 다른 예수를 믿고 있고, 다른 영을 따르고 있고, 다른 복음을 듣고 앉아 있는 거예요. 이미 뱀이 그 간계로 고린도 교회를 불법 점거하고 그 속을 다 파먹은 거죠. 뱀이 들어와서 고린도 교회 내부의 알맹이는 다 파먹고 지금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으로 채워 놓은 겁니다.
구약의 성전에서 벌어졌던 일이 신약의 교회에서 똑같이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껍데기 즉, 이 세상의 가치를 말하게 되면 이미 미혹된 겁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음으로 이루어 놓은 하나님의 의를 고백하고 나누고 증거 하는 순간에만 교회 됨이 온전히 드러나는 겁니다. 그거 외에 달리 우리가 말할 게 없어요. 저는 저 자신을 바라볼 때 싸우는 자가 아닌가 싶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당신을 드리신 그 희생의 가치 이외에 나머지 모든 가치를 부정하는 그 싸움을 싸우는 거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은 창조되었는데 그 형상과 모양의 실체는 누구인가요? 그 실체는 예수님이잖아요. 하나님 형상과 모양의 실체이신 예수님이 오실 때에에야 비로소 인간 내부를 불법 점거하고 있는 마귀가 떠나갑니다. 마귀가 인간 내부에서 선악 가치로 온갖 이론과 윤리와 잡다한 가치를 구축해 놨단 말이죠. 예수님이 오실 때 선악 가치로 인간을 미혹하는 마귀의 세력이 떠나갑니다.
마찬가지로 성전의 실체는 예수님이잖아요. 예수님이 성전의 실체로 오실 때까지 그 성전 내부를 마귀가 장악하고 있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실체는 머리이신 예수님인데 예수님이 머리로 오실 때 내부에 침투한 더러운 귀신이 떠나가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행해 지금 너희 속에 다른 예수가 들어가 있으니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추방되어야 할 거라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은 이 반복적인 싸움을 벌이시면 당신 자신을 나타내고 증거 하시는 겁니다.
그 다음 고린도후서 11장 13절 말씀 볼까요.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사도는 사도인데 가짜란 말이죠. 일꾼이라고 하는데 속이는 사기꾼이란 말이죠. 그들은 뭘 속이는 거예요?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희생의 가치로 공급되는 하나님의 의가 아닌 인간의 의를 말하는 모든 자들은 속이는 자들이고 거짓된 사도라고 하는 거죠.
14절,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15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결국 사탄의 일꾼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는 거예요? 모든 것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의 희생으로 이루어 놓으신 그 의를 말하지 않고 말하지 않고, 인간이 별도로 이뤄야 할 의가 있다고 한다면 사탄의 일꾼입니다.
이 본문을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고, 무엇에든지 경건하고, 무엇에든지 옳으며,’ 이렇게 말할 때 이런 수준에 어떻게 이를 수 있죠? 우리가 어떻게 이런 말씀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 어떻게 해야 이런 수준에 이를 수 있어요? 이 말씀이 어떻게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죠? 오늘 우리 중에서 박집사님이 최연장자이신데 우리 중에 가장 오래 사셨으니까 이제는 무엇에든지 참되고 무엇에든지 경건하고 무엇에든지 옳은 경지에 도달되셨나요? 예, 반대죠.
지금 사도 바울은 어쩌자고 이렇게 어려운 말씀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겁니까? 이것은 우리로서는 도달 불가능한 말씀입니다. 우리 개인으로서는 불가능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무엇에든지 참되고, 무엇에든지 경건하고, 무엇에든지 옳고, 무엇에든지 정결하고, 사랑받을 만하고, 칭찬받을 받을 만한 일을 다 이루시고 그 모든 성취의 열매를 우리 가운데 그냥 공급하시는 거예요.
그 원리를 다시 읽어볼게요. 히브리서 10장 9절부터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첫째 것, 첫 번째 아담에 속한 모든 것은 다 폐하시는 거예요. 첫 번째 아담의 세계에 속한 것은 다 불량품입니다. 무엇에든지 경건하지 않고 무엇에든지 옳지 않은 불량품이기에 폐기 처분하는 겁니다. 불량품을 폐기 처분하고 삭제한다는 말이 얼마나 시원한 말이에요.
불량품은 폐기 처분해야지 그걸 고치고 수선한다고 해서 나아지지 않아요. 주님은 첫째 것을 폐하시고 둘째 것을 세우십니다. 그 둘째 것이 10절에 나오죠. 같이 봐요.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이 문장에서 이상한 게 있잖아요. 단번에 몸을 드리신 분은 누구예요? 단번에 몸을 드리신 분은 예수님인데 온전히 거룩함을 입은 자들은 우리란 말이죠. 몸을 드리신 분은 주님인데 거룩함을 얻은 자들은 우리입니다. 이 교차된 진실을 믿는 겁니다. 개별적인 우리의 행함으로는 거룩함에 이를 수 없기에 예수님이 우리 대신 자기의 몸을 단번에 드려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고 우리에게 그 거룩함을 공급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각자 말씀을 지키고 노력해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단번에 몸을 드리심으로 이루어 놓으신 거룩함을 얻는 거란 말이죠. 따라서 무엇에든지 참되고, 경건하고, 옳고, 사랑받을 만하고, 칭찬받을 만한 그 완전한 수준은 우리가 노력해서 도달해야 할 수준이 아니라 그냥 믿음으로 얻는 겁니다. 우리가 이루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세요. 거저 얻는 것이 많습니까, 우리가 노력해서 얻는 것이 많습니까. 우리의 노력과 행위도 거저 주시는 삶의 혜택이 없다며 다 헛것이죠.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할 수 없듯이 우리는 무엇에든지 거룩하고 경건할 수 없어요. 안되기 때문에 예수님이 친히 오셔서 그 몸으로 우리 대신 말씀의 요구를 다 이루신 거란 말이죠.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베푸시는 의를 거절하고 믿지 않는 것은 자기 자신의 의를 믿기 때문이죠. 자기 자신을 믿는 완고함으로 예수님이 이루신 성취의 의를 거부하는 겁니다. 그 완고함으로 지옥 가는 건데 물론 그 완고함마저 주님이 허락하신 거예요.
우리의 의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는 불량품이기에 주님이 친히 준비하신 의를 우리에게 공급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0장 11절, ‘제사장마다 매일 서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2절,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3절,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여기 나오는 원수는 자기의 사적인 의를 가지고 하나님의 세계에 도전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멸시하고 무시하고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치르신 십자가 희생의 가치를 멸시하는 자들이 원수라고 하는 거죠. 그들은 선악의 가치에 근거한 자기 의와 자기 경건을 믿고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으로 주어지는 의와 경건의 가치를 무시합니다. 자기 의로움의 무능함과 불량함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을 무능한 자들의 자기변명으로 취급하는 거죠.
자기 의가 부족하니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말을 무능한 자들의 소리로 취급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이 정말 유능합니까? 인간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는 병원에서 의사들을 볼 때마다 앞으로 20년 뒤 30년 뒤에 저 의사가 환자가 누웠던 침상에 누워 또 다른 젊은 의사와 간호사의 손길에 몸을 맡기게 될 것을 생각합니다. 이건 확실하잖아요. 어떤 인간이 자기의 자기 됨을 항상 유지할 수 있느냐 말이죠.
어떤 인간도 자기의 항상성을 유지할 수 없잖아요. 아침에 기분 다르고 저녁에 기분이 달라지는 것이 인간인데 어떤 인간이 자기의 의로움을 항상 유지하고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히브리서 10장 14절,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그래서 주님이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우리를 온전하게 하신 겁니다. 십자가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다는 선언 안에 이미 우리의 완전함도 다 들어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도 들어있고, 무엇에든지 참되고, 경건하고, 옳으며, 정결하며, 사랑받을 만하며, 칭찬받을만 하라는 말씀도 다 들어 있어요.
개별적인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는 경건함과 의로움은 항상성을 유지할 수가 없죠. 그런데 영원히 우리를 온전케 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온전케 하심 안에서 우리는 이미 무엇에든지 옳고 경건한 자로 인정받고 있는 거예요.
여기서 개별적으로 쓱 빠져나와서 자기 얼굴을 내세우는 자가 저주를 받는 겁니다. 주님의 완전하심 안에서 왜 자기 얼굴의 의로움을 내세우느냐 말이죠. 그래서 모든 성도의 머리는 그리스도 예수밖에 없어요.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의 머리고 우리의 얼굴입니다.
개별적인 우리의 얼굴은 늘 경건치 않고, 늘 거룩하지 않고, 늘 옳지 않죠. 그러나 우리의 얼굴과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 보시기에 항상 의롭고, 항상 경건하시고, 항상 거룩하십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의 얼굴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하시는 거예요.
그것을 다른 각도로 어떻게 표현합니까? 잠깐 갈라디아서 3장 26절 봅시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이게 얼마나 놀라운 고백이에요. 우리의 얼굴이 바뀌었어요. 우리의 얼굴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바뀐 거예요 하나님께서 다 심판하시는 중에 딱 보니까 얼굴이 그리스도 예수의 얼굴인 거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하시는 말씀 그대로 우리의 얼굴이 바뀌었단 말이죠.
이걸 이어서 갈라다아서 3장 27절에서 뭐라고 표현합니까? 27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거죠.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의 얼굴도 그리스도의 얼굴로 보시고 우리의 옷도 그리스도로 보신다는 거죠.
어떨 때 이런 변화가 발생하는 겁니까. 사적인 나의 의를 부인하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단번에 드리신 십자가의 제사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이런 변화가 생기는 거죠.
항상 경건하지 못하고 항상 의롭지 못한 우리의 의는 하나님 앞에 심판받을 부정한 것들이잖아요. 그 진실을 시인하고 제거되어야 마땅함을 인정하고 예수께서 이루신 의를 받아들이는 그 순간에 우리의 얼굴이 하나님 아들의 얼굴로 바뀌고 우리의 옷이 그리스도의 옷으로 바뀐단 말이죠.
이걸 구약에서 형상화해서 나타냅니까. 한번 봅시다. 창세기 27장 27절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 맞추니 아버지가 그의 옷에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지금 야곱이 형 에서의 옷을 입고 아버지 앞에 나갔잖아요. 눈이 어두운 아버지 이삭은 큰아들, 에서 옷의 향취가 어땠는지 알고 있단 말이죠. 야곱이 에서의 옷을 입고 아버지 앞에 서니까 아버지는 그 옷의 향취를 맡고 복을 기원한단 말이죠.
우리의 옷은 냄새나는 죄악의 옷이란 말이죠. 우리의 의는 하나님 앞에 악취가 풍기는 옷과 같아요. 우리가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우상숭배자들이며 살인자들이며 간음자들입니까. 우리는 욕망의 냄새, 짜증의 냄새, 걱정, 근심, 염려의 냄새만 풀풀 풍기는 자들이죠. 그런데 그 아들 그리스도 예수로 옷 입었느니라고 선언하십니다. 항상 감사함으로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그 예수의 옷을 입을 때 하나님은 우리 위에 입혀진 그리스도의 옷을 보시고 축복하시는 겁니다.
돌아와서 한 번 더 봐요. 8절,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이든지 참되며 무엇이든지 경건하며 무엇이든지 옳으며,’ 이게 어떻게 된다고요? 무엇에든지 참되고, 경건하고, 옳고, 사랑받을 만한 이 모든 것은 주님께서 행하신 것이고 주님께서 이루신 성취인데, 그 주님께서 이루신 성취의 옷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덧입음으로써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수준에 도달하는 겁니다.
즉, 우리는 우리의 실패를 통해 주님이 이루신 성취의 깊이와 넓이와 그 순전한 밀도를 알고 더 온전히 주님을 찬송하게 되는 거죠. 우리가 각자 노력함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경건과 의의 수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경건과 의의 수준에 홀로 도달하신 예수님의 성취를 덧입음으로써 그 수준에 도달하는 겁니다. 홀로 도달하신 예수님의 이름을 믿음으로 그의 성취에 함께 참여하는 거죠.
9절 말씀에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사도 바울에게 도대체 뭘 배우고 뭘 듣고 봤습니까? 인간의 부실한 의를 바라보지 말고 주님이 십자가에서 자기를 희생함으로 이루어 놓으신 완전한 성취의 의를 바라보라는 거잖아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만 알기로 작정한 거잖아요. 그것만 말하고 나누고 전파하고 가르치는 거죠.
모든 성경은 우리의 의를 부인하고 예수의 십자가의 의를 말하는 것으로 꽉 차 있습니다. 그 십자가의 의를 나눌 때 우리 속에 있는 인간의 의는 배설물처럼 빠져나간단 말이죠. 하나만 더 읽고 마치겠습니다. 빌립보서 3장 8절 말씀에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고 하고 9~9절에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고 하잖아요.
성도는 우리의 것을 배설하면서 그리스도를 얻고 날마다 그 안에서 발견되는 생명의 신진대사를 하는 겁니다. 내 힘과 내 유익을 위해 살아왔다는 그 배설물을 배설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새로운 살과 피를 얻는 거예요. 우리의 착함과 의로움과 경건을 배설하면서 그리스도의 의로움과 그리스도의 경건을 공급받는 거죠.
엄밀히 말하면 그리스도의 의와 경건이 성령으로 공급될 때에 우리의 인간적인 의와 경건이 배설되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성실이 공급될 때마다 우리의 인간적인 행위의 가치가 배설되는 거죠.
우리가 우리의 인간적인 선과 의와 행위의 가치를 배설하지 못할 때는 마치 변비 환자처럼 인생이 괴로워요. 서로에게 자신의 가치를 알아달라고 투정을 부린단 말이죠. 자식과 부모 사이에도 이런 갈등이 있어요. 내가 어떻게 너를 키웠는데 하면서 부모는 자녀를 닦달한 수 있죠. 그러나 부모의 공로도 주님이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환경을 줬기 때문에 사랑하고 양육한 거죠. 저 아프리카나 우크라이나, 이란이나 팔레스타인에 가보시란 말이죠. 어떤 부모가 마음껏 자식을 키울 수 있습니까?
자식을 돌보고 양육하는 것도 다 주의 은혜로 다 주어진 선물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왜 거기서 부모가 자기의 공로를 내세우느냐 말이죠. 그러니까 그것도 빠져나가야 할 배설물인 거죠. 그런 마음을 갖고 있으면 변비처럼 괴로워지는 겁니다. 반면에 자기로서 자기를 보는 자식들이 또 부모의 은혜를 모르고 덤빈단 말이죠. 어제 신문을 보니 요즘 소년원이 만원이래요. 부모들이 제대로 가르치지 않지 학교에서는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방치되어 있다 보니까 청소년 범죄가 증가해서 소년원도 만원이라는 거죠.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의 가치 앞에서 우리의 인간적인 가치는 배설물처럼 쑥쑥 빠져나갈 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생명의 은혜로 충만한 하나님의 아들들로 드러나는 거죠. 우리가 말씀을 나눌 때마다 뭐 하는 겁니까? 십자가에 죽임당하신 예수님의 삶과 피만을 나누고 공급함으로 인간적인 의를 좀 배설시키는 과정이 말씀을 나누는 과정이고, 그 순간 우리 모두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우리의 존재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그 은혜의 현장, 그 은혜의 순간들이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삶이 날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로 충만하게 채워지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존귀하신 주님 감사합니다. 무엇에든지 경건하고 무엇에든지 참될 수 없는 우리의 타락한 실상을 보게 하시고 홀로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이루신 하나님의 의를 덧입어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거룩한 수준에 도달됨을 늘 새롭게 보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스도 예수의 완전한 의를 늘 새롭게 공급받으며 우리의 인간적인 의로움을 배설할 수 있도록 성령으로 우리를 늘 새롭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