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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일체의 비결. 빌립보서 4: 10~12

작성자은서아빠|작성시간26.06.20|조회수6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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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의 비결. 빌립보서 4: 10~12

 

성경은 우리가 순종할 수 없는 차원의 말씀입니다. 말씀의 수준에 도달할 수 없는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죽음이 마땅합니다. 그 죽음과 멸망의 자리에서 십자가에 대신 죽은 예수님을 보게 되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자기 가능성을 믿고 말씀을 실천하려는 자들이 종교인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이신 삶의 최종적인 모범은 자기 부인과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하나님은 자잘한 인간의 순종 따위를 원하시지 않고 죽음을 원하십니다.

 

그 죽음의 십자가 너머에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이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구차한 행위를 조건으로 생존의 복을 기대하면서 삶의 실패와 죽음의 공포에 반복적으로 시달립니다. 우리가 가진 풍부와 궁핍의 기준은 선악과를 먹게 한 마귀에게서 왔습니다.

 

선악의 지식은 인간 내부로 이식되었고 그때부터 인간은 자기의 욕망과 목표로 자기를 판단하고 괴롭히는 자기 분열의 고통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의식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지만 그 실존은 저주의 땅에서 뒹굴고 있습니다. 옛 뱀, 즉 사탄은 우리의 자아를 내세워 십자가 죽음의 진실을 가리고 삶의 환상을 좇게 합니다.

 

베드로와 붙어 있는 사탄을 책망하여 떼어내시듯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와 붙어 있는 사탄을 말씀으로 떼어내십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음을 날마다 성령으로 확인받는 자들은 이미 죽었기에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게 됩니다.

 

십자가 순종으로 모든 만물의 소유권이 예수님께로 이전되었습니다. 실패하든 성공하든 우리의 소유는 아무것도 없음을 알 때 사탄의 미혹에서 벗어나 자족하게 됩니다. 풍부든 궁핍이든 우리 몸의 주인이신 주님이 허락하시는 것들입니다.

 

우리 힘으로 인생을 지켜보겠다고 벌이는 생존의 싸움은 사탄이 만들어내는 허구의 싸움입니다. 사나 죽으나, 배고프나 배부르나 우리 인생을 통치하시는 주님께 인생을 내맡기는 성도에게 담대한 자유와 기쁨이 있습니다.

 

 

 

 

일체의 비결. 빌립보서 410~12

10절,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11절,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사도가 말하고 있는 이 말씀의 경지와 수준을 우리는 따라갈 수 없습니다. 사도는 우리가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의 말씀을 항상 말합니다. 그 위에 4장 4절 말씀에도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고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항상 기뻐할 수 있나요? 누가 우리를 건드리면 우리는 화가 나잖아요. 그래도 우리가 항상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내 돈을 뺏어갔는데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 육신으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이제 우리는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사도가 말하고 있는 그런 말씀의 수준에 도달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실상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겸손이에요.

 

그런데 자기 실상을 모르는 사람들이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대하면서 순종하겠다고 항상 기뻐하려고 애를 쓰는 거죠. 억지웃음을 지으며 노력하기도 하고 이 말씀을 요모조모 뜯어서 실천할 구석을 찾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저 기뻐하려고 애를 쓰는 것일 뿐이죠. 그리고 기뻐하려고 애쓰는 자기의 노력에 스스로 점수를 매기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존재가치를 확인받으려고 합니다. 청년 부자처럼 말이죠. 그러다가 참다 못해서 한번 폭발하면 그땐 난리가 나는 거죠. 그러니까 다들 기뻐하려고 노력하고 참는 거예요.

그러나 사도의 말씀대로 항상 기뻐하는 세계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우리 인간의 세계가 아니라 항상 기뻐하는 주님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성도의 겸손이고 그게 기본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 우리 자신의 힘과 의지로 이 말씀을 실행하는 수준 높은 성도가 되고자 애를 쓰면서 평생을 지나가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의 대표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죠.

 

그러므로 일단 우리는 이 세계에 도달할 수 없는 우리의 한계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간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나 감성이나 이성으로 불가능한 일이에요. 말씀 하나 볼게요. 마태복음 8장 말씀 보면 이게 주님이 처음부터 그냥 대놓고 하신 말씀인데 마태복음 8장 19절 말씀 볼까요?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이 서기관의 충성심과 종교성이 대단하잖아요. 예수님을 보고 그냥 따르고 싶은 거죠. 이 예수를 따라가면 뭐가 있겠다 싶은 거죠. 그런데 그다음 말씀 같이 봐요. 20절 말씀,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예수를 따라가면 뭔가 엄청난 것이 있는 줄 생각하는 그 서기관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죠.

 

예수를 따라가 봐야 그 서기관이 기대하는 그런 것은 없다는 거죠. 여우도 굴이 있지만 예수를 따라가 봐야 작은 아파트 하나도 없다는 거죠. 여우도 굴이 있지만 예수를 따라가 봐야 반지하 방도 하나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면 이런저런 복이 있다고들 하잖아요. 교회에 나와서 예수를 믿으면 구원도 받고 그다음에 뭐 풍요로운 생활의 복이 있을 거라고 막 선전하는데 그런 건 다 사람들의 욕망으로 가공된 예수입니다.

스팸처럼 가공된 예수죠. 사도가 경계했던 다른 예수죠. 그 예수를 따르면 반지하에서 벗어나 아파트도 장만하고 뭐 그렇게 막 뻗어 갈 것처럼 얘기하잖아요. 욕망을 막 자극하잖아요. 그런 욕망으로 지금 한국 교회가 빠르게 성장한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형성된 욕망의 교회를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서 또 애를 쓰는 거잖아요.

 

그러나 주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는 여우도 누리고 있는 그런 편안한 삶을 위해 부르신 게 아닙니다. 새들도 가지고 있는 둥지를 이 땅에 마련해주려고 부르신 게 아니란 말이죠. 그러니까 잘 생각하라는 거죠. 도대체 무엇을 상상하면서 예수를 따라오려고 하느냐고 물어보시는 거죠. 이쯤 되면 탁탁 털고 이제 뭘 잘못 봤나보다 하고 돌아가야 정상인데 혹시 뭔가 있을까 하여 따라오다가 십자가 앞에서 다 뒤로 돌아가잖아요.

그래도 예수님이 막판에 뭔가 보여주실 것을 기대하고 따라왔는데 예수는 십자가 앞에서 어떤 표적도 보이시지 않고 정말 죽어버리신 겁니다. 이미 계속 말씀하신 것처럼 요나의 표적 즉, 주님의 죽음만 보여주신 겁니다. 그리고 그 죽음의 순간에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단 말이죠. 인간의 입장으로는 정말 뭘 이루었는지 물어보고 싶단 말이죠. 본인이 죽는 마당에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같은 맥락으로 21절 말씀에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이 세상 사람은 다 죽은 자들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만 살아있는 자들입니다. 돈이 많으나 적으나 죽은 자, 건강하나 약하나 죽은 자, 높으나 낮으나 죽은 자, 다 죽은 자들뿐입니다. 그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러한 예수님의 세계관에 동의할 수 있습니까?

지금도 병원에 가면 살기 위해서 애쓰는 자들이 그렇게 많은데, 주님이 하시는 말씀은 다 죽은 자들뿐이라는 거죠. 이게 너무 파격적인 말씀이기에 사람들에게 안 다가오는 거예요. 지금 숨 쉬고 있는데 이게 왜 죽은 거냐고 묻고 싶죠. 그러나 인간의 반응과 상관없이 이게 예수님이 세상의 인간을 바라보시는 관점입니다.

 

주께서 세상을 바라보시는 관점이 이러한데 너무 많은 사람이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예수를 믿으면 잘 된다는 식으로 삶의 허상을 더 키워주는 거죠. 점점 다른 예수, 인간의 욕망으로 가공된 예수를 유통하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담백하게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하시는 말씀은 도대체 우리로서는 따라갈 수 없는 말씀입니다. 따르고 싶어도 따를 수 없는 길인 거죠. 그러니 누가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한 번 더 말씀 봅시다. 오늘 사도의 권면과 연관된 말씀을 한번 읽겠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말씀 보면,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7절,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어떤 사람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다고 거기에 만족하겠어요. 옷장에 옷이 가득해도 입을 것이 없다고 한숨 쉬잖아요. 이런 차원을 넘어서 9절 말씀을 같이 봐요. 9절,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절,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끝없이 인간 내부에서 부하고 싶고 좀 더 갖고 싶은 욕망이 올라오잖아요. 그것 때문에 스스로 올무에 빠지고 시험에 떨어지는 거죠. 그래서 해로운 욕심에 떨어진다고 하잖아요. 그 해로운 욕심으로 사람들이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찌르는 겁니다. 그게 주님께서 내리시는 하나의 저주 같은 거죠.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있는 것을 족한 줄로 아는 그런 삶은 지금 우리들의 세계에는 없다는 그 진실을 확인하게 하는 겁니다.

이 말씀을 대할 때 가장 큰 오해는 사도가 이렇게 말씀하시니까 이대로 순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먹을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알라고 하셨으니까 그렇게 합시다 하면서 아멘으로 받고 돌아가는 거죠.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자기자신의 실상을 모르는 상태에서 감정적 의지적으로 결단하고 그냥 돌아가는 거죠. 그러나 아무리 결단하고 결심해 봤자 어떤 상황에 놓이는 순간 돈에 대한 탐심은 다시 뜨겁게 불타오릅니다. 또 올라와요.

 

사도는 지금 이 말씀을 통해 이 세상과는 다른 차원의 세계가 있음을 말하는 겁니다. 그 차원의 세계에서는 지금 이 세상의 인간들이 모두 죽은 자들로 보이는 겁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과 상관없이,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알고 누리는 세계가 있음을 말하는 거죠. 예수님 말씀처럼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는 이 세상의 실상을 환히 아는 새로운 차원의 세계에서 말하는 겁니다.

 

사도가 말하는 이런 차원의 세계는 인간의 지혜와 노력으로 들어갈 수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세계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말씀을 대하면서 이대로 살아보겠다고 나서는 것은 정말 내 머리통으로 바윗돌을 들이박는 것처럼 무모한 시도거나 자기를 속이는 자기기만의 시도가 되는 거죠. 그래서 세상에서 이 말씀대로 살아갈 자는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이 모든 말씀을 홀로 지켜 성취하시는 분으로 예수님이 오신 거란 말이죠. 율법의 일점일획까지 완벽하게 지켜내시는 분으로 주님이 오신 거예요. 그리고 모든 말씀을 지켜내신 주님의 세계에서만 욕망으로 들끓는 우리들의 인간 세계가 명확히 보이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세계와 주님의 세계를 섞지 마세요. 아주 예리한 메스로, 칼로 유착된 부분을 분리해 내듯이 말씀을 대할 때마다 우리의 힘으로 접근할 수 없는 말씀의 세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이 요구하시는 세계는 우리가 감히 접근할 수도 없는 거룩한 세계임을 알고 시인해야 하는 거죠.

 

그 뒤에 10절 말씀을 볼까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하시는데 어떤 사람이 돈을 사랑하지 않습니까? 아이들도 돈 주면 좋아하잖아요.
요즘 아이들 만 원 주면 별 감동 없습니다. 만 원짜리를 주면 한번 흔들어봐요. 더 없나 하고 말이죠.

 

그러니까 돈을 사랑한다는 것은 아이부터 어른까지 보편적인 본성이에요. 누가 여기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돈이 없어도 충분하다는 주님의 세계와 돈 없이는 인간의 세계는 너무 다른 세계예요. 돈 없이는 살 수 없는 인간 세계에서 돈 없이도 유유자적하는 저쪽 세계를 탐낸다는 자체가 이미 마귀의 또 다른 속임수에 빠진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사도가 하는 말의 배경이 이겁니다. 본문 빌립보서 4장 10절 말씀을 볼게요.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도다.’


사도가 지금 어디 있어요? 로마 감옥에 있잖아요. 그런데 사도 바울이 어디에 있는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뒤늦게 알았어요. 사도가 가이사랴에 2년 정도 수감되어 있다가 황제에게 재판받기 위해 로마로 이송되었잖아요. 빌립보 교인들은 늘 사도 바울을 후원하고 돕기를 원했는데 바울의 소재 파악과 근황이나 안부를 제대로 알기 어려웠어요.

 

그러다 뒤늦게 사도가 로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죠. 그래서 로마의 감옥으로 에바브로디도 편에 후원금을 보내게 된 겁니다. 갇혀 있던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서 보낸 에바브로디도를 만나 너무 기뻤던 거예요. 그들이 자신을 잊지 않았고 또 자신을 돕기 위해 후원금을 보낸 것을 보고 기뻐서 고백하는 말이 10절 말씀입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도다.’

 

사도는 빌립보 성도들이 항상 자신을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여러 상황으로 서로 만날 수가 없었죠. 그런데 드디어 에바브로디도를 통해서 그들의 안부를 듣고 복음에 필요한 것들을 받게 된 거죠. 너무나도 만나고 싶던 그리운 사람들을 만난 것처럼 사도는 기뻤던 겁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그저 그들이 보낸 물질적 것 때문이 아니라는 걸 말하고 있는 거예요. 11절 말씀,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한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립보 성도들이 보내온 물질도 참 기쁘고 도움이 되지만 그것만으로 지금 기뻐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거예요. 사도는 이미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배부름과 배고픔을 포함해서 여러 상황에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다고 말하는 거죠.


사도는 지금 뭘 말하고 싶은 겁니까? 물질적인 조건과 상관없이 평안을 누리는 복음의 세계를 이번 기회를 통해 빌립보 교회에 전달하고 싶은 거예요. 풍족한 돈이 있어서 기쁜 것만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궁핍 가운데에서도 풍성한 기쁨을 누리는 다른 차원의 세계를 그들이 알고 누리기를 바란다는 거죠.

예수를 믿으면 뭐든 잘 될 것으로 알던 사람들이 막상 예수 믿은 이후에 기대하던 풍족함이 없으면 스스로 낙심하고 의심하잖아요. 그리고 온갖 방송에는 예수를 믿고 잘 됐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풍성하단 말이죠. 그런데 자기만 여전히 궁핍할 것 같을 때 힘이 빠진단 말이죠. 그런 사람을 향해서도 사도는 말하는 거죠.

 

이 땅에서는 소유가 곧 그 존재로 평가받아요. 많이 소유한 자가 그 존재의 가치를 더 많이 인정받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가진 것으로 그 존재의 가치를 평가하는 세상에서 가진 것이 없어도 만족하며 기뻐하는 세계와 그런 삶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소유로 인간을 평가하는 이 세계 말고 아무것도 없는 배고픔 가운데에도 자족하는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거죠.

 

풍부하든 궁핍하든 만족하는 이런 세계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먼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풍부와 궁핍이라는 인식의 기준은 어디에서 온 거죠.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인식하고 판단하는 모든 기준은 선악과에서 온 거죠. 옛 뱀이 그 선악과를 먹게 했잖아요. 즉, 지금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인식과 판단의 기준은 옛 뱀이 주도하는 겁니다. 선악의 지식으로 인간을 농락하는 마귀에게서 온 기준과 안목이란 말이죠.

 

마귀는 처음부터 인간에게 어떤 욕망을 일으켰습니까? ‘하나님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는 식으로 선악과에 대한 가치 판단을 하게 했잖아요. 그리고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같이 될 거라고 했단 말이죠.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될 거라고 여자를 미혹한 결과 그 선악과를 먹었단 말이죠. 즉, 마귀는 인간을 하나님처럼 만들어버린 거예요. 그때부터 인간은 존재는 피조물인데 인식은 하나님이 되어버린 겁니다. 이게 인간의 비극이에요. 존재는 피조물이거든요. 그런데 인간의 의식은 벌써 하나님이 돼 있는 거죠.

 

그래서 인간은 뭐든지 다 우습게 알아요. 실제 존재로 부딪히게 되면 바로 무너질 인간들이 인식의 세계에서는 하나님이니까 뭐든지 쉽게 보이는 거죠. 인간의 의식은 위기에서 지구를 구해내는 슈퍼맨 같은 영웅들을 끝없이 만들어내지만 정작 현실에서는 작은 사고나 재해 하나도 막아내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러니까 인간의 의식 속에는 유토피아를 만들어도 실제 현실에서는 어디에도 만들 수 없는 천국이기에 유토피아잖아요.

 

인간의 의식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지만 실제 삶의 현장에서는 모두 비루한 인생일 경우가 얼마나 많아요. 의식의 세계에서는 창조주 신이지만 인간의 실존은 자기의 머리카락 한 올도 어쩌지 못하는 피조물일 뿐입니다. 실존은 아무것도 없는 무력한 필부인데 의식은 한 나라의 대통령까지 좌지우지 비판하고 통제하는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 있는 거죠. 그러나 현실은 대통령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영향력 없는 존재인 경우들이 얼마나 많아요.


인간의 실존은 피조물인데 선악과를 먹은 이후에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조물주가 되어 있단 말이죠. 그게 인간의 비극인 거예요. 그러니까 매일 본인이 괴롭고 안타깝고 본인만 불쌍한 거죠.

피조물의 자리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한데 선악과 사건 이후에 인간은 이미 피조물의 자리를 벗어났어요. 피조물의 위치에서는 벗고 있어도 부끄럽지 않으나 옛 뱀이 선악의 지식이라는 허상으로 다른 기준을 인간에게 심은 다음부터 인간은 벗고 있는 것이 부끄럽고 입고 채워도 늘 부족하다는 허상에 휘둘리는 겁니다. 벌거벗은 자기의 모습이 부끄럽게 보인다는 것은 허상입니다. 마약을 먹으면 자기 몸에 기어 다니는 벌레가 보여서 막 털어내려 한다잖아요. 뇌가 일으키는 일종의 착시죠. 벗고 있어도 괜찮은데도 불구하고 선악의 관점을 갖게 되면 자기 몸이 부끄러워 보이는 착시가 일어나고 그래서 뭔가로 가려야 하는 강박에 시달리는 겁니다.

 

지금 우리의 삶이 엄청난 발전에도 불구하고 타인과 비교하면 또 모자라잖아요. 선악과가 인간의 내부에 들어왔기에 이제 인간은 자기와 자기를 비교합니다. 그래서 사도가 말하는 일체의 비결을 배운다는 것은 우리 내부에 선악의 지식을 미끼로 들어와 있는 옛 뱀, 사탄이 쫓겨나야만 하는 거예요. 그럼 우리가 생각할 때는 사탄과 싸워 이기면 되겠다고 하겠지만 그게 우리는 할 수 없어요.

 

사탄은 우리의 자아와 굳게 결합되어 있기에 사탄이 쫓겨난다는 것은 곧 우리 자아가 부정되고 무너지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사탄을 축출할 수 없어요.

 

그래서 마태복음 16장 23절 말씀 같이 볼게요.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도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심으로써 마치 베드로와 사탄이 하나로 붙어 있음을 지적하시고 베드로에게서 그 사탄을 떼어내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베드로가 지금 말리고 있는데 그걸 예수님이 사탄의 장난으로 보시는 거잖아요. 예수님이 망하는 것 곧, 우리가 망하는 것은 당연한데 사탄은 결코 우리가 망해서는 안 된다고 항변하는 거예요.

 

사탄은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의 성공의식만을 주입하고 우리 자아의 승리를 주입하죠. 그래서 사탄은 베드로의 자아의식을 뒤집어쓰고 예수님을 넘어트리려 하는 거죠. 바로 그 베드로의 자아의식을 뒤집어쓰고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려는 사탄을 예수님이 지적하여 책망하신 겁니다.

 

‘사탄아 물러가라.’고 책망하심으로써 베드로에게 붙어서 헛된 자아의식으로 베드로를 통제하여 예수님의 일을 방해하는 사탄을 그에게서 떼어내시는 거죠. 마귀와 붙어 있는 우리의 자아의식은 망해서는 안 되고 성공해야 하고 죽어서는 안 되고 사는 것이 진리라고 믿게 되어 성공과 생존을 챙겨주는 자를 진짜 하나님과 메시아라고 믿게 되는 거죠. 그래서 많은 사람이 적그리스도를 따르게 되고 바알을 따르고 다른 예수를 따르게 되는 겁니다.

 

사탄의 공작은 우리의 자존심을 챙기라고 미혹해요. 그러나 우리는 무시 받아도 마땅한 존재예요. 요즘에 긁힘이라는 말을 많이 써요. 아이들이 긁혔다는 말을 많이 하거든요. 한 주간 많이 긁히지 않았습니까? 누군가가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는 거죠. 사탄은 우리에게 무시받으면 안된다고 속삭이지만 주님 답변은 뭡니까? ‘사탄아, 물러가라,’는 겁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형제 둘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죽었잖아요. 형님이 재산을 다 가져가셨어요. 동생이 억울해서 예수께 나와 도움을 요청하잖아요. 그때 예수님의 답변이 뭐였죠? 누가복음 12장 14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5절,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이 세상의 가치와 논리를 따라 그의 생존과 이익을 대변하시지 않았어요. 우리는 우리의 손해 본 것, 우리의 긁힌 것, 자존심 상한 것, 이런 것들로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하는데 주님의 답변은 뭐예요? 사탄은 물러가라죠.

지난주에 한 자매가 카톡으로 지금 박사 논문을 쓰고 있는데 힘들다고 해요. 그래서 어쨌든 그 논문을 일단 제출하라고 했더니 논문이 허접하다 엉성하다 등등 얘기하길래 그냥 제출하고 수치와 모욕을 당하라고 했어요. 수치와 모욕은 그냥 우리 인생에 주어진 기본값이에요. 지금 논문을 잘 써도 칭찬받기 어려운데 엉성하면 당연히 책망받으면서 수정하고 방향을 잡는 거죠. 그런데 어떻게든 자기의 자존심은 자존심대로 챙기면서 부끄러움과 수치는 당하지 않으려고 하니 괴로운 거예요.

 

사탄은 우리에게 거짓된 자아의식을 심어주고 그 자아의식으로 우리를 통제하면서 주님이 인도하시는 언약의 길을 방해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어도 자존심을 세워가는 쪽으로, 그리고 이 세상에서 칭찬들으면서 영광을 얻는 쪽으로 믿으라고 우리를 미혹하는 거죠. 그러나 주님의 응답은 어떤 겁니까.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는 겁니다.

 

더 망가지고, 더 잃고, 더 크게 낭패당하고, 망하고, 죽어도 마땅한 존재가 십자가 언약 안에 있는 성도의 삶입니다. 그런 식으로 십자가와 부활의 길을 가신 주님을 따르게 되는 거죠. 창조주의 의지가 피조물의 세계를 통치하고 있어요. 창조주 하나님은 이 세계를 창조하신 이후에 떠나가신 게 아니에요. 그분의 의지가 여전히 이 땅을 통치하고 있습니다.

 

어저께 월드컵 보셨나요? 저도 하이라이트만 봤어요. 그런데 과감하게 홍명보 감독이 손흥민이를 뺐더라고요. 나중에 그 댓글들을 보니까 ‘야 과감하다.’ 어떻게 손흥민을 뺐냐는 거죠. 만약에 손흥민이를 뺐다가 지면 얼마나 사람들이 난리를 치겠어요. 그런데 교체되어 투입된 그 선수가 들어가서 골을 넣었단 말이죠.

 

모든 피조물은 감독의 의지에 따라 통제받는 겁니다. 감독이 나오라면 나와야 하는 선수처럼 피조물의 의지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들이잖아요. 하나님의 의지대로 분류되어 가는 겁니다. 그런 맥락에서 잠깐 말씀 하나 봅시다. 이사야 38장에 히스기야 왕의 이야기가 나와요. 이사야 38장 1절 말씀 볼게요.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나아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길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자, 지금 감독이신 주님께서 히스기야를 교체하려 하시는 거죠. 이제 그만 그라운드에서 나오라는 겁니다. 교체카드를 준비해서 이사야 코치를 보내신 거죠. 그런데 히스기야가 감독의 말을 안 듣는 겁니다. 2절 말씀,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3절,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 앞에서 진실과 선함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니,’

 

주님께서 히스기야에게 이제 그만 인생무대에서 내려오라고 선지자를 보내 교체카드를 제시하셨는데 히스기야가 기도라는 이름으로 통곡하면서 자기는 교체되기 싫다고 떼쓰는 거죠. 자기는 더 뛰고 싶고 여태 잘 뛰었고, 자기 아니면 이 혼란한 나라 꼴을 정비할 왕이 없고 어쩌고 하면서 더 뛰겠다는 거죠.

 

그래서 5절 같이 봅시다. ‘ 너는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오 년을 더하고.’

 

히스기야가 무대에서 내려오기를 거부하고 울고불고 통곡하니까 15년을 더 연장해 주ㄷ셨어요. 그런데 히스기야가 몰랐던 사실이 있었죠. 그의 수명 연장의 증거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이사야 38장 8절을 봅시다. ‘보라 아하스의 해시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뒤로 십 도를 물러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더니 이에 해시계에 나아갔던 해의 그림자가 십 도를 물러가니라.’

 

이 해시계 그림자를 10도를 뒤로 물렀다는 말은 더 살아봐야 같은 인생의 반복이란 말입니다. 그냥 도돌이표죠. 더 살아봐야 새로운 것은 없어요. 같은 인생의 반복이죠. 도돌이표로 연주하면 같은 멜로디의 반복이잖아요. 15년을 더 수명을 연장받아 산다 해도 똑같은 인생입니다. 새로울 게 없다는 거죠. 인생을 다시 태어나서 산다 해도 새로운 건 없어요.

 

다시 태어나서 결혼한다면 지금의 배우자랑 결혼하시겠습니까? 한다 혹은, 안 한다 해도 만약 그렇게 된다 해도 같은 결혼의 반복이란 거죠. 그럴 리는 없지만 다시 태어나서 인생을 또 산다고 해도 그 인생이 그 인생입니다.


모든 인생은 창세 전에 확정해 놓으신 대로 가는 겁니다. 아까 기도했던 자매의 기도처럼 그냥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은총을 나타내고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 인생을 창조하시고 경영하시기에 어떻게 산다고 해도 똑같은 인생으로 돌아갑니다. 히스기야가 이 연장된 15년 동안 벌인 일들이 사실 좋은 일이 하나도 없어요. 바벨론에 약점 잡히고, 그 연장된 기간에 낳은 아들 므낫세는 유다 왕국 최악의 왕이 됩니다.

 

우리가 인생을 더 산다 해도 우리에게서 나올 것은 죄밖에 없어요. 우리가 얼마나 죄악된 존재인지 죄만 유출할 뿐이에요. 그런데도 우리가 맹목적인 생존본능에 휘둘리는 것은 사탄이 삶의 공포로 우리를 속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무조건 살아남아야 하고 실패해서는 안 되고 성공해야 한다는 맹목적인 강박감을 심어주는 사탄을 주님이 책망하시고 쫓아내시는 거죠.

 

맹목적인 생존본능에 휘둘리는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고 하신 이후에 주님은 계속해서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말씀하시죠.

 

여기서 지금 사도가 말하고 있는 무엇에든지 자족하는 일체의 비결을 누리는 삶은 우리에게서 사탄이 떠나갈 때 이루어지는 겁니다. 중요한 건 이겁니다. 그 사탄이 바로 우리 자신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거죠. 사탄이 곧 우리 자아의 모습과 성질로 우리와 붙어있기에 주님이 친히 그 사탄을 우리에게서 벗겨내어 분리하지 않으면 우리의 자아가 곧 사탄이 되는 겁니다.


우리의 자아는 사탄과 하나로 결합되어 있기에 우리는 사탄을 물리칠 수 없어요. 실패와 죽음을 두려워하고 그것을 피하려고 말씀을 지키는 우리 자아의 모습과 활동은 모두 사탄에게 사로잡혀 시달리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사탄의 모습은 곧 우리 자신의 모습이죠. 사탄은 육신이 없어요. 사탄은 항상 인간 자아의 모습으로 활동합니다.

우리 자아의 모습이 곧 사탄의 모습이고, 우리 자아의 욕망이 곧 사탄의 욕망이에요. 내가 지금 누구의 말을 듣고 기분 나빠진다면 그게 왜 기분이 나쁘죠? 내가 왜 기분 나쁘죠? 우리 속에 있는 사탄이 항상 자기의 정체를 숨기고 우리 자아의 모습으로 활동하고 우리 자아의 모습을 내세우기 때문에 누가 나를 무시할 때 우리가 기분이 상하는 것은 우리 배후에 사탄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은 주님의 명령을 따라 즉각 순종해야 하는데 뭔가 우리 내부에 주님의 명령을 거부하게 하는 다른 실체가 들어와 있는 거죠. 주님의 명령을 수신하지 못하게 하고 주님의 말씀을 교란하는 다른 영의 실체가 들어와 있는 거예요. 감독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선수처럼 주님의 명령을 듣지 못하고 하고 따르지 못하게 하는 다른 영적 존재가 우리 안에서 활동하는 거예요.

 

주님의 말씀을 거역하게 하고 인간의 뜻대로 하도록 부추기고 선동하는 그 사탄이 인간 안에서 활동하는 겁니다. 그렇게 사탄과 하나가 되어 사탄의 말대로 움직이는 것이 우리의 자아입니다. 우리의 자아는 사탄이 자기를 은폐하기 위해 앞에 내세우는 하나의 가면이라고 하는 거죠. 인간을 방패 삼아 사탄이 활동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의 자아는 사탄이 자기 정체를 숨기기 위해 사용하는 사탄의 가면이에요.

 

인간에게 자아가 없었는데 선악과를 먹은 다음부터 자아가 생겼잖아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의식하게 만든 자아는 선악과를 먹고 난 이후에 생겼죠. 우리 자신을 보고 평가하고 판단하고, 또 타인을 보고 평가하고 판단하는 이 모든 자아의식은 다 선악의 지식에서 온 겁니다. 그리고 그 선악의 지식을 먹도록 인간을 미혹한 건 사탄인데 지금도 사탄은 그 선악의 지식으로 인간을 몰아갑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여러 모습 가운데 어떤 부분은 감추고 어떤 부분은 나타내고 혹은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죠. 요즘은 인스타그램이든 뭐든 자기를 꾸미다 보니 뭐가 자신의 진짜 모습인지도 모르죠. 인간이 여러 가지 자기 모습에 빠지는 것은 사탄이 자기를 숨기기 위한 하나의 작전이라고 하는 거예요.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은 사탄이 떠나고 자아가 부인될 때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아가 부인되고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고 사탄이 떠나간 상태에서 나오는 것이 일체의 비결이라고 하는 거예요.


사탄이 인간을 미혹할 때 어떻게 미혹하는지 잠깐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3장 16절,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17절,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18절,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

 

짐승이 받게 한 이 표는 짐승의 이름이잖아요. 그리고 그 이름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란 말이죠. 그런데 그 짐승의 수가 사람의 수라고 하잖아요. 붉은 용 즉, 마귀가 동원한 세력이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즉, 모든 국가의 세력인데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구조 자체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 짜놓은 구조예요. 창세기 4장에 보면, 하나님이 가인에게 표를 주셔서 아무나 가인을 죽이지 못하게 하시잖아요.

 

하나님은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표를 주셔서 그의 목숨을 보존하게 하고 아벨을 죽이는 그의 세계를 더 견고하고 넓게 확대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확장된 가인의 표는 요한계시록에서 나타나는 짐승의 표의 역사적인 한 단면이죠. 가인의 세계는 곧 편만하게 될 짐승 세계의 한 부분이죠.

 

바벨탑도 마찬가지죠. 하나님이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바벨탑을 중단시킨 다음에 그 바벨탑을 세운 인간들을 사방으로 쫙 흩어지게 하셨잖아요. 언어까지 나누어 바벨탑의 정신을 온 세상에 흩뿌리는 거예요. 가인의 표를 온 세상에 흩뿌리는 것이고 바벨탑을 세운 인간들의 욕망을 온 세상에 흩뿌리는 거란 말이죠.


가인의 표와 바벨탑의 정신을 온 세상에 흩어 뿌리는 거예요. 가인이 쌓은 성과 바벨탑이 결국 최종적으로 큰 성 바벨론으로 확대되는 것이며 가인의 표가 짐승의 표로 확대되는 거죠. 왜 이렇게 하시느냐 하면 이런 과정을 통해 인간 배후에 숨어 있는 사탄의 공작이 어떤 것인지를 드러내시는 거예요. 따라서 지금 사탄은 짐승에게 권세를 줘서 인간중심의 구조를 세우게 하고 그 짐승의 사회구조 안에서 누구든지 이 표를 받지 못하는 자들은 살 수 없게 만들어 간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 않은 자들은 결단코 이 짐승의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어요. 아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들은 이미 죽었기에 짐승의 세계에서 살아남게 되는 거죠.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있는 자가 없는 자 위에 서는 구조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자본주의 세계와 짐승의 구조에서 낙오되고 도태되게 하시는 방식으로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는 겁니다. 짐승의 구조에서 실패자로 드러나 수치와 모욕을 당하면서 그냥 살게 하시는 거예요. 건축자들이 버린 돌처럼 건축자들의 구조와 세계에서 쓸모없는 자로 판정받고 추방되게 하시는 거죠.


일체의 비결을 배운 자의 모습이 그런 식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실패자와 없는 자와 가난한 자로 드러나 모욕당하고 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까요.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죽고 사는 문제는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이 모든 것을 허락하시는 주님의 의지에 있기 때문이에요.


돈을 쌓아둔다고 삽니까? 스티브 잡스가 돈 쌓았다고 영생합니까? 아니잖아요. 감독이 선수를 경기에서 나오게 했다고 그 선수가 망하는 건 아니잖아요. 여전히 팀이 승리하면 그 승리의 영광을 함께 누린단 말이죠. 우리가 가난하다고 해서 우리가 망한 것이 아닙니다. 승리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부유함의 세계에 우리가 참여해 있는 거예요.

 

우리의 삶은 우리의 개인적인 행위에 달린 것이 아니라 우리를 속량하신 주님께 달린 겁니다. 이 사실을 알 때 우리는 우리의 자아를 이용해 우리를 통제하는 짐승의 세계 즉, 짐승의 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벗어나 주님의 풍요와 성취를 누리는 일체의 비결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주인 된 세계에서 벗어나서 그리스도가 주인 된 세계에서 살 때 비로소 짐승의 의지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통치를 기뻐하는 천상의 세계를 사는 거예요.


한 번 더 골로새서 3장 1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3절,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춰졌음이라.’

 

너희가 죽었다고 말할 때 뭐가 죽은 겁니까? 우리의 뜻대로 움직이는 우리의 모든 의지는 주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주님의 의지 앞에서 죽은 거예요. 성도는 어떻게 해도 자기의 뜻대로 인생을 살아갈 수가 없어요. 이제 성도는 자기의 마음대로 살아가는 모든 길이 다 끊겨버린 겁니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주님의 뜻만 성도의 인생에 나타날 뿐이죠. 그래서 성도는 이미 죽은 겁니다. 자기 맘대로 살아가는 때가 끝나버린 거죠.

예를 들어, 오늘 내가 엄청 손해를 봤다면 누가 손해 보게 하신 거죠? 주님의 의지가 손해 보게 하신 거예요. 오늘 엄청 많은 돈을 벌었다면 그건 누구의 의지입니까? 주님의 의지요. 주님이 그렇게 많은 돈을 벌게 하신 거죠.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말하는 사도바울의 의도는 뭐냐 하면 나의 풍부와 궁핍 자체가 내 의지, 내 뜻이 아니고 주님의 의지와 주의 뜻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나오는 고백이에요. 돈을 벌든, 잃든 다 주님이 벌게 하시고 또 잃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돈을 좀 잃어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주님의 것이었고 또 주님이 회수해 가시는 거니까요. 벌어도 나와는 상관이 없죠. 어차피 주님의 것이니까요.

우리의 의지를 압도하는 주님의 의지 앞에서 우리는 뭘 해도 이미 죽은 자인 겁니다. 그리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춰졌다.’고 하잖아요. 그토록 우리가 지키고 싶은 진짜 우리의 생명은 주님 안에 이미 소중하게 보관돼 있다는 거예요. 가난하다가 죽는 것이 아니고 돈이 많다고 사는 것도 아닙니다. 생명은 소유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는 거죠. 돈이 그렇게 많은데도 병상에 환자로 누워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제 신문에 우리나라 대기업 회장들과 그 가족들만 전담해서 운동을 도와주는 전문 트레이너의 인터뷰 기사를 봤어요. 그 사람은 운동과 식단 조절을 주로 하는데 그가 접한 대기업 회장들의 삶이 좀 흥미로웠어요. 일단 대기업 회장들은 어마어마하게 바쁘답니다. 드라마에서 보던 재벌들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일상이라는 거죠. 끝없이 생각하고 공부하고 결정하고 지시하는 상황들이 닥쳐오더라는 거죠.

 

대기업 회장들은 최고의 상태에서 최선의 선택과 결정을 하기 위해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는다고 해요. 해외 출장 중에는 비가 내리는데도 아침에 달리고 어떤 회장은 감옥에 들어갔는데 감옥에 들어가서도 수의에 잡지를 싸서 그걸로 아령처럼 운동하고 온갖 아이디어로 운동을 계속 하더라는 거죠.

 

아무튼 그 트레이드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 대기업을 이끄는 회장들이 엄청난 절제력으로 자기의 삶을 통제한다는 거죠. 그 몸이 무너지면 다 무너진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 절제력과 집중력으로 돈을 지키는 충성스러운 청지기 역할을 하는 겁니다.

자 우리는 그들을 보면서 그들의 재산이 그들 의지의 산물이 아님을 알잖아요. 우리 의지의 환상에서 벗어나 우리 의지의 실상을 봐야 비로소 우리 자아의 의지를 미끼 삼아 우리를 통제하고 있는 옛 뱀 즉, 사탄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사탄은 우리의 자아를 미끼로 사용하지만 주님께서는 이 자아 자체를 부인하게 하고 아예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시는 겁니다. 로마서 14장 다 아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14장 7절,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은 자도 없도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의지와 힘으로 산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러나 살고 죽는 것이 우리 맘대로 되지 않죠. 주님이 우리를 살리시고 또 죽이시는 거죠.

가끔 보면 어떤 선수는 다리를 쩔뚝거리고 있는데 감독이 안 빼주잖아요. 어떤 성도는 병들어 침상에 누워있어도 그 목숨을 금방 회수하시지 않아요. 성도는 자기 맘대로 병들지도 못해요. 우리 중에 아무도 자기를 위해 사는 분도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분도 없습니다. 자기 인생을 자기가 관리한다는 그 주체성 자체가 허구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자아의 주체성은 사탄이 만들어 놓은 허구의 개념이에요. 로마서 14장 8절,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죽고 사는 자체가 우리의 의지를 넘어선 주님의 의지로 오늘도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그 사실을 알 때 생존을 미끼로 우리를 위협하는 짐승의 세력에서 벗어나 자유를 주리는 거죠.


본문 빌립보서 4장 12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배부르면 주께서 배부르게 하신 것이고, 배고프면 주께서 배고프게 하신 거예요. 거기에서 항상 우리는 뭘 바라보는 겁니까? 우리의 의지를 넘어선 주님의 의지가 우리를 움직인다는 그 사실을 볼 때, 그때 우리의 인생 주도권 자체가 나를 벗어나서 주님께로 넘어가는 겁니다.

 

주님이 벗겨 놓으시면 벗고 있는 것이고, 입히시면 입는 것이고, 배부르게 하시면 배부른 것이고, 주님이 주님의 몸을 통치하시는 겁니다. 우리의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몸을 친히 관리하시고 돌보십니다. 그 진실을 알고 자기 몸에 대한 관리권을 주님에게 양도할 때 비로소 사도처럼 일체의 비결을 배운 자의 평안을 누리는 겁니다.

 

주께서 주의 몸을 배고프게도 하시고, 배부르게도 하십니다. 빌립보교회에서 지원이 왔어요. 그렇게 일하시는 주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성도의 삶은 자기 인생을 통제하시는 주님의 통제 앞에서 비로소 사탄은 떠나가고, 자아에게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며, 주와 함께 움직이는 주의 몸으로 기능하게 됩니다. 그 기능 안에서 성도의 자아는 늘 주님의 지체로 새롭게 확인되는 거죠. 그때 자유가 있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주님 감사합니다. 나로서 내 인생을 지켜보겠다고 하는 이 싸움이 사탄이 우리 안에서 만들어내는 허구의 싸움임을 알게 하시고, 주께서 사나 죽으나 배고프나 배부르나 우리 인생을 통치하고 있음을 늘 새롭게 보게 하여 주옵소서. 주의 인도하심에 나를 맡기는 자의 자유로움을 누릴 수 있도록 긍휼을 더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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