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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 2장 15-21절. 믿음으로 살아가는 바울의 삶. 요약설교

작성자바다위 빨간해|작성시간24.12.29|조회수33 목록 댓글 0

갈라디아서 2장 15-21절. 믿음으로 살아가는 바울의 삶. 요약설교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 ‘본래 유대인이라는 표현은 혈통적으로 이방이었다가 유대인으로 개종한 유대인 소위 개종자’(proselyte)가 아니고, 나면서부터 유대인의 혈통을 가진 순수한 유대인을 가리킵니다.

본래 유대인즉 나면서부터 유대인(Jews by birth)은 자존심이 매우 강하여, 개종한 유대인보다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고, ‘이방인은 종이나 개 취급했습니다.

2. ‘이방 죄인이라는 표현은 바울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유대인 사회에서 통상적으로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개념을 말한 것뿐입니다.

이 표현은 이방인에 비해서 유대인이 의인이라고 높이 평가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같은 죄인이지만, 특히 당시의 사회적인 통념을 빌려서 이방 죄인이라고 지칭한 것뿐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울이나 베드로나 혈통적인 유대인이고, 혈통적 이방인이 개종하여 유대인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 즉 순수 유대인이라는 것을 표현하고자 한 것입니다.

3. 본 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순수한 유대인도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 행위로써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방인은 율법 규정 자체를 갖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율법 행위 자체가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전제한 것입니다.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었다는 것은 첫째 사람은 율법의 행위들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는 것과, 둘째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과, 셋째 이 진리를 알고서 우리들도 과거에 확실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2. 첫째 여기서 율법의 행위란 과거의 유대교 생활을 가리킵니다.

즉 유대교인들이 성전에서 제사를 드렸으나, 성전 제사로써는 죄 사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유대교인들이 여러 가지 율법 규정들인 미쉬나아 성결법 규정들을 지킴으로써,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율법 규정들로써 오히려 부모 효도를 버리고, 효도할 물건들을 하나님께 드린 물품 즉 고르반이라고 해서 부모에게 물질을 드리지 않는 악한 유대교의 율법 규정들을 공격하셨습니다. (7:11)

또 안식일 규정들로서 안식일에 선행하는 것을 금지하고,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고 구원하시는 것을 정죄한 율법 교사들을 정죄하셨습니다. (12:10-12)

이처럼 유대교의 율법 규정들과 성결법 등을 지킴으로써는 결코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3. 둘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 예수님에게 전가시켜서 우리 대신 죄에 대한 형벌을 담당하게 하심으로써, 우리가 자신의 무능과 비참함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우리의 행위나 공로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믿음도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감동하셔서 믿게 하심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2:8, 5:2)

4. 이 복음 진리를 알고서 우리도 과거에 확실히 예수님을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회심 사건은 성령의 감동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성령의 감동을 받은 우리는 눈물과 콧물 흘리며 회개하고, 주님의 희생적 사랑이 고마워서 일평생을 주님께 헌신하는 중생의 체험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5.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함을 얻으려 함이라에서 율법의 행위그리스도를 믿음은 상반되고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란 유대교 지도자들의 처벌이 무서워서 율법 규정들과 성결법 규정들을 억지로 지킨 것이나, 바울처럼 독심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지키려고 한 것을 가리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인과 서기관들이 자기들은 무거운 율법 규정을 하나도 지키지 않으면서, 일반인들에게 무거운 율법 규정을 짐지워서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한다고 지적하셨습니다. (23:1-4)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이란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을 마음속에 받아들이는 것을 가리킵니다.

요한복음 112에 말씀한 대로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을 마음속에 영접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요한계시록 320에서도 주님이 마음 문밖에서 두드리시는데, 우리가 마음 문을 열면 주님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더불어 먹고 마신다고 했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자기 집에 영접하는 것도 예수님을 믿는 행위였고, 죄 많은 여인이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닦는 것도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었고, 나사로가 자기 집에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도 예수님을 믿는 것이었고, 마리아가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것도 예수님을 믿고 헌신한 것이었고, 일반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자기 집에 영접하는 것도 예수님을 믿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처음 우리 마음속에 믿고 영접했을 때, 우리는 눈물 콧물을 흘리면서 회개하고 예수님께 사랑의 헌신을 했습니다.

5.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함을 얻은 육체가 없기 때문이다는 것은 유대교의 율법 규정이나 성결법 규정을 지켜서 의롭다함을 얻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육체란 표현은 죄성을 가진 연약한 인간임을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유대교의 성전 제사로 의롭게 되지 못하고, 유대교의 엄격한 성결법 규정을 다 지킨다고 의롭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인간성 자체에 깊은 죄성이 박혀 있어서, 외부적인 도덕적 행위로써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지 못합니다.

우리의 죄성이 변화되는 것은 오직 성령으로 임재하시는 예수님을 우리 마음속에 받아들임으로써만 가능합니다.

처음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을 때, 성령으로 거듭나서 눈물로 회개하고, 주님 사랑에 감격하여 헌신할 때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믿음 생활 할 때도 오직 우리는 성령님 즉 영으로 오신 예수님을 우리 마음속에 모셔들일 때만 의로운 삶을 살 수 있고, 성령님을 모시고 그 인도를 받지 않고, 자기 마음과 감정과 생각에 따라 살면, 곧 죄악된 감정과 죄악된 말과 행동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하고, 성령 충만할 때, 아름다운 삶이 이루어지고, 행복하고, 복된 삶이 이루어져 갑니다.

이처럼 성령 충만과 성령님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 본 절은 반드시 베드로의 외식 행동과 관련하여 이해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한다는 것은 베드로가 율법 행위를 통해서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게 된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죄인으로 드러났다는 것은 유대인 성도들이 베드로가 이방인 신자와 식사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가 율법 규정을 지키지 않는 죄인이라고 정죄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결국 예수님 믿고 의롭게 되어 이방인과 식사를 하는 베드로와 바울과 바나바는 율법 규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유대인 율법주의 성도들에게 정죄되어 죄인으로 취급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이냐는 뜻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 규정을 어기고 이방인과 식사하게 하셨으므로, 결국 율법주의자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이방 죄인을 배척해야 한다는 율법 규정(7:1-4)을 어기게 만든 죄짓게 만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3. 좀 쉬운 예를 들어보면, 어떤 대학생의 아버지가 유교 지방 책임자로 제사와 묘지 관리를 주관하는 분이었는데, 이 대학생이 서울에 기독교 학교에 가서 예수님을 믿고 그 후로는 일체 문중의 제사에나 집안 제사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아버지와 문중 사람들은 그 대학생을 보고, 예수가 제사도 안 지내고, 조상도 몰라보게 하는 불효막심한 교주라고 욕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4.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은 예수님이 죄를 짓게 만드는 분이 결코 아니고, 예수님은 율법의 정죄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구주시라는 뜻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율법을 지키지 않게 만드는 반율법주의자로 보이겠지만, 예수님은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시키실 뿐만 아니라, 더욱 양심적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마음으로부터 범죄를 하지 않도록 성령으로 감동하시는 분이십니다.

즉 율법주의자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외식적인 율법적 행동을 하지만, 예수님을 믿고 성령님 모시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이 보지 않아도 선을 행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진정한 의로운 성도들이 됩니다.

예컨대, 어떤 국회의원들은 수해 의연금을 내놓고, 많은 사람들에게 선전을 하지만, 어떤 교회 성도들은 더 많은 수해 의연금을 내놓고도, 남몰래 은밀히 선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운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이라는 집을 헐어버리셨는데, 베드로와 바울이 율법의 집을 다시 세운다는 것을 가정한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나 율법 규정이나 성결법 규정들로써 유대교라는 집을 세워서 그 집 사람들인 유대인들을 종노릇시켰습니다.

그리고 이 할례나 율법 규정이나 성결법 규정이 담벼락이 되어서, 이방인들은 이 유대교라는 집에 들어올 수가 없었고, 아예 개나 짐승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모든 죄를 사하심으로써, 율법의 집 유대교라는 집이 무너져버렸고, 이방인들도 율법이라는 담벼락이 무너져서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2. 그런데 만일 베드로나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헐었던 율법의 집을 다시 세운다면이 행위는 그리스도의 피를 헛되게 만들고, 기독교회를 파괴하는 중대 범죄가 되는 것입니다.

3. 만일 그리스도께서 허무셨던 유대교라는 집을 바울이 다시 세운다면, 바울이 범법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유대교라는 집을 무너뜨리셨는데, 만일 바울이 유대교를 다시 세운다면, 이것은 그야말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만드는 최대의 중대 범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사도행전 1011에서 이방인 고넬료 집에서 함께 식사하고 교제한 것이 하나님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고, 나중에 사도행전 15 예루살렘 총회에서도 이방인에게 할례를 줄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는데, 이제 와서 안디옥 교회 이방인 성도들과 식사하다가 예루살렘 교회에서 온 율법주의 할례자들 앞에서 이방인 성도들을 떠나 도망한 것은 바로 예수님의 피를 헛되게 만들고 율법주의 유대교를 다시 세우려는 중대한 범죄가 되고, 만일 바울도 베드로의 외식에 동조한다면, 예수님의 피를 헛되게 만드는 중대 범죄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1.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는 것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유대교 율법주의자로서 기독교인들을 죽이려고 찾아다녔으나,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로는 율법주의를 버리고, 완전히 예수님을 전파하는 사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바울은 율법주의 유대교를 버렸고, 유대교의 사도였던 바울은 죽어버렸습니다.

즉 유대교의 최고 선봉장이었던 바울이 원수로 여겼던 그리스도의 최고 선봉장이요 사도가 되었으니, 이제 율법주의자 바울은 죽어버렸고,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님의 사도인 바울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율법에 대해서 죽어버린 자였고, 이렇게 바울이 율법에 대해서 죽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율법이었습니다.

여기서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은 바울이 유대교와 관계를 완전히 끊고, 유대교 선봉장 노릇한 데서 돌이켜, 이제는 완전히 예수님께 헌신한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또한 율법으로 말미암아 바울이 죽었다는 것은 율법주의 유대교인들이 더 이상 바울을 자기의 동족으로 여기지 않고, 어디서나 바울을 죽이려고 하고, 율법주의 유대교인들이 바울과 관계를 완전히 끊어버린 상태를 가리킵니다.

예컨대, 어떤 대학생이 유교 제사 지내는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그 학생이 기독교 학교에서 예수님을 믿고, 제사를 지내지 않으니까, 가정에서 쫓겨나고, 호적에서도 지워져서, 그 학생은 이제 완전히 그 유교 가정에서 죽은 자가 된 것과 같습니다.

바울도 유대교 나라에서 최고 지위에 있던 사람이었는데, 예수 믿고 사도가 되자, 유대교 사회가 바울을 유대교 사회에서 제명하고, 쫓아내고, 죽이려고 한 것과 같습니다.

이제 바울은 율법이라는 유대교 사회에서 죽은 자이고, 바로 율법 때문에 유대교 사회에서 쫓겨난 사람이었습니다.

2. ‘이는 하나님을 대하여 살려 함이라에서 하나님을 대하여’(Θεῷ: to God)관계의 여격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게 하기 위함이라는 뜻입니다.

즉 과거에는 바울이 율법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왔으나, 이제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과거에는 율법과 유대교에 종노릇 하면서 살았으나, 예수 믿은 후로는 하나님을 모시고, 예수님과 성령님을 모시고, 살아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과거에는 율법이라는 문자와 법조문에 얽매어서 종살이하고, 두려움 가운데서 살았으나, 이제는 인격적이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감동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가 올바른 길로 가도록 감동하시고 인도하시는 참 좋으신 주님이십니다.

이제 우리는 사람에게 종노릇 할 필요가 없고, 선하신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면 행복하게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1. 벵겔(Bengel)은 본 절이 그리스도인 생활의 핵심을 나타낸다고 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바울, 과거 율법주의자로서의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완전히 죽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즉 율법을 따라가다가 늘 정죄되는 죄책감 속에서 살던 바울의 삶은 예수님이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에서 죽으셨을 때,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다 함께 죽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라는 연합의 원리는 바울이 로마서에서도 자주 사용했습니다. (6:4,8. 8:17)

2. ‘그러므로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는 것은 과거에 내가 주관자가 되어서 살던 삶은 지나가버렸고, 이제는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 즉 성령님을 모시고, 성령님의 감동과 인도와 지시에 따라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요, 하나님의 자녀된 삶입니다.

로마서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로마서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3.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바울이 육체를 가지고 현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의 태도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하나님의 아들을 마음속에 모시고, 성령님을 모시고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믿는 것은 영접하는 것이고(1:12), 하나님의 아들을 모시고 사는 것은 곧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것은 성령님이 인격적이시기 때문에, 나의 인격 활동을 무시하시지 않고, 늘 성령님이 감동을 주시고, 나는 늘 좋으신 성령님의 감화와 인도를 받아 사는 것을 가리킵니다.

귀신은 늘 억압하고 극도의 괴로움을 주지만, 성령님은 가장 좋으신 분으로서 늘 평안과 사랑과 감동을 주십니다.

즉 성령님 안에서는 늘 의와 평안과 희락이 있습니다. (14:17).

4.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유대교의 철저한 율법주의자로서 살았으나,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로는 철저하게 기독교인으로서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로서 살았습니다.

우리도 과거에 예수님 믿기 전에는 제사 지내고 우상 숭배하는 자였고, 방탕하고 세상 출세를 위해 살았으나, 예수님을 믿은 후로는 귀신 제사를 거절하고, 예수님을 위해 헌신하고, 교회에서 충성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바울이 과거 율법주의자로서의 삶이 죽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과 신비적인 연합의 원리로 설명했습니다. (6:4-6)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철폐하거나 무시하거나 거절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은혜는 예수님을 통해서 거저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거저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거절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희생시킴으로써 죄인인 우리를 구원해주셨는데, 우리가 그 은혜를 폐지하고 무시하고 거절한다면, 이것은 지옥 갈 무서운 죄입니다.

2.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에서 란 죄가 하나도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데, 이런 의로운 상태가 율법을 다 지킴으로써 얻어진다면, 이것은 율법주의적 삶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율법으로는 의로운 사람이 하나도 없고, 오직 율법으로는 오히려 죄를 더욱 깨닫게 될 뿐입니다.

로마서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과거에 바울은 율법주의자의 생활을 해보았는데, 이런 율법주의 생활을 할 때 바울은 가장 악질적인 살인마의 모습이었습니다.

, 사람을 때리고, 가정을 파괴하고, 감옥에 가두고 죽이는 악질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8:3, 26:10-11)

그러나 바울이 예수님을 믿고, 주님을 모시고 살아갈 때는, 예수님처럼 의롭고, 은혜롭고, 사랑이 풍성한 모습이었습니다.

3. 본 절은 만일 갈라디아 지방 교인들이 과거에 유대교를 그리워해서 율법주의로 돌아가면,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헛된 것으로 만드는 배도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과거의 율법주의로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하고,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가장 큰 범죄 행위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성령님을 따라 살지 않고, 육신의 향락을 따라 살고, 내 생각과 내 감정에 따라 사는 옛 생활로 돌아간다면, 이것은 그리스도를 배신하는 배도 행위요, 마귀를 따라 멸망으로 가는 자살 행위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거에 내 욕망을 따라 살고, 율법에 따라 살고, 귀신을 숭배하며 살던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 믿고 성령님 모시고 살게 해주신 그 은혜를 배신하지 맙시다.

우리의 육체적 과거의 옛사람은 죽은 것으로 인정하고, 이제는 예수님 믿고,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새 사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날마다 성령 충만하시고, 늘 승리하고, 복된 생활하시고, 교회와 가정과 자손이 잘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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