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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눈요기

타이타닉호 내부공개

작성자경암|작성시간12.04.26|조회수466 목록 댓글 0

타이타닉호 [Titanic]


영국 화이트스타사(社)가 1911년에 건조한 대형 호화여객선. 그리스신화의 타이탄(Titan)신족의 이름을 따와 타아타닉으로 이름을 정했다고 한다.총톤수 46,328t. 길이 259.08m. 너비 28.19m. 주기(主機)는 터빈의 삼연성기기(三連成汽機)의 조립으로 된 기관이다. 삼축선(三軸船)으로 속력은 22kn이며,획기적인 이중 선저(船底)와 방수구획을 채용한 불침선(不沈船)으로서, 당시 4만t급 이상 객선의 개척선이었다.

 

1912년 4월 10일 영국 사우샘프턴에서 뉴욕을 향해 2224명의 승객·승무원을 태운처녀항해로 출항하여, 5일째인 4월 14일 밤 11시 40분 뉴펀들랜드의 그랜드 뱅크스남쪽 150㎞ 난바다를 22kn(시속 약 40.7㎞)로 항해하던 중 부류 빙산에 부딪쳐 수면아래에 길이 90m 가량의 틈이 생겨, 16개의 방수구획 가운데 앞부분 5구획이 침수되어 15일 오전 2시 20분에 침몰하였다. 구명정 수용인원은 모두 1178명 밖에 안되어 1513명의 희생자를 낸 세계 최대의 해난사고이며 이때 국제적으로 정해진 구난신호SOS>를 최초로 발신하기도 하였다. 이 참사 결과 1913년 해상의 인명안전에 관한 국제회의가 런던에서열려 오늘날과 같이 배의 안전시설을 충실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12년 4월 10일 첫 출항, 1912년 4월 14일 11시 40분 빙산 충돌, 2시간 40분만에 완전 침몰

 

 


 

타이타닉 탑승자 생존율

1위 - 1등실 여자와 아이들 (탑승객 156명, 생존자 145명) 생존율 93%

2위 - 여자 승무원 (탑승객 23명, 생존자 20명) 생존율 87%

3위 - 2등실 여자와 아이들 (탑승객 128명, 생존자 104명) 생존율 81%

4위 - 3등실 여자와 아이들 (탑승객 224명, 생존자 105명) 생존율 47%

5위 - 1등실 성인 남자 (탑승객 173명, 생존자 54명) 생존율 31%

6위 - 남자 승무원 (탑승객 876명, 생존자 194명) 생존율 22%

7위 - 3등실 성인 남자 (탑승객 486명, 생존자 69명) 생존율 14%

8위 - 2등실 성인 남자 (탑승객 157명, 생존자 15명) 생존율 10%

 

 

 

 

 

 

 

 

 

 

 

 

 

 

 

 

 

 

 

 

 

 

 

주인잃은 신발

 

 

 

 

 

 



좌 : 침몰한 타이타닉호에서 발견된 실제 다이아몬드 목걸이
우:태양의 심장 호프 다이아몬드

 

 

 

 

 

 

 

 

영화 '타이타닉

 

 

 

 


건조

20세기 초에 조선업으로 영향력이 있던 하란드 월프사의 회장인 피리 경이, 런던에서 저녁 식사 자리에 참석한 화이트 스타 라인사의 사장에게 대형 여객선 3척을 건조할 계획이 있다고 말한 게 타이타닉호 건조의 발단이었다. 건조는 토머스 앤드루가 맡았다.

설계

화이트 스타 라인사는 당시 북대서양 항로에 있어서 속도 경쟁보다는 느긋하고 쾌적한 선박 여행에 중점을 두는 회사였다. 하지만, 타이타닉은 속도부터 설비의 호화로움까지 모든 것에 중점을 두고 설계하였다. 안전에도 신경을 써서 방수구 획이 있었다. 방수 격벽은 16개의 구역으로 구분되었고, 2구역(뱃머리로부터 4구역)까지 침수해도 침몰하지 않고 떠 있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격벽은 제어실에서 원격 조작으로 즉시 폐쇄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타이타닉호는 침몰하지 않는 배로 소문났다. 그러나 방수 격벽은 완전히 밀폐된 구역이 아니고 상부의 주 갑판에 구역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 구조였다. 이는 타이타닉 호 사고가 발생하였을 때, 격벽 한계치를 넘어서면서 넘쳐나는 물이 다른 구역을 차례대로 침범하여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게 했다.

화이트 스타 라인 회사에는 타이타닉보다 1년 일찍 건조한 올림픽호와 상선인 HMS 브리타닉호가 재적했다. 원래 북대서양을 항해할 때 배 한 척으로는 운항에 차질이 생긴다. 따라서 북대서양을 항해하려면 항상 배가 두 척 이상 필요했다. 화이트 스타 라인사는 이러한 필요에 맞춰서 올림픽호를 먼저 건조하고 같은 해에 타이타닉호를 건조하였다. 이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브리타닉호를 건조하였다.

타이타닉호는 올림픽호와 거의 동시에 건조하기 시작했다. 대계단이나 식당의 장식, 식사의 메뉴나 객실서비스등, 그 외관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닮았다고 한다. 영화 타이타닉에서는, 마치 타이타닉호가 가장 거대한 배처럼 연출되었지만, 당시에는 올림픽호가 대표적인 배였으며, 타이타닉호와 브리타닉호는 자매선이었다. 이 세 선박을 통틀어서 올림픽 클래스라고 불렀다. 그 때문에 타이타닉호의 사진으로 종종 올림픽호 사진이 사용된다.

설계의 변경

앞서 운행되고 있던 올림픽호의 문제점이나 개선점을 듣고 타이타닉호 설계는 다소 변경되었다. 먼저 외관부터 올림픽호와는 다소 달랐다. 예를 들면 북대서양의 추운 강풍을 막기 위하여 A 갑판의 1등석 전용 산책용 갑판(Promenade)의 창에 유리를 장착했다. 이러한 변화는 외관상으로 두 개의 자매선을 판단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그 밖에도 올림픽호는 B 갑판의 창가 전체에도 산책용 갑판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타이타닉호의 설계도에서는 B 갑판의 산책용 갑판이 폐지되었고, 대신에 창가 전체에 1등 선실을 새롭게 마련하였다. 그 결과, 1등실 수가 올림픽호에 비해 훨씬 많아져 올림픽호에는 없는 스위트 룸이 설계되었다. 스위트 룸은 자체 산책 갑판까지 있었다.

당초 자매선의 중량은 거의 비슷하게 만들려고 했지만 타이타닉의 객실의 수가 증가하면서 최종적으로 타이타닉호의 중량은 올림픽호의 45,324톤보다 1004톤 무거운 46,328톤이 되었다. 엄밀한 의미로 말하면 타이타닉호는 올림픽호를 넘어, 당시 세계 최대의 여객선이었다. 그러나 그늘에 숨은 타이타닉호가 유명해진 이유는 어두운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탓이다.

1등실

1등실에는 총 329명의 부유한 승객들이 타고 있었으며, 급한 사정보다는 즐기려고 승선한 승객들이 많았다. 객실은 최상층인 보트 갑판부터 갑판 E(상갑판)까지 설치되어 있었으며 호화 호텔 수준이었고 개인 목욕탕이 있었다.

2등실

2등실에는 총 285명의 중산층 승객들이 타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1등실만큼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비교적 많은 편리한 시설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객실은 갑판 D부터 갑판 G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흡연실(갑판 B), 레스토랑(갑판 B), 도서관(갑판 C), 상점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3등실

3등실에는 총 710명의 가난한 승객들이 타고 있었으며, 주로 아메리칸 드림으로 미국에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얻기 위해 승선한 승객들이었다. 객실은 2등실과 마찬가지로 갑판 D부터 갑판 G까지 설치되어 있었다.시설은 1등실과 2등실만 못하고 엔진이 가동되는 소리가 울려퍼졌으나 다른 배들에 비해서 비교적 좋은 대우를 해주었다. 배에 탑승하기 전에는 검역을 걸쳐서 전염병이나 이/벼룩을 확인했고 여자와 남자는 배의 앞머리와 뒷머리에 각각 따로 떨어져 승선했으나 가족 단위일 경우 같이 승선할 수 있었다.

항해에서 침몰까지

항해

1912년 4월 10일, 영국사우샘프턴(Southampton)에서 타이타닉호는 첫 항해를 시작했다. E·J·스미스 선장과 승무원과 승객을 합쳐서 2,200명 이상이 배에 탔다. 프랑스셰르부르(Cherbourg)과 아일랜드의 퀸즈 타운에 기항해, 미국뉴욕으로 향했다.

출항당시 쌍안경의 열쇠가 인계되지 않아서, 승무원은 배 안에 있는 쌍안경을 꺼낼 수 없었다. 망지기들은 쌍안경을 사용하지 못하고 눈으로만 위험 요소를 확인해야 했는데, 이는 후에 치명적인 영향을 가져오는 한 요인이 된다.

타이타닉호는 출항 오전부터 빙산이 떠다닌다는 소식을 선박사이의 무선통신으로 받았다. 특히 4월 14일에 는 빙산 경고를 6통 받았다. 그러나 타이타닉호 통신사 잭 필립스는 승객의 통신 발신 업무에 쫓기고 있었고, 통신사들은 이 계절에서 북대서양을 항해할 때에는 자주 있는 일로 생각하여 빙산 경고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심각한 실수를 하였다. 그러다가 캘리포니안 호가 무전을 보낼때에는 타이타닉의 통신사가 바쁘다면서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 일침을 놓았다. 그러자 캘리포니안 호의 통신사 에반스는 화나서 잠이 들었다. 이는 1500여명의 사람을 죽게 하는 또 한가지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침몰

손상

그리고 운명의 밤 11시 40분, 레지날드 리와 함께 망을 보던 망지기 프레드릭 플리트가 전방 450미터에 높이 20미터 미만의 빙산을 육안으로 발견했다. 출항할 때 쌍안경을 사용할 수 없었고 빙산의 10분의 1은 숨어 있었기 때문에 빙산을 발견했을 때에는 이미 늦은 뒤였다. 플리트가 빙산을 발견하고 급히 무전을 쳤고, 6등 항해사 제임스 무디가 조타실에서 그것을 받고 윌리엄 맥매스터 머독 1등 항해사에 게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그는 바로 우측으로 키를 돌릴 것을 명령하고 (당시에는 왼쪽으로 가려면 오른쪽으로 키를 돌려야 했다.) 텔레모터(원격 조정 장치)를 "전속 후진"로 돌려놓아 기관실에 지시한 뒤, 그러고 나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보일러실에 방수 격벽이 닫힐것을 알리는 알람을 울렸다. 조타수 로버트 히친스는 빙산을 피하려고 오른쪽으로 키를 최대한 돌렸다. 정통으로 부딪히지는 않았지만, 배 우현은 빙산이 있는 곳으로 서서히 접근하여 결국에는 배와 빙산이 충돌을 했다. 아랫쪽 승객들은 큰 충격을 느끼고 잠에서 깨어났다. 허나 깨어있던 윗쪽 승객들은 약간의 흔들림을 느꼈으나 잠에서 깨어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6번과 5번 보일러실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화부들은 물을 피해 도망갔다. 1등 항해사 윌리엄 머독은 방수 격벽의 스위치를 내렸다. 조타실과 망루에서는 빙산의 피해가 그렇게 크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충격을 느끼고 올라온 사람들이나 갑판위에 있었던 승객들은 오히려 즐거운 분위기였다. 3등실 승객들은 올라나와 얼음조각으로 축구를 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기념으로 위스키에 쓸 얼음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우현에는 수면 아래로 약 90미터에 걸쳐서 손상이 생겼다. 이 과정에서 5구획에 걸쳐서 엄청난 해수가 배 안으로 들왔다. 4번째 방수구역까지 물이 들어오면 타이타닉호가 침몰하지 않고 버틸 수 있지만 5번째 방수 구역에 물이 차면 그 한계를 넘는 것이었다. 애초에 격벽이 위 갑판과 연결되어 있는 구조라, 해수는 격벽을 넘어서 차례차례로 다른 구역으로 흘러 들어갔다. 뱃머리에 실린 물로 배는 서서히 앞으로 기울고 뱃머리가 해수면 아래로 점점 들어갔다.

타이타닉호의 벽이 이처럼 쉽게 허물어진 것은 당시의 낮은 제강 기술 때문이었다. 최근의 샘플 조사결과에서 선체에 사용한 강철에 불순물인 황화 망간을 다량으로 포함하고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게다가 타이타닉호가 침몰한 북대서양은 수온이 낮다. 물 온도가 낮으면 황화 망간의 강도가 약해진다. 그 결과 배가 빙산에 충돌할 때 강철이 찢어진 게 아니라, 강철을 지지하던 나사못이 한순간에 풀려 해수가 들어왔다.

타이타닉의 스미스 선장은 배수 펌프로 해수를 밖으로 빼내려고 했지만 그저 몇 분의 시간을 버는 정도였다. 12시 45분, 타이타닉 호는 조난 신호를 발신하고 인근 선박에 구조를 요청했다. 불과 20km 정도의 거리에 정박중인 화물선 캘리포니안 호가 있었지만, 통신사가 타이타닉의 통신사에게 일침을 듣고서는 화가 나서 취침중이라 타이타닉 호의 긴급 신호를 받지 못했다. 약 90km 떨어진 여객선 카르파티아 호가 조난 신호에 응답해 전속력으로 타이타닉이 있는 곳으로 향했지만, 배의 최대 속도가 17노트밖에 되지 않는 카르파티아 호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타이타닉호가 가라앉은 지 약 1시간 30분이 지난 새벽 3시 55분이었다.

탈출

스 미스 선장은 탈출 명령을 내렸다. 좌현에서는 2등 항해사 찰스 라이톨러가, 우현에서는 1등 항해사 윌리엄 머독이 구명보트를 하선하기 시작했다. 2등 항해사는 혼란을 막기 위해 1등 승객의 여성과 어린이 우선의 당시 관습을 철저히 실시했지만 1등 항해사는 더 이상 여성과 아이들이 보이지 않으면 남자를 태우는 것을 허용하는 등 비교적 남성에게도 관대한 대응을 했다. 당시의 영국 상무성의 규정을 보면 여객선은 여객 정원만큼 구명보트를 갖출 필요가 없었다. 당시 규정으로는 978명 정도의 구명보트만 준비하면 그만이었다. 이는 당시의 구명보트 규정이 배의 배수톤수를 기준으로 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미관, 비용 등의 이유로 인해 화이트 스타 라인사는 최종적으로 타이타닉 호에 1,178명 정도가 탈 수 있는 보트만 준비하였다. 허나 그나마도 제대로 채워지지 않았다. 맨 처음에 구명보트를 하선할 때에는 많은 승객들이 승선을 거부했다. 배가 침몰한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고 나무로 만든 조그만한 보트보다는 차라리 260미터의 강철로 만들어진 여객선이 훨씬 안전해 보였기 때문이다. 엎친대격으로 유언비어가 승무원 사이에 떠돌았다. 정원 65인승의 보트에 70명을 태우는 실험을 했는데 배는 뜰 수 있었지만 추진과 균형 잡기가 불안정하다는 것이었다. 또한 급작스런 사고에 당황한 승무원은 정원을 다 채우지 못하고 황급히 구명보트를 하선했다. 게다가, 그 누구도 그런 배가 침몰할거라고 생각을 못했기 때문에 선원들도 정원이 얼마인지 헷갈렸고 사전에 안전 교육도 전혀 하지 않았다. 많은 보트들이 정원을 채우지 않은채로 바다에 내려졌다. 만약 정원이 완전히 채워졌다면 승객의 반은 살수 있었을 것이었다. 약 1천 5백 명의 승무원과 승객이 타이타닉호로부터 탈출할 수 없었다. 이들 대부분은 선미 쪽으로 피해갔다.

12시 45분에 배를 탈출할 준비를 마쳤다. 첫번째 신호 로켓이 발사되고, 모스 램프를 통해서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구명보트 6호가 첫 번째로 바다에 내려졌다. 선장은 구명보트의 정원이 다 채워지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귀환 지시를 내렸다. 그 배를 맡은 조타수 로버트 히친스는 그걸 묵인했다.

1시 15분에는 앞머리의 이름 부분까지 가라앉았으며, 1시 40분쯤에 뱃머리가 물에 잠겼고 이쯔음에 대부분의 구명보트가 떠나고 마지막 신호용 로켓이 발사되었다.

최후의 20분

2시 5분, 두개의 남은 접이식 구명보트를 제외한 마지막 구명 보트인 접이식 보트 D가 떠났다. 선장은 남은 선원들에게 모두 제 살길을 찾으라고 했으며 배를 포기함을 선포했다. 남은 사람들은 접이식 보트 2개를 기달리거나 바다로 뛰어들거나 선미로 달려나갔다. 프로펠러가 그 모습을 완전히 드러냈다.

  • 2시 10분, 바닷물이 최상층인 보트 갑판까지 다다르었다. 그때쯤 체육관 바깥쪽 휴식터에서 월리스 하틀리가 지휘를 맡았던 악단은 구슬픈 찬송가를 마지막으로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 곡이 어떤 곡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유력한 곡은 Nearer my God, to thee와 Autoume이다.) 선장은 확성기를 쥔 체로 선교에 들어가 그대로 그곳에 남았다.

2시 15분, 중앙계단의 유리 돔과 창문이 파도에 의해 깨짐으로써 물이 쏟아져 내렸다. 이 와중에서 안전한 곳을 찾던 사람들 몇몇이 그곳으로 빨려들어갔다. 2시 17분, 배가 보트 갑판이 있는 곳까지 가라앉았다. 통신사 잭 필립스와 조수 해럴드 브리드는 더 이상 무리라는 것을 깨닫고 마지막 구조 신호를 보낸 후, 침수되어가는 통신실에서 빠져나왔다. 남은 접이식 구명보트 두 척은 파도갑판 위를 떠다녔는데, 접이식 보트 B는 30여명의 사람들이 선 상태로 뒤집혔고 접이식 보트 A는 물이 반쯤 찼다. 그리고 굴뚝 1이 선교루쪽으로 쓰러지면서 몇몇 사람들을 덮쳐버렸다. 배가 급속도로 기울면서 가라앉기 시작함에 따라 배 내부의 물체들이 떨어지면서 생기는 굉음이 발생했고 이는 배의 침몰을 가속시켰다. 2시 18분, 물체들이 떨어지면서 생기는 굉음이 더 커졌다. 그러던 중, 보일러실이 침수하면서 잠깐 깜박거리다가 완전히 정전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잠깐 후, 바닷물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선체는 굉음과 함께 3번째와 4번째 굴뚝(환기구) 사이의 신축 이음을 중심으로 금이 가면서 두 동강으로 쪼개졌다. 동시에 굴뚝 3과 환기구인 4가 부러졌다. 이윽고 뱃머리 부분은 잠기고 배 뒤쪽은 바다로 내동댕이 쳐서 일직선이 되었으나 곧바로 다시 기울어서 점차 수직에 가까워졌다.

마침내 운명의 시각 2시 20분, 배와 해수면 사이의 내부 압력이 같아지자 타이타닉호는 물을 뿜어내며 수직으로 서면서 서서히 물속으로 들어가다가 완전히 침몰했다. (이 와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차디찬 바다로 떨어져 나갔다.)

구조

배에 남아 있던 1500여명의 사람들은 차가운 북대서양 한복판에 버러졌다. 구명보트에 탔던 사람들은 배가 침몰했던 곳에서 울려퍼지는 아우성을 들었다. 가장 적은 탑승수인 12명을 태운 1번 보트에 탑승한 화부 헨더릭손은 현장에 돌아가자고 요구했으나 더프 고드만 부부와 배를 맡은 시몬스가 반대했고 나머지는 말이 없었고 결국 무산되었다. 5번 보트의 3등 항해사 허버트 피트만 또한 현장에 돌아가려 했으나 몇몇 여자들이 이에 반대해서 무산되었다. 6번 보트에서는 마가렛 몰리 브라운 또한 현장에 돌아가서 사람들을 구하자고 요구했고 사람들도 이에 동의했으나 배를 맡은 조타수 로버트 히친스는 사람들이 배를 끌어당길 것이라며 거절했다.

결 국 14번 보트의 5등 항해사 해롤드 로우가 구명 보트들을 재편성한 뒤 지원자는 남기고 다른 사람들을 다른 구명보트로 옮긴 뒤 구조를 향해 나섰으나 그가 준비를 갖추어 구조로 향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영하 2도의 차가운 바다에 있던 사람들은 저체온증으로 대부분이 30분 안에 죽었다. 저체온증 이전에 심장마비로 몇 분 이내에 사망했다고 하는 의견도 있다. 별세자 중에는 갓난아기를 안은 모친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중 4명만이 그 곳에서 건져나왔다.

배가 침몰한 뒤 약 1시간 30분 후인 새벽 3시 55분에 도착한, 선장 아서 로스톤이 맡은 카르파티아 호는 약 4시간 30분 동안에 20개의 구명보트에 타고 있는 생존자들을 구조했다. (5명의 사람은 구명보트에서 죽었다.) 배는 생존자들을 위해 따뜻한 커피, 담요, 그리고 의료 서비스를 곳곳에 제공해 놓았다. 그리하여 8시 30분에 마지막 생존자를 구조한 후, 속도를 줄이고 현장으로 돌아가 다른 생존자들을 찾았으나 시신들은 파도에 쓸려가서 거의 보이질 않았고 흩어진 잔해들과 시신 1구밖에 보이질 않았으며, 이때까지 물 속에 살아있을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결국 더 이상의 수색은 포기하고 뒤늦게 사고 해역에 도착한 캘리포니안 호에게 생존자를 더 찾아달라고 한 뒤에, 3일 후 뉴욕에 도착했다.

이후

며칠 후, 시신 인수를 위해 맥케니 베넷 호를 포함한 몇몇 배들이 보내졌다. 총 328구의 시신이 바다에서 인수되었는데, 그중 119구의 신원 확인이 불가능하거나 연고자가 없는 시신, 그리고 선원들의 시신(바다에서 죽은 선원은 자신의 고향인 바다에 묻힌다는 전통에 따라)은 영국에서 바다에 장사지냈다.

영웅들

승 객들을 구하거나 품위있게 죽은 영웅들도 있었다. 에드워드 존 스미스 선장은 구명보트 승선을 거부하고 끝까지 승객들을 지도하다가 죽었다. 배의 설계자인 토마스 앤드류스는 승객들이 뜰 만한 물건들을 던지는 것을 돕다가 1등실 흡연실에 조용히 들어가서 배와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우등 기관사인 조셉. G. 벨을 포함한 많은 기관사들이 배가 완전히 침몰하기 오직 2분 전, 그러니까 배의 불이 완전히 꺼질때까지 그 자리를 계속 지키면서 배의 전기를 작동시키는 작업을 하며 배와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월리스 하틀리가 지휘를 맡은 8명의 연주대는 배가 침몰하기 고작 10분 전까지 곡을 연주하고 (이 곡이 어떤 곡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유력한 곡은 Nearer my God, to thee와 Autoume이다.) 서로에게 행운을 빈 후 헤어졌으나 비극적이게도 그들 모두는 죽었다. 토마스 바일스 신부는 구명보트 승선을 거절하고 사람들의 구명보트 승선을 돕고 구명보트를 타지 못하고 죽을 운명만을 기달리는 사람들에게 고해성사를 보고 갚판 위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다가 죽었다. 백만장자인 철강업자 벤자민 구겐하임은 자신은 살 수 없음을 직감하고 현지처와 하인을 태운 뒤 선원의 구명조끼를 거절하고 턱시도로 갈아입은 뒤, 자신을 따르는 하인과 함께 "우리는 가장 어울리는 복장을 입고 신사답게 갈것이다"고 하며 마지막까지 시가와 브랜디를 즐기며 배와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뉴욕에서 유명한 메이시 백화점을 소유하고 있는 노부부 스트라우스 부부는 금실이 좋은 노부부였다. 이사도라 스트라우스가 구명보트 승선을 거절하자 그의 부인은 선원의 구명보트 승선 제안을 거절하고 하인에게 모피 코트를 건네주고 구명보트에 태운 뒤 함께 죽었다.

사고의 영향

당시 최신 과학기술로 만든 타이타닉호의 침몰참사는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문명의 진보와 인간의 이성에 낙관적인 신뢰를 갖고 있던 당시의 서방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타이타닉호 침몰 참사 희생자 수는 다양한 설이 있지만, 영국 상무성의 조사에 따르면 1,513명에 달해 당시 "세계 최대의 해난사고"라고 불렸으며, 살아남은 사람은 711명에 불과했다. 이 사고를 계기로 선박·항해의 안전성 확보에 대해서, 조약의 형태로 국제적으로 결정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 1914년 1월 "해상에서 인명의 안전을 위한 국제 회의"를 열어 13개국이 참가, 1914년 해상에서 인명의 안전을 위한 국제 조약(International Convention for the Safety of Life at Sea(SOLAS), 1914)이 채택되었다. 또한 영국 상무성은 구명보트 구비 기준을 배의 총 정원으로 변경하였다. 그 후로, 여러 배가 조약에 따라 구명보트를 늘렸으며, 이중에는 타이타닉의 자매선 올림픽호, 브리타닉호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 미국에서는 선박에의 무선 장치 배치의 의무 부여가 강화되어 무선 통신 기계가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발견

1985년 미국 심해탐험가 로버트 발라드(Robert Ballad)는 뉴펀들랜드 680킬로미터 지점에서 최초로 타이타닉호 잔해를 심해카메라로 촬영했으며, 미국영국 학자들의 노력으로 심해 잠수정을 이용한 선체 파편 인양 작업이 성사되었다. 수심 약 4000미터에서 발견된 두 동강난 선체는 각각 600미터 떨어져 있었으며, 약 20% 정도가 침몰 과정과 그 후의 과정에서 유실되었다. 배의 앞쪽 부분은 비교적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뒷쪽 부분은 선체가 여기저기 찢어져 있어서 훼손이 심했으며, 잔해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배의 모든 기둥은 침몰 과정에서 유실되었고, 망루는 선교루를 향해 쓰러져 있었다. 신기하게도 옷은 발견되었으나 유해는 발견되지 않았는데, 아마 조류로 인해 흩어졌거나 바닷물의 유기물에 녹아 없어진 듯 하였다. 발라드는 배를 발견하고 한동안은 그 사실을 언론에 알리지 않았으며, 참사에서 죽은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추모비를 세웠다.

타이타닉호에 대한 연구결과

1985년 미국 심해탐험가 로버트 발라드(Robert Ballad)는 뉴펀들랜드 680킬로미터 지점에서 타이타닉호 잔해를 심해카메라로 촬영했으며, 미국영국 학자들의 노력으로 심해 잠수정을 이용한 선체 파편 인양 작업이 성사되었다. 1993년 9월에는 미국 조선 전문가 윌리엄 가츠케(Wiliam Garzke)가 당시 기록을 근거로 타이타닉호 침몰 참사를 미리 막을 수 있었던 인재(人災)로 해석하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생존자들은 배가 빙하와 충돌하는 순간 엄청나게 크게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고 순식간에 가라앉았다고 증언했는데, 그 소리는 저급 강철판이 만들어낸 대재앙의 신호였다는 것이다. 윌리엄은 건져올린 선체 파편을 연구한 결과 충돌시 휘지 않고 부서지는 질이 낮은 강철판을 사용한 것으로 판명되었으며, 고급 강철판을 사용했다면 침몰을 막았거나, 침몰시간이 지연되어 인명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1] 그러나 타이타닉를 만든 회사가 사용한 강철판은 가장 좋은 것이었다. 당시 제철기술로는 최고급 강철판조차 의 함유량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낮은 온도에선 휘어지기보단 부서져버리게 되었다.


타이타닉호 내부공개

















































타이타닉의
티켓은 매우 고가여서 그당시
귀족들만 탔다고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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