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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다시 돌아 보는 백남준의 작품세계

작성자junghokim|작성시간06.02.28|조회수22 목록 댓글 0

백 남 준

 

  
    "물고기 하늘을 날다"

    백남준   1932.  서울 출생 

  대부호의 3남 2녀 중 막내로,
  어려서 피아노를 배워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어린 시절                                                  독일 유학 시절

  6·25사변이 터지자 그의 집안은 모두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는데,
상경대에 진학하라는 부친을 속여가며 동경대 미대에 진학했다.
그는 도쿄대학에서 총명한 학생으로 정평이 나 있었으며 주로 음악과 철학 서적을 읽었다.

 일본 도쿄대학을 졸업할 즈음, 백남준은 당시 현대 음악의 메카로 알려져 있던 독일로 유학하여 58년에는 존 케이지와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면서 그의 예술 인생은 큰 전환을 이룩하게 되었다.

 
    "완전 피아노"

 존 케이지는 서양 음악의 고정 관념에 대하여 반기를 든 가장 적극적인 전위 음악가이며, 
 백남준이 서양의 전통악기인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때려부수면서  행위 음악을 전개시키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962년  백남준은 자신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을 만나게 된다.
독일 뒤셀도르프의 어느 공연장에서 바이올린을 부수는 퍼포먼스를 하였는데,  그 곳에서  플럭서스 그룹을 창시한 요셉 보이즈을 만난다. 

  이들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가까워진 것은 요셉 보이즈가 백남준의 첫 전시에 느닷없이 개입하고 난 뒤부터였다.
백남준과 요셉 보이즈는 그 후에도 여러 차례 퍼포먼스를 함께 하였으며 특히 요셉 보이즈 신화의 대부분에 백남준이 함께했다.               

 
  피아노 공연 후 자신이 제작한 로봇을 끌고 나와 시연하는 백남준
  그 후 뉴욕에선 로봇이 무단횡단하다 교통사고를 당하는 해프닝으로 이름이 알려진다.

 

  그는 무대 위에서 바이올린이나 피아노를 때려 부수고, 관객의 넥타이를 자르고, 머리에 세제를 끼얹고, 객석에 소변을 보고, 구두로 물을 마시고, 머리로 붓글씨를 쓰며, 막 자른 황소 머리를 걸어 놓는 등 당시  미술계에서 가장 과격하고 폭력적인 예술가로 명성을 얻었다. 
 
 63년 백남준은 독일 유학 시절 부친의 마지막 송금액으로  텔레비전 13대를 샀다.
그리고 3월에 독일의 소도시 부퍼탈에서는 텔레비전 13대가 동양의 젊은 예술가 백남준에 의하여 호되게 괄시 당하고 억압당하는 매우 공격적  전시회가 열렸다.

 백남준은 이 전시회에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Exposition of Music-Electronic Television)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음악을 전시하겠다는 발상에다 그 전시가 전자 텔레비전과 관계가 있다는 암시가 깔려있다.
이 전시는 오늘날 비디오 예술의 첫 전시회로서 백남준 신화의 첫 페이지에 기록되었다.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 전시는 역사에 남는 사건이 되었다. 이 전시회는 당시까지 음악가나 행위 예술가로 알려져 있던 백남준이 텔레비전이라는 예술 영역을 새로 개척한 비디오 역사의 장을 연 문제의 전시이다.

그는 13대 가운데 12대의 텔레비전을 전시하면서 텔레비전의 기능을 온전히 살려둔 것은 거의 없었다.
어떤 것은 영사막을 거꾸로 뒤집어놓거나 관객이 발로 밟아야 기능을 하도록 조작해 놓기도 하였다.
어떤 것은 영사막을 조작하여 하나의 가느다란 선으로 묘사하였고 이것을 'TV 참선'으로 제목을 붙였다.
배치 방법도 의도적으로 무질서하게 유도하였으며 관객이 접근하여 매만지거나 건드려야 작동되도록, 즉 TV 문화를 관객의 지배 하에 둔 것이 특징이었다.

 이 전시회의 기본적인 개념은 60년대 대중 문화의 성상이며 우상이던 텔레비전을 공격하고 해체시키는 것이었다.
텔레비전을 '라디오+그림'으로 해석해 볼 때 음과 이미지의 결합은 예술에서의 혁명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이 전시회는 관객이나 언론으로부터 크게 환영받지는 못하였다.


 
   "참여 텔레비젼"                                          "TV 부처"

  그 후 뉴욕으로 건너 간 백남준은  전위 음악가이자 플럭서스 예술가인 샬로트 무어만과 
'괴짜들'을 공연한다.
 유태인인 샬롯 무어만은 헌신적이고도 열정적인 도움으로 백남준에게 매우 큰 정신적인
 동반자가 되어주었다.

 
   "내 팔을 자름"                                            "존 케이지의 현악기를 위한 26.1.1499"
  
 
  "TV첼로"        샬롯 무어만이 첼로를 연주하면 TV 화면이 미리 녹화된 영상이나,
                      직접 방영되면서 신디사이저에 의해 변형된 화면이 나온다.
                      소리는 영상의 바이브레이션에 의해 배가된다.


 
 백남준의 가장 큰 출세작은 1984년 1월 1일, 미국과 프랑스의 공중파를 통해 방영된
생방송 작품,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다.
이 방송은 미국, 프랑스 뿐만 아니라 전세게 곳곳에 방영됐는데,
조지 오웰의 [1984] 소설을 풍자한 이 작품은 1984년에도 아직도 지구인들이 건강히
지내고 있을 뿐 아니라 TV를 통해서도 그 어떤 지배나 독재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굿모닝 조지 오웰"의  장면


 
  "예술과 인공 위성"

   
  
 
     
   "백악관"에서의 퍼포먼스                보티첼리의 비너스를 닮은 몸에 힐러리 상원의원
                                                    (기천달러밖에 안들었다며, 원래는 마돈나로 하려
                                                    했는데 조수가 힐러리로 하자 해서 바꿨다 함)의
                                                    얼굴이 달린 거대한 풍선이 설치돼 있다. 
                                                    조만간 이를 맨해튼 상공에 띄울 예정이라 한다.

 
  이들은 관념적 예술 형식을 버리고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예술의 이름으로 시도하였으며 신체적인 밀착 공연을 벌인 것은 물론 심지어 외설적 공연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어 재판까지 받는 등 스캔들도 일으켰다.

  당시 뉴욕 예술계는 예술과 외설 시비에 대한 차별성 및 예술적 표현 자유의 확보를 위하여 이 들의 재판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그 결과 외설과 예술의 표현 자유는 다르다는 최종 판결을 발표하게 되었으며 이들은 영웅이 되었다

 
       "로봇가족"                                                "색칠한 아이"


 
    "요소"                                                       "나의 파우스트"


  백남준은 데뷔 초기에서부터 지금까지 텔레비전의 대중 지배에 대한 역기능을 놓고 예술적 해석을 함으로써 비디오 예술의 시조가 되었다. 

 



 
  "동시 변조"   뉴욕 "구겐하임" 전시

 
 

  백남준은 데뷔 초기에서부터 지금까지 텔레비전의 대중 지배에 대한 역기능을  예술적으로
 해석함으로써  비디오 예술의 선구자가 된 것이다.
  그가 개발한 비디오 기술들 중 특히 자석을 이용하여 텔레비전의 이미지를 뒤틀리게  하면서 예술적으로 바꾸었던 시도는 후배 비디오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손부처"                                                    "안테나가 있는 손기정"



 
   "호랑이는 살아있다"                                    "기마민족"


 
   "백팔번뇌"

 

  또한 신디사이저를 개발하여 비디오카메라가 사실적으로 담아내는 다큐멘터리 속성을 다양한 컬러와 이미지효과를 곁들여 텔레비전의 이미지와 다른 비디오 예술을 창조한 것은 백남준의 중요한 업적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참여와 소통을 전제로 하지 않는 예술적 실천은 예술의 독재, 또는 독백 예술로 간주하였 으므로  관객이 다양한 방법으로 작품에 관계하고 함께 즐길 수 있는 차원으로 발전시켰다. 
 예술 작품에서 심각한 사상이나 철학을 배제하고, 오직 예술가 자신의 재미와 변덕, 즉흥성에 의해 작품을 창조하며, 서양 전통 사상이나 예술에 철저하게 저항한 인물로, 오직 자기 중심적인 아이디어에서 작품을 생산한다.


   일본인 전위 예술가 쿠보타 시게코와 결혼하여 서로가 예술의 동반자로서의 삶을 영위하며,
소위 재벌 집안에 태어나  세계적인 예술가의 반열에 올라섰지만,  백남준은 미술가의 길을
택한 뒤 단 한번도 풍족한 삶을 누리지 못했다.
오히려  미술 활동과  생계를 위해 가족들에게 돈을 꾸어야 했으며, 돈을 빌리기가 어려워 전시회를 열지 못할 위기를 겪기도 했다 한다. 

 항상 허름한 노숙자 옷차림을 하고 다니는 바람에 약속 장소에서 쫓겨나거나 길에서 적선을 받은 적도 있다고 한다.

 플럭서스 작가들 작품이 오늘날 수천 수 억원을 호가하는데 반해,
백남준은 "작품은 그냥 작품으로써 끝날 뿐 거기에 금전적인 가치가 붙는 것을 용납치 않는다" 는 그의 예술 철학때문인지도 모른다.
  

 


<비디오 부처>, 1976-78
폐쇄 회로 카메라를 이용한 자기 명상적 작품 가운데 백미로
손꼽히는 TV 부처는 1974년 뉴욕의 보니노 화랑에서 가진
네번째 개인전에 처음 출품된 이후 돌에 둘러싸인 모습, 흙 속에
파묻힌 모습 등 여러 가지 형태로 번안되어 소개되어 왔다.
이 작품의 방법론은 지극히 간단한 것으로, 텔레비전 모니터 뒤에
놓인 카메라에 포착된 자신의 모습을 TV를 통해 바라보며 사색에
잠겨 있는 부처가 작품의 모티브이다. 그러나 그 안에 내재된
미학이 테크놀로지 아트의 핵심을 설파하고 있기에 이 작품은
많은 평론가들로부터 비디오 아트의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아
왔다. 서양의 과학기술과 동양의 명상 세계가 접목되어 있는 이
작품에서 우리는 그 둘의 세계가 서로의 이질성에 대한 담론을
나누며 서로의 정체성 확인에 몰두해 있는 상황을 발견하게 된다.
심오한 명상의 세계마저 테크놀로지로 재현할 수 있으며, 반대로
차가운 테크놀로지가 인간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쾌하게
증명해 주는 작품이다.

 

 

 

 


, 1975(2000)
TV 부처와 동일한 개념에서 구성된 작품이나, 일정 거리를 두고
TV와 마주한 채 나르시즘적 명상에 빠져 있는 부처와는 달리
이 작품은 소형 워치맨 TV위에 앉아 TV 프로그램을 보고있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주인공이다.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을 형상화한 <지옥의 문>에 등장하는 이 인물은 지옥의
심판관인 미노스나 단테 혹은 로댕 자신으로 비유되기도 하며
한걸음 더 나아가 사유하는 인간의 보편적인 형상으로 인식되어
왔다. 서구적 인간형의 한 모델로 선택된 <생각하는 사람>은
동양의 부처가 자기 자신을 화두로 끝없는 명상의 세계에 몰두해
있는 것과는 달리 현실의 반영인 TV 프로그램을 바라보며
고통스러운 사유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 특별히 추가된 이 작품은 기존에 출품된 TV 부처와
좋은 대조를 보여 주며 동시에 국내 유일의 로댕 작품 상설관인
로댕갤러리의 작품들과 백남준의 로댕 해석을 비교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백남준의 삶과 예술] 플럭서스



이제 백남준의 예술을 좀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백남준 예술의 중심을 이루어온 플럭서스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1960년대의 백남준을 과격한 전위예술가로 묘사할 때마다 플럭서스라는 말이 심심찮게 등장하였다. 플럭서스는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백남준의 예술을 가꾸어준 정신적 지주이면서 그의 저항적 예술행위를 체질화시켰던 저력의 근원이었다. 백남준 예술철학의 중심에 언제나 자리잡고 있는 플럭서스를 이해하지 않고는 결국 백남준의 비디오예술이나 행위예술 퍼포먼스 행위음악 등은 한낱 관객에게 유희나 충격, 또는 쇼맨십 정도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플럭서스는 그만큼 백남준 예술의 핵심이며 또 비디오예술의 탄생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다다이즘 철학 계승▼

플럭서스 예술가들은 이름만 들어도 그 집단의 개성을 금방 이해할 만큼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들이다. 만능 예술가로 불려온 조셉 보이즈가 그러하고 플럭서스의 창시자인 조지 마치우나스, 그리고 앨런 카프로우, 앨런 긴즈버그, 라몬트 영, 조지 브레히트, 벤저민 패터슨, 트리샤 브라운, 오노 요코, 벤 보티에, 앨리슨 놀즈, 토마스 슈미트, 볼프 포스텔, 조나스 메카스가 그러하다. 그리고 역사상 최초의 극작가 대통령으로 불리는 체코의 바츨라브 하벨과 구 소련으로부터의 독립 이후 리투아니아의 초대 대통령이 된 비타우타스 란즈베르기스가 플럭서스 멤버였다는 사실은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플럭서스는 20세기초 다다운동처럼 기이하고 우발적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매우 난해하다. 다다운동과 1960년대 플럭서스 사이의 유사한 관계는 미국의 조지 마치우나스가 플럭서스를 ‘네오 다다’라고 언급한데서 잘 나타난다. 플럭서스가 다다이즘의 철학을 받아들였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플럭서스의 철학은 무엇일까. 마치우나스는 플럭서스의 존재이유에 대해 “고급예술이 지나치게 많다. 그래서 우리는 플럭서스를 한다”로 설명하였다. 이 말 속에는 플럭서스가 반 고급예술을 위한 실천집단처럼 묘사되고 있다. 적어도 플럭서스는 고급예술을 지양하고 대중적 예술행동과 강령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전달된다. 그런가 하면 플럭서스의 대표적 이론가인 토마스 켈라인은 “플럭서스는 도대체 예술인가, 아니면 수수께끼인가? 플럭서스는 포스트모더니즘인가”라고 반문하면서 플럭서스의 정체에 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사인 거부 상품성 배격▼

20세기초 다다 예술가들이 마치 미치광이 집단으로 인식되었던 것처럼 플럭서스도 그 정체에 관한 논란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다이즘이 예술이 된 것처럼 플럭서스도 오늘날 중요한 예술경향임은 물론이다. 백남준은 플럭서스 운동의 창립멤버이며 오늘날에도 플럭서스 이야기만 나오면 떠나간 연인이 되돌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제 정신이 아닐 만큼 애정이 가득하다. 플럭서스 없는 백남준은 가히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플럭서스란 라틴어로 ‘흐름’이란 뜻을 갖고 있다. 미국의 건축가였던 조지 마치우나스가 발행한 잡지 ‘플럭서스’로부터 이름이 그대로 차용되었으며 1962년 창설이후 ‘플럭서스그룹’ 또는 ‘플럭서스 예술가’ ‘플럭서스 운동’ 등으로 묘사되었다.

플럭서스 예술은 의외성을 수반하는 다양한 퍼포먼스와 함께 플럭서스식의 글쓰기, 그리고 예술의 상품성을 거부하기 위하여 작품에 사인을 거부하는 행동 등으로 유명하다. 가령 이 연재의 초반에 소개하였던 백남준의 격렬하고도 전위적인 행위예술은 거의가 플럭서스 퍼포먼스였다. 또 플럭서스 예술가들의 사인 없는 장난감 같은 오브제들은 예술의 상품화를 철저히 배격하기 위하여 재미로 손쉽게 만들어 전시하였는데 이는 엄청난 가격을 지닌채 거창한 의미를 담고 있는듯이 보이는 미술품들을 조롱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백남준의 플럭서스식 글쓰기 내용을 한 토막 읽어보기로 하자.

“내가 만든 텔레비전은 항상 재미있는 것도 아니지만 항상 재미없는 것도 아니다. 자연이 아름다운 것은 자연이 항상 아름답게 변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변하기 때문인 것처럼. 내 텔레비전에서 질(quality)이란 말은 가치(value)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개성(character)을 의미한다. A가 B와 다르다는 것이 A가 B보다 낫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빨간 사과가 필요하지만 가끔 빨간 입술도 필요하다.”


▼행동주의 정신 실천▼

그렇다면 플럭서스가 추구하던 본질적인 미학은 무엇이었을까. 플럭서스 창시자인 조지 마치우나스는 독일의 시인이며 플럭서스 예술가인 토마스 슈미트에게 쓴 편지에서 “우리가 예술을 한답시고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로부터 이탈한다면 우리의 행동은 모든 의미를 잃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이 사회와 행동을 같이 하여 새로운 물결이 될 것이다. 또 다른 다다클럽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처럼, 플럭서스는 인간정신을 현혹시키고 소비하는 것에 중지신호를 보내는, 이를테면 반미학적인 것이다. 따라서 플럭서스는 이 사회에 기능하지 않는 상품으로서의 예술품을 명백히 반대한다. 플럭서스는 예술가의 에고를 촉진시키는 수단으로서의 예술에 반대하는, 그리고 에고를 촉진시키는 전문집단이 아닌 반 전문집단이다”고 밝히고 있다.

그의 플럭서스 철학이 더욱 명백하게 나타나는 것은 프랑스의 플럭서스 작가 벤 보티에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조에 달한다. “그대의 에고를 가능한 한 억제하고 제거하라. 작품에 사인을 하지 말라. 아무 것도 그대의 탓으로 돌리지 말라. 탈 개성화하라. 그대를 탈 유럽화하라.”


이러한 강령들 때문에 플럭서스 자체 내에서도 반발이 뒤따랐지만 궁극적으로 이들은 무정부적이고 탈 자본주의적 속성을 유지한 플럭서스의 철학에 따라 마치우나스의 의견을 수용하였다.
플럭서스 에술가들은 화가 음악가 무용가 시인 건축가 영화제작자 행위예술가 등 다양한 예술영역에서 참여하였기 때문에 플럭서스를 특정 예술경향으로 분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럭서스는 특유의 자유로운 표현과 행동주의로 예술의 속성을 한층 다양하고 재미있게 유도한 예술형식이다.

 

특히 비디오예술의 초기 선구자인 백남준을 비롯하여 볼프 포스텔, 조지 브레히트가 모두 플럭서스 초기 멤버였다는 사실은 비디오가 가지고 있는 반 제도권적이고 반모더니즘적인 속성을 플럭서스에서 이식해온 증거이다.
이용우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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