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ralless
어떻게 여기까지 운전을 하고 왔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온 메시지 한 통을 확인하기 전까지만 해도 지용의 주말은 나름대로 평화로웠다. 평소처럼 샤워를 하고 즐겨듣는 클래식을 틀어놓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던 그에게 날아온 것은 평화로운 주말을, 아니 평화로운 그의 생활을 나락으로 떨어트리기 충분한 내용의 동영상이었다. 몇 달 전 사고의 진실이 담긴 블랙박스 영상. 이미 김 과장이 죄를 덮어쓰고 마무리가 지어진 사건이었지만 만약 이 영상이 바깥으로 공개 된다면 그 동안 후계 자리를 잇기 위해 노력했던 제 모든 세월이 물거품이 되어버릴 게 분명했다. 지용은 발신 번호로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단조로운 통화 연결음을 들으며 기다리는 잠깐의 시간도 초조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메시지를 보낸 주인공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는 세상이 무너진다는 말의 의미를 체감하게 되었다.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이름보다 골드문 최 실장이라는 직함으로 더 많이 불리는 승현이었다. 골드문은 계열사까지 갖춘 어엿한 상장 기업이었지만 지용은 여전히 그들을 깡패질을 하는 대부업체 쯤으로 여겼다. 재범파, 제일파, 북대문파 등 잔뼈 굵은 3개의 조직 파벌들이 하나로 합병해 세운 회사가 바로 골드문이니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제 아무리 고급 양복을 입고, 칼 대신 서류 더미를 들고, 폭력 대신 회의를 하며 회사원 흉내를 내어도 그들의 본질은 조폭이었고 하는 일도 조폭과 다를 바 없었다. 때문에 지용은 그들을 경멸했다.
최근 몇 년 사이 골드문은 로비를 통해 정계나 법조계 쪽으로도 인맥을 넓히고, 귀찮은 일들을 몇 번 손봐주며 대기업들과 연을 이어가기도 했다. 그의 회사인 무한 그룹도 예외는 아니었다. 비정규직 해고 건으로 골머리를 썩이던 아버지는 골드문의 은밀한 도움을 받은 후부터는 본격적으로 골드문과의 사업을 추진했다. 그리고 골드문과의 비즈니스는 대부분 무한 상사의 전무인 지용이 맡게 되었다.
“이게 지금 제안서예요? 그 쪽 회사엔 머리 쓰는 분들은 없나 봐요. 비즈니스를 몸으로 하는 분들이라 서류가 낯선가?”
“아이고, 죄송하게 됐습니다 권 전무님. 지가 검토를 잘 했어야 하는디 요즘 쪼까 바빠서. 으떤 점이 마음에 안 드는지 말씀해주시믄 아래 애들 시켜서 얼른 고치라고 하겠습니다잉.”
“어떤 점이 잘못인지도 모르는 게 가장 큰 문제인 것 같은데요. 이렇게 해서는 정 이사님이 말씀하시는 비즈니스 하겠습니까?”
며칠 전까지만 해도 지용은 골드문 회의실에서 그들의 수장인 정청 이사를 조롱하며 비난했었다. 자신들의 형님인 청이 샐쭉샐쭉 웃으며 분위기를 풀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직급이 직급인지라 전무인 지용에게 아무 말도 못하고 눈알만 부라리며 씩씩대던 청의 수하들이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났다. 그리고 그 중심엔 승현이 있었다. 그는 괜한 트집을 잡아 자신들을 욕하고 천대하는 타 기업 어린 전무의 행태를 보면서도 다른 사람들처럼 얼굴을 붉히거나 입모양으로 욕을 중얼대거나 하진 않았다. 시종일관 아무런 표정 하나 없이 삐딱한 자세로 앉아있는 지용을 뚫어져라 보고만 있었다.
지용은 처음부터 승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사인 청마저 제 앞에선 유들유들하게 굴며 비위를 맞추는데 제깟 게 뭐라고 저렇게 뻣뻣해?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승현의 앞에서 갑의 횡포를 두어번 가량 부렸을 때, 청은 능글맞은 얼굴로 술을 따라주며 지용을 달랬었다.
“전무님, 내가 문제 하나 낼까요? 주먹을 존나게 잘 쓰는 새끼랑 대굴빡을 존나 잘 굴리는 새끼랑 둘이 붙으면 누가 이길 거 같소? 영 모르겄죠? 그럼 주먹이나 대가리 중 하나만 잘 쓰는 새끼랑 주먹이랑 대가리 둘 다 잘 쓰는 새끼랑 붙으면? 이건 쉽죠잉? 근데 그 두 개를 다 잘하기가 씨빠, 조온나 힘들어. 근데 우리 최 실장 저 새끼는 주먹도 잘 쓰고 대가리도 아주 그냥 이거야 이거.”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 나보고 최 실장 앞에서 몸이라도 사리라고요?”
“우와아, 우리 전무님 역시 배운 사람이라 이해력이 빨러. 아아, 칭찬이에요오. 똑똑하다구.”
“이런 말을 대체 왜 하는 건데요?”
“내가 우리 전무님 좋아하니까 그러지. 권 전무님, 나는요 파이팅 넘치는 사람을 겁나게 좋아혀요. 그러니께 충고 해드리는 거예요. 최 실장 빡돌면 솔직히 나도 못 말려, 저 개새끼 존나 무섭거든 씨바.”
“.........”
“그니까아, 우리 전무님이 맴 좀 너르게 쓰셔서 우리 최 실장 이삐게 좀 봐줘요잉? 서로 피 보지 말구, 응? 우리 잘 혀봐요오? 악수, 악수!”
물론 그 날의 지용은 저를 향해 내밀어진 커다란 청의 손을 단칼에 쳐냈지만. 그 때부터 승현은 청과 지용이 만나는 날이면 기를 쓰고 지용의 앞에 나타났다. 저승사자처럼 싸늘한 낯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그가 거슬려 남 몰래 뒷조사를 해본 적도 있었다. 승현은 청이 자성 다음으로 가장 아끼고 믿는 수하이자 골드문의 실질적인 핵심 세력 중 한 명이었다. xx 교도소에서 1년 2개월 복역. 그러나 그에 관한 정보는 달랑 저것 한 줄이었다.
“전무님은 지금처럼 떳떳하게 사셔야 될 겁니다.”
회사일로 받는 스트레스를 청에게 모두 풀어내고 회의실을 나가던 날, 등 뒤에서 들렸던 섬뜩한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했다.
“그 고고한 자존심 계속 지키고 싶다면.”
협박으로 흘려들었던 승현의 경고를 무시하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골드문과 엮이지 말았어야 했다. 그는 승현이 전화로 불러준 주소로 운전해서 가는 내내 지난 날 제가 저질렀던 실수를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 * *
느긋한 자세로 손님을 기다리던 승현은 예상했던 것보다 조금 더 빨리 열린 문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단장할 시간도 없었는지 지용은 손질하지 않은 머리와 홈웨어 차림이었다. 많이 급하긴 했나봐. 승현은 초조함이 잔뜩 묻어있는 전무의 앳된 얼굴을 훑었다.
“기어와.”
어디서부터 어떻게 딜을 해야 할까? 이 영상은 언제, 어떻게 손에 얻은 거지? 머릿속으로 풀리지 않는 의문점을 되짚던 지용은 부자연스럽게 얼어붙은 공기를 단번에 깨트리는 낮은 음성에 제 귀를 의심했다.
“뭐라구요?”
“거기서부터, 여기까지.”
“.........”
“기어오라고.”
말문이 막힌다는 게 이런 거구나. 장난기 하나 없는 그의 태도에 대꾸할 말을 잃어버렸다. 지용은 그 자리에 멈춰선 채, 바쁘게 움직이는 승현의 손가락을 지켜보았다. 당황한 그와 달리 최 실장은 너무나도 여유롭게 지포라이터로 손장난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잔대가리 굴리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
“.........”
“5분 후에. 제일 먼저 네 아버지한테 이 영상 보낼 생각이야.”
최 실장은 말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었고, 정 이사처럼 실없는 농담을 던지는 캐릭터는 더더욱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말이 없는 축에 속했다. 필요한 말만 짧고 굵게, 쓸 데 없는 열 마디의 말 대신 정확한 행동으로. 그게 골드문의 최 실장이 비교적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높은 직책에서 청을 보좌하고 있는 이유였다.
“싫어?”
승현은 미동 않는 지용을 보며 한 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동네 양아치도 아니고.”
“..........”
“유치하게 노네.”
아까부터 승현이 내뱉는 반말이 짜증날 정도로 신경을 긁어댔다. 지지 않으려 입술을 앙다문 지용은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제 자존심부터 꺾고 보려는 그의 의도가 뻔히 보였다. 그는 애써 태연한 얼굴을 하고 승현이 있는 곳까지 기어갔다. 이건 명백한 기싸움이었다. 승현은 다리를 꼬고 앉아 제 발 앞까지 기어온 지용을 내려다보았다.
“누가 일어서래?”
“아악!”
몸을 일으키려는 지용의 허벅지를 꽉 짓밟은 승현이 상체를 앞으로 숙여 눈높이를 맞췄다.
“비즈니스 하러 온 새끼가 위아래도 구분 못 해?”
지용은 냉정한 남자의 태도에 본능적으로 자신이 원하던 방향의 거래는 성사되지 않을 거란 걸 직감했다.
“그 쪽은 이런 행위를 비즈니스라고 부르나보죠?”
“우린 원래 비즈니스 몸으로 해. 어디 하나 자르거나, 아예 공사 치거나. 몰랐어?”
“나한테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멍청하게 굴지 말고 말 예쁘게 하자.”
“.........”
“무사히 여기서 나가고 싶으면 그만 까불라고. 귀한 얼굴에 상처 내고 싶은 거 지금도 겨우 참고 있으니까.”
오만한 얼굴로 명령한 승현은 테이블 위에 놓인 USB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뭐, 진짜 양아치 짓은 전무님이 하셨던데.”
“.........”
“이거 세상에 단 하나뿐인 원본 파일이야. 복사본 같은 거 없고.”
“원하는 게 뭐예요?”
승현은 여전히 지포라이터의 뚜껑을 여닫는 장난을 계속하며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담배를 꺼냈다.
“등가교환.”
“.........”
“이 블랙박스 파일과 바꾸고 싶을 만큼 꼴리는 영상을 지금부터 찍으면 돼. 걱정 마, 법에 걸리는 일은 안 시켜.”
“그게 무슨,”
“이해했으면 되묻지 마. 나 말 많이 하는 거 싫어하니까.”
승현은 하얗게 질려가는 지용의 얼굴을 감상하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스스로 딸 칠 줄은 알지?”
제 중심에 닿은 승현의 시선에 한 번, 노골적이다 못해 저급하기까지 한 질문에 또 한 번. 수치심으로 인해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거 한 대 다 피우기 전에 싸면 여기서 끝내줄게. 카메라는 저기 앞 쪽.”
대단한 아량을 베푼다는 듯한 말투였다. 친절히 카메라 위치까지 잡아준 승현은 삐딱하게 물고 있는 담배 끝에 라이터를 가져다 댔다.
“그럼 지금부터,”
아니지? 농담이지? 지용은 다급한 얼굴로 승현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이냐며 따져 묻고 싶은 충동이 들끓었다. 승현은 당황과 공포로 뒤섞인 지용의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하며 필터를 깊게 빨아들였다.
“시-작.”
(+)
예전에 썰방에 잠깐 썼던 moralless 속 골드문 최실장님과 권전무님을 곱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
다음주도 행복한 한주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