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켈러의 기도' p 159-173 중에서
기도 중의 기도, 주기도문을 말하다
어거스틴과 루터, 칼뱅처럼 기도를 가르친 위대한 스승들은 그 누구도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기도의 논리를 전개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산상수훈의 골간을 이루는 주기도문을 최고의 본보기로 삼아 거기서 무얼 믿고 훈련할지 뽑아냈다.
주기도문 속에 길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풍요로운 기도의 곳간을 여는 열쇠로 이 주기도문을 주셨다.
그런데 그 엄청난 자원이 방치되다시피 하는데는 지극히 익숙하다는 사실도 한 몫하는 듯하다.
어떻게 하면 '익숙함'이라는 치명적인 위험을 피할 수 있을까?
오랜 세월 성찰하고 훈련하면서 주기도문의 깊이를 가늠해 왔던 이 위대한 세 스승의 말을 유념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칼뱅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행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설명한다.
루터도 이 구절은 곧장 하나님과 이야기를 나누려는 의도가 아니라 기도로 진행하기 전에 우선 스스로의 처지를 되새기고 그리스도 안에서 갖게 된 위치를 자각하려는 부름말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고 평안해 하는 믿음을 마음에 심어 주시길" 구하는 것으로 기도를 시작해야 한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루터는 세례를 받은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이름을 지녔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존귀한 이름을 품은 존재로서 선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표하므로 부름을 받은 그 호칭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 선하고 거룩해질 힘을 주시도록 꾸준히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향한 빋음이 온 세상 방방곡곡에 두루 퍼지며 크리스천들이 그리스도를 닮은, 한마디로 거룩한 삶을 살아서 주님을 드높여 드리고 더 많은 이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분의 이름을 부르게 되길 요청하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칼뱅은 "은혜를 짓밟는 행위로 조금이나마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는다면 그만큼 가당찮은 짓이 어디에 있겠는가?"라고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다시 말해서 주께 배은망덕하고 냉담한 태도를 가지면 그분의 이름을 영예롭게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그저 착하게 사는 차원을 넘어 늘 기꺼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며 더 나아가 그 아름다움에 경이감을 품는다는 뜻이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칼뱅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데는 두 가지 경로가 있다고 보았다.
하나는 "정욕을 바로잡아 주시는 성령님"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생각들을 빚어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은 '주권'과 관련한 간구다.
왕이신 하나님이 감정과 욕구, 사상과 헌신을 비롯한 삶의 모든 영역에 왕권을 펼쳐 주시길 구하는 것이다.
루터는 외면적이고 미래적인 관점을 덧댔다.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통치가 부분적으로 드러날 뿐이지만, 장차 다가올 하나님 나라에서는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완전하게 실현될 것이다.
온갖 고통과 상처, 가난과 죽음은 사라진다. 그러므로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기도는 "정의와 평화가 흘러넘치는 미래의 삶을 갈망하는" 간구다.
"앞으로 나타날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이 우리 가운데서 시작하신 나라의 완결과 완성"을 구하는 것이다.
'뜻이 이루어지이다'
루터는 이렇게 풀이했다.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 주셔서 온갖 질병과 가난, 수치와 고통, 역경을 기꺼이 견디며 주님의 거룩한 뜻이 그 가운데서 우리의 뜻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음을 알게 해 주소서"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심을 가슴 깊이 확신하지 않는다면 감히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할 수 없다.
어거스틴은 이런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꿰차고 앉아서 자신에게 해를 입힌 상대에게 복수하려 들게 된다고 했다.
주님께 자신을 드리는 법을 배우고 나서야 비로소 인신공격과 중상모략, 뒤에서 몰래 하는 험담, 다른 이들에게 퍼붓는 저주 따위를 피할 수 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서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하지 못한다면 한줌의 평화조차도 느낄 수 없다.
칼뱅은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한다는 건 어떤 환경이 닥치든 낙담하거나 쓰라린 아픔에 시달리거나 냉담하지 않도록 제 의지뿐 아니라 감정까지도 하나님 뜻에 복종시키는 것을 말한다고 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어거스틴이 여기서 말하는 '일용할 양식'은 사치품이 아니라 생필품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어거스틴은 온전한 기도란 너무 가난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도 말고, 너무 부유해서 주님을 잊어버리지도 않게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라는 잠언 30장 8절처럼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칼뱅은 '하나님의 영광을 떠나는 게 아니라 ...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방편이 되는 것들을 구하라'고 강조한다.
크리스천들은 긍정적인 응답을 기대하며 필요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나오지만, 먼저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그분만을 신뢰하는 마음가짐이 전제되어야 한다.
루터는 이 기도에 사회적인 차원을 더했다.
누구나 빠짐없이 일용할 양식을 얻으려면 경제가 활성화되어야 하고, 취업률이 높아져야 하며, 정의로운 사회가 구현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는 사업과 거래, 노동 시장에서 가난한 이들을 짓밟고 하루하루 끼닛거리를 앗아 가는 악의적인 착취에 대적하는 기도다.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루터는 "누구든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고 남들을 멸시하는 이가 있으면 ... 이 간구와 마주서서 자신을 살피게 하라. 자신이 남보다 나을게 없으며, 누구라도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고 겸손이라는 높이 낮은 문을 지나 용서의 기쁨 가운데로 들어가야 함을 깨달을 것이다."라고 날마다 기도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칼뱅은 "마음에 미워하는 감정을 계속 붙들고 있다면 앙갚음할 궁리를 하거나 어떻게든 해코지할 기회를 골똘히 찾고 있다면, 더 나아가 원수처럼 여기는 상대가 보여 준 호의에 보답해서 거기에 어울리는 온갖 배려를 하려 애쓰지 않는다면 이 기도를 드려 봐야 하나님께 우리 죄를 용서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는 꼴이 될 따름이다."라고 현실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옵고'
어거스틴은 이 간구를 두고 중요한 구분을 지었다. "이는 시험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게 아니라 시험에 끌려들어가선 안 된다는 기도다."
성경은 고난과 환난을 심령의 숱한 불순물들을 '태워 없애서' 더 건강한 자기 인식과 겸손, 참을성과 믿음, 사랑을 갖게 하는 도가니로 풀이한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시험에 들지 않게'는 죄에 굴복할 가능성이란 개념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칼뱅은 '오른편'과 '왼편', 두 범주로 나누어 시험을 열거한다.
오른편에서 오는 시험은 '부, 권력, 명예' 따위로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죄에 빠지게 몰아가는 유혹이다.
왼편에서 오는 시험은 '가난, 수치, 멸시, 고통'처럼 절망하게 하고, 소망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하고, 분노에 차서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리게 만드는 시험이다.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원문은 '악마에게서 구하시옵소서'라도 번역할 수 있다.
루터는 이를 두고 '악한 나라에서 뿜어 나오는 구체적인 폐해 ... 가난, 수치, 죽음 ... 한마디로 우리를 위협하는 모든 것들에 맞서는 기도'라고 썼다.
어거스틴은 내면에 잔존하는 악에서 구해 주시길 간청하는게 여섯 번째 간구라면, 일곱번째는 외부의 악, 곧 세상의 사악한 세력, 특히 호시탐참 해칠 기회를 노리는 적들로부터 보호해 주시길 구하는 기도라고 해석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칼뱅은 '라틴어 판에 없는' 문절임을 알면서도 여기에 두는 게 지극히 타당하므로 제외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믿었다.
크리스천은 결핍과 역경, 한계 따위에 깊이 들어갔었지만 마침내 하나님이 온전히 채워 주신다는 진리로 되돌아오게 마련이다.
세상의 그 무엇도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사랑이 많으신 하늘 아버지의 손에서 낚아챌 수 없음을 기억하고 평온한 안식으로 수렴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