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37-100)
Flavius Josephus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37-100)의 역사적 예수에 대한 증언
비기독교인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그의 책 {유대인 고대사}(Antiquities, 18권3장3절)에서 예수의 역사성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이 시대에 예수라고 불리는 현인이 있었다. 그의 행실은 선하였고, 그의 학식은 뛰어난 것이었다. 그리고 유대인들과 다른 나라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제자가 되었다. 빌라도는 그를 정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의 제자가 되었던 자들은 그의 제자 되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지 삼일만에 그들에게 나타났고, 그가 살아났다고 보도하였다. 따라서 그는 아마도 선지자들이 놀라움으로 자세하게 말했던 메시아였을 것이다. 그리고 소위 그의 이름을 따서 그리스도인으로 불렸던 그리스도인들 족속은 오늘날까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At this time there was a wise man who was called Jesus. And his conduct was good and his learning outstanding. And many people from among the Jews and the other nations became his disciples. Pilate condemned him to be crucified and to die. And those who had become his disciples did not abandon their discipleship. They reported that he had appeared to them three days after the crucifixion and that he was alive; accordingly, he was perhaps the Messiah, concerning whom the prophets have recounted wonders. And the tribe of the Christians, so called after him, has still to this day not disappeared. --translation of Shlomo Pines.
또 요세푸스는{유대인 고대사}(Antiquities, 20권9장1절)에서 야고보의 형제 예수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을 남겼다.
'그와 같은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아나누스는 베스도가 죽었고, 알비나스가 아직도 오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호기를 맞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산헤드린의 판관들을 소집하였고, 그들 앞에 그리스도라 불리는 자인 예수의 형제 야고보와 어떤 다른 자들을 불러내어 율법을 범한 자들로 고소하고, 그들에게 돌로 치는 형벌을 받게 하였다.'
. . . . Possessed of such a character, Ananus thought that he had a favourable opportunity because Festus was dead and Albinas was still on the way. And so he convened the judges of the Sanhedrin, and brought before them the brother of Jesus, the one called Christ, whose name was James, and certain others, and accusing them of having transgressed the law delivered them up to be stoned. . . .
--trans. Louis Feldman.
요세푸스(37-100) 그는 누구인가?
요세푸스는 이 땅에 교회가 세워진지 7년만인 37년에 태어났다. 외가 쪽으로 하스몬가의 혈통을 타고 태어났고, 히브리어 이름은 요셉 벤 마티티야후였다. 요세푸스는 제사장과 율법학자들조차 그를 찾아와 도움을 구할 정도로 율법에 능통했다. 26세에 유대인 대표단의 일원으로 로마에 건너갈만큼 헬라어 실력도 뛰어났다.
66년 열심당원들이 로마에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키자 그는 갈릴리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전투 중 그는 갈릴리의 요타파타에서 로마군에 포위되었다. 그와 함께 동굴에 숨어있던 동료들은 로마인의 포로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자결을 결심하였다. 이때 유대인들은 요세푸스의 제안으로 먼저 제비에 뽑힌 사람이 다음에 뽑힌 사람에게 살해당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 제비뽑기에서 요세푸스는 최후까지 살아남은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요세푸스는 남은 다른 사람을 설득하여 로마군에 투항하였다.
로마군에 투항한 요세푸스는 로마군 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에게 그가 머지않아 로마제국의 황제가 될 것임을 예언하였고, 실제로 베스파시아누스는 68년 네로의 자살이후 부하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고, 유대인과의 전쟁은 그의 아들 티투스에 의해서 70년에 마무리되었다. 요세푸스는 이들 부자를 도와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한 공을 인정받아 로마로 건너가 플라비우스라는 황제가문의 이름까지 얻고 황제의 보호아래 남은 여생을 보냈다.
요세푸스는 전쟁이 끝난 뒤 75년경에 {유대인 전쟁사}를 기록하여 후세에 남겼다. 그리고 20년 후에는 유대인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는 로마인들을 위해 인간의 창조부터 네로 황제 때까지의 역사인 {유대인 고대사}를 저술하였다. 그 외에도 요세푸스는 {자서전}과 {아피온 반박문}을 남겼다.
요세푸스는 이스라엘이 멸망하던 1세기 당시 이스라엘의 유일한 역사가였기 때문에 구약성경이후 이스라엘의 역사는 요세푸스의 기록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이런 업적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유대인으로부터는 배신자라는 모욕을 감수해야만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요세푸스의 저작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의 손에 의해 보존되어 왔다
요세푸스의 예수
1세기 로마-유대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글의 현존하는 사본은 예수와 기독교의 기원에 대한 참조를 포함한다[Feldman & Hata 1987, p.54–57; Flavius Josephus & Maier 1995, p.284–285]. 기원후 93-94년 (마르코 복음이 처음으로 알려진 기원후 70년의 약 25년 후) 부근에 기록된 요세푸스의 유대인의 고대는[Pagels & Helms 1995], 18권과 20권에서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조 및 18권에 세례자 요한에 대한 참조를 포함한다[Feldman & Hata 1987, 54–57; Flavius Josephus & Maier 1995, p.12].
○ 역사적 예수가 기록된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 3장의 전장 내용
요세푸스는 유대고대사 18권에서 본디오 빌라도의 유대총독 재임시절(AD 26~37)에 있었던 사건들과 연관해서 예수를 언급하였다
요세푸스의 기록에는 예수뿐 아니라 예수의 동생 야고보, 세례요한까지 신약성경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요세푸스의 기록이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는 측면에서 신뢰성이 높은 평가를 받는다는 점에서 예수에 대한 증거도 역사적 인물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 유대고대사 18권(32년간) 1장
– 케사르는 로마 원로원 의원인 키레니우스 (Cyrenius)를 유대인들의 세금 징수를 위해 수리아에 파견
– 세금부과에 반대하여 가말라 (Gamala)에 사는 유다스 (Judas)가 바리새인 사둑과 함께 반역을 선동
– 유대인의 철학종파 사두개파, 바리새파, 엔센파에 이어 유다스와 사둑이 새로은 4번째 철학체계 도입
* 유대고대사 18권(32년간) 2장 : 본디오 빌라도 유대총독으로 부임
– 헤롯과 필립이 케사르(가이사 또는 옥타비아누스)를 기념하기 위해 여러 도시들을 건설한 경위, 가이사는 로마 황제의 칭호이다
1. 케사르가 악티움 전투(BC 31)에서 안토니를 무찌르고 승리한 지 제37년째가 되던 해(AD 6)에 키레니우스는 아켈라오의 재산을 처분하고 세금부과의 건을 매듭짓고 난 후, 백성들이 선택해 세웠던 대제사장 요아사르(Joazar)를 대제사장직에서 해임시키고 셋(Seth)의 아들 아나누스(Ananus)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다.
헤롯과 필립은 각기 그들의 분봉국(tetrarchy)를 차지하고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였다.
헤롯은 전 갈릴리 지역의 요충지인 세포리스 시를 성벽을 쌓아 요새화하여 분봉국의 중심도시로 만들었다.
헤롯은 또한 베타람프타 시도 성벽을 쌓아 요새화한 후 황제의 아내인 이름을 본따 율리아스(Julias)라고 이름 지웠다.
필립도 요단강 근원지에 도시를 건설하고 가이사랴로 불렀다.
그는 또한 게네사렛 호숫가에 위치한 벳새다 마을을 주민의 수로나 그 밖의 점에서 시로서의 면목을 갖추도록 만든 후에 케사르의 딸의 이름을 본떠서 율리아스라고 명명했다.
2. 코포니우스는 키레니우스와 함께 케사르의 명을 받고 유대 총독으로 보냄을 받았다.
코포니우스가 총독으로 유대를 통치하고 있을 때 아래와 같은 사건이 발생했다.
유대인들이 유월절이라고 부르는 무교절에 제사장들은 밤 12시가 지나면 바로 성전 문을 여는 것이 일종의 관습이었다.
그런데 성전문이 열리자마자 몇몇 사마리아인들이 몰래 예루살렘에 잠입하여 죽은 사람들의 시체들을 성전 회랑에 던져 놓고 도망을 쳤다.
이로 인해 유대인들은 그후로 사마리아인들이 성전에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이런 일이 일어 난 후 코포니우스는 로마로 돌아가고 마르쿠스 암비비우스가 후임 총독으로 부임하였다.
그가 총독으로 있을 때에 헤롯 왕의 여동생인 살로메가 세상을 떠났다.
살로메는 유언으로 얌니아와 그 인근 전지역과 파사엘리스 평지를 케사르의 아내 율리아에게 주었으며 아르겔라우스에겍는 종려나무 대농장-최고급 열매가 맺히는-을 남겨 주었다.
그 후 마르쿠스 암비비우스의 후임으로 안니우스 루푸스가 총독으로 부임하였다
그가 유대 총독으로 재임하는 동안에 케사르 즉 로마의 두번째 황제가 새상을 떠났다.
케사르의 재위기간은 모두 57년 6개월 2일간이었다.
(이 기간 중 안토니우스와의 공동 통치기간은 14년이었으며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가 죽자 율리아의 소생인 티베리우스 네로가 뒤를 이었다.
티베리우스 네로는 제 3대 황제가 되었다.
그는 안니우스 루푸스 후임으로 발레리우스 그라투스를 유대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발레리우스 그라투스는 아나누스를 대제사장직에서 해임시키고 파비의 아들 이스마엘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이스마엘을 대제사장직에서 해임시키고 아나누스의 아들 엘루아살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엘루아살도 1년 만에 대제사장직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 후 그라투스는 카미투스의 아들 시몬에게 대제사장직을 주었다.
그러나 시몬도 1년이 채 못 되어 대제사장직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요셉 가야바가 후임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마태26:57)
그라투스는 11년 동안 유대를 통치하다가 로마로 돌아갔다.
이에 본디오 빌라도가 후임 총독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 유대고대사 18권(32년간) 3장 : 유대인의 반역과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가 기록된 3장은 모두 5개파트로 나누어져 있다.
1파트 : 케사르의 우상 사건
2파트 : 유대인의 반역과 살해(누가 13:1~2)
3파트 :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4파트 : 로마 이시스 신전에서 일어난 추잡한 사건
5파트 :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추방된 사건
– 1파트 : 케사르의 우상 사건
유대 총독 빌라도는 유대 율법을 말살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겨울 진영으로 삼고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군대를 이동시켰다.
빌라도는 또한 상(Image)을 만드는 것조차도 금하는 유대 율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케사르의 상이 그려진 깃발을 들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전임 총독들은 유대 율법이 우상을 금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상이 그려지지 않은 깃발을 들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했었다.
따라서 이런 상을 예루살렘에 가지고 들어온 것은 빌라도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이 일이 밤에 일어났기에 유대인들은 처음에 몰랐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이 사실을 알고 떼를 지어 가이사랴로 몰려가서 에루살렘으로부터 케사르의 상을 제거해 달라고 여러 날 빌라도에게 간청하였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것이 케사르에게 욕이 된다는 이유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이에 유대인들도 물러서지 않고 계속 간정하였다.
6일째 되는 날 빌라도는 병사들에게 은밀히 무기를 소지하고 자기가 지시하는 대로 따르라고 명령하였다.
빌라도는 6일때 되는 말 재판석에 나와 앉았다
그는 병사들을 숨길 수 있도록 도시의 공터에 재판석을 만들어 놓았었다.
유대인들이 다시 간청을 하려고 나타나자 빌라도는 신호를 보내 병사들로 하여금 유대인들을 에워싸게 하고는 곧장 지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괴롭히면 죽음을 면키 어려울 것이라고 위협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땅에 엎드려 목을 길게 빼고는 율법을 범하느니 차라리 달게 죽겠다고 말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율법을 지키려는 굳은 결의에 크게 감동하여 즉시 케사르의 상을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옮겨 오라고 지시하였다.
– 2파트 : 유대인의 반역과 살해(누가 13:1~2)
빌라도는 거룩한 돈(Sacred momey)을 사용해서 200퍼얼롱 떨어진 곳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물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일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빌라도가 그 일을 즉시 중단해야 한다고 떠들어 대기 시작하였다.
이에 일부 사람들은 군중들이 모이면 흔히 하는 것처럼 빌라도에게 욕설을 퍼붓고 비난을 하기도 하였다
이에 빌라도는 많은 병사들을 유대인 복장으로 변장시키고 단검을 옷 속에 숨기에 한 후에 유대인들이 모이는 곳에 잠입시켰다.
그리고 빌라도는 몸소 나서 유대인들에게 해산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비난을 퍼붓자 빌라도가 약속한 신호를 병사들에게 보냈다.
병사들은 빌라도가 명령한 것보다 더 가혹하게 행동하여 거기에 있던 사람들을 한 사람도 살려두려고 하지 않았다.
무방비 상태였던 수많은 유대인들이 살해당했고 일부는 부상당한채로 도망을 쳤다.
이렇게 해서 반역이 진압되었다.
(이 사건은 누가 13장 1~2절에 나온다)
– 3파트 :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한편 바로 이때 예수라는 지혜로운 사람 – 너무나 신기한 일들을 많이 행했기 때문에 인간이라고 볼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인간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면 -이 있었다.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쁜 마음으로 진리를 받아 들일 수 있게 만드는 선생이었다.
그는 수많은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도 그의 곁으로 끌어들였다.
그가 바로 그리스도였다.
빌라도가 유대인의 유력 인사들의 청에 의해 그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했으나 그를 처음부터 사랑하던 자들은 그를 버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그에 관해 예언한 대로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서 그들에게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이뿐 아니라 그에 관해서 수많은 놀라운 일들을 예언했었다.
그의 이름을 본따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
– 4파트 : 로마 이시스 신전에서 일어난 추잡한 사건
또 다른 슬픈 재난으로 유대인들이 극심한 혼란에 빠지게 된 것은 그로부터 얼마 후였다.
이때 로마에 있는 이시스의 신전에서도 수치스러운 일이 발생하였다.
이시스의 신전에서 일어난 추잡한 죄악에 대해서 먼저 살펴본 다음에 유대인들이 당한 재난도 살펴보도록 하자.
로마에는 파울리나란 한 여인이 살고 있었다.
그 여인은 명문 출신으로 정숙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명성이 매우 드높았다.
또한 그 여인은 매우 큰 부자였다.
게다가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였으며 세상을 즐기려는 한창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정숙한 삶을 살았다.
파울리나는 모든 면에서 결코 자기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는 사투르니누스와 결혼하였다.
그런데 고위 기사단(equestrian order, 고대 로마에서 기병대를 구성하는 사람들로 특별한 권리를 가진 시민자들) 단원인 데키우스 문두스가 파울리나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파울리나는 선물 따위로 환심을 살 수 있는 그런 여인이 아니었다.
이에 데키우스 문두스는 많은 선물을 보냈으나 그 때마다 거절을 당하였다.
그러자 문두스는 오히려 그녀를 더욱 사랑하게 되어 하루밤만 같이 지내게 해주면 200,000아틱 드라크마를 주겠다고 제의했다.
그럼에도 파울리나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파울리나의 거절에 상심한 문두스는 음식을 전폐하고 굶어 죽기로 작정하였다.
이에 문두스는 자기 생각을 즉시 실행에 옮겼다.
그런데 문두스에게는 그의 부친이 해방시킨 이데(Ide)라는 여자 하인이 하나 있었다.
이데는 남을 해하는 일을 꾸미는 데 남다른 재주가 있는 여인이었다.
이데는 문두스가 계획한 것을 알고 문두스를 찾아가 위로하면서 파울리나와 하룻밤 지낼 수 있는 묘책이 있다고 했다.
이에 문두스가 귀가 솔깃해지자 이데는 50,000드라크를 주면 파울리나를 올가미에 잡아 넣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데는 문두스를 설득하여 50,000 드라크마를 손에 넣었다.
이데는 파울리나가 돈에 넘어갈 여자가 결코 아님을 잘 알고 있었기에 문두스처럼 돈으로 유혹하는 방법을 쓰지 않았다.
그대신 이데는 파울리나가 이시스 여신을 열성으로 섬긴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이용하기로 했다.
이데는 이시스(Isis)를 섬기는 몇몇 제사장들을 찾아가 능란한 말솜씨와 돈으로 그들을 유혹하였다.
그들에게 25,000드라크마를 주면서 일이 성공하기만 하면 25,000드라크마를 더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데는 문두스가 파울리나를 미칠 정도로 사랑하고 있으니 어떻게 해서든지 파울리나를 속여서 문두스가 하룻밤을 같이 지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시스의 제사장들은 돈에 눈이 어두워져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나이가 많은 제사장은 즉시 파울리나를 찾아가 은밀히 할 얘기가 있다고 했다.
파울리나가 말해 보라고 하자 제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누비스 신의 명을 받고 이렇게 오게 된 것입니다.
아누비스 신께서 그대를 사랑하시어 그대를 불러 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에 파울리나는 제사장의 말을 호의로 받아들였으며 아누비스 신이 황공스럽게도 그런 은혜를 자기에게 베푼 것에 대해 무척 만족스러워했다.
그래서 파울리나는 남편에게 아누비스 신이 함께 식사를 나누고 동침하자는 내용의 전갈을 보냈다고 말했다.
이에 남편은 그동안 아내의 정절에 크게 만족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고 허락했다.
마침내 파울리나는 신전으로 갔다.
식사가 끝나고 잘 시간이 되자 제사장은 신전의 모든 문을 닫았다.
성소의 불도 모두 꺼졌다.
그리고 제사드리는 동안 그를 신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문두스가 나와 파울리나와 동침을 했다.
문두스는 이런 계략을 전혀 모르는 다른 제사장들이 눈치채기 전에 일찍 사라졌다.
한편 파울리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일찍 남편에게로 돌아가 아누비스 신이 그녀에게 나타났었다고 말했다.
친구들에게도 그 누가 아누비스 신에게 이보다 더 큰 은혜를 입을 수 있겠느냐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친구들은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반신반의하면서 파울리나의 신분과 정절을 생각하면 믿지 않을수도 없어서 놀라워했다.
이런 일이 있은지 3일째 되는 날 문두스는 파울리나를 만나자 이렇게 말했다.
“오 파울리나여, 그대는 200,000드리크마를 벌 수도 있었는데 안타깝소.
그러나 어쨌든 그대 덕분에 나는 200,000드라크마를 쓰지 않게 되어 기쁘오.
또한 내가 찾아갔을 때 나를 극진히 섬겨 주어 고맙기 그지 없소.
그대가 문두스라는 이름에 그동안 먹칠을 해왔으나 이름이 무슨 상관이 있소.
실제로는 내가 그대를 안고 즐긴 것을 알고 있지 않소?
내가 아누비스 신의 행세를 하고 그대를 내 품에 안은 것을”
문두스는 이렇게 말하고는 가버렸다.
파울리나는 그때야 비로서 자기가 얼마나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는가를 깨닫게 되었다.
파울리나는 옷을 찢고 남편에게 모든 사실을 알린 후 이번 일을 모른체 하지 말고 제발 자기를 도와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남편인 사투리니누스는 이 사실을 황제에게 알렸다.
티베리우스 네로 황제는 제사장들을 심문하여 사실을 밝혀내고, 제사장들은 물론 흉계를 꾸민 이데를 십자가에 처형시켰다.
황제는 또한 이시스 신전을 파괴하고 이시스 여신의 상을 티베르 강에 던져 넣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황제는 문두스를 단지 추방만 시켰다.
문두스가 사랑에 눈이 어두워 멋모르고 지은 죄라는 이유였다.
이시스 신전과 이시스 신의 제사장들이 저지른 죄악은 이와 같이 추잡했다.
이제는 앞서 언급했던 대로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일어난 일을 살펴보도록 하자.
– 5파트 : 유대인들이 로마에게서 추방된 사건
한 유대인이 율법을 범한 죄로 고소를 당하자 벌을 받을까 무서워 로마로 도망쳤다.
그는 어디로 보나 사악한 사람이었다.
그는 로마에 거주하면서 사람들에게 모세의 율법의 지혜를 가르친다고 떠벌이고 다녔다.
또한 성품이 악한 세사람을 공모자로 끌어들였다.
그는 유대종교를 신봉하는 매우 지체 높은 부인 풀비아(Fulvia)를 감언 이설로 꼬여 자주색 옷감과 금을 예루살렘 성전에 보내게 한 다음 그것을 중간에서 가로체는 방식으로 돈을 벌었다.
풀비아의 남편 사투루니누스는 자세한 내막을 황제에게 알렸다.
이에 티베리우스 황제는 사실을 자세히 조사한 연후에 모든 유대인들을 로마 밖으로 추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집정관들은 유대인 중에서 4,000명을 뽑아 사르디니아 섬으로 보내는 한편 조상 전래의 율법을 지키기 위해 병사가 되기를 거절하는 수많은 유대인들을 처벌하였다.
이같이 단 4명의 범죄로 모든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추방당하는 불행을 겪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