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그리스도 구원의 은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리라"
이 설교는 아담의 후손으로 죄인 된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고 동행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거쳐야 할 단계가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특히 죄인의 회개와 성도의 회개의 차이, 영혼의 구원과 생활 속에서의 구원에 대하여 잘 설명해 줍니다.
1. 신앙생활의 단계
신앙생활에는 몇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죄인 된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을 갖고 동행하기 위해서는 몇몇 가지 과정을 거쳐야 되기 때문입니다.
①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발견함. ② 죄를 깨닫고 긍휼을 바라며 회개함. ③ 죄 사함의 복음을 듣고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됨. ④ 거듭난 사람이 죄를 범하여 어두움에 거함. ⑤ 의인이 죄를 자백하고 뉘우쳐 돌이킴. |
편의상 번호로 구분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악을 발견하는 것이 가장 먼저이므로 그것을 ①번 단계로 정할 수 있습니다.(①번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발견함.)
제 1단계는 ①번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상관없이 죄를 짓고 살던 사람이 “아,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구나!” 하는 깨달음을 가지는 것이 신앙생활의 첫 단계라는 것입니다.
병자가 병을 깨닫지 못하면 의사와 아무 상관이 없듯이, 죄인이 죄를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과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제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하고 회개하는 단계입니다. 즉, 죄인이 자신의 죄를 깨달아 통회하며 자복하는 단계입니다. (②번 죄를 깨닫고 긍휼을 바라며 회개함.)
제2단계 ②번 죄를 깨닫고 긍휼을 바라며 회개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단계만으로도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큰 오산(誤算)입니다. 만일 이 단계에서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면 굳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셔야 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③번 단계가 필요합니다.
③번 단계는 복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죽으셨는지를 깨달아, 자신의 모든 죄를 흰 눈같이 깨끗하게 씻는 단계입니다. (③번 죄 사함의 복음을 듣고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됨.)
제3단계 ③번 죄 사함의 복음을 듣고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즉, 죄인에서 의인으로, 심판에서 영생으로,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옮겨지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 죄 사함과 구원과 거듭남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상관없는 죄인(일반 불신영혼)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①번 단계에서 시작하여 ②번 단계를 거쳐 ③번 단계에까지 이르러야 됩니다. 만일 이 중에 어느 것 하나라도 빠진다면 온전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몰라 행위의 법에 매인 세리나 창기와 똑같은 죄인들이었지만, 자신들의 죄를 깨닫지 못함으로 회개하지 않았기에 여전히 죄인으로 있다가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①번 단계에도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판 죄로 인해 괴로워하며 대제사장에게 은 30냥을 돌려주었지만, 스스로 정죄하고 자살했지, 하나님 앞에 나아와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그 죄를 씻지는 않았습니다. 그 역시 복음과 주의 사랑을 전혀 알지 못하여 ①번 단계까지 밖에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
사도행전 18장에 등장하는 아볼로는 회개의 단계까지만 알았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웠기 때문에 성경에 능한 자였지만, 죄인들을 회개시키는 요한의 세례까지만 알 따름이었습니다. 그래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회당에서 설교하던 그를 불러내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함으로 ③번 단계로 인도했습니다. (③번 죄 사함의 복음을 듣고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됨.)
그때부터 아볼로는 훌륭한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는데, ③번 단계에 이르게 되면 누구라도 하나님과 귀한 사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즉, ③번 단계는 하나님의 능력과 복을 입는 믿음의 시작 단계입니다.
2. 거듭난 후에 죄를 범하면
그러나 ③번 단계에(③번 죄 사함의 복음을 듣고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됨.) 이르러 모든 죄를 눈처럼 희게 씻음 받은 의인이 되었다고 해서 그때부터 죄를 짓지 않고 온전한 삶을 사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모든 죄를 용서받았지만 육신이 변화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구원을 받아 죄가 없는 의인이 되었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는 의미이지, 죄를 짓지 않는 완벽한 인간이 되었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③번 단계에 이르러 의인이 된 사람이라도 얼마든지 범죄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빛 가운데서 살아야만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만일 복음을 깨달아 의인으로 거듭난 사람이 죄를 지으면 어떻게 됩니까?
죄를 지었으니까 다시 죄인으로 되돌아갑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③번 단계에 있던 의인이 죄를 지어 어두움 가운데 거하면 그 다음 단계로 진행되는 것이지, ①번 단계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거듭난 사람이 죄를 범함으로 어두움 가운데 거하는 그때가 바로 ④번 단계입니다. (④번 거듭난 사람이 죄를 범하여 어두움에 거함.)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어두움 가운데 있는 사람과는 절대로 사귐을 가질 수 없습니다.
제4단계 ④번 거듭난 사람이 죄를 범하여 어두움에 거하게 됩니다.
그래서 죄 사함을 받아 의인이 된 사람이 연약한 육신으로 인해 죄를 짓고 어두움 가운데 행하면 하나님과 정상적인 사귐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없다면, 당연히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도 살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두움 가운데 거하는 의인이 다시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 어두움에서 빠져나오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 과정이 바로 의인이 자신을 어두움으로 이끈 죄를 자백하는 과정으로 ⑤번 단계라는 것입니다. 즉, ⑤번 단계 역시 하나님 앞에 죄를 자백하고 뉘우쳐 돌이키는 단계라는 것입니다. (⑤번 의인이 죄를 자백하고 뉘우쳐 돌이킴.)
제5단계 ⑤번 의인이 죄를 자백하고 뉘우쳐 돌이켜야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죄인이 행하는 ②번 단계의 회개와 의인이 행하는 ⑤번 단계의 회개를 잘 분별하지 못해 혼동하고 있습니다.
또한, 죄인의 상태인 ①번 단계와 의인이 어두움에 빠진 ④번 단계 사이에도 명백한 차이가 있지만, 이것도 잘 분별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많은 오해가 발생하므로 이 부분에 대한 명확한 구분이 필요합니다.
3. 죄인의 회개와 성도의 회개
먼저 ①번 단계와 ④번 단계의 차이점을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①번 단계는 본래 죄인의 상태이므로 하나님께서 재판관으로 계시지만, ④번 단계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의인이 죄에 빠진 것이므로 하나님은 여전히 아버지로 계십니다.
재판관과 죄인의 관계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전혀 다릅니다.
재판관은 범한 죄에 상당한 형벌을 죄인에게 내리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잘못에 대해 징계만 내릴 뿐입니다.
재판관은 벌을 주기 위해 심판하는 것이고, 아버지는 사랑하기 때문에 매를 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죄인이 죄를 지으면 재판관은 법대로 가차 없이 벌을 내리지만, 아들이 죄를 지으면 아버지는 아들과의 사귐을 회복하기 위해 징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①번 단계의 죄인에게는 하나님께서 재판관의 입장에서 대하시므로 지옥에 보내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상태에서 죄에 빠진 ④번 단계의 사람은, 하나님이 아버지의 입장에서 대하시므로 징계를 내리시는 것입니다.
즉, ①번 단계의 사람은 근본 하나님과 원수 관계에 있지만, ④번 단계의 사람은 잠시 하나님과 멀어진 것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①번 단계의 죄인이 죄를 뉘우치는 목적과 ④번 단계의 의인이 죄를 뉘우치는 목적은 서로 다릅니다. ①번 단계의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한 것이고, ④번 단계의 사람은 하나님과의 사귐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①번 단계의 죄인을 ③번 단계인 의인의 상태로 만들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4. 하나님과의 사귐
요한 1서를 통해 이 부분을 좀 더 이야기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 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요일 1:2)
여기서 영원한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여 전했는데, 그들이 한 일은 ①번 단계의 죄인을 ③번 단계의 의인으로 이끈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한 목적에 대해서 요한 1서는 이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함이라.(요일 1:3)
즉,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한 것은, 죄인들이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를 통해, 죄인은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임을 증거 했는데, 원수 된 죄인이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과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 되어야 비로소 하나님과 함께 푸른 초장을 거니는 사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①번 단계에서 ③번 단계로 옮겨진 사람에게는 하나님과의 사귐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사귐의 문제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요일 1:5)
하나님은 빛이시므로 어두움이 조금도 없는, 지극히 거룩하신 분입니다. 거룩이란 단어는 어두움과 구별된다는 의미이므로, 하나님은 당신과 같이 거룩한 사람과만 함께하시며 사귐을 가지실 수 있습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
그런데 하나님과 같이 거룩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함을 얻는 길뿐입니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10)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만 거룩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된 사람은 비로소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데, 문제는 하나님은 어두움에 빠질 수 없는 거룩하신 분이지만, 인간은 거룩함을 얻어 거룩한 자가 되었어도 연약한 육신 때문에 다시 어두움에 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행위로는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룩해진 사람이 어두움에 거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때 거룩하신 하나님은 그와 함께하실 수 없고, 그는 하나님과 멀어진 상태에 처합니다.
이것은 ①번 단계의 죄인이 하나님과 등져 있는 상태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거룩함을 입은 의인은 어두움에 빠져 하나님과의 사귐이 끊어졌을지라도 그 어두움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다시 사귐이 회복되지만, ①번 단계인 죄인이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려면 ②번 단계를 거쳐 ③번 단계인 복음을 받아들여야 되기 때문입니다.
5. 영혼의 구원과 생활 속에서의 구원
그런데 요한 1서 1장은 ①번 단계에 있는 죄인이 ③번 단계까지 와서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는 것이 아닌, ④번 단계에 있는 의인이 ⑤번 단계로 옮겨와 하나님과 사귐을 회복하는 부분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②번 단계에서의 회개와 ⑤번 단계의 회개는 똑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차원이 서로 다릅니다.
구원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1)
여기에 등장하는 구원은 ①번 단계의 죄인이 죄에서 건짐을 받아 ③번 단계의 의인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여기서의 구원은 ③번 단계의 의인이 생활 속에서 거룩한 삶을 사는 것, 곧 성화(聖化)된 삶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마태복음 1장에 등장하는 구원은 죄에서 건짐을 받는 것을 의미하며, 빌립보서 2장에 등장하는 구원은 죄악 된 생활에서 건짐을 받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구원과 생활의 구원은 다릅니다.
영혼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되어 지고, 생활의 구원은 죄에 대한 자백으로 되어 집니다. 이처럼 ②번 단계의 회개와 ⑤번 단계의 회개도 구분할 수 있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갈릴리에서 전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등장하는 이 회개는, 죄인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행해야 되는 ②번 단계의 회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 2:5)
그러나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보내진 편지에 나오는 이 회개는 하나님과의 사귐을 회복하기 위해서 행해야 되는 ⑤번 단계의 회개입니다.
이 ⑤번 단계의 회개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그 부분을 중점적으로 설명한 말씀이 바로 요한 1서 1장 7절부터 10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리라.(요일 1:7~10)
6. 다윗의 자백
하나님과의 사귐과 죄에 대한 자백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다윗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사무엘 하 11장에는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을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랫동안 하나님과 동행했던 다윗이 간음이라는 죄를 범함으로 어두움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더욱이 다윗은 그 죄를 감추기 위해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를 죽이는 죄까지 범합니다. 그러나 그는 ①번 단계의 죄인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하나님을 마음에 모셨기 때문에 ③번 단계에서 ④번 단계로 추락한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혹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마음에 모신 사람이 어떻게 그런 무서운 죄를 범할 수 있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할지 모르지만, 시편 51편의 다윗의 기도를 보면, 다윗은 분명히 하나님을 마음에 모신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들도 어느 순간에 사단의(육신의) 이끌림을 받아 가장 더럽고 악한 모습으로 드러납니다.(시51:3-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항상 주님을 의지한 자였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시 51:10~12)
그는 자기 속에 있던 주의 성신을 거두지 말기를 하나님께 구했고,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다시 말해, 다윗은 주의 성신을 이미 모신 자였고, 구원의 즐거움을 이미 맛보았던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다윗이 죄를 범함으로 어두움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필요한 것은 ②번 단계의 회개가 아닌, ⑤번 단계의 회개입니다.
다윗의 기도를 보십시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그는 자신이 근본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육신을 입고 있음을 고백했고, 하나님과의 사귐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소원했습니다.
즉, 그는 ⑤번 단계의 회개를 한 것입니다. 다윗은 이 회개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다시 사귐을 가질 수 있었는데, 회개하기 전까지는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어두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동침한 후에도, 그것을 죄로 여기지 않아 하나님 앞에 들고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죄를 죄로 여기지 않을 때는 어두움에 거하는 때이고, 하나님과 멀어진 상태입니다.
그는 얼마 후 밧세바가 잉태했다는 소식을 알려오자, 또 다른 어두움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전쟁터에 나가 있던 우리아를 불러 들여, 집으로 보내 그 아내 밧세바와 동침케 함으로 자신의 죄를 가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궤계를 꾸민 것 자체가 다윗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않고 어두움 가운데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충실한 군사였던 우리아가 자기 혼자서는 집에서 쉴 수 없다고 극구 사양했기에 다윗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더욱 무서운 궤계를 꾸며, 마침내 우리아가 적의 손에 죽게 했습니다. 그때 다른 군사들도 함께 죽었는데, 다윗은 자신의 죄를 숨기는 일을 성공한 것에 대해 만족해하며
전혀 가책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어두움에 깊이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냥 내어버려 두셨다면 그는 더욱 더 깊은 어두움 속으로 빠져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의 죄를 적발해 내셨습니다. 그것은 다윗을 벌하기 위함이 아니라, 다윗과의 사귐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예리한 책망을 받고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었고, 크게 회개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사귐을 다시 가질 수 있었습니다.
7. 자백을 통한 교제의 회복
하나님의 마음과 합한 사람이었으면서도 간음을 행했던 다윗처럼, 성령을 마음에 영접하여 거룩하게 된 사람일지라도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해도 육신이 약하여 그렇게 되는 것인데, 어쨌든 죄를 범하면 어두움에 거하게 되므로 하나님과는 사귐이 끊어집니다.
그때 필요한 것이 바로 자신의 죄를 죄로 여기며 자백하는 ⑤번 단계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요일 1:6)
즉 밧세바와 동침하고 우리아를 죽인 다윗이, 만일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ꡑ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임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할 것이요(요일 1:7)
다윗이 빛 가운데 행할 때는 하나님과 사귐이 있었는데, 어두움에 거함으로 그 사귐이 끊어졌습니다. 그가 어떻게 해서 하나님과 다시 사귐을 가질 수 있었습니까? 자신의 죄를 숨기려고 애쓸 때 그는 계속 어두움에 빠져 들었습니다.
그런데 나단 선지자가 와서 그 죄를 들추어내고 책망하자 마침내 다윗이 죄를 자백했고, 하나님과의 사귐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엡 5:13)
범죄 한 사람은 책망을 받고 그 죄가 빛으로 나타나야만, 회개의 과정을 거쳐 하나님과 사귐을 다시 가질 수 있습니다.
의인으로서 죄를 짓지 않는 것이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고, 죄를 범한 의인이라도 책망을 받아 죄가 드러남으로 회개하는 것도 빛 가운데 행하는 것입니다.
그때 그 아들 예수의 피가 회개한 의인을 그 모든 악한 행실에서 깨끗케 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①번 단계의 죄인을 ③번 단계의 의인으로 옮기기도 하지만, ③번 단계의 의인을 거룩한 삶으로 이끌기도 합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는 구원을 받고, 그 고기로는 양식을 삼아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힘을 얻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은 의인으로, 의인은 성화된 삶으로 이끄는 능력이시라는 것입니다.
8. 목욕한 자의 발 씻음
어쨌든 신앙생활은 지금까지 언급한 대로 ①번 죄인의 단계, ②번 회개의 단계, ③번 복음을 깨달아 의인이 되는 단계, ④번 의인이 죄를 범한 단계, ⑤번 회개함으로 하나님과의 사귐을 회복하는 단계 순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순서를 거치지 않고 ①번 죄인의 단계에서 바로 ⑤번 회개의 단계로 넘어가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려고 애를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집을 지을 때 기초를 놓은 후 바로 지붕을 얹으려는 태도로, 신앙의 단계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서 비롯된 오류라는 것입니다.
혹 어떤 사람은 요한복음 13장에 나오는 예수님과 베드로와의 대화를 통해, 목욕한 자가 발 씻는 비유를 들어 이 오류를 변호하는데, 그것은 더욱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자신의 발을 씻기려는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 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목욕한 자는 발만 씻으면 된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미 목욕한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모든 죄를 사함 받고 거룩해진 의인을 말하는 것으로, 의인은 죄를 짓더라도 발만 더러워지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사귐만 끊어질 뿐이지, 다시 온 몸이 더러운 죄인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범한 의인은, 발을 씻듯 사귐을 갖기 위한 자백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즉, 발을 씻는 것과 같은 회개는 이미 목욕한 자, 곧 의인만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③번 단계의 의인이 아닌, 목욕을 하지 않아 온 몸이 더러운 ①번 단계의 죄인이면서도 발을 씻는 ⑤번 단계의 회개를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①번 단계의 죄인은 ⑤번 단계의 회개를 아무리 해도 결코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천국은 ②번 단계의 회개를 거쳐 ③번 단계에 이른 사람만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9.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속에 있지 아니하리라" (요일1:8-9)
여기서 우리가 라는 단어의 뜻은 그때 당시 모두 구원받은 성도들, 곧 ③번 단계에 이른 의인들을 두고 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 역시 만일 ④번 단계에 있는 죄 사함 받고 구원받은 의인이 자신의 입으로 죄 없다. 고 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임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다윗은 4번 단계의 의인이었습니다. (④번 거듭난 사람이 죄를 범하여 어두움에 거함.) 그러나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고 우리야를 죽이는 삶속에서의 죄를 지었습니다. 만약 그가 죄 없다. 라고 하면 자신을 스스로 속이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 요한일서 에서 죄 없다.는 말은 ....잘못된 믿음으로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기 때문에 나는 죄를 짓지 않는다. 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죄 없다."고 자신을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상태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원래 복음에서 선포하는 죄 없다.라는 이 말씀은 ①번 단계의 죄인이 ③번 단계의 의인이 되어 이제 나는 예수님의 보혈로 의인이 되었다. 나는 모든 죄를 사함 받아 죄가 없다. 라고 복음적인 십자가의 구원 차원으로서의 이야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요한일서 1장 8절의 죄 없다.라는 이 말씀은 ①번 단계의 죄인이 ③번 단계의 의인이 되어 이제 나는 예수님의 보혈로 의인이 되었다. 나는 모든 죄를 사함 받아 죄가 없다. 라고 복음적인 십자가의 구원 차원으로서의 이야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 1서에 등장하는 우리는 그때 당시 모두 구원받은 성도들, 곧 ③번 단계에 이른 의인들을 두고 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요일1:8절 본문의 죄 없다. 는 말은 예수님께 죄 사함을 받아 거룩한 의인이 되어 죄가 없다. 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고 구원받아 믿음으로 자유 함을 얻어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매일 삶속에서 연약한 육신을 통해 나타나는 허물을 계속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 당시의 구원받은 성도들 중 "예수님을 믿으면 거룩하고 의로운 자가 되어 죄를 전혀 짓지 않는다."는 잘못된 믿음 관을 경계하기 위해서 요일1:8절에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라는 말씀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정확히 어떤 자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긍휼의 은혜로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받아 의롭고 거룩한 백성으로 인치심을 받았지만 세상육신에 의해서 우리가 태어났고, 세상아래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고, 우리 육신은 항상 세상에 길들여져 반응하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주님을 믿어 거듭난 백성이 되었다 할지라도 매일 매일의 삶속에 한 번도 죄를 짓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아니 우리의 삶은 그 자체가 죄악 된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를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을 믿고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새 언약의 은혜의 법으로 너 의롭다 라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은혜의 약속을 잘못 받아들여 믿음이 행위로 둔갑시켜버리는 잘못된 신앙사상이 생겨났습니다. 예수 믿어서 의롭게 되었는데 의로운 믿음의 성도답게 살아야 된다는 다시금 율법적 행위로 되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의로운 일을 해야 하며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물론 여기까지는 거듭난 성도들에게 향한 권면이니까 성도들이 들어야 할 내용이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복음서나 서신 서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앙적 삶을 권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앞서도 얘기했다시피 거듭난 자라도 육신의 옷을 입고 있는 이상 그렇게 살수 없기 때문에 신앙을 갖고서도 죄가 또다시 드러나고 이 죄를 용서 받으려면 다시금 회개해야 한다는 그 주장이 행위주의에 빠진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무가치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죄 값에 대한 잘못된 해석입니다.)
*히6:5-6
- 하나님의 선한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여기에서는 다시금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달라는 회개의 기도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이미 하나님의 세계를 경험한 자들은(구원받은 자) 다시금 회개하여 새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자백하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금 회복하는 단계를 말합니다.
그 사실은 바로 히6:1-6에서 정확하게 말하지 않습니까?
-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지라.
이 말씀은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다시금 죄와 허물로 인해 처음부터 되돌아가는 것에 대한 위험을 경고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신앙을 마음으로가 아닌 지식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지식이 아니라 기쁨과 누림입니다. 한번 복음을 통해서 들은 이 생명의 말씀은 영원히 우리삶속에 신앙과 믿음의 능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자들은 이것을 마음으로 제대로 받아들여지지가 않아서 끊임없이 계속 이론과 지식으로 쌓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회개, 부활, 안수, 세례, 심판 등등은...) 우리가 배우고 알아서 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죄악 중에 신음하여 고통으로 울부짖을 때 우리의 연약함을 보시고 이미 주님께서 다 이루어 놓으신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받아들여서 나도 주님과 함께 장사 지냈다.라는 은혜의 경험을 하였다면 두 번 다시 이런 부분에 자꾸 매여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특히 회개부분은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고 거듭나서도 매일 삶속에서 죄를 짓는다고 해서 다시금 원래 자연인처럼 또다시 회개해 버리는 어리 섞음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회개는 이미 사해놓으신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앙의 모습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회개의 단회성을 가지고 기독교인중 잘못 오해하여 우리주님이 죄와 사망을 영원히 깨뜨리셨기 때문에 이런 사실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는 이후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범죄에 대해서는 주님께서 다 해결 하셨으니라. 고 하여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영지주의적인 한 모습이 나타나게 되고 말았습니다.
만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신이 예수를 믿어 죄를 전혀 짓지 않으며 죄의 생각도 나지 않는다고 하면 그는 틀림없이 진리가 없는 사람, 곧 구원을 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성경 요일1:8절은 이것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구원을 확실히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주안에서 새 언약의 믿음의 은혜의 법으로 죄 없는 의인이 되었다. 말은 하지만, 결코 죄를 짓지 않는 의인이 되었다. 고는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에서 오해를 가장 많이 하는데, 그것은 의인이라는 단어의 개념을 혼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의인이라는 말이 두 가지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전혀 죄를 짓지 않은 의인이고, 또 다른 하나는, 죄는 범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죄 사함을 받은 의인입니다.
전자(前者)의 의인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지만,
후자(後者)의 의인(믿음으로 죄 사함 받은 의인)은 성경에 많이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이 전자(前者)와 같은 예수님과 같은 의인(죄도 모르고 죄를 아예 짓지 않는 의인)이 되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 1서 1장 8절에 등장하는 죄 없다. 는 말은 이미 구원받은 백성이 죄를 죄로 여기지 않거나 죄를 짓지 않는 의인으로서 죄 없다.(범죄행위를 말함)고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지 세상불신 사람들이 어느 날 주의 복음으로 긍휼하심을 입고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죄를 사함 받아 의인으로 거듭난 사람으로서 죄 없다.고 믿는 사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뒤에 나오는 말씀이 이 부분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리라.(요일 1:9,10)
여기에 말씀하는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 는 말은 믿고 거듭난 사람이 나는 죄짓지 않았다라고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분명히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10. 성도의 빛 된 삶
요한이 요한 1서 1장 말씀을 기록한 이유를 통해서도 이 부분을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 2:1)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 즉, 요한 1서 1장 말씀이 기록된 이유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죄를 범치 않게 하기 위하여서입니다. 죄를 범하면 어두움에 거하게 되고, 어두움에 거하면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며,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면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참된 신앙생활은 반드시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되어 집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어떤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죄를 범함으로 어두움 속에서 방황하는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빛 된 삶을 살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기록했던 것입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대언자가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하나님 우편에서 모든 성도들의 변호를 맡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면, 연약한 육신으로 인해 죄 가운데 빠지더라도 마땅히 그분의 이름을 의지하여 죄를 자백함으로 말미암아 그 어두움에서 벗어나, 다시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복된 삶을 살아야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