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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고종과 민비의 매관매직으로 망했다

작성자kenny|작성시간26.06.10|조회수26 목록 댓글 0

조선왕조가 망한 진짜이유는 26대왕인 고종과 민비의 매관매직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매관매직과 비정상적인 국가 운영이 조선의 국력을 회복 불가능하게 망가뜨려 조선 멸망의 가장 결정적인 내부적 원인이 되었다는 점은 현대 역사학계에서도 깊이 동의하는 정설이다.

 

나는 관광객을 안내하면서 향원정은 잘 소개하지 않는다. 향원정 뒤에 있는 건물인 건청전에서 민비가 일본자객에게 살해 당한 비극의 장소인 것도 그 이유이지만, 향원정과 건청전 등의 건물이 고종과 민비가 매관매직으로 축재한 돈으로 지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향원정은 유교의 극기복례 원칙에도 벗어나기도 하지만, 조선왕조, 치욕적 한국역사를 상징하는 건물이다.

 

1. 고종은 43년의 재위 기간 동안 한성판윤을 무려 429~435명가량 임명했습니다. 이들의 평균 재임 기간은 한 달 남짓에 불과했으며, 역사의 기록들이 지적하듯 이는 당시 정권의 극심한 부패와 매관매직이 만연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극단적인 관직 회전율: 한성판윤은 오늘날의 서울특별시장이나 장관급에 해당하는 정2품의 최고위직입니다. 

고종 재위 기간 동안 400명이 넘는 판윤이 임명되었다는 것은 벼슬자리가 자주 바뀌었다는 의미로, 짧게는 며칠 만에 교체되는 경우도 허다했습니다.

 

1). 매관매직의 성행: 고종과 명성황후 등 왕실과 민씨 척족은 정치 자금과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관직을 팔았습니다. 

 

매관매직 기록에 따르면 돈을 더 많이 내는 사람에게 관직을 주다 보니, 부임 도중에 자리를 빼앗기는 일도 비일비재했습니다. 

 

2). 사라진 인사 시스템: 과거제를 근간으로 한 관료 체제가 무너지고 오직 돈에 의해 관직이 결정되면서 국가 재정 악화와 망국의 주요 원인이 되었습니다.

 

3). 고종과 명성황후(민비)의 매관매직은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 관찰사와 군수·현감 등 목민관(수령) 자리에 훨씬 더 대규모로, 조직적으로 행해졌습니다. 

 

당시 영재 황현이 저술한 매천야록 등의 기록을 통해 전해지는 구체적인 사례와 실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지방 관직별 구체적인 ‘매관 시세’

명성황후는 아들 순종의 무병장수를 빌기 위해 팔도강산을 돌며 굿을 하고 제사를 지내는 등 막대한 

사치를 부려 왕실 재정을 탕진했습니다. 이를 메우기 위해 민씨 척족의 실세인 이조판서 민규호에게 지방 수령 자리에 공식 가격표를 매기도록 지시했습니다. 

 

지방 관찰사(감사): 10만 냥 ~ 20만 냥 (현재 가치 수십억 원 상당)

 

일등 고을 수령(군수 등): 5만 냥 이상

민규호는 매관매직을 막아보려고 당초 1만 냥짜리 자리를 2만 냥으로 배나 올려 보고했으나, 오히려 사려는 지원자가 구름처럼 몰려들었습니다. 

 

(2). 황당한 지방 매관매직 실제 사례

돈을 더 낸 사람에게 당일 가로채기: 어떤 자가 5만 냥을 바치고 고을 사또 자리를 얻어 임지로 가던 중, 감기에 걸려 며칠 누워 있었습니다. 그 사이 다른 사람이 10만 냥을 바치고 같은 관직을 새

로 사는 바람에, 먼저 돈을 낸 사람은 임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관직을 빼앗겼습니다. 

 

황제에게 직접 바친 경주군수 자리: 밀양의 부자 박병인은 고종에게 직접 35만 냥이라는 거금을 바치고 경주군수 자리를 받았습니다. 고종은 더 많은 뇌물을 받기 위해 수령들을 몇 달 만에 계속 교체했습니다. 

 

왕실 외척도 예외 없는 뇌물: 을사늑약에 항거해 순국한 민영환의 어머니조차 자기 남동생(서상욱)의 관직을 고종에게 수차례 청탁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했습니다. 결국 5만 냥의 뇌물을 바친 후에야 겨우 광양군수 자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일자무식 가마꾼의 초고속 승진: 단지 왕과 왕비의 피란길 가마를 메어주었다는 이유만으로, 글자도 모르는 일자무식 가마꾼들에게 전라병사와 낙안군수 같은 최고 요직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2. 매관매직이 초래한 비극: 동학농민혁명 

지방관 자리를 돈으로 산 탐관오리들은 부임하자마자 본전을 뽑고 왕실에 바친 빚을 갚기 위해 백성들을 가혹하게 수탈(가렴주구)했습니다. 결국 이로 인한 고통을 견디지 못한 전라도 고부 백성들이 폭발하면서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게 되었고, 농민군이 제시한 개혁안에는 언제나 '매관매직 척결'이 제1순위로 포함되었습니다.

 

3. 고종과 민비가 팔아먹은 지방관의 숫자는 너무 많아 파악하기도 어렵다.

고종 재위 기간 동안 매관매직으로 교체되거나 임명된 전체 지방관의 정확한 총숫자는 국가 공식 기록의 누락과 은밀한 거래 특성상 통계로 명확히 산출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한성판윤이 430여 명 바뀐 것처럼 지방관 역시 수시로 교체되었으며, 기록에 따르면 이조판서 민규호가 전국 수령 자리에 공식 가격표를 매긴 이후 수천 명에 달하는 지방 행정관 자리가 돈으로 거래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왜 정확한 숫자를 집계하기 어려운가?

은밀한 비자금 거래: 고종과 민씨 척족은 정부 공식 재정(호조)이 아닌, 왕실의 사적 금고인 내탕금을 채우기 위해 뇌물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승정원일기나 일성록 같은 공식 연대기에는 '돈을 받고 임명했다'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공명첩과 과거 합격증의 남발: 조선 후기에는 이름만 있고 실직이 없는 '공명첩'이나 가짜 과거 합격증인 '공명홍패'까지 대량으로 인쇄해 팔았습니다. 실질적인 행정관 외에 명예직까지 포함하면 그 숫자는 수만 명을 상회합니다. 

 

4. 민비의 미신 숭배가 매관매직을 악화시켰고 조선왕조 붕괴른 가속화시켰다.

명성황후(민비)가 총애하여 궐에 끌어들이고, 왕자나 왕족에게만 내리는 '군(君)'이라는 칭호까지 하사했던 무당의 이름은 진령군(眞靈君)이며, 야사(野史) 등을 통해 전해지는 본명은 박창렬(매천야록 등에는 박씨 혹은 이씨로도 기록)입니다. 

그녀는 단순한 무당을 넘어 정3품 당상관 총순(摠巡)에 임명되는 등 조선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무당 신분으로 군호와 관직을 동시에 받아 국정을 농단한 인물입니다. 

 

1). 진령군이 권력을 잡게 된 계기

임오군란과 예언: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명성황후는 성난 군사들을 피해 충주 장호원으로 피신했습니다. 이때 무당 박씨가 나타나 "몇 월 며칠에 반드시 궁궐로 다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환궁 후 신임: 우연히 그 예언이 정확히 맞아떨어져 명성황후가 무사히 환궁하자, 황후는 그녀를 '신의 딸'로 여기며 극도로 신임하게 되었습니다. 고종 역시 '진실로 영험하다'는 뜻의 '진령군'이라는 파격적인 군호를 내렸습니다. 

 

2). 천문학적인 국고 탕진: 기록에 따르면 굿을 한 번 할 때마다 수만 냥의 돈이 들어갔으며, 세자의 병을 고친다며 금강산 1만 2천 봉우리마다 쌀 한 섬, 돈 천 냥, 무명 한 필씩을 바치게 하여 국가 재정을 완전히 바닥냈습니다.

 

3). 무당의 손에서 좌우된 인사권 (비선실세) 

무당의 양아들이 된 고관대작들: 진령군의 권세가 왕을 능가하자, 출세에 눈이 먼 조병식, 윤영신 등 조정의 내로라하는 고관대작들이 천민 출신인 무당 진령군에게 "어머님"이라 부르며 기어가 양아들(의자)을 자처했습니다. 

 

4). 인사 농단: "어젯밤 진령군이 북묘 사당에서 한 말이 다음 날 아침 어명으로 내려온다"는 말이 돌 정도로 관직 임명이 그녀의 입에서 결정되었습니다. 앞서 언급된 지방관들의 매관매직 역시 진령군의 손을 거친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당시 사헌부 지평이었던 안효제 등이 목숨을 걸고 "요사스러운 무당을 처단하고 국정을 바로잡으라"는 상소를 올렸으나, 고종은 오히려 상소를 올린 신하를 유배 보내며 무당을 끝까지 비호했습니다. 

 

결국 이 비정상적인 권력 구조는 1894년 청일전쟁과 갑오개혁으로 진령군이 체포되어 재산을 몰수당할 때까지 10년 넘게 지속되며 조선의 멸망을 재촉했습니다. 

 

5. 매관매직이 조선 멸망의 '가장 큰 원인'인 이유

지방 수령의 부패와 비정상적인 국가 운영은 다음과 같은 파멸의 연쇄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1). 조세 제도의 완전한 붕괴: 돈을 주고 부임한 관리들은 본전을 뽑기 위해 백성들에게 법적 세금 외에 수십 가지의 부당한 세금을 신설해 뜯어냈습니다(가렴주구). 이로 인해 국가로 들어와야 할 정상적인 세수가 차단되고 국가 재정은 파산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2). 국민의 신뢰 상실과 내분: 국가가 백성을 보호하기는커녕 착취의 주체가 되자, 백성들은 정부를 완전히 불신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동학농민혁명과 같은 거대한 민중 봉기로 이어졌고, 고종 정권은 이를 자국 군대로 진압하지 못해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를 끌어들이는 치명적인 외세 의존 결과를 낳았습니다. 

 

3). 국방력 및 근대화 기회의 상실: 관료 조직이 능력 중심이 아닌 오직 돈으로만 굴러가다 보니, 국가 정책을 추진할 유능한 인재들이 배제되었습니다. 결국 을사늑약과 경술국치라는 국가 위기 상황에서 나라를 지킬 군사력과 외교력을 전혀 갖추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고종과 명성황후 정권의 매관매직은 조선이라는 국가의 내부 면역력을 완전히 무너뜨렸고, 일본이라는 외세의 침략에 저항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국권을 빼앗기는 비극적인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Paul Koo 2026.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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