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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와 믿음

진정한 회개

작성자salt34|작성시간26.06.20|조회수0 목록 댓글 0

◈ 거짓 회개

먼저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회개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피상적인 회개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진정으로 회개하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장 흔한 거짓 회개는, 어려움과 고통 가운데서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괴로워하는 것을 회개로 생각하는 것이다. 단순히 죄를 깨닫는 것이나 양심의 가책 정도를 회개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은 회개가 아니다.

이런 피상적인 회개는 가인과 가룟 유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아벨을 죽인 가인의 죄가 결국 하나님 앞에 드러나 심판을 받게 되자 가인은 이렇게 말하였다.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창4:13).

가인의 말은 “내가 지은 죄는 살인죄에 불과한데, 그것에 대한 심판이 무겁다”라는 불평이다. 즉, 자신의 죄는 인정하지만, 그 지은 죄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만약 가인이 진정으로 회개하였다면,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지를 인정하고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마땅한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간절히 용서를 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가인은 마지못해 자신의 죄를 인정하였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불평하였다. 이런 경우에는 가인이 자신의지를 인정하였다 할지라도 회개한 것이 아니다.

또 하나의 예로, 마태복음 27장 3절을 살펴보자,

“그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룟 유다는 예수를 판 뒤에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고는 목매어 자살하였다. 가좃 유다처럼 단순히 죄를 깨닫는 것은 회개가 아니다. 만약 그가 진정으로 회개하였다면, 단순히 예수님을 판 것에 대해서 뉘우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탐욕과 지금까지 믿음 있는 척하였던 위선과 자신이 지은 수많은 죄를 회개하였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 처하게 되면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 그러나 그러한 고통과 어려움이 사라지고 나면 다시 죄 가운데로 돌아간다. 이러한 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니다.

바로 왕은 하나님께서 우박 재앙을 내리시자 자신의 죄를 고백하였다.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모세와 아론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이번은 내가 범죄하였노라.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나와 나의 백성은 악하도다”(출 9:27)

바로 왕의 고백은 정말로 회개하는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우박 재앙이 그치자 그는 다시 계속 죄를 지었다. 그가 우박재앙 가운데서 고백하였던 것은 단지 어려움을 면하기 위한 일시적이고도 임시적인 회개에 불과한 것이다.

이와같이 어려움으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죄를 고백한 것을 회개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진정한 회개는 죄로부터 떠났다는 증거가 반드시 나타나야 한다.

사울 왕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사무엘상 24장에서 다윗은 사울 왕의 목숨을 취할 수도 있었지만 그를 해치지 않았다. 그러자 사울 왕은 16,17절에서 자신의 불의와 죄를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이후에 또다시 같은 죄를 짓고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내가 오늘 내 생명을 귀하게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 되었도다”(삼상 25:21).

이때에도 사울 왕의 죄의 고백이 마치 회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반복해서 같은 죄를 지었다. 따라서 사울 왕의회개의 고백은 진정성이 결여된 거짓 회개이다.

요한일서 3장 6절은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한다. 즉, 습관적으로 계속 죄를 짓는 사람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요, 거듭나지 않은 자라는 것이다.

헤롯 왕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헤롯 왕은 세례 요한으로부터 자신의 죄에 대한 꾸짖음을 받고 그 죄를 인정하지만, 머뭇거리면서 여전히 죄 가운데 있었다.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일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 (막 6:20)

그러나 헤롯 창이 회개하기를 머뭇거리는 사이에, 불가불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게 되었다. 세례 요한의 책망을 받았지만 죄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죄에 대해서 질책을 받았다 할지라도 정작 그 죄에서 떠나지 않은 것은 회개라고 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회개하였다고 말하지만, 그 회개가 피상적인 경우가 많다. 즉, 자신의 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대충 혹은 피상적으로 수박 겉핥기식의 회개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구체적이지 못하며 일반적이고도 모호한 피상적인 회개는 구원에 이르는 회개가 아니다.

이렇게 피상적으로 회개한 사람들은, 여전히 특정한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지에 대한 부담감 없이 “죄를 용서해 주세요”라는 고백을 반복한다.

성경에서는 이러한 회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에브라임이 여러 민족 가운데에 혼합되니 그는 곧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호 7:8).

뒤집지 않은 전병이란 한쪽만 익고 다른 한쪽은 익지 않은 전병을 말한다. 즉, 죄를 고백하는 일에 있어서 드러난 죄는 고백하지만 은밀히 짓는 지에 대해서는 고백하지 않는 것이다. 구체적이지 못하고 일반적으로 모호하게 죄를 고백하는 것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러한 것은 회개가 아니다.

또한 아직 회개하지 않은 상태로, 회개에 대해서 미온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 즉, 죄로부터 떠나고 변화된 증거가 나타나야 하는데, 확실한 태도를 취하지 않는 경우이다.

요한계시록 3장 15절에 등장하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러하였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그들은 지금까지 지은 죄에 대해서 진정으로 슬퍼하지 않는다. 또한 그들에게는 용서받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갈망도 없다.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 모호한 태도로 슬쩍 넘어가려고 할 뿐, 죄로부터 떠나려는 결단도 없다. 이러한 회개는 구원에 이르는 회개가 아니다.

◈ 진정한 회개

그렇다면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진정한 회개는 무엇인가?

이제 우리는 자신이 이러한 회개를 하였는지를 확인해 보아야 한다.

회개는 성령께서 우리 영혼 위에 일하신 결과로 생산되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래서 구원에 이르는 회개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말씀을 통하여 일어나게 된다.

먼저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죄인들로 하여금 죄를 볼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신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죄가 눈에 보이기 시작하면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즉, 영적으로 깨어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영적으로 깨어나기 전에는 “그의 눈이 아주 멀어” (슥 11:17) 자신의 죄를 볼 수 없다. 그러나 이제 성령께서 그 영혼 위에 역사하심으로써 죄를 보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깨어나는 영혼 위에 성령께서 더욱 강하게 역사하심으로써 그 영혼은 죄에 대해서 슬퍼하게 된다. 그는 자신이 지은 구체적인 죄들로 인하여 슬퍼하게 되는데, 심지어 어려서부터 지은 특정한 죄들까지도 그의 심령을 누르게 된다. 그리하여 그 영혼은 죄에 대해서 부끄러워하고, 죄를 미워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돌이킨 후에 뉘우쳤고 내가 교훈을 받은 후에 내 볼기를 쳤사오니 이는 어렸을 때의 치욕을 지므로 부끄럽고 욕됨이니이다 하도다”(렘 31:19).

그런 사람은 한편으로는 성령께서 죄인들의 죄를 책망하심으로써 죄를 깨닫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죄들이 그 영혼을 누름으로써 그 영혼이 점점 더 낮아지게 된다. 왜냐하면 죄를 깨닫고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데도 여전히 죄를 짓는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은혜는 그 영혼으로 하여금 통회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통회의 과정을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시 33:3-5).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이렇게 죄인은 통회하면서 죄를 고백하고 죄로부터 떠나기 시작한다. 죄를 짓게 하는 친구에게서 떠나고, 세상적인 것에서 떠난다. 이것은 구원에 이르는 진정한 회개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이다.

제2차 영적 대각성의 때에 설교자였던 아사헬 네틀톤은, 죄인들이 거짓되고도 잘못된 회개에 스스로 속지 않게 하고, 영적으로 깨진 죄인들이 온전히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하도록 하기 위하여 진정한 복음적 회개의 성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회개는 죄의 질책을 포함합니다. 죄의 질책 없이는 회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죄의 질책이 강하게 일어나면 죄인들은 자신이 잃어버린 바 된 자라는 사실을 알고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이러한 죄의 질책의 상태에만 있다가는 오히려 그 심령이 이전보다 더 교만해지고 강퍅해질 수 있습니다. 또한 회개는 죄의 고백을 함축합니다. 죄인들은 그 양심의 힘으로 인해 죄를 고백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게 됩니다. 그것이 밤낮으로 계속됩니다. 죄인은 자비를 위해 울부짖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 회개하지 않고 그의 심령이 여전히 교만하거나 고집스럽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회개입니까? 회개는 죄의 질책, 죄의 고백뿐만 아니라 죄를 버리는 것을 포함합니다. 죄인이 죄를 고백했다 할지라도, 자신의 죄로 인하여 그 양심이 심히 괴로웠다 할지라도, 자신의 죄를 버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회개하는 것은 죄를 지독히 미워하고 죄에 대해 슬퍼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구원에 이르는 회개의 과정에서 죄의 책망을 받고 자신의 죄로 인하여 겸손해진 영혼은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한 갈망과 간구를 소유하게 된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그 어떤 행위로도 죄를 씻을 수 없다는 처절함 속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용서를 구한다.

예수림의 비유의 말씀에서 세리가 바로 그러하였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 15:13).

이렇게 처절하게 용서를 갈구하는 중에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죄 용서함을 체험하게 된다. 성경은 죄 용서함을 체험할 때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슥 12:10).

이상의 과정이 구원에 이르는 회개의 과정이다. 이러한 일련의 회개 과정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선택된 백성에게서 일어난다.

그런데 이렇게 진정으로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경험하게 되면, 회개와 함께 즉시 열매가 나타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회개하는 과정에서 성령의 역사(중생)가 강력하게 그 심령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성질을 신적인 성질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하였는지, 안 하였는지는 그 열매로 알 수 있다. 그 열매는 다음과 같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미·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 7:11).

여기에서 바울은 진정한 회개의 증거들을 나열하고 있다. 이것은 과연 구원에 이르는 회개인지 아니면 일시적이거나 거짓된 회개인지를 구별할 수 있는 증거들이다.

먼저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라는 것은 자신의 죄 된 삶을 고치기 위한 간절함을 의미한다.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는 이제 그들이 바울의 가르침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면서 은혜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얼마나 분하게 하며"는 자신이 지은 죄와 어리석음에 대해서 분하게 생각하는 것을 말하는데, 죄에 대한 슬픔보다 더욱 강렬한 성질을 의미한다.

"얼마나 두렵게 하며"는 여전히 동일한 죄에 빠지고 그것을 극복하지 못할 경우에 임할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죄를 범하치 않도록 상당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만드는 성향이다.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는 같은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죄를 미워하면서,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영적 성향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는 성화된 열심이다.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는 스스로를 징계함으로써 자신이 죄를 범하지 않도록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행위를 말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오른쪽 눈이 범죄하면오른쪽 눈을 뽑아 버리는 것과 같은 결심과 행위가 여기에 속한다.

이러한 것들은 진정한 회개의 고백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죄를 벗어 버림으로써 진정으로 회개하였다는 것을 증거하는 효과 혹은 열매들이다. 따라서 회개의 열매로 반드시 나타나야 하는 영적 성향들인 것이다.

이러한 회개의 증거를 살피는 것은 구약에서도 나타난 원리이다. 창세기 44장에는 요셉이 기근으로 인하여 애굽에 양식을 사러 온 자신의 형들을 시험하는 사건이 나온다.

요셉은 자신의 청지기를 시켜서 친동생인 베냐민의 자루에 은잔을 넣어 두었다. 그리고는 베냐민이 그것을 훔친 것으로 간주하여 그를 잡아 두려고 하였다.

물론 이 일이 진행되는 가운데, 요셉의 형인 유다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죄들을 찾아내셨다고 말하면서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였다. 그리고는 베냐민은 물론 자신들도 노예가 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요셉은 말하기를, 베냐민만 종으로 삼겠으니 나머지 형제들은 떠나서 야곱에게로 돌아가라고 하였다(16,17절 참고).

요셉이 이렇게 한 것은 형들이 진정으로 회개하였는지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과거에 형들이 요셉을 팔았던 것과 똑같은 상황을 재현한 것으로, 만약 형들이 자신을 팔았던 것처럼 베냐민을 그대로 두고 자신들의 목숨만 건지기 위해서 떠난다면 회개의 진정성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려고 했던 것이다.

더 나아가서 만약 형들이 베냐민을 애굽에 남겨 두고 다시 아버지 야곱에게로 가서 거짓말로 둘러대거나 핑계를 댄다면, 요셉을 팔아넘기고 야곱에게 요셉이 죽었다고 거짓말했던 과거의 죄를 반복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간주하려고 하였다.

물론 요셉의 이러한 시험에 대해서 유다는 진정한 회개의 증거를 보여 주었다. 더 이상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회개의 열매를 살피면서 회개의 진정성을 시험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제1차 영적 대각성 가운데 일어난 회개들이 진정한 것인지, 아니면 감정적인 것들로서 일시적이거나 흥분적인 것인지를 분별하였다. 회개의 진정성을 살피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부흥인지 아니면 인간들의 감정만을 건드린 “흥분” 인지를 구별한 것이다.

제2차 영적 대각성 때에도 경건한 목회자들은 회개하였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회개의 증거를 철저히 살폈다. 왜냐하면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함에도 불구하고 거짓이 역사하여 많은 영혼들을 속이는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시 두 번째 질문을 하겠다.

“당신은 진정으로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하였는가?”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회개하게 하는 역사가 당신의 영혼 위에 일어났는가? 그리고 진정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의 효과 혹은 열매가 분명하게 나타나는가?

- 당신의 구원을 점검하라

<옮긴글>


[출처] 진정한 회개 (은혜성서교회) | 작성자 사무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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