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세상사는 이야기

신을 사랑한 쟌느-마리 귀용

작성자좋은열매|작성시간26.06.14|조회수8 목록 댓글 0

쟌느-마리 귀용

   1648년 4월 13일에 프랑스의 몽따르지(Montargis)라는 곳에서 한 소녀가 태어났다그녀의 이름은 쟌느 마리 부비에(Jeanne-Marie Bouvier)였다동양에서와 마찬가지로 서양에서도 17세기 후반의 여성의 사회적 상황은 힘겨웠다오직 장남만을 생각하는 어머니 밑에서 가족의 관심에서 배제되었고교육을 전혀 받지 못하였으며 게다가 병약하였다그녀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스스로 나는 나쁜 것들로 이루어진 천 조각 이었습니다”(자서전』 p. 22)라고 고백하고 있는데그 이유는 병약한 건강 때문이었다그녀는 스스로 나는 위험할 정도로 지속적으로 아팠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저녁에 나는 안색이 매우 좋았습니다하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얼굴이 부어 있었고보라색 멍이 여기저기 보였습니다라고 말하는가 하면, “나는 한 때 완전히 장님이 될 것 같았습니다왜냐하면 나의 목에 나의 입술에 그리고 나의 잇몸에 수두로 가득 차 있어서 국물을 삼킬 수도 없었고그 어떤 음식도 심하게 고통 받지 않고서는 먹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내 육체는 마치 나병환자의 그것과 같았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이러한 병약한 육체는 그녀로 하여금 매일을 고통과 함께 살아가도록 하였다그녀는 이미 어린 시절부터 고통을 견디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어린 부비에는 4년 동안이나 수녀원에 맡겨졌는데오히려 그곳에서 나름 훌륭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수녀원에서의 생활은 그녀로 하여금 수녀가 되기를 희망하게 하였다하지만 그의 부모는 그녀가 수녀가 되는 것을 반대하였고거의 강제적으로 결혼을 준비시켰다일종의 법률 조사관이었던 그의 아버지 끌로드 부비에는 자신의 딸을 매우 부자였던 쟈크 귀용(Jacques Guyon)과 정략결혼을 시켰다당시 쟌느는 16세였고 남편이었던 귀용은 무려 22세나 연상인 38세였다결국 이렇게 하여 소녀 쟌느는 귀용부인이 되었다당연히 결혼 생활은 불행할 수밖에 없었다결혼 이후의 그녀의 결혼 생황에서의 십자가는 병약한 육체로 인한 고통 그 이상의 것이었다그 십자가는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것이었다그녀는 후일 결혼 생활 동안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고 고백하였는데그러한 불행한 결혼 생활 중에서도 5명의 자녀를 낳았고그 중 2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이 살아남았다고 전해지고 있다하지만 이러한 고통의 나날들이 그녀에게 모두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그녀는 이러한 일상에서의 고통들을 자신이 져야만 할 십자가로 여겼던 것이다즉 십자가를 지는 것이 곧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그녀는 결혼 생활을 나는 나의 삶의 분야에서 작은 십자가를 하나 더 얻게 되었다라고 고백하였다.

   결혼 생활 2년 차인 18세 되던 해에 프란치스코 수도자였던 아르크앙쥐 앙귀에랑(Archange Enguerrand)을 만났는데그를 통해 쟌느-귀용은 내적인 삶(영적인 삶)’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었다그 수도자는 쟌느-귀용 이 애타게 갈망하고 있는 그 무엇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당신은 당신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을 당신의 바깥에서 찾고 있습니다하느님을 당신의 마음에서 찾고자 하는 것에 습관을 들이십시오그러면 당신은 하느님을 찾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은 마치 번개를 맞은 듯 그녀의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고쟌느 귀용은 이를 감미롭고 깊은 상처결코 치유 받고 싶지 않은 영혼의 상처라고 묘사하고 있다이후 그녀는 자신의 영적인 삶을 위해서 명망 높은 수녀들과 사제들에게 조언을 구하였다. 28세 되던 해에 그녀의 남편이 병으로 죽자 쟌느-귀용은 많은 재산을 물려받은 미망인이 되었다하지만 34세 되던 해에 자신의 전 재산을 세상에 기부하고 제네바로 떠났다역사의 은수자들처럼 그녀는 버리고 떠나기를 실천한 것이다수도자나 성직자가 아닌 사람이 신비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전 삶을 투신하고자 한 것이다-노엘 비아르네(Jean-Noël Vuarnet)는 이러한 여인들의 있었음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모든 금지된 것을 넘어서면서 신비적인 언어는 무한한 향유를최소한 감성적인 희열을 열어준다이는 하느님을 신랑으로 만나기 이전에 자신들의 남편들 사이에서 헤맸던 여성 신비가들이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이 여성신비가들 중에는 안젤(Angèle), 아카리 부인(Madame Acarie), 그리고 귀용 부인(Madame Guyon)이 있다.

Extases féminines, Arthaud, 1980, p. 15 -

  

   평범한 가정주부로서 한 남편의 아내로서 그리고 세 아이의 어머니로서 이러한 영성적인 삶을 영위하였다는 사실은 성직자나 수도자가 아닌 평신도들에게는 하나의 큰 위안과 희망을 주고 있다즉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의 현존을 추구하는 영적인 삶이 일반인들에게 있어서도 가능하다는 희망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레만 호수 근처의 작은 도시 또농(Thonon)으로 이주하여 고독하게 자신만의 영적인 여정을 시작하였다그녀는 자서전에서 당시 나는 하느님의 매우 큰 충만함 속에 있었다당시 나는 말하는 것을 잊은 채 자주 침대에 있었거나 누워만 있었다라고 말하였으며또 다른 곳에서는 이는 마치 나의 깊숙한 곳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것 같았고전혀 나의 머리로는 헤아릴 수가 없는 것이다지금까지 나는 이러한 방식으로 글을 쓰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 나는 가끔 하루 종일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침묵 속에 보내곤 한다라고 기술하고 있다이러한 체험이 그녀로 하여금 격류(Torrents)를 저술하게 하였다그리고 그녀 스스로 고요한 기도(prière silencieuse)’라고 부른 새로운 형식의 영적인 일치가 가능하다고 믿게 되었다당시 그녀의 고해신부는 사제 라콤브(Lacombe)는 침묵의 기도라는 것을 쟌느 귀용에게 습득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귀용부인의 상태를 내가 느끼는 방식으로 배울 수 있었다나는 무의식적으로 하느님이 원하시는 상태에 도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조금 씩 조금씩 나는 침묵 중에서만 하느님께 말하는 상태에 도달하였다.”

   자신이 체험하고 터득한 신비주의적인 삶을 세상 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손쉬운 방법이라는 책을 저술하고알프스 산맥의 자락에 있는 그로노블로’ 내려와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방법을 전수해 주기도 하였다. 38세에는 다시 파리로 돌아 왔다하지만 1687년에 그녀의 저작들이 이단으로 단죄 받고 이듬해에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다행히 신앙심이 깊고 정치적으로 힘이 있었던 멩뜨농(Maintenon) 부인의 중재로 귀용부인은 같은 해 9월에 자유를 되찾았다하지만 1695년에 정적주의(quiétisme)’로 의심 받아 쟌느-귀용은 다시 체포되었다당시 스페인의 유명한 정적주의자였던 몰리노스(Molinos)가 로마교회로부터 이단으로 단죄 받았고이후 정적주의는 가톨릭교회의 경계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당시 쟌느-귀용의 고해신부였던 라콤브신부가 몰리노스의 친구였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그 역시 결국 체포되었기 때문이다정적주의는 수련을 통해 영혼의 절대적 평정을 추구하였던 스토아 철학의 이념이었는데가톨릭교회는 이를 가톨릭의 정신에 일치하지 않는 이단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쟌느-귀용이 체포된 이유는 보다 복잡한 상황에 연유했을 것이다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여성이 남성들을 인도하면서 문화적 질서를 뒤 흔들었으며또한 수도원에 입회하기를 거부하면서 영성적인 삶을 영위하고 수도자나 성직자들을 이끌어가는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그리고 그녀의 인도를 받은 이들 중에는 프로테스탄 신앙인들도 많았다그리고 이들의 모임은 공적이기 보다는 항상 비밀스러운 모임을 통해 이루어졌다그리고 의도치 않게 쟌느-귀용에게 붙여졌던 여성 지도자(Dame directrice)’라는 이름은 더욱 교회의 의심을 샀다나아가 진리이나허가되지 않은(la vérité et non l’autorité)” 것을 실천하고 사람들에게 전파한 혐의를 받고 있었다이 모든 의심들은 그녀를 감옥으로 데려가기에 충분하였다.

   그녀의 지지자였던 페넬롱신부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녀의 신비적인 체험과 내적인 삶에 대해서 변호하고자 하였으나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그리고 모든 신비가들이 그러했듯이 쟌느-귀용 역시 그 당시 자신에게 주어진 질문들에 대해서 거짓을 말할 수가 없었고감금을 회피하기 위해서 교활한 수를 쓰거나 애매한 질문들을 회피하거나 하지 않았다그녀에게는 매 순간이 그리고 자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순간과 사람들이라 여겨졌고고백신부의 충고에 전적으로 순종하였다이러한 그녀의 진솔함은 왜 그녀가 마치 스스로 감옥의 삶을 택한 것 같이 보이는 것이지를 알 수 있게 하고 있다한 번은 자살을 생각하고 있는 한 수감자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해주었는데여기서 감옥 생활에 대한 그녀의 의미가 잘 드러나고 있다.

  

오직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뜻에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만이 존재할 뿐입니다만일 이것이 없다면 위로도 없이 사람들이 주는 이 시련의 기간들은 우리들을 절망으로 던져버릴 것입니다. (...) 한 번은 사람들이 나에게 무시무시한 지하 감옥을 보여주었습니다나는 그들에게 그곳이 매우 아름답다고 말하였습니다.”

  

   쟌느-귀용은 8년 동안 두세 군데의 감옥을 옮겼고마지막에는 바스티유 감옥에 감금되었다그녀가 다시 자유의 몸을 되찾은 것은 55세 되던 해인 1703년 이었다쟌느-귀용은 이후 14년 동안 나머지의 인생을 내적인 삶을 위해 헌신하였고블루아(Blois)에서 가톨릭 신자와 프로테스탄트 신자를 모두 포함하는 영성적인 단체를 형성하였다특히 가정을 잃은 영국과 스코틀랜드 아이들은 그녀를 어머니라고 불렀다이 마지막 시기에 그녀는 성서해석과 자신의 영적인 여정의 가장 심오한 부분들을 말해주고 있는 내적 삶에 대한 글(Écrits sur la vie inteéieure)을 남겼다이 마지막 저작은 오랫동안 숨겨져 있었던 보석과 같은 것이었는데그녀가 죽기 한 해전인 1716년에 출간될 수 있었다.

   신비가 쟌느-귀용은 1717년 6월 9일에 69세의 나이로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그녀가 저술한 5권의 책과 생전에 그녀가 보낸 편지글을 모은 서간들』 은 유럽의 신비주의에서는 아주 소중한 저서들로 사랑받고 있다특히 평신도로서 탁월한 영성적인 길을 간 그녀의 삶은 영성의 길을 꿈꾸는 모든 평신도들에게 희망이 되어주고 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