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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의 은혜의글

기도의 체험, - 안토니 블룸

작성자좋은열매|작성시간26.06.06|조회수1 목록 댓글 0
하느님께서 안 계신 듯 보일 때, 곧 그분께서 침묵하실 때가 기도를 시작할 때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할 말이 많을 때가 아니라 "저는 당신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정말 괴롭습니다. 왜 이렇게 침묵하고 계십니까?" 하고 하느님께 호소할 때 시작되는 것이지요.
하느님을 찾아야만 되겠고, 못 찾으면 죽을 것만 같을 때 비로소 우리는 현재의 나를 넘어서 그분의 현존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사랑과 그리움이 무엇인지를 알고, 절망을 두려워하지만 않는다면 반드시 승리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바라는 게 아니라, 하느님 자체를 그리워하는 갈망이 우리 마음 안에 있게 될 때 기도가 시작됩니다. 또 어느 때는 우리 눈 안에 슬픔이 깃들고 영원을 향한 동경이 강해져 우리를 가득 채울 때 크나큰 기쁨을 느끼게 되기도 합니다. (38p)

 

참된 기도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 시작되는가? 

"하느님을 찾아야만 되겠고, 못 찾으면 죽을 것만 같을 때"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바라는 게 아니라, 하느님 자체를 그리워하는 갈망이 우리 마음 안에 있게 될 때"

 

물론 지금 내 삶에 찾아온 고통과 고난을 벗어나고자 할 때, 내게 주어진 삶의 도전을 헤쳐나갈 힘이 필요할 때,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응원하고 도움을 주고 싶을 때, 그럴 때에 하나님의 도움을 청하는 기도도 필요한 기도다. 주님께서 그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그런 간청기도는 기도의 출발이다. 그다음 단계로 더 나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간청기도는 기도를 청해야만 하는 상황이 종결되는 순간 사라지기 때문이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사귐이다. 그 사귐을 향한 갈망으로 나의 기도의 초점이 옮겨져야 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들(힘, 지혜, 사랑, 재물, 그리고 기적 같은 간섭)에서 하나님 자신을 향한 관심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현존 안으로 들어갈 수 있고, 하나님의 기쁨에 동화되어 참으로 깊고 그윽한 기쁨과 평안을 누릴 수 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거나 생활에 관련된 어떤 것을 청할 때 그 기도는 얼마나 열정적이고 간절합니까? 그럴 때 우리의 마음은 온통 기도 안에 파묻히고 맙니다. 이때 우리가 하느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까?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가 기도하는 그 문제에 몰두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걱정거리가 해소되기를 청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때는 열심히 하다가 그것이 아닌 다른 것을 기도하려면 우리 마음은 순식간에 차가워집니다. 하느님께서 멀리 가 버리셨기 때문일까요? 아니지요. 우리가 기도할 때 쏟는 열정이 하느님의 현존과 그분께 대한 신앙과 그리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열정은 우리가 기도하던 사람이나 어떤 일에 대한 애착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해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59p)

 

그렇다. 정말 그렇다. 간절히 기도할 때 쏟는 열정은 하느님의 현존과 그분께 대한 신앙과 그리움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 내가 아끼는 그 일, 그것들에 대한 '애착'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들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 그것들을 통해 만족을 얻겠다는 마음, 그것들을 잃어 얻게 될 상실에 대한 두려움, 그런 애착들이다. 그것 자체를 나쁘다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더 높은 길, 깊은 길, 넓은 길, 영원한 생명을 향한 길로 나아가려면 그다음 단계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겸손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후무스Humus'에서 유래했습니다. 비옥한 땅을 의미하지요. 그런데 겸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상당히 다른 듯합니다. 자신을 낮추고, 가장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려 하고, 남 앞에서 그런 사람처럼 행동하려는 인위적인 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겸손은 땅과 같은 것입니다.
땅은 항상 거기 있기에 늘 있겠거니 생각되어서 아무도 기억하지 않습니다. 항상 모든 사람이 그 위를 밟고 지나가고 원하지 않는 쓰레기를 모두 갖다 버립니다. 땅은 조용히 모든 것을 받아들이면서 모든 쓰레기를 부패시키고, 변화시키고, 씨앗에 실체와 생명을 줄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해와 비를 받아들이고 우리가 뿌리는 어떤 씨든 받아들여 30배나 60배나 100배의 수확을 낼 수 있습니다. 저는 그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이렇게 되기를 배워야 한단다. 겸손하게 사람들이나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은 무엇이든 받아들일 준비를 하거라.”(69p)

 

땅과 같은 사람, 겸손하다 못해 바보같아 보이는 사람, 사람들의 현란한 말에 조롱당하고, 요리조리 피해 다시는 약삭빠른 사람들 때문에 더 많이 고생하고, 수고하고 애쓴 것에 비해 당장 돌아오는 보상도 없이 늘 고생하는 듯 보이는 사람, 게다가 더 주목받지도 못하는 사람, 땅을 닮은 사람, 겸손이란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한다. 어쩌면 나는 이 생애에서 그런 사람이 되긴 글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게 앞으로 만나게 될 수많은 고난을 통해서 겸손한 사람으로 이끌어가실 것은 분명하다. 변함없는 사실이다. 심호흡을 가다듬자. 그 길을 향하여 하늘의 호출이 있거든 준비된 만큼 걸어가자. 겸손을 배우고 익혀 겸손한 사람, 땅과 같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일 것이다. 

 

우리가 모두 대면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 기도를 어디로 향하게 할 것인지는 이미 말한 바 있습니다. 제가 말한 답은 자신 안으로 향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고 싶은 기도가 자신에게 중요하지도 않고 의미도 없다면 어떻게 하느님께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하는 말에 정신을 집중하지 않고, 마음이 거기에 없으며, 생활이 기도하는 것과 같은 방향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기도는 하느님께 다다를 수 없을 것입니다. (101p)

그러니 기도할 때 올바른 말을 선택하고, 그 말에 주의를 집중해 온 마음을 쏟고 난 후 이 말들이 마음의 가장 깊은 데까지 뚫고 들어가서 우리 인식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도록 하십시오. 기도할 때 하는 말은 언제나 헌신의 말이기도 합니다. (118p)

 

기도는 밖을 향해 말할 때도 있지만, 안을 향해 자세를 고쳐잡아야 할 때가 있다. 밖을 향해 기도하기 시작하면 자칫 공허한 말, 중언부언하는 말을 하기 쉽다. 공중에서 의미 없고 맥없이 사라지기 십상이다. 그것은 기도가 아니다. 그러나 안을 향해 마음을 모으고 의미를 담아 인격이신 하나님께 진지하고 정직하게 대화하듯 말하면 그 말은 중언부언하지 않는다. 그것이 훈련이 되면, 초월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내 앞에 앉아계시거나, 혹은 높은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할 수도 있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내 안으로 향하는 기도'가 출발점이 이어야 한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도하는 데 보내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른 일을 하는 사이에 멈추어 하느님께로 향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이 안정되어 있고 하느님을 만날 의지만 지니고 있다면 이런 시간을 낼 수 있는 자유를 갖게 될 것입니다. 
우선 모두가 아는 것에 주의를 집중시켜 봅시다. 시간을 잡으려고 뛰어다닐 필요는 없습니다. 시간은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오고 있습니다. 다음 순간이 우리를 향해 오는 것을 의식하든 못 하든 그 순간은 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든지 미래는 현재가 될 것이므로 현재에서 미래로 뛰어가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움직이는 것은 시간이므로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안정된 상태에 머무르면서도 앞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142p)

 

 오롯이 지금 여기, 현존을 인식하는 게 관건이다. 기도를 얼마나 많이 했느냐가 중요하지 않다. 현존, 현존, 현존에 주목하라. 내 의식과 생각, 내 몸이 오롯이 지금 여기, 현재에 머무르는 것이다. 생각이 지나간 과거의 쓰디쓴 상처로 되돌아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생각이 다음 해야 할 일을 염려하고 준비하는 쪽으로 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런 것은 의미 없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 오롯이 지금 여기, 현존에 머물러야 하나님을 알현하는 문을 만나게 된다. 

 

시간이라는 비행기가 우리를 '지금'이라는 곳에 데려 왔습니다. 이런 자신의 상태를 좀 더 평화로운 방법으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시간을 멈추고 현재에 머무르는 방법을 배워야 하고, 이 '지금' 안에 살아 있으며, 이 '지금'이 영원과 시간을 가르는 지점임을 배워야 합니다. 
그럼 무엇을 해야 할까요? 첫째로 할 일이 없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연습을 해 보십시오.(147p)

이렇게 평온을 유지하는 법을 배운 다음에는 시간이 남을 때나 할 일이 없을 때뿐만 아니라 바쁠 때에도 멈추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148p)

또 우리는 시계를 보지 않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149p)

 

오롯이 지금 여기, 현존에 머무르는 실제적인 방법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본다. 매우 잘못된 습관이다. 위험한 습관이다. 영혼을 병들게 하는 습관이다. 스마트폰 중독은 삶의 질을 형편없게 만든다. 그러니 정신차리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스마트폰을 보는 것보다 더 소중하다. 지금 이 싸움과 싸워 이기지 않으면 안 된다. 나만의 습관과 룰을 지켜야 한다. 

 

숲이나 들에서 새가 날아가는 것을 보려면 새들보다 먼저 일어나서 정신을 차리고, 새가 날기 전에 잠이 완전히 깨어 있어야 합니다. 숲이나 들에 가서 완전히 평온한 상태로 마음을 느긋이 하고 조용히 앉아 있어야 합니다. 새들은 예민해서 소리를 내면 멀리 도망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새가 날아가는 것을 보려면 이런 평온과 침묵, 쉼을 알아야 하고, 동시에 강한 집중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요. 졸린 눈을 하고 앉아 있다가 해가 떴나 하고 정신을 차려 보았자 새들은 벌써 날아가 버린 다음일 테니까요.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면서 조용히 쉬는 태도, 이것이 침묵을 위한 준비입니다. 어렵긴 하지만 이것은 우리를 모든 편견과 기대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합니다. 그리하여 무엇이든 받아들일 열린 마음 상태를 갖도록 도와주는 집중력과, 이기심을 개입시키지 않고 주어진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해 주는 평온을 조화시키지요. (157p)

우선 입을 침묵시키는 데서 시작해서 감정의 침묵, 마음의 침묵, 몸의 침묵을 배우십시오. 그러나 처음부터 마음의 침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착각입니다. 먼저 입을 침묵하기를 배워야 하고, 다음에는 평온하게 있기 위해 몸을 조용히 하는 걸 배워야 하며, 그다음엔 환상에 빠지지 않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162p)

 

침묵, 고요, 평온. 

먼저 입을 닫는 훈련이다. 말을 그친다. 입을 닫는다. 외부 환경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차단하기 위해 마음의 창문을 닫는다. 그 다음 몸의 침묵 훈련이다. 불필요한 동작을 금한다. 손, 다리, 머리, 몸을 가만히 둔다. 힘을 뺀다. 가만히 앉아 있든지, 가만히 걷든지, 가만히 일을 하든지, 오롯이 지금 여기, 현존에 머물도록 한다. 

그다음 마음의 침묵을 훈련한다. 비록 입은 닫았지만 생각 속을 떠도는 말들, 이미지들이 계속 떠들어댄다. 꿈처럼 꿈틀댄다. 지나가게 한다. 제풀에 지쳐 사라지게 한다. 아니면 선하고 아름다우신 하나님을 생각한다. 

침묵은 고요하게 만든다. 고요한 중에 은밀한 곳에 숨어 계시는 하나님께서 거기 계시며 말씀해 온 사실을 인식한다. 알아챈다. 그러면 평온이 온다. 

 

나는 생각이 많다. 끊임없이 다음 일을 대비하느라 바쁘다. 사태를 파악하고, 원인을 분석하며, 대안을 마련한다. 할 말을 준비하고, 방어와 공격을 위한 대비를 한다. 그러느라 현재를 허비한다. 그런 것들을 기도라는 이름으로 치환한다. 하나님의 반응은 듣지 않고 기다리지도 않는다. 그러면서 기도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착각한다. 그러면서 뭔가 더 아는 것처럼 착각한다. 훈련해야 한다. 침묵, 고요, 평온.

 

제가 군중 속에서 한 사람을 선택하는 순간, 우리의 관계는 개인적이고 참된 것이 됩니다. 그 사람이 제게 특별한 존재가 되고, 그의 이름이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167p)

기도도 하느님을 '그분'이라든가 '전능하신 분' 등 나와 거리가 먼 3인칭으로 생각하지 않고 당신이라고 가깝게 생각할 때에 비로소 시작됩니다. (168p)

하느님의 이름을 올바로 찾지 않는 한 우리는 자유롭고 즐겁게 진실한 마음으로 그분께 갈 수 없습니다. '전능하신 분'이나 '창조주'처럼 보편적인 호칭으로 하느님을 부른다면 우리는 그분과 멀리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와 가까운 누군가를 친근하게 별명으로 부르듯 하느님을 부를 때도 나만이 아는 특별한 호칭으로 부를 수 있는 순간이 있습니다. (173p)

"내 기쁨이여!"와 같은 말로 그분을 칭할 때 그분과 우리의 관계는 특별한 것이 됩니다. 물론 하느님을 부르는 이름을 남들과 나누지 말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인간관계처럼 다른 이와 공유하면서도 동시에 상대와 내가 특별한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나에게만 속하는 단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부를 나만의 호칭을 만들어 그 이름을 자신의 온 마음과 사랑을 담아 부를 수 있도록 합시다. (175p)

 

기도는 사귐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내 하나님은 내게 어떤 분이신가? 그분을 나는 어떻게 부르고 있는가?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 '성령님'... 창조주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긍휼히 풍성하신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 나의 구세주, 마른 뼈와 같은 우리를 군대로 일으키시는 생기이신 성령님, 선하고 아름다운 하나님, 기쁨과 평화를 주시는 하나님,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희생당하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고 부활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 따뜻하고 섬세하게 지혜를 주시는 성령님, 어리석은 양과 같은 우리를 인도하시고 지키시며 보호하시고 이끄시는 목자 되신 주님, 우리를 안아서 업어서 광야를 건너시는 하나님, 아빠 아버지.... 많다. 참 많다. 그런데 나만의 하나님 호칭이 없는 것 같다. 남들이 다 부르는 이름이다. 내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별칭, 나만이 부를 수 있는 나의 하나님의 이름, 그 이름을 찾아보자. 

 

 

출처: https://nouwenjp.tistory.com/entry/기도의-체험-안토니-블룸 [아픈 바람: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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