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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의 은혜의글

회복 - 박은조

작성자좋은열매|작성시간26.06.07|조회수2 목록 댓글 0

회복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였사오나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_시60:1

회복은 모든 사람들의 소원입니다. 사람은 원래 존귀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에덴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이후로 우리는 늘 목마르고 배고프고 외로운 존재로 살아왔습니다.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지 못하면 인간은 계속해서 그런 가여운 존재로 살아야 합니다. 존귀한 인간도, 행복한 가정도 그리고 정의로운 사회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힘든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_서문에서

 

| 신앙의 회복 | … 신앙, 어디에서 시작해야 하는가?

| 이사야 42:1-4) |

“우리가 출발선을 제대로 떠났으면 결승점에 도착했을 때 상이 주어질 것이다. 그러나 제대로 출발하지 않았으면 문제가 생긴다. 무릎이 깨지고 뒹굴면서 결승점에 1등으로 들어갔다고 해도 아무런 상을 받을 수가 없다” 마태복음 7장 21-23절은 결승점에 도착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무엇을 했다고 주장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이 법이 아닌 '불법'을 행했다고 지적하고 계신다. 그들이 행한 것이 진리를 따라 행한 것이 아니었고, 주님과 상관없이 자기 마음대로 행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결승점에서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제대로 출발했는지 '상한 갈대'(사42:3)라는 말씀을 가지고 생각해 보자.

 

_인간은 상처 받은 상한 갈대일 뿐이다.

이사야 42:1-4절은 이사야 선지자가 오실 메시아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는 내용이다. 메시아가 오시면 그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꺾이지 않도록 하시겠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마12:9-21절 사건에서 인용되고 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고 그 사람을 치료하신 후, 이 사건이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메시아의 역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사야 시대

 

의 갈대는 먹을 수도 없었고, 팔수도 없는 쓸모없는 식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갈대가 자라고 있는 땅은 척박해서 농사를 지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당시의 농사꾼들은 갈대를 보면 저주받은 식물로, 그 땅은 저주받은 땅으로 생각했다.

 

하나님께서는 메시아가 가장 볼품없고 가치 없는 식물인 갈대, 게다가 그마저 상해 있는 갈대를 꺾지 않을 분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멀리서 보면 갈대는 멋있고 꼿꼿하게 서 있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목이 벌레를 먹어 상해 있기 때문에 손을 대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곧 부러지고 말 것이며, 태풍이 몰아치지 않아도,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잔잔한 바람에도 곧 부러지고 말 거이다. 이것이 바로 상한 갈대의 모습인 것이다. 이 상한 갈대는 바로 하나님 없이 살고 있는 인간을 의미한다.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원을 공급받으며 살도록 설계되어 있다. 하지만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살겠다고 선언을 하면서 인간은 상한 갈대가 된 것이다.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환경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상한 갈대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나쁜 환경에 있다고 해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인간이 낙원에서 범죄한 존재라고 말한다. 인간 최초의 범죄는 완벽한 조건의 낙원에서 있었다. 결국 인간 자체가 문제지 환경이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환경보다 인간을 먼저 고치시는 것이다.

 

_연약함과 약속 사이에 있는 인간

그런데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실 분, 메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사건은 단순히 육체적 결함이 있는 사람을 고친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을 떠나 있는 사람, 생명에서 떠나 있는 사람, 상한 갈대를 고치신 이야기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상한 갈대에 불과한 우리를 고치시고,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신다. “원수를 사랑하라” ”아내를 또는 남편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여러분들은 이 말씀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성령의 능력을 덧입기를 날마다 사모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명하신 말씀이니까 시도해 보긴 했는데 잘 안 되어서 지쳐있는 상황인가? 아니면 이 땅에서 이런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아예 포기하고 살지는 않는가? 신앙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볼 때, 우리는 원수 사랑은커녕 배우자 사랑도 제대로 못하는 자들임을 발견한다. 나 자신의 비천함과 연약함을 볼 때 그런 엄청난 일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므로 우리가 내 삶 속에서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 것이다. 나 자신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약속 사이,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의 믿음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믿음을 선택하는 자를 신앙인이라고 한다.

 

_출발선에 제대로 서 있는가?

하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실 때, “예, 알겠습니다. 그 가르침대로 열심히 살아 보겠습니다”라고 응답한다면 그는 출발선에 제대로 서지 못한 사람이다. 우리가 그런 생각으로 신앙 생활을 한다면, 평생 열심히 수양을 하고, 선행을 베풀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며 살았다고 해도, 결승점에 이르렀을 때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신앙의 길은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가는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열심히 산다. 금식도 해보고, 철야도 해보지만 여러 해가 지나도 꼴 보기 싫은 인간은 여전히 꼴 보기가 싫다.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런 일은 연약한 인간들이 사는 상한 이 땅에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이 믿음으로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 모습을 보면 고운 시선으로 보지 않고 그들을 냉소적으로 본다. “누군 왕년에 그렇게 안 해 봤나?” 라며 빈정댄다. 이런 어중간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보니까 타협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건 이미 신앙생활이 아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인가? 나는 할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 할 수 있다고 말씀하는 것이다. 나는 도저히 원수를 사랑할 수 없는데, 나는 도저히 배우자를 예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할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성령의 능력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이다. 신앙은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렇게 이루어질 것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난 못해” 라고 결정할 것인가? 이 지점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일이 내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사람을 신앙인이라고 하며, 여기에서 출발할 때 우리는 제대로 출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이라고 포기한 사람에게는 열매가 없다. 열매가 있다면 자신의 열매뿐이다. 자신의 판단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일은 버리고, 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일만 따라 간다면 그건 자신의 주관을 따라가는 것이지, 이미 신앙생활이 아니다. 하나님의 열매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사람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냉소적이 된다. 냉소적인 사람은 복음에 대한 열정을 서서히 잃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열정을 갉아먹는 것이다. 열정이 없고 능력 있는 삶을 살지 못하니까 타협하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떠나지는 않는다. 다만 적당히 타협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회복 … 네 손을 내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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