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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의 은혜의글

헤아려 본 슬픔(A Grief Observed) - C. S. 루이스(C. S. Lewis)

작성자좋은열매|작성시간26.06.20|조회수2 목록 댓글 0

슬.픔.의.편.지

 

C. S. 루이스의 심장을 담은 ‘슬픔의 일기’

“슬픔은 게으른 것이라고 아무도 내게 말해 주지 않았다. 일상이 기계적으로 굴러가는 직장에서의 일을 제외하면 나는 최소한의 애쓰는 일도 하기 싫다. 글쓰기는 고사하고 편지 한 장 읽는 것조차 버겁다. 수염 깎는 일조차 하기 싫다.” ―본문에서

 

평생 독신으로 살다 59세에 결혼한 루이스가, 아내 조이(Joy)를 암으로 떠나보낸 뒤 깊은 비탄과 절망, 회의 속에 써 내려간 슬픔의 일기. 아주 어렸을 적 어머니를 암으로 여읜 루이스는, 아버지에 이어 노년에 결혼한 아내마저 암으로 사별하게 되는 기막힌 고통을 겪는다. 그 상상하기 어려운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에 대한 회의와 아내에 대한 그리움, 다시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때로 격정적으로 때로 깊은 묵상 속에서 그려 낸 일기가 바로 이 책 《헤아려 본 슬픔》이다. 

 

 목차

 

머리말

 

1장

2장

3장

4장

 

해설 

 

   “죽음과 결혼, 신앙의 의미에 관한 지극히 사적이며 고뇌에 차 있으며 명쾌한 책!”

-퍼블리셔스 위클리 Publishers Weekly

 

“애도자(哀悼者)를 판에 박힌 태도에서 끌어내어, 슬픔에 대한 자신의 견해에 동참하도록 초대한다.” -타임스 문학부록 The Times Literary Supplement

 

“이 책은 노골적이리만치 정직하고 꾸밈없는 단순성이 특징이며, 흔히 찾아볼 수 없는 힘을 보여 준다. 그것은 솔직 대담한 진실의 힘이다!” -더글러스 그레셤 / C. S. 루이스의 양아들

 

C. S. 루이스   

 

우리 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로 꼽히는 기독교 변증가이자 시인, 작가, 비평가, 영문학자. 1898년 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출생. 1925년부터 1954년까지 옥스퍼드 모들린 대학에서 개별지도교수 및 평의원으로 있었으며, 1954년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로 부임하여 중세 및 르네상스 문학을 가르쳤다. 무신론자였던 루이스는 1929년 회심한 후, 치밀하고도 논리적인 정신과 명료하고 문학적인 문체로 뛰어난 저작들을 남겼다. 1963년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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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는 60세에 가까운 황혼의 나이까지 독신으로 지내다가 조이를 만나게 된다. 조이는 루이스의 팬으로 그와 편지교류를 한다. 서로에 대한 공통점과 매력으로 인해 그들 사이에는 우정이 피어나기 시작하고 이는 사랑으로 이어진다. 조이는 알코올 중독자이며 바람둥이인 남편이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다고 이혼을 요구하고 견디다 못한 그녀는 이혼하게 된다. 미국에서 살던 그녀는 이혼 후 두 아들을 데리고 영국으로 오게 된다. 이 때 루이스는 그녀가 영주권을 가질 수 있도록 그녀와 결혼식을 올린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법적인 절차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다 1957년에 조이가 암으로 갑자기 쓰러지게 되고 이 사건은 그동안 무르익었던 그들의 사랑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의사가 몇 개월 밖에 안 남았다는 판명에도 불구하고 루이스는 조이에게 청혼을 하고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놀랍게도 조이는 죽지 않고 그 후로부터 3년 4개월을 더 살았다. 그가 고백하듯이 짧은 결혼생활이었지만 루이스는 정말 아름다운 시간을 보냈다. "지난 몇 년간 그녀와 나는 사랑에 탐닉하였으며 그 갖가지 양식을 다 즐겼다. 심신 어느 곳이든 충족되지 않은바가 없다."

 

그러나 그런 행복을 질투라도 하듯 조이는 암증세가 다시 나타나고 1960년 7월 11일에 45세의 나이로 죽고 만다. 조이가 떠나간 자리는 루이스에게 고통 그 자체였다. 예전부터 <고통의 문제>와 씨름하며 하나님의 근원적 선하심에 대해 내린 결론이 조이의 빈자리 앞에서 힘없는 부르짖음과 분노와 원망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를 뿌리째 흔들어놓은 이 사랑과 고통의 경험을 일기로 기록한 것이 <헤아려 본 슬픔>이다.

이 책의 앞부분은 그의 고통을 직설적으로 표현해 놓았다. 그 과정에서 그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상실로 보일만큼 많은 고민과 회의를 하게 된다. 그러나 루이스의 그런 몸부림은 믿음의 상실이기보다는 이제껏 그가 머릿속에서만 상상했던 고통의 실제를 경험함으로 인해 이를 향한 하나님의 크신 뜻을 알고자 하는 과정의 전초작업으로 변론의 한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된다.

"내가 만일 세상의 슬픔에 대해 진정으로 염려하였다면, 나 자신에게 슬픔이 닥쳐왔을 때 이처럼 압도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상상 속 내 믿음은 질병, 고통, 죽음, 외로움 등으로 이름 붙여진 가짜 돈으로 계산놀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밧줄이 나를 지탱해 줄지 어떨지 문제가 되기 전까지는 그 밧줄을 믿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것이 문제가 되자 믿고 있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오직 극심한 고통만이 진실을 이끌어 낼 것이다. 오직 그러한 고통 아래에서만 스스로 진실을 발견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믿음이나 사랑의 자질을 알아보시려고 시험을 하시는 게 아니다. 그분은 이미 알고 계시니까. 모르는 쪽은 오히려 나였다. 그분은 언제나 내 성채(요새)가 카드로 만든 집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신다. 내가 그 사실을 깨닫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쳐서 무너뜨리는 것뿐이었다."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고 연애 다음에 결혼이 오듯, 결혼 다음에는 자연스럽게 죽음이 온다. 그것은 과정의 단절이 아니라 그 여러 단계들 중의 하나이다. 춤이 중단된 게 아니라, 그 다음 표현 양식으로 옮겨 간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녀에 대한 추억에 크게 마음 쓰고 있었고, 그것이 거짓되이. 변할지 모른다는 점에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하나님의 자비로우며 선하심 외에는 달리 생각할 방도가 없다) 나는 더 이상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놀라운 일은 그런 데에 신경 쓰지 않게 되자, 사방팔방에서 그녀를 만나게 되는 것 같다는 사실이다. 그녀의 죽음에 대해 여태껏 가장 덜 슬퍼한 순간 불현듯, 그녀를 가장 선명하게 기억했던 것이다."

"종이 위에서건 마음속에서건 이미지란 그 자체로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단순한 연결고리일 뿐. 그리스도를 원합니다, 그분과 유사한 그 무엇이 아닌. 그녀를 원합니다, 그녀와 유사한 그 무엇이 아닌. 하나님에 대한 내 생각이 아닌 하나님 자체를 그녀에 대한 내 생각이 아닌 그녀 자체를. 그렇다. 우리 이웃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 우리 이웃 자체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는 실제로 고통을 겪고 나서야 그 의미를 깨닫게 된다. 고통을 통해 진실을 알게 되었고 또한 그를 진실하게 만들어 주었다. 루이스의 위대한 점은 그를 뿌리째 흔들어놓은 이 사랑과 고통의 경험을 일기로 써 내려감으로 단순히 개인의 고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주는 교훈을 얻고자 노력했다는 것이다.

이 책보다 앞서 <고통의 문제>라는 책을 쓴 바 있지만 이 책 <헤아려 본 슬픔>은 보다 사실적이고 성숙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고통과 슬픔을 애써 거룩한 모습으로 포장하려 하지 않고 직설적이고 적나라하게 표현함으로 우리 인간의 약함과 아픔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수많은 문제들로 고통 받고 있는 자들에게 실제적이고 의미 있는 지침서가 되리라 본다.

"오직 극심한 고통만이 진실을 이끌어 낼 것이다. 오직 그러한 고통 아래에서만 스스로 진실을 발견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믿음이나 사랑의 자질을 알아보시려고 시험을 하시는 게 아니다. 그분은 이미 알고 계시니까. 모르는 쪽은 오히려 나였다. 그분은 언제나 내 성채(요새)가 카드로 만든 집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신다. 내가 그 사실을 깨닫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쳐서 무너뜨리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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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사별 슬픔 진솔하게 적어 국민일보 | 황세원 기자 | 2004.05.08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59세에 결혼했던 C S 루이스가 아내 헬렌 조이 그래셤을 암으로 떠나보낸 후 그 슬픔을 진솔하게 적은 책. “…다른 모든 도움이 헛되고 절박하여 하나님께 다가가면 무엇을 얻는가? 면전에서 쾅 하고 닫히는 문, 안에서 빗장을 지르고 또 지르는 소리. 그러고 나서는,침묵. 돌아서는 게 더 낫다. 오래 기다릴수록 침묵만 뼈저리게 느낄 뿐, 창문에는 불빛 한 점 없다… 왜 그분은 우리가 번성할 때는 사령관처럼 군림하시다가 환난의 때에는 이토록 도움 주시는 데 인색한 것인가?”

역사상 가장 뛰어난 기독교 변증가인 루이스라면 사별의 슬픔 앞에서도 의연했으리라 예단하기 쉽다. 그러나 그가 털어놓는 슬픔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그는 이 글을 쓸 때는 출판을 염두에 두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른 후 이 글이 자신과 비슷하게 슬픔으로 시달리고 감정적 고난을 겪는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루이스조차도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 앞에서는 이처럼 괴로워했다는 것, 그러나 그 끝에 되돌아온 곳은 역시 하나님의 품이었다는 사실이 우리 평범한 크리스천들에게는 큰 위안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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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 대한 아름다운 반항  

1. <헤아려본 슬픔 A Grief Observed>은 루이스의 책 중에 가장 얇다(를 제외한다면…….). 가장 작지만 그러나 가장 날카로운 작품이다. 이 책의 예리함은 루이스의 화려한 필력과 그의 상처받은 마음이 결합되는 데서 파생되는 특성이다. 그는 그 특유의 문체를 가지고 신에 대한 그의 쓰디쓴 감정을 아름답게 표현해낸다. 정녕 아름답게 신을 원망한다. 루이스의 상처는 그가 58살에 결혼한 여인, 조이와의 사별에 기인한다. 왜냐하면 4년간의 불꽃같은 사랑에 예기치 않게 뒤이은 그녀의 암 재발이 그녀의 생명을 거두고, 그의 마음에서도 불꽃을 앗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루이스가 일찍이 신정론神正論의 대가로 명성을 얻었다. 무신론자의 사도라 불리는 그가 사별의 아픔 앞에서 격렬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내면을 할퀴고 지나가는 잔인한 손길을 좀 더 깊이 있게 헤아려봐야 한다. 2. 앞서 말하였듯이 이 소품은 실로 아름답다. 그의 신에 대한 원망은 하나의 예술이다. 그의 언어들은 하나하나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다(단언 컨데 하나님도 그의 원망에 감동받으실 것이다). 시편 기자들의 영성, 예언자들의 영성이 바로 그의 내면에서 이어지고 있다. 그들이 신에게 불만을 토하듯이 그 또한 이 노트에서 신의 사랑을 부인하고 있다. 그의 앞에서 천국의 문이 닫혔고, 적막만이 감돈다.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 신의 자비란 없다. 물론 그의 원망은 그의 신앙에 기초한다. 즉 그는 신의 존재를 여전히 받아들인다. 그러나 신에게서 위로를 받으려 하지도, 신에게서 의미를 찾으려 하지도 않는다. 그에게서 신은 우주적인 과학자(cosmic sadist)일 뿐이다. 하지만 그의 견실한 신앙과 가열하다 정직이 결합되어 결국 하나님의 자비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결코 도그마틱 한 태도에서 나올 수 없고, 정녕 자신과 하나님 앞에서 솔직한 태도에서만이 나올 수 있는 열매이다. 나는 그의 영성의 확실한 증거를 바로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비록 사람에 따라 감동의 정도는 상이하겠지만, 조금도 아낌없이 이 책을 추천한다. 열린 마음으로 이 책을 펼쳐 볼 때 벅찬 감동을 얻게 될 것이다. 또한 바라 건데 단순히 책을 읽고 감동받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우리 또한 그러한 솔직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것이다. 3. 끝으로 이 책을 읽기 전에 두 가지를 먼저 볼 것을 권한다. 하나는 영화다. 비디오로 출시된, <쉐도우 랜드>. 이 영화는 <헤아려본 슬픔>과 같이 간다. 개인적으로 그 영화보다는 책이 훨씬 절절했다. 그러나 영화도 충분히 볼 만 하다. 그러므로 책보다 먼저 봐두길 바란다. 또한 이 책을 깊이 이해하게 도와줄 책으로, 루이스의 방송 강연 원고를 묶어낸 <네 가지 사랑 The Four Loves>을 추천한다. 이 책에서 그의 이성애에 대한 경시를 읽어내려는 해석이 있지만, 그는 이 책 가운데에서 인간관계를 그 본질에서부터 섬세하게 읽어낸다. 그러한 전망을 가지고 다시금 <헤아려본 슬픔>을 읽어본다면 훨씬 의미 있게 읽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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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실체가 이미지 보다 중요한 것인지를 이 책을 읽으면서 확실하게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왜 루이스가 십계명 중 1,2계명을 붙잡았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계명에서 미끄러지기 쉬운 제 자신을 살필 수 있었습니다. 실체가 사라진 뒤(아내와의 사별) 루이스는 한 동안 아내가 남긴 이미지를 붙잡고 기나긴 밤을 지새웁니다. 그리고 자신이 겪고 있는 슬픔을 극복해 내는 방법은 실체가 남긴 이미지가 아닌 실체 자체를 바라 볼 때인 것을 깨닫습니다. 그 외롭고 처절했을 시간에 그는 눈물이 얼룩져 있는 동안에는 제대로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인간도 이미지가 아닌 실체로써 만이 진정한 의미와 경배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늘 그랬지만 이번에도 역시 루이스는 투사다운 면모를 어김없이 보여 주고 있습니다. 절규와 비명 그리고 슬픔의 포탄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그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은 투사로 우뚝 서 있습니다.

비록 그 자신이 팔과 다리가 잘려 나간 절뚝거리는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는 역시 승리의 개선문을 통과하고 있는 하나님의 군사임에 틀림없습니다. 총 네 개의 장으로 구성 된 짧은 책이지만, 네 개의 큰 기둥처럼 루이스의 사상과 철학 그리고 그의 신앙과 인간미를 접하게 합니다. 논픽션을 다루면서도 그는 픽션의 재료를 아낌없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자신을 철저히 모든 이를 위하여 버리는 기쁨(?)을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역시 모든 시대의 전도자로서의 사명을 받은 하나님의 종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혼돈 가운데 이 책을 썼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치밀한 구성과 내용 전개 또한 읽는 이의 눈과 혼을 그리고 생각을 사로잡기에 충분합니다. 언뜻 보기에 붓 가는 데로 흘려 갈긴 글씨 같지만, 신앙의 완숙미를 가지고 마지막으로 남긴 가히 루이스의 유작임에 틀림없는 책입니다. 머리글과 해설의 글은 본 내용을 읽는 데 도움이 될 뿐더러 읽고 난 뒤에 그 의미가 더 새롭게 이해되는 것이 루이스를 제대로 아는 사람들이기에 루이스의 이미지가 아닌 실체를 보도록 훌륭한 길잡이가 되었습니다. 박수를 보내 드리고 싶은 분들이 있습니다. 루이스를 루이스답게 이 시대의 옷을 입혀서 계속해서 탄생시키시고 계신 분들입니다. 편집과 디자인 그리고 번역으로 수고하시는 분들입니다.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 드립니다. 아마 천상에서 실체를 맛보면서 누리고 있을 루이스 또한 저와 같이 뜨거운 박수를 보내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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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은 우리를 위한 것이다!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책을 멀리하다가 C. S. 루이스의 새 책이 나왔다기에 바로 친구를 통해 주문을 했다. 최근의 건강치 못한 나의 신앙에 그의 고백이 일격을 가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고, 나 또한 건설적으로 반응하리라 생각했다. 몇 년 전 [순전한 기독교]를 통하여 지적 자살을 포기하고 나 개인의 신앙을 정립하게 된 이후 루이스는 그 누구보다도 나를 이끌어주는 영적스승이기 때문이다. 루이스의 책들을 보면 힘이 솟고 충분한 위로를 받는다. 그의 글은 너무도 솔직하고, 때론 너무나 당돌하다. 그러나 그러하기에 그 누구보다도 마음이 간다. 다윗이 시편을 통해 그의 모든(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생각들과 감정들을 쏟아내며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했던 것처럼 루이스 또한 그렇다. 때문에 나도 루이스의 글을 읽으며 가려웠던 부분들을 시원하게 긁는다.

몸부림친다. 하하 웃는다. 며칠 전 청년부 M. T. 중에 한 후배에게서 이런 문자를 받았다. ‘가장 위대한 교훈은 고통에서 나온다.’ 그 말에 동의는 하면서도 고통에도 과연 정도가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상대적이지 않을까? 서로의 경험이, 환경이, 배경이 너무나 다르지 않는가? 어쨌든 나는 그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의 슬픔을 다 느낄 수 없다. 그러나 그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 아버지와 자녀, 주인과 종의 관계 모두에서 볼 수 있는 인격적 유대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 사람들이 루이스를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나 우리나 모두 하나님을 온전히 알지 못한다. 그분의 마음을 다 느낄 수 없다. 그러나 고통을 통해 우리는 그분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다져 나간다. 루이스는 그것을 더욱 명료하게, 또 솔직하게 드러냄으로써 우리의 손을 잡고 앞서 걸어가는 따뜻한 형과도 같다. 루이스의 자전적 이야기인 이 책에서 그는 슬픔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에 다가가는 영적순례의 길에 서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눈물로 눈이 흐려져 있을 때는 어느 것도 똑똑히 보지 못한다.’ 구하여도 너무 절박하게 구하는 자는 얻지 못한다며, 마치 물에 빠진 사람처럼 닥치는 대로 붙잡고 거머쥐니 도와줄 수 없는 거라고, 아마도 반복된 외침 때문에 우리 귀가 어두워져 정작 듣고 싶어 하는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며 그의 마음을 쏟아낸다(p.70, 71).

고통의 문제를 앞에 두고 있는 인간은 (거의) 항상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 회의를 갖기 시작한다. 과연 존재하시는가? 또 그 분은 선하신가? 악하신가? 사랑이 있으신가? 등의 질문들도 단골메뉴다. 어디에 계시는가? 왜 하필 이런 때만 되면 숨어 계시는가?...... 예전에 어디서 본 글이 생각난다. (루이스도 짤막하게 언급했지만) 구조원들은 사람이 물에 빠졌을 때 결코 서두르지 않는단다.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잡으려고 할 때 구하게 되면 같이 빠져 죽을 수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사람의 발버둥이 끝나갈 무렵에, 가라앉기 막 시작할 무렵에 뛰어든다고 한다. 물론 하나님이야 구하려 하시다가 같이 빠져 죽는 일 같은 건 없겠지만, 참 깊은 생각을 하게 하는 얘기였었다. 내가 살아보겠다고, 헤쳐 나가보겠다고 발악을 할 때에는 구경? 만 하시다가 다 죽게 될 때에 나를 건지시는 하나님……. 하나님과 고통, 아내 조이에 대한 슬픔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하던 그가 책 중반 이후에 이런 고백을 하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 믿음이나 사랑의 자질을 알아보시려고 시험을 하시는 게 아니다. 그분은 이미 알고 계시니까. 모르는 쪽은 오히려 나였다. - p.78’ 무릎을 탁 쳤다. 그리고 무릎을 꿇었다. 그렇다. 시험이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정말로 다 알고 계시니까. 그 시험이란 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다. 욥기 처음도 이와 같다. 하나님은 우리(욥)를 더욱 명확히 아시고자 시험을 허락하신 것이 아니셨다. 사탄에게 또 우리에게 우리 자신(욥)이 누구인지, 당신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보여’주고 싶으신 것이다. 그리고 보여주셨다(주신다). 루이스는 이 여정들을 통해 다음과 같은 깨달음을 얻는다. 실체와 이미지는 엄연히 다른 것이라는 것을.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를, 아내 조이에 대한 생각이 아닌 조이 자체를, 우리 이웃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 우리 이웃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이미지가 아닌 실체를 사랑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실체가 아닌 이미지를 자꾸 그리고 생각하기 때문에 눈물이 가득한 눈처럼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음의 그의 고백은 내게 채찍과도 같았다. ‘우리는 같은 방에 있는 산 자들을 향해 종종 이러한 실수를 저지르곤 하지 않는가? 그 사람 자체에게 말 걸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마음속에 만든 대략의 그림에다 대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우리가 미쳐 그 사실을 깨닫기도 전에 그는 멀찌감치 떨어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 p.96’ 그의 생각들을 거의 정리해가면서 루이스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고통과 슬픔 가운데 있을 때에 던지는 질문들은 어쩌면 하나님께 이렇게 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1만일 안에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들어 있나? 노란 색은 사각형인가, 둥근 모양인가? - p.98’ 그의 책 [고통의 문제]와는 또 전혀 다른 느낌이다.

이 책을 통해 나는 내 생각의 틀을 또 하나 부수었다. 내가 바라고 믿어야 할 대상은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 그 자체임을, 내가 사랑하고 섬겨야 할 대상은 이웃에 대한 나의 생각들이 아니라 이웃 자체임을 본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신다. 내가 큰 슬픔을 느낀다거나, 극심한 고통 중에 있는 중에라도 하나님은 당황하시거나, 놀라지 않으신다. 그분은 그분께서 어떻게 일하실 것 까지 다 준비해 놓으셨고, 또 다 아신다. 물론 여전히 나는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분명하다. 결코 필요치 않은 경험은 내게 허락하지 않으실 거라는 것을. 이제 중요한 것은 내 눈물이 나로 하여금 제대로 보지 못하게끔 하면 안 되겠다는 것이다. 물론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시는 내 아버지께 나의 모든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생각으로 나의 전인을 인도한다면 도대체 나는 무엇이 되는 것인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 분이 날 사랑하시고, 나 또한 그 분을 사랑한다. 이것으로 족하다. 너무 감격스러울 뿐이다. 내게 주어지는 것이 그 무엇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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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이 글은 좋은 서평이 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글을 써내려가기도 전에, 벌써 이 글은 나만의 짧은 슬픔 고백록이 될 것 같은 느낌입니다. 며칠 전 이별의 아픔이 내 마음을 허전함으로 도려내었습니다. 첫 사랑의 처절한 실패로 움츠러들고 고통스러웠던 나날들. 그로 인해 죽음을 넘나들며 병마와 싸워야 했던 시간들. 의지할 것 없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았더니 그 고통 속에서 내 신음 소리 같았던 기도의 약속을 들으시고 끝내 내 안의 '죽음에 이르는 병'을 몰아내며 '신실하신 하나님'으로 내 앞에 나타나셨던 그 분. 주님은 그렇게 얼음장처럼 차가운 내 마음을 여셨습니다.

주께서 직접 안겨주신 새 생명의 감격. 그러나 한때 나를 죽음까지 몰아갔던 그 '사랑'이란 문제는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 있었기에 나는 기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그 기도의 제목이 6년을 넘기며, 예기치 못한 설렘이 다시 마음속에 깃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미 한 차례 나를 죽음으로 몰아갔던 고통스러웠던 '사랑'의 실패가 다시 찾아올까봐 그랬습니다. 그럼에도 그 사람과의 만남은 더욱 가까워졌습니다. 그럴수록 나는 더욱 더 기도에 매달려야 했습니다. '주님! 어찌 내 마음을 이렇게 격동케 하시나이까?' '주여! 내 마음을 잡아주소서.' '주님! 내게 다가오는 저 사람이 진정 당신의 뜻입니까?' 그런 기도의 물 음속에서 하나님은 내게 교재의 풍성하심을 허락 하셨습니다. 나는 점점 내게 찾아온 설렘의 행복 속으로 걸어갔습니다. 그 기쁨은 과연 꿀보다 달았으며, 내 눈 앞에 천국이 펼쳐지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도 잠시, 결국 하나님은 야속하게도 기도로 기다려온 그 사람을 제게서 떼어 놓았습니다. 그 사람이 떠난 자리에는 '아직 때가 아니니라…….'라는 두 글자만 선명하게 남아있었습니다. 기도로 시작한 만남이었고, 교제하는 시간동안 모든 것을 주님께 물어봤기에 처음에는 이별의 아픔이 그리 실감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날수록 나는 더욱 절박해져 갑니다. '거의 기적과도 같았던 일시적인 회복 등등을 통하여 우리가 믿게 되었던 희망, 심지어는 희망하도록 강제되었던 부분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한 걸음 한 걸음 우리는 '동산의 길을 걸어 올라갔다.' 하나님은 가장 자비로운 듯 보일 때마다 실은 다음 번 고문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이다.

(헤아려 본 슬픔 p.52) 내게 설렘의 행복을 허락 하셨을 때, 하나님은 내 오랜 상처를 치유하시는 듯 했습니다. 기적 같은 회복이 믿어졌고 또 기적 희망했습니다. 아니 희망하도록 강제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장 자비로워 보일 때, 실은 더 큰 고문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나는 거의 언제나 그녀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헤아려 본 슬픔 p.38) '그녀가 없다는 사실은 마치 하늘과 같아서 모든 것들을 뒤덮고 있다.' (헤아려 본 슬픔 p.28)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생생하다. 그 목소리를 생각하면 나는 또다시 훌쩍이는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다.' (헤아려 본 슬픔 p.33) 아직도 많은 시간을 그녀 생각으로 채웁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제 마음속에 생생하게 남아있지만, 나는 남아있는 그 선명한 목소리로 인해 더욱 슬퍼집니다. 그리고 그 슬픔은 마치 하늘처럼 나의 세상을 덮고 있습니다. '오늘밤에는 철부지 슬픔이 지옥처럼 다시 입을 벌린다. 실성한 말들, 비탄에 젖은 후회, 위장의 울렁거림, 악몽 같은 비현실. 눈물이 앞을 가린다.' (헤아려 본 슬픔 p.83) 여전히 그녀는 제 꿈속의 주인공이 됩니다. 슬픔은 두려움과 같은 느낌입니다. 오늘밤 슬픔은 지옥처럼 다시 입을 벌리고 달려듭니다. 또다시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나의 수많은 생각과 느낌, 수많은 행동들은 H를 향한 것이었다.

이제 그 목표물이 사라졌다. 나는 습관적으로 활에다 화살을 메기지만, 다음 순간 목표물이 사라졌음을 깨닫고 활을 내려놓아야 한다. 너무나 많은 길들이 H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어 나는 그 중 하나를 택한다. 그러나 이제는 건널 수 없는 경계 표지판이 길을 가로막고 버티고 있다. 한 때는 그렇게 많은 길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만큼 많은 막다른 길로 변해 버렸다.' (헤아려 본 슬픔 p.72~73) 나의 수많은 생각, 느낌과 행동들이 아직 그녀를 향하고 있지만, 이제 나의 목표물이 사라졌습니다. 습관적으로 가슴 벅찬 이 마음을 다시 그녀에게 주려고 하나, 그 순간 그녀가 사라졌음을 깨닫고 벅찬 마음 그대로 내려놓아야 합니다. 예전에는 모든 생각이 그녀에게로 이어지게 되어 있었지만, 이제는 모두 건널 수 없는 길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이러실 거면 왜 제게 교재를 허락 하셨습니까?' '도대체 당신의 뜻은 무엇이나이까?' 힘껏 외쳐보지만 그러나 주님은 제게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루이스도 이렇게 부르짖었나 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 행복할 때는 행복에 겨워서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너무 행복해서 그분이 우리를 주장하시는 게 간섭으로 여겨지기조차 하는 그때.…… 그 다른 모든 도움이 헛되고 절박하여 하나님께 다가가면 무엇을 얻는가? 면전에서 쾅 하고 닫히는 문.…… 그러고 나서는, 침묵. 돌아서는 게 더 낫다. 오래 기다릴수록 침묵만 뼈저리게 느낄 뿐.' (헤아려 본 슬픔 p.22) 루이스의 글이 오늘따라 하늘에 대고 외치는 저의 목소리 같습니다. 아무리 외쳐도 내 면전에서 쾅 하고 닫히는 문. 그리고는 침묵. 차라리 돌아서는 게 낫습니다. 오래 기다릴수록 침묵만 뼈저리게 느낄 뿐. '내게 종교적 진리에 대해 말해 주면 기쁘게 경청하겠다. 종교적 의미에 대해 말해주면 순종하여 듣겠다. 그러나 종교적 위안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 '당신은 모른다.'고 나는 의심할 것이다.' (헤아려 본 슬픔 p.46) 나를 위안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그 어떤 믿음의 말들로 나를 위로하려 해도, 내 마음속의 아픔을 덜어내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전히 아파하리라.' (헤아려 본 슬픔 p.81) 많이도 아팠습니다. 그리고 또 그렇게 아파할 것입니다.

아픔에 충실하고 싶습니다. 이 아픔 속에 하나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격의 하나님께서 나 혼자 울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 울고 계십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눈물을 허락하신 이유입니다. 슬플 때 마음껏 울어라 하신 것입니다. 언젠가 하나님께 물을 수 있는 날에 저는 하나님께 이렇게 물어볼 것입니다. '하나님! 그때 저와 함께 우셨죠?' '하나님을 바라볼 때, 내 마음은 더 이상 닫힌 문에 부딪치지 않는다. H를 바라볼 때, 이제 더 이상 공허한 진공을 만나게 되지 않는다.' (헤어라 본 슬픔 p.90) '하나님 앞에 이러한 질문을 던질 때 나는 아무 대답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다소 특별한 종류의 '묵묵부답'이다. 잠긴 문이 아니다. 외려 조용하고 분명 동정적인 시선 같은 것. 거절의 뜻으로 머리를 가로저으시는 게 아니라, 질문을 유예하시는 것 같은. '아들아, 잠잠하거나. 너는 이해하지 못한다' 하시는 것 같은.' (헤아려 본 슬픔 p.98) 글이 끝나가며 나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자 내 마음은 더 이상 닫힌 문에 부딪치지 않습니다. 멀어진 그녀를 바라볼 때 더 이상 공허한 진공을 만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어떤 특별한 종류의 침묵임을 알았습니다. 거절의 뜻으로 하시는 침묵이 아닙니다.

다만 아직은 질문을 유예하고 계실뿐입니다. 아직 내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내게 이렇게 말씀하시려나. 봅니다. '아들아, 잠잠하거나. 너는 이해하지 못한다.' '이 기록들은 나와 H와 하나님에 관한 것이다.' (헤아려 본 슬픔 p.90) '하나님에 대한 내 생각이 아닌 하나님 자체를. H에 대한 내 생각이 아닌 H 자체를.' (헤아려 본 슬픔 p.96) 처음에 드린 약속처럼, 서평이 아니라 창조적 모방으로 지은 저의 고백이 되었습니다. 이 글은 제가 써내려간 짧은 슬픔입니다. 그리고 나와 그녀, 그리고 하나님에 관한 것입니다. 멀리서 바라본 슬픔으로 인해 하나님에 대한 내 생각이 아닌 하나님 자체를, 그리고 그녀에 대한 내 생각이 아닌 그녀 자체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차마 다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을 헤아리며, 아름다운 글로 그려낸 고인 C. S Lewis에게 삼가 경의를 표합니다. 슬플 때 슬퍼하게 하시며, 항의하고 싶을 때 항의할 수 있는, 그리고 모욕과 비난까지 다 받아주신 하나님. 무엇보다도 나와 함께 울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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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조심해서 읽어야 할 책이다. 루이스의 다른 저작을 읽어본 적이 없거나 신앙에 대해 깊은 고민이 없었던 이라면 이 책을 안 읽는 게 낫다. 적어도 이 책은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와 ‘예기치 못한 기쁨’ 정도는 읽고 난 후에 읽는 게 옳은 책이다. 만약 그 두 권의 책을 읽지 않고 이 책을 읽는다면 이 책은 슬픔에 빠진 어떤 이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수준, 심한 혼란 속에서 순간순간의 감정들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저자의 의식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수준 이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이 책을 읽기 전에 이 책의 저자가 20세기가 나은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였고 그가 어떻게 신앙인이 되었는지에 대해 밝힌 ‘예기치 못한 기쁨’과 고통의 실존적 의미와 현실적 의미들에 대해 고찰한 ‘고통의 문제’라는 책을 통해서 그가 가지고 있는 명쾌한 신과 고통과 신앙에 대한 체계에 감탄해 본적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단순한 슬픔의 기록 이상의 가치로 당신을 사로잡을 것이다. 모차르트에 대한 전기에서 모차르트가 그의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한마도 말도 하지 못하고 곧장 피아노 건반으로 자신의 슬픈 마음을 표현했었다는 이야기를 읽었었다. 감정에 대해 표현하는 법, 특별히 엄청난 슬픔에 대해 표현하는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 저자는 그가 가지고 있던 유일한 감정의 분출구였던 ‘글쓰기’를 택한다. 그리고 아내를 잃어버린 슬픔에 대해 기록하기 시작했다.

거의 대부분의 작가는 독자에게 읽혀질 것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쓰지만 이 글에는 그런 냄새가 없다. 철저하게 일기이다. 저자의 감정이 어떻게 변화되어갔고, 그 감정에 대해서 최대한 솔직하게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느 한 구석에도 독자를 위한 배려라고는 찾아 볼 수 없다. 그렇기에 이 책은 읽기가 어렵다. 이 책은 애당초 책이 아닌 것으로 써졌기 때문이다. 집안 곳곳에 굴러다니던 노트에 감정이 밀려올 때마다 적게 된, 이 ‘슬픔의 일기’에는 그렇기에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이며 지성인의 상징적 존재였던 저자의 이름에 걸맞은 깔끔하고 체계적인 무엇이 아니라 철저하게 솔직한 한 인간(범인)의 ‘슬픔’이 그려져 나오고 있다. 4부로 구성된 (실제로 4권의 노트에 낙서처럼 적혀진) 이 글들은 시간의 순서대로, 그 아내 조이가 죽은 직후부터 꽤 많은 주가 지나서 슬픔이라는 감정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상태에 이르는 과정까지의 내용들의 시간의 순서대로 기록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슬픔에 빠진 이들의 범인의 글이 그러하듯 논리적 구성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의 글이지만 그의 글답지 않다. C. S.루이스를 좋아한다. 그가 가지고 있던 명증함을 좋아한다.

서구에서 나온 거의 대부분의 기독교 서적 속에 나오는 루이스의 글 속에 나와 있는 글에 대한 인용들을 보며 지적인 신앙의 성숙의 과정을 걸을 수 있었다. 자신의 영적인 저서전인 ‘예기치 못한 기쁨’에서조차 저자는 자신의 명쾌한 논리와 글쓰기의 과정을 보여주었고, 쉽게 읽히나 결코 쉬운 책이 아닌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조차 저자의 탁월성을 경험하며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헤아려 본 슬픔’을 통해서는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였던 그가,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 그토록 명쾌한 글을 남겼던 그가, 어느 날 자신에게 찾아온 사랑하는 이의 상실이라는 주제 앞에서 비참할 정도로 좌절하고 슬퍼하는 모습에서 그가 그토록 많은 이에게 증명해 오던 ‘하나님’에 대해서 그토록 회의적인 언어들을 남발하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살아있는’ 루이스의 마음을 접할 수 있었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그래서 슬플 수도 있고, 울 수도 있고, 의심할 수도 있는 ……. 그런 인간 루이스를 만날 수 있었다. 약 두 시간정도 루이스와 함께 슬픔의 바다에 빠져 있었다. 감정적으로 급격하게 찾아오는 통곡이 잦아들고, 차츰 그의 이성이 활동하기 시작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실이라는 현실을 점점 더 깊이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루이스를 봤다. 자신이 평생을 들여 변증했던 하나님에 대해서조차,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서조차 의심하며 하나님을 향해 ‘닫혀버린 문’이라고 1부를 통해서 말하던 루이스가 4부 끝에서 “저는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롭습니다.”라고 말했던 아내 조이의 목소리를 상기함으로 하나님을 향해 눈을 돌리는 것으로 자신의 ‘슬픔의 노트’를 마감된다.

이 책만 가지고는 루이스가 그를 혼동에 빠지게 한 슬픔에서 완전히 벗어났는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졌는지에 대해서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이후에 이 글들이, 비록 가명이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읽혀지기 위한 글로 출판되었다는 사실에서 나는 루이스가 이 문제에서 답을 찾았을 것이라 상상한다. 이 책은 모든 슬픔에 대해서, 또는 사별의 아픔을 경험한 이들을 위해서 쓰인 책은 아니다. 이 책이 슬픔의 교과서도 될 수 없다. 그러나 이 책은 정말로 용감하게 자신의 솔직한 감정에 대해서 하나의 숨김도 없이 기록된 글이다. 이 솔직한 용기가, 결국에 이 슬픔 속에서 더한 가치인 사랑을 찾게 해 주었고, 예기치 못한 슬픔을 안겨준 신에게서 사랑의 하나님을 찾고, 의심에서 믿음으로 옮겨가게 한 힘이었다. 감춰두고 꼭꼭 숨겨둬야 했었을 루이스의 ‘슬픔의 일기’가 내 손에서 읽혀졌음에 감사하다. 저자의 여러 단면 중 가장 보고 싶었던 부분을 본 것 같았고, 그의 슬픔을 공유하며 그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슬픔을 받아들이는 이론적 단계로서가 아닌 솔직한 한 사람을 통해서 슬픔 속에서 믿음으로 나아가는 여정을 함께 경험하는 귀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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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신으로 살다 59세에 결혼한 루이스의 사랑하는 아내 조이를 암으로 떠나보낸 뒤 수필 식으로 쓴 루이스의 수필이다. 이 책을 보며 루이스같이 신학적 이론이 빠듯한 사람일지라도 결국은 인간은 인간이구나 하는걸, 즉 인간의 한계를 느꼈다. 루이스는 자신이 쓴 '고통의 문제'라는 책에서 고통의 의미와 또 그것이 주는 유익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던 그도 커다란 고통(슬픔) 앞에선 어쩔 수 없었다. 대부분의 그의 저서에서 나오는 논리적인 문체보다는 감정을 표현하는 감성적인 문체가 쓰인 책은 유일하게 이 책인 듯싶다. 그만큼 루이스는 힘들었나보다. 하지만 그는 그이 이론대로 그 기회를 통해 하나님을 더 깊이 체험하고 다가갔음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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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아려 본 슬픔>은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교수이자 문학가였던 C. S.루이스가 58세에 결혼한 아내를 사별하고 쓴 글이다. 루이스란 사람을 처음 알게 되었던 것은 고등학교 시절 보았던 <섀도우랜드(Shadowlands)>라는 영화 때문이었다. 옥스퍼드의 늙은 교수가 미국 여류 시인을 만나게 된다. 처음에는 영국 국적을 얻게 해주려 위장결혼을 하지만 그녀는 곧 암에 걸리게 되고, 그제야 노교수는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평소에 고통의 의미를 강연하고 다녔던 그였지만 고통 속에 신의 뜻이 있음을 외치고 다녔던 그였지만 진정 누군가를 사랑하게 됨으로서 그리고 그 사랑만큼 아픈 고통을 겪어 보면서 자신이 미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의미로 외쳐 왔던 단어들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는 과정을 그린 영화로 기억된다.

앤소니 홉킨스의 열연이 참 인상적이었고, 대사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이 오랜 잔상과 함께 남아있던 영화였다. 나중에 대학에 오면서 이 영화의 주인공인 C. S.루이스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 처음 읽어 보았던 책이 <스크루테이프의 편지(Screwtape's letter)>이었는데 충격적이기까지 한 구성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선배 악마 스크루테이프가 환자(Patient:인간)를 유혹하는 방법을 후배 악마 웜우드에게 '전수'하는 내용인데, 단순해 보이는 스토리 속에 인간의 심리를 심도 깊게-그것도 해학과 유머를 곁들여- 다루는 기술에 나도 모르게 반했던 책이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를 읽으면서 진심으로 이 작가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이 사람의 영향력과 커다란 그림자를 처음으로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이 책은 일종의 기독교 변증론인데 변증론이란 걸 별로 좋아하지 않던 나로서는(그 빈약한 논리와 억지성에 질리는 적이 많았으므로) 가장 거부감 없이 그리고 설득 당하며 읽었던 책이었다. 이 책의 내용은 2차 대전 당시 BBC방송으로 루이스에 의해 직접 강연되었다고 하는데,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책을 읽어 보면 명확하다. 죽음을 항상 의식하고 있던 당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이렇게 잘 알려줄 수 있는 책은 아마도 어디에도 없었을 것이다. 그 뒤로 <고통의 문제(problem of pain)>,<천국과 지옥의 이혼>,<예기치 못한 기쁨(Surprised by Joy)> 등 루이스의 책을 읽으면서 점점 그의 글에 빠져들었던 것 같다. 고도의 논리성 속에 감동을 담아 낼 수 있는 천재성, 깊은 철학을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담아 낼 수 있는 천재성에 감탄하면서 말이다.

그것은 루이스의 책이라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점이다. <섀도우랜드>를 보면 동료 교수들이 루이스를 '어려운 문제를 질리도록 쉽게 대답하는 사람'이라고 놀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은 진정으로 사실이다. 그의 책을 읽으며 지적인 만족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루이스가 주는 커다란 선물일 것이다.(물론 얻기 힘든 선물이긴 하다…….)

논리적이고 딱딱하게 까지 보이는 글을 쓰곤 했던 이 작가가 격정적인 사랑의 주인공이었다는 점은 매우 새롭게 다가온다. 중세 스콜라 철학을 집대성한 아벨라르의 철학 속엔 엘로이즈와의 가슴 아픈 사랑이 담겨 있듯이, 루이스의 글 속에 있는 섬세함의 원인이 바로 이 사랑이다. 루이스는 평생 자기만의 세계 속에 살던 사람이다. 그는 자기만의 질리도록 단순한 생활을 너무도 사랑했으며, 평생 그 세계에서 빠져나오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무신론의 껍질을 깨고 유신론을 거쳐 기독교인이 되기까지 그렇게도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것도 스스로가 말하듯이 옥스퍼드의 기숙사에서 씩씩거리며 하나님을 겨우 인정하였을 정도로, 끌려가는 와중에서도 발길질 하고 몸부림 치고 화를 내면서 도망갈 기회를 찾을 정도로 괴로워하면서 말이다. (루이스의 회심과정은 자서전 <예기치 못한 기쁨>에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런 루이스에게 조이(루이스의 아내)는 자기만의 세계에서 빠져나올 용기를 주었던 사람이었다. 그에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회심 이상의 의미를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깨기 어려운 껍질을 깨고 나왔건만 그곳까지 그를 인도했던 사랑의 대상이 곧 눈앞에서 사라지고 만다.

 

그때의 상실감과 공허감 그리고 슬픔을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 것인가…….

<헤아려 본 슬픔>에서는 이 슬픔이 질리도록 솔직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렇게 아프게 할 거면서 왜 껍질 속에서 나를 그렇게 애써 끌어냈냐고…….

 

그렇게 울부짖는 솔직함이 이 책 속에 내내 메아리 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슬픔에 결코 압도당하지 않는다. 슬픔을 얘기 하지만 슬픔에 지지 않고, 하나님의 침묵을 얘기하지만 침묵하시지 않는 하나님을 얘기한다. 그런 역설의 아름다움이 이 책에 한없이 반했던 이유인 것 같다. <헤아려 본 슬픔 >은 루이스의 인생의 마지막에 쓰인 글에 속한다. 그 자체로서도 아름다운 글이지만 루이스의 인생과 그가 썼던 책들을 읽어 보고 이 책을 읽어 본다면 좀 더 깊은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영화<섀도우랜드>를 보고 읽어보면 책 속의 절규들이 훨씬 사실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사랑하는 게 이렇게 아픈 줄 알면서 왜 사랑을 시작했을까…….

답은 모른다. 다만 내가 살아온 인생을 보여줄 뿐……. “

<섀도우랜드>에서 루이스가 내뱉은 말이다. <헤아려 본 슬픔>에서 여러분은 그 답을 찾으려 노력하는 상처 입은 영혼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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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아픔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루이스의 심정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소리가 자신에게도 있었음을 알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사랑하는 아내를 떠나보내고 괴로워한다. 외로워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주변에 있길 원하지만 아무도 그를 상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그의 고백을 접할 때는 자신의 심리적 표현을 잘하는 그의 글 쓰는 특징을 잘 보여주기도 한다. 이 책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성도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책이 아니다. 한 개인이 아내를 잃은 슬픔을 솔직한 감정으로 써내려간 영적 슬픔의 체험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슨 정보를 얻고자 하는 자는 재미없을 것이지만 인생의 깊이를 알고자 하는 자는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은 루이스의 책 중 가장 짧은 책이다. 그러나 기독교 변증가인 루이스의 심리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자서전의 한 부분이라고 할까? 그의 심리적인 면을 글로 표현하는 탁월한 집필가의 면을 엿볼 수 있는 책으로서 괜찮은 듯싶다. 이 책에서는 C. S. 루이스의 다른 책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여리고 헝클어진 내면과 불안한 심리 상태에 어쩔 줄을 모르는 한 중년 남자를 만나볼 수 있었다. 

하나님의 크신 존재와 선한 뜻 가운데 어린아이처럼 자기중심적으로 원하는 것들을 달라고 떼를 쓰던 신앙생활을 하다 예기치 못하게 어려운 일을 당해 신앙을 잃어버릴 위험에 처한 일들이 내게도 있었다. 하나님이 정말 계시다면 왜 이렇게 내게 잔인한 일들을 허락하실까? 이것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이며 누구를 위한 일일까? 하며 몸부림치며 정신을 놓아버리고 싶을 만큼 괴로웠던 그 시간에서야 비로소 하나님 앞에서 적나라하게 자신을 볼 수 있었고 정직하게 인정할 수 있었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삶에서 인정하는 값진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중년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서야 만나게 된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 앞에 20세기 최고의 지성인 C. S. 루이스가 무기력하고 잔인하리만치 무방비 상태로 무너져 내리는 것을 여과 없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무너진 폐허 속에서 죽음을 통한 인간의 유한성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다시 발견하는 겸손한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저자는 이 책을 자신과 같이 하나님 앞에 처절하게 울부짖었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 썼다고 했다. 그의 순수한 동기대로 이 책은 그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루이스도 nfl와 같이 사람임을 알게 하는 동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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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잭('C. S루이스'의 애칭)의 책들 중에 꽤 독특한 것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잭이 엮어간  '욥기'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이나 책 치고 독특하지 않은 것은 별로 없는 것이지만…….굳이 작품으로 만들려는 의도보다는 당시의 슬픔을 일기 형식으로 주저리주저리 써 놓은 글이다. 아니 바로 일기 그 자체를 책으로 역은 것이다.  '사랑하는 이여, 당신이 떠나면서 얼마나 많은 것을 함께 가져가 버렸는지 알기나 하오? 당신은 내게서 나의 과거조차 앗아가 버렸소. 우리가 함께하지 않았던 과저마저도.'-89

어떤 슬픔에 대한 것인가를 한번 엿보았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소득이 있다. 잭이 이 글은 한마디로 자신이 밝힌 것처럼 한편으로 보면 실패작으로서 작품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무엇을 주장한다거나 표현하려는 것이 아니라 의식과 생각의 흐름을 그대로 배설하듯이 마구잡이로 토해 놓은 바가 없지 않다. 그래서 더 좋은 책이다. '여기까지만 끼적거리기로 결심한다. 이런 목적으로 공책을 새로 사지는 않을 것이다. 이 기록은 나를 완전히 무너지지 않게 하며 감정을 배출하는 출구로서, 어느 정도 좋은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내가 생각한 또 다른 목적이 있었는데, 이제 와서 보니 잘못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겠다. 나는 내가 어떤 상태를 묘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슬픔의 지도를 그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슬픔은 '상태'가 아니라 '과정'이었다.'-87쪽

책은 네 묶음으로 구성되었는데 아마도 대부분의 독자는 세 번째 묶음까지는 매우 혼돈스러울 것이다. 잭이 그랬던 것처럼…….하지만 잭의 본심은 마지막 네 번째 묶음에 있었다. '찬양이란 언제나 그 안에 기쁨을 담고 있는 사랑의 양식이다. 올바른 순서로 찬양해야 한다. 주신 분으로서 하나님을, 그리고 내게 주어진 선물로서 그녀를, 우리가 아무리 찬양의 대상에게서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찬양함으로써 우리는 그 대상을 향유하게 되지 않던가?'-90쪽

 이 책은 반드시 머리말과 해설(더글러스 그레셤의 설명)이 있어야 좋은 책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매 들린 웬글의 머리말에서도 이 책을 잘 설명한 것이 있다.   '또한 루이스가 성난 목소리로 하나님께 고함지르고 회의하고 발버둥 치며 대들 용기가 있었던 사실에 감사한다. 이는 그다지 자주 권장되지는 않지만 건강한 슬픔의 일부이다.'-13쪽

 이 책에 있는 루이스의 글은 루이스이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먹혀들어가는 정말 고개를 꺄웃거리다가고 끄덕끄덕할 수 있는 책인 것이다. 해설에서 이 책에 대해 더 잘 말해 주고 있다.   '이 책은 자기 삶에서 가장 충격적인 슬픔으로 인해 감정적으로 마비되는 상태를 파악하고자 하는, 그리하여 종국에는 그러한 마비 상태를 딛고 일어서고자 하는 '한 사람'의 주의 깊은 시도를 적나라하게 펼쳐놓은 기록이다.'-110쪽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강하고 확고한 그리스도인인 루이스조차 격정적인 생각과 느낌의 회오리에 말려들었으며, 슬픔이 입을 적 벌리고 있는 깊은 틈새에서 구원을 찾아 어지럽게 헤치고 다녔음을 알게 된다.'-1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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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책꽂이에 꽂아 놓고 읽지 못했던 루이스의 작품을 오랜만에 집어 들었다. '헤아려본 슬픔'의 내용에 대하여는 루이스에 관한 다른 작품을 통하여 약간이나마 알고 있었으나 실제 책을 읽어가면서 한 사람의 고통 가운데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법으로 역사하시는지, 아니 극심한 고통가운데서 어떠한 방법으로 하나님께 위로를 받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루이스는 중년이 지나 만나게 된 이혼녀와의 결혼을 통하여 너무나 깊게 사랑하였던 아내를 잃고 견딜 수 없는 상실감에 빠진다. 상실감에 의한 고통은 지금까지 항상 자신과 동행하며 은혜로 이끄셨던 하나님에 대하여 꾸밈없는 원망을 내 뱉는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일관성 없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다가 말다가 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선하지 않거나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독설도 서슴지 않는다.  욥이 하나님을 향하여 '차라리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지 말지. 태어나는 날 차라리 죽게 해버리지.'하는 원망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심한 고통 중에 빠지면 애써 태연하려하며 위로하는 사람들에게 의연함을 유지하려 노력한다. 물론 그들의 위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함에도……. 

 이런 이들을 향하여 '나에게 죽은 아내가 하나님의 품속에 있다고 위로하지 말라'라고까지 말한다. 이미 다 알고 있지만 지금 상태에서는 자신에게 아무런 그런 지식도 그리고 위로도 도움이 되지 못함을 항변한다. 그렇다. 순간순간 일어나는 추억속의 사랑의 순간이 가슴 뭉클함에서 해방시킬 수는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세월이 약이다'라는 말을 하는 모양이다. 루이스는 이러한 감정에도 깊은 좌절을 겪는다. 혹시 자신이 누구보다 사랑한다고 하였던 아내에 대한 기억이 하나하나 소실되어 가 버릴 때 자신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감정이나 사랑이 한 낱 가식이나 과장에 불가하지 않았나 하는 불안이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렸는지 모른다.  그래서 일부러 아내와 함께 했던 곳을 찾기도 하고 아내와 함께하였던 상황을 떠 올려 보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그런 기억이 점점 희미해지는 것을 발견한다. 이러한 자신에 대한 두려움이 오히려 그 고통을 증가시켰다. 그러나 이미 죽은 자를 떠나보낸 사람들의 슬픔이나 추도 행위가 오히려 죽은 자를 더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 아내를 하나님의 평안에 떠나보낸다. 비로소 그는 아내에 대한 더 뚜렷한 생각과 함께하였던 기쁨을 누리는 자유를 얻게 된다. 그렇다. 우리는 너무 한 가지에 집중하므로 그 사실을 볼 수는 있으나 그 사실의 본질을 놓지는 경우가 너무 많다. 루이스는 어떻게 보면 자신의 정숙스럽지 못한 한 때의 감정이 노출시키기 싫은 부끄러운 단면이었을 것이나 이를 독자들에게 공개하므로 동일한 고통으로부터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고 자유롭기를 소망하는 마음이 이 책에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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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보는 3인칭 적 관점과 1인칭 적 관점

강영안 -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와 철학연구소 소장

 

C. S. 루이스는 고통에 관해 전혀 다른 두 권의 책을 썼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루이는 고통의 문제에 관해 이론적이고 객관적인 논의를 담은 책과 자신의 슬픔을 관찰한 책을 썼다. 앞의 책은 루이스가 마흔 두 살이 되던 해(1940년)에 「고통의 문제」(The Problem of Pain)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고, 뒤의 책은 원래 공책 네 권 분량의 소책자로 그가 죽던 해(1963년)에 가명(假名)으로 「헤아려 본 슬픔」(A Grief Observed)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두 책은 문체나 분위기나 태도에서 사뭇 다르다. 「고통의 문제」에서 루이스는 구체적인 죄를 회개하는 데서 나오는 슬픔, 따라서 구체적으로 자기 잘못을 바로 잡거나 남에게 끼친 해를 보상하게 만드는 슬픔이나 남을 향한 연민 때문에 솟아나 적극적으로 그를 돕게 만드는 슬픔이 아닌 한 슬픔은 정말 나쁜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아내 조이 데이비드먼이 죽자 이와 관계없는 슬픔을 그 자신이 마음껏 토로했다.

 

고통에 대한 두 가지 태도

루이스는 누구보다 절실하게 자신의 삶에 찾아왔던 예기치 못한 기쁨에 관해 말했던 저자였다. 그리고 그 기쁨을 누린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그러나 루이스는 속 깊이 뼈저리도록 슬픔을 안 사람이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것만큼 큰 슬픔과 고통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루이스는 서른 한 살의 나이(1929년)에 뒤늦게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그리스도인이 된 지 11년 만에 「고통의 문제」라는 책을 썼다. 그때는 고통이 마치 저만치 떨어져 있는 것처럼 거리를 두고 고통에 관해 논리적으로 신학적인 근거를 갖고 차근히 얘기했다. 루이스와 조이를 그린 영화 <새도우랜즈>를 보면, 루이스는 교회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꼭 행복하기를 원하시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사랑할 줄 알고 사랑받을 줄 아는 사람이 되길, 우리가 철들기를 바라시죠.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고통을 선물로 주시는 겁니다. 귀 기울이지 않는 세상을 깨우치려고 고통이라는 메가폰을 드신 겁니다! 라고 매우 열정적으로 강연하는 모습이 나온다. 「고통의 문제」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죄와 어리석음에 만족하며 지낼 수 있습니다. 최고로 맛있는 음식을 아무 생각 없이 퍼먹고 있는 대식가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쾌락조차 무시할 수 있는 존재임을 인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은 고집스럽게 우리의 주목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쾌락 속에서 속삭이시고, 양심 속에서 말씀하시며, 고통 속에서 소리치십니다. 고통은 귀 먹은 세상을 불러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입니다.”1

그러나 1961년에 조이가 암에 걸려 있음을 알면서도 결혼해 몇 년을 행복하게 지내고 그녀가 죽자, 루이스는 자신의 이 말을 잊은 듯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 다른 모든 도움이 헛되고 절박해 하나님께 다가가면 무엇을 얻는가? 면전에서 쾅 하고 닫히는 문, 안에서 빗장을 지르고 또 지르는 소리, 그러고 나서 침묵, 돌아서는 게 더 낫다. 오래 기다릴수록 침묵만 뼈저리게 느낄 뿐, 창문에는 불빛 한 점 없다. 빈집인지도 모른다. 누가 살고 있기나 했던가? 한때는 그렇게 보였다. 그때는 꼭 누가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지금은 정말 빈집 같다. 지금 그분의 부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그분은 우리가 번성할 때는 사령관처럼 군림하시다가 환난의 때에는 이토록 도움을 주시는 데 인색한 것인가?”2

조금 더 인용해 보자.

“대답은 없다. 그저 잠긴 문, 철의 장막, 텅 빈 허공, 절대적인 무의 세계만 있을 뿐, ‘구하여도 얻지 못하리라.’ 구하다니, 내가 바보였다. 지금으로선 그런 확신이 온다고 해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나 자신의 기도에 의해 야기된 자기 최면일 테니까.”3

“하나님이 광대 마냥 한순간 우리의 밥그릇을 채어 갔다가 다음 순간에 똑같이 생긴 다른 밥그릇으로 바꿔치기라도 하신다는 말인가? 자연조차 그런 광대 짓은 하지 않는다. 자연은 똑같은 음률을 결코 두 번 연주하지 않는다.”4

“오랫동안 채워지지 못했던 고귀한 허기가 마침내 맘에 맞는 음식을 만났으나 즉시 그 음식을 빼앗기고 말았다. 운명(아니면 다른 무엇이든)이란 대단한 능력을 만들어 내고선 곧 그 능력을 꺾는데 재미를 느끼는 모양이다. 베토벤은 귀머거리가 되지 않았는가. 우리의 기준으로 보면 심술궂은 장난이다. 비열한 얼뜨기가 저지르는 짓궂은 바보짓이다.”5

“나는 사실 우리가 덫에 갇힌 쥐가 아닐까 싶어 더 두렵다. 아니 더 나쁘게는 실험실의 쥐들인지도 모른다. 누군가 ‘하나님은 언제나 기하학적으로 행하신다! 라고 했다. 사실 ‘하나님은 언제나 생체 실험을 행하신다. 이면 어쩔 텐가?”6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에서 고통을 ‘내’가 당하는 고통도 아니고 눈앞에 있는 ‘네’가 당하는 고통도 아닌 마치 제 3자가 당하는 고통처럼 서술하지만, 「헤아려 본 슬픔」에서는 자신이 당하는 고통을 적나라하게 그린다. 3인칭 적 관점에서 한 서술과 1인칭 적 관점에서 한 서술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간혹 사람들이 말하듯이, 루이스는 정말 신앙을 버리고 하나님을 떠났는가? 하나님에 대한 생각과 고통에 관한 생각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는가?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구제할 가능성이 없는 자처럼, 친구로부터 마치 소망이 없는 자들이 하는 것처럼 그렇게 슬퍼하지 말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슬픔에 빠진 루이스에게는 마치 하나님이 부재한 분처럼, 아니면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외면하는 분처럼 보였다. 그러나 슬픔에서 조금씩 회복되면서 그의 생각은 다시 예전의 생각으로 이어진다. 이런 면을 보기 전에 「고통의 문제」에서 루이스가 고통을 다룬 방식을 잠깐 살펴보자.

 

「고통의 문제」에서 본 고통

루이스는 전통적인 변신론(또는 신정론, theodicy)의 문제 제기를 고통의 문제로 확인한다.

“하나님이 선하다면 자신이 만든 피조물들에게 완벽한 행복을 주고 싶어 할 것이며, 하나님이 전능하다면 그 소원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피조물들은 행복하지 않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선하지 않은 존재이거나 능력이 없는 존재이거나 선하지도 않고 능력도 없는 존재일 것이다.”7

이것은 고통의 문제를 ‘가장 단순하게 표현한 말’이라고 루이스는 말한다. 여기서 문제는 하나님의 전능함과 선함이 피조물의 불행과 어떻게 양립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루이스는 하나님의 전능함과 선함에 대해 두 장을 할애해 자세하게 논의한 다음에 인간의 악함과 타락을 다시 두 장으로 나눠 자세하게 서술한다.

그 다음에 비로소 인간이 경험하는 고통에 관해 다시 두 장으로 나눠 서술한 후 동물의 고통을 다루는 한 부분을 포함해 지옥과 천국에 관해 다룬다. 논의 순서만 보더라도 고통에 대한 루이스의 논의 방식과 태도가 드러난다. 몇 가지 핵심만 얘기해 보자. 문제가 되는 것은 (1)하나님의 전능, (2)하나님의 선하심, (3)고통의 원인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다.

 

1. 하나님의 전능함이란 하나님은 어떤 일이나 할 수 없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조차 불가능한 것, 말이 되지 않는 것은 할 수 없다. 예컨대 “하나님은 한 피조물에게 자유 의지를 주시는 동시에 안 주실 수도 있다”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상호 모순되는 일은 우리뿐 아니라 하나님도 할 수 없다. 하나님의 능력이 장애물을 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보기에 말도 안 되는 일은 하나님께도 똑같이 말도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8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삶의 환경으로 자연과 생존 조건을 주시고 자유 의지를 주셨다면 이것은 하나님조차도 바꿀 수 없다. 그래서 루이스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아무리 전능하시다고 해도 상대적으로 독립적이며 ‘가차 없는’ 자연을 창조하지 않고선 자유 의지를 가진 영혼들의 사회를 창조하실 수 없다는 점입니다.”9

이렇게 보는 이유는 불변하는 법칙과 인과적 필연성에 따른 결과 및 전체 자연 질서는 일상의 삶을 제한하는 한계인 동시에 그런 삶을 가능케 해 주는 유일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 질서 및 자유 의지와 맞물러 있는 고통을 배제한다는 것은 삶 그 자체를 배제하는 것과 같다”이다.10

 

2. 하나님의 선하심은 곧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며 하나님의 사랑은 그저 모든 것을 허용하는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루이스는 이렇게 말한다.

“꾸벅꾸벅 졸면서 여러분이 그 나름대로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연로한 할아버지의 인자함이나 양심적 치안 판사의 냉담한 박애주의나 손님 대접에 책임감을 느끼는 집 주인의 배려로서가 아니라 소멸하는 불로서, 세상을 창조해 낸 사랑으로서 작품을 향한 화가의 사랑처럼 집요하고 개를 향한 인간의 사랑처럼 전제적(專制的)이며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처럼 신중하고 숭고하며 남녀의 사랑처럼 질투할 뿐 아니라 꺾일 줄 모르는 철두철미한 사랑이다.”11

이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주된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물론 이 목적도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으로써 우리를 그분의 사랑이 ‘아주 기쁘게’ 머물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드시려는 데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12 그래서 왕비가 된 거지 소녀가 더러운 누더기를 걸치고 있으면서도 왕이 만족하기를 바라는 것이나 사람을 사랑하기를 배운 개가 야생 동물처럼 벌레 투성이에 더러운 몸으로 집안의 물건을 물어뜯으면서도 주인의 너그러움을 기대할 수 없듯이, 인간도 하나님이 거리낌 없이 사랑하실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질 때 비로소 진정한 행복이 인간에게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루이스에 따르면 인간에게 주어진 고통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존재로 빚어져 가는 데 기여한다. 이것이 루이스가 “인간의 고통과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조화시키는 문제는, 우리가 ‘사랑’이라는 말에 하찮은 의미를 부여하며 인간이 만물의 중심인 양 만물을 바라보는 한 결코 해결될 수 없습니다! 라고 한 까닭이다.13 그에 따르면 “피조물에 불과한 존재들로서 인간의 역할은 언제나 주체에 반응하는 객체, 남성에 반응하는 여성, 빛에 반응하는 거울, 소리에 반응하는 메아리”가 되는 것이며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활동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반응하는 것”(response, not initiative)이다.14

 

3.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고자 하는데 그 까닭은 우리가 자유 의지를 잘못 사용함으로써 아주 악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이스는 죄 문제를 아주 심각하게 다룬다. 고통은 곧 죄의 결과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근거를 루이스는 “인간은 처음 지음 받았을 때에 완전히 선하고 행복한 존재였지만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써 오늘날 보는 바와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다”는 데서 찾는다.15

단지 저 먼 과거뿐 아니라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을 인식하고 우리 자아를 인식하는 순간에 하나님을 자기의 중심으로 택하느냐, 자아를 중심으로 택하느냐 하는 ‘무서운 양자택일’의 길에 서 있고 자기를 선택함으로써 배운 사람이나 배우지 못한 사람이나 누구나 매일 같이 죄를 짓고 있다.16 이것이 모든 개별적인 죄들의 배후에 자리 잡고 있는 ‘근본적인 죄’이다.17

따라서 고통에 대한 루이스의 핵심적인 사상은 이것이다. 인간은 하나의 종(種)으로서 스스로 부패했기 때문에 이런 상태에서 우리에게 선이 되는 것은 우리를 치료하고 바로 잡으며 고통은 실제로 그와 같은 치료책이라는 것이다.18 그래서 루이스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메가폰으로서 고통이 혹독한 도구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또 고통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은 반항으로 연결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은 개심(改心)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악인에게 제공해 줍니다. 고통은 베일을 벗깁니다. 고통은 반항하는 영혼의 요새 안에 진실의 깃발을 꽂습니다. 만사가 잘 돌아가고 있다는 환상을 깨뜨리는 것이 고통의 효력 중에 가장 낮은 단계에 해당하는 첫 번째 효력이라고 한다면 두 번째 효력은 ‘지금 우리가 가진 것은 본질적으로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간에 전부 우리 것이며 그 이상은 필요치 않다’라는 환상을 깨드리는 것입니다.”19

이어서 세 번째 효력으로 루이스는 고통을 통해 비로소 우리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식적으로 선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을 들고 있다. 하나님께 자아를 완전히 양도하는 행위에는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라는 것이다.20 이처럼 루이스에게 고통은 분명히 목적이 있고 의미가 있는 것이다.

 

루이스는 신앙을 버렸는가?

이제 물음은 루이스가 젊은 시절의 생각을 말년에도 그대로 일관되게 유지했는가 하는 것이다. 「헤아려 본 슬픔」 1장과 2장에서 인용한 앞의 구절들을 보면 루이스는 자신의 생각을 완전히 바꾼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은 더 이상 선한 분, 전능한 분이 아니며 가학적인 신이고 음식을 주고선 다시 빼앗아 가는 광대, 멍청한 바보로 불리기도 한다. 심지어 ‘나쁜 신’으로 언급되기까지 한다.

“나쁜 신을 믿는 것이 합리적인가? 어쨌든 그처럼 나쁜 점을 가지고 있는 신을 믿는 것이? 우주를 다스리는 가학적인 신, 악의에 찬 얼뜨기(The Cosmic Sadist, the spiteful imbecile)를?”21

그러면서도 그 자신은 내심 이렇게 묻는다.

“왜 나는 마음속에다 이처럼 쓰레기 같고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남겨 놓는 것인가? 이렇게 하면 마치 내가 덜 느낄 수 있기라도 하는 양, 손바닥으로 느낌을 가리려 하고 있는 것인가? 이 모든 기록이, 고통이란 겪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자의 의미 없는 글쓰기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22

「헤아려본 슬픔」 3장과 4장에서 루이스는 1장과 2장의 기록에서 보인 태도를 수정한다. 특히 관심을 끄는 대목은 두 가지다. 하나는 혹시나 자신의 삶이 종이 카드로 쌓아올린 성채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하나님이 생체 실험을 하고 있는 자인지 아니면 질병을 고쳐주고자 하는 수의사인지 묻는 질문이다. 여기서 필자는 「고통의 문제」를 쓴 40대 초반의 루이스와 「헤아려 본 슬픔」을 쓴 60대 초반의 루이스 사이의 연속성을 본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루이스는 조이 데이비드먼의 죽음에 대한 슬픔은 사실 그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임을 자각한다. 암으로 고생했던 조이의 고통에 비하면 자신의 고통은 별 것이 아닌데도 자신의 고통만을 생각하고 그녀의 고통에 대해선 생각하지 못했음을 인식한다. 동시에 루이스는 조이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같은 종류의 것이었음을 고백한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 안에 상상 외에 다른 요소가 없었는지, 조이에 대한 사랑 안에도 이기주의 말고 다른 것은 없었는지 자문해 보지만 오직 하나님만 아실 것이라고 루이스는 토로한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나 조이에 대한 사랑도 카드로 만든 성채였음을 발견한다.23 그리고 결국 아무 것도 모르는 쪽은 자신이었음을 고백한다.

“하나님은 우리 믿음이나 사랑의 자질을 알아보시려고 시험을 하시는 게 아니다. 그분은 이미 알고 계시니까. 모르는 쪽은 오히려 나였다. 이 시험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피고석과 증인석 그리고 재판석에 모두 한꺼번에 앉아 볼 수 있도록 만드신다. 그분은 언제나 나의 성채가 카드로 만든 집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내가 그 사실을 깨닫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쳐서 무너뜨리는 것뿐이었다.”24

여기서 바로 젊은 시절 루이스의 목소리가 다시 울린다. 삶의 중심으로 자신에서 하나님에게로 옮기는 방법은 고통으로 삶을 뒤흔드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하나님은 수의사인가, 생체 실험가인가 하는 질문은 앞서 잠깐 언급한 하나님은 혹시 ‘나쁜 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과 관련이 있다. 이 생각은 결국 하나님은 생체 실험가가 아니라 병을 치료하기 위해 고통을 주는 수의사나 외과 의사 또는 치과 의사라는 생각으로 답을 얻는다.

하나님이 우리를 치료하고자 고통을 주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그렇게 믿으면 믿을수록 자비를 구하는 일은 아무 소용이 없음을 믿지 않을 수 없다. 외과 의사가 다정하고 양심적인 사람일수록 더욱 무자비하게 썩은 살을 도려낼 것이고, 만일 자비를 베풀어 애걸복걸하는 일에 꺾이고 만다면 그때까지 겪은 고통은 아무 소용이 없게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루이스는 만약 고통이 필요 없다면 신은 존재하지 않거나 악한 존재일 것이라고 단언한다. 만약 선한 신이 계신다면 이런 고통은 필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니 나는 그분이 두렵지 않아”라고 말하는 자는 생전에 치과에도 가보지 않은 사람이라고 루이스는 힐난한다.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에 고통을 주시고 고통을 통해 치료해 주신다는 것이다.25 조이는 올바른 영혼을 지녔으며 영민하고 칼과 같이 그 지성이 잘 닦인 사람이었지만 조이나 자신은 죄 많은 여자이고 남자이므로 아직까지 치유가 필요하고 박박 닦아내야 할 얼룩이 있는 존재라고 루이스는 고백한다.

 

                                                               

 

고통을 통해 루이스가 배운 것

자신의 고통을 통해 루이스는 두 가지 소득을 얻었다고 말한다. 하나는 하나님은 이제 자신에게 닫힌 문이 아님을 안 것이다. 그리고 조이를 바라볼 때 더 이상 공허한 진공을 만나지 않게 된다. 아니,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과 조이를 찬양하게 된다. 찬양이란 ‘그 안에 기쁨을 담고 있는 사랑의 양식’이며 우리가 찬양할 때 올바른 순서로 찬양해야 한다. 그래서 루이스는 주신 분으로서의 하나님을,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선물로서 조이를 찬양한다.26

조이는 루이스에게 마치 칼과 같이 뛰어난 지성을 소유한 존재였고 또한 들어가 보면 볼수록 깃들일 수 있는 정원과 같다고 토로한다. 루이스는 찬양을 통해 정원에서 정원을 가꾸는 분으로, 칼에서 칼을 만드시는 대장장이로, 생명을 주시는 생명의 근원으로, 아름답게 만드시는 아름다움의 근원으로 올라가는 경험을 한다.27

그러나 루이스는 예전처럼 그렇게 논리적으로, 합리적으로 고통에 대해 모두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더 이상 행동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이 하나님께 이런저런 질문을 던질 때 하나님은 역시 ‘묵묵부답’임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이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잠긴 문이 아니다. 외려 조용하고 분명히 동정적인 시선 같은 것, 마치 그분이 거절의 뜻으로 머리를 가로 저으시는 게 아니라 질문을 유예하시는 것 같은. ‘아들아, 잠잠하거라. 너는 이해하지 못한다’라고 하시는 것 같은.”28

그러면서 「고통의 문제」 마지막 장에서 천국을 다루었듯이, 루이스는 「헤아려 본 슬픔」이 끝나는 부분에서도 다시 천국을 말한다. “천국이 우리의 문제를 풀어 줄 것이나, 명백히 모순되는 C. S. 루이스는 고통에 관해 전혀 다른 두 권의 책을 썼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루이는 고통의 문제에 관해 이론적이고 객관적인 논의를 담은 책과 자신의 슬픔을 관찰한 책을 썼다. 앞의 책은 루이스가 마흔 두 살이 되던 해(1940년)에 「고통의 문제」(The Problem of Pain)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고, 뒤의 책은 원래 공책 네 권 분량의 소책자로 그가 죽던 해(1963년)에 가명(假名)으로 「헤아려 본 슬픔」(A Grief Observed)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두 책은 문체나 분위기나 태도에서 사뭇 다르다. 「고통의 문제」에서 루이스는 구체적인 죄를 회개하는 데서 나오는 슬픔, 따라서 구체적으로 자기 잘못을 바로 잡거나 남에게 끼친 해를 보상하게 만드는 슬픔이나 남을 향한 연민에서 솟아나 적극적으로 그를 돕게 만드는 슬픔이 아닌 한 슬픔은 정말 나쁜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아내 조이 데이비드먼이 죽자 이와 관계없는 슬픔을 그 자신이 마음껏 토로했다.

 

고통에 대한 두 가지 태도

루이스는 누구보다 절실하게 자신의 삶에 찾아왔던 예기치 못한 기쁨에 관해 말했던 저자였다. 그리고 그 기쁨을 누린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그러나 루이스는 속 깊이 뼈저리도록 슬픔을 안 사람이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것만큼 큰 슬픔과 고통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루이스는 서른 한 살의 나이(1929년)에 뒤늦게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그리스도인이 된 지 11년 만에 「고통의 문제」라는 책을 썼다. 그때는 고통이 마치 저만치 떨어져 있는 것처럼 거리를 두고 고통에 관해 논리적으로 신학적인 근거를 갖고 차근히 얘기했다. 루이스와 조이를 그린 영화 <새도우랜즈>를 보면, 루이스는 교회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꼭 행복하기를 원하시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사랑할 줄 알고 사랑받을 줄 아는 사람이 되길, 우리가 철들기를 바라시죠.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고통을 선물로 주시는 겁니다. 귀 기울이지 않는 세상을 깨우치려고 고통이라는 메가폰을 드신 겁니다”라고 매우 열정적으로 강연하는 모습이 나온다. 「고통의 문제」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죄와 어리석음에 만족하며 지낼 수 있습니다. 최고로 맛있는 음식을 아무 생각 없이 퍼먹고 있는 대식가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쾌락조차 무시할 수 있는 존재임을 인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은 고집스럽게 우리의 주목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쾌락 속에서 속삭이시고, 양심 속에서 말씀하시며, 고통 속에서 소리치십니다. 고통은 귀 먹은 세상을 불러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입니다.”1

그러나 1961년에 조이가 암에 걸려 있음을 알면서도 결혼해 몇 년을 행복하게 지내고 그녀가 죽자, 루이스는 자신의 이 말을 잊은 듯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 다른 모든 도움이 헛되고 절박해 하나님께 다가가면 무엇을 얻는가? 면전에서 쾅 하고 닫히는 문, 안에서 빗장을 지르고 또 지르는 소리, 그러고 나서 침묵, 돌아서는 게 더 낫다. 오래 기다릴수록 침묵만 뼈저리게 느낄 뿐, 창문에는 불빛 한 점 없다. 빈집인지도 모른다. 누가 살고 있기나 했던가? 한때는 그렇게 보였다. 그때는 꼭 누가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지금은 정말 빈집 같다. 지금 그분의 부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그분은 우리가 번성할 때는 사령관처럼 군림하시다가 환난의 때에는 이토록 도움을 주시는 데 인색한 것인가?”2

조금 더 인용해 보자.

“대답은 없다. 그저 잠긴 문, 철의 장막, 텅 빈 허공, 절대적인 무의 세계만 있을 뿐, ‘구하여도 얻지 못하리라.’ 구하다니, 내가 바보였다. 지금으로선 그런 확신이 온다고 해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나 자신의 기도에 의해 야기된 자기 최면일 테니까.”3

“하나님이 광대 마냥 한순간 우리의 밥그릇을 채어 갔다가 다음 순간에 똑같이 생긴 다른 밥그릇으로 바꿔치기라도 하신다는 말인가? 자연조차 그런 광대 짓은 하지 않는다. 자연은 똑같은 음률을 결코 두 번 연주하지 않는다.”4

“오랫동안 채워지지 못했던 고귀한 허기가 마침내 맘에 맞는 음식을 만났으나 즉시 그 음식을 빼앗기고 말았다. 운명(아니면 다른 무엇이든)이란 대단한 능력을 만들어 내고선 곧 그 능력을 꺾는데 재미를 느끼는 모양이다. 베토벤은 귀머거리가 되지 않았는가. 우리의 기준으로 보면 심술궂은 장난이다. 비열한 얼뜨기가 저지르는 짓궂은 바보짓이다.”5

“나는 사실 우리가 덫에 갇힌 쥐가 아닐까 싶어 더 두렵다. 아니 더 나쁘게는 실험실의 쥐들인지도 모른다. 누군가 ‘하나님은 언제나 기하학적으로 행하신다’라고 했다. 사실 ‘하나님은 언제나 생체 실험을 행하신다’이면 어쩔 텐가?”6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에서 고통을 ‘내’가 당하는 고통도 아니고 눈앞에 있는 ‘네’가 당하는 고통도 아닌 마치 제 3자가 당하는 고통처럼 서술하지만, 「헤아려 본 슬픔」에서는 자신이 당하는 고통을 적나라하게 그린다. 3인칭적 관점에서 한 서술과 1인칭적 관점에서 한 서술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간혹 사람들이 말하듯이, 루이스는 정말 신앙을 버리고 하나님을 떠났는가? 하나님에 대한 생각과 고통에 관한 생각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는가?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구제할 가능성이 없는 자처럼, 친구로부터 마치 소망이 없는 자들이 하는 것처럼 그렇게 슬퍼하지 말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슬픔에 빠진 루이스에게는 마치 하나님이 부재한 분처럼, 아니면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외면하는 분처럼 보였다. 그러나 슬픔에서 조금씩 회복되면서 그의 생각은 다시 예전의 생각으로 이어진다. 이런 면을 보기 전에 「고통의 문제」에서 루이스가 고통을 다룬 방식을 잠깐 살펴보자.

 

「고통의 문제」에서 본 고통

루이스는 전통적인 변신론(또는 신정론, theodicy)의 문제 제기를 고통의 문제로 확인한다.

“하나님이 선하다면 자신이 만든 피조물들에게 완벽한 행복을 주고 싶어 할 것이며, 하나님이 전능하다면 그 소원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피조물들은 행복하지 않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선하지 않은 존재이거나 능력이 없는 존재이거나 선하지도 않고 능력도 없는 존재일 것이다.”7

이것은 고통의 문제를 ‘가장 단순하게 표현한 말’이라고 루이스는 말한다. 여기서 문제는 하나님의 전능함과 선함이 피조물의 불행과 어떻게 양립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루이스는 하나님의 전능함과 선함에 대해 두 장을 할애해 자세하게 논의한 다음에 인간의 악함과 타락을 다시 두 장으로 나눠 자세하게 서술한다.

그 다음에 비로소 인간이 경험하는 고통에 관해 다시 두 장으로 나눠 서술한 후 동물의 고통을 다루는 한 부분을 포함해 지옥과 천국에 관해 다룬다. 논의 순서만 보더라도 고통에 대한 루이스의 논의 방식과 태도가 드러난다. 몇 가지 핵심만 얘기해 보자. 문제가 되는 것은 (1)하나님의 전능, (2)하나님의 선하심, (3)고통의 원인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다.

 

1. 하나님의 전능함이란 하나님은 어떤 일이나 할 수 없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조차 불가능한 것, 말이 되지 않는 것은 할 수 없다. 예컨대 “하나님은 한 피조물에게 자유 의지를 주시는 동시에 안 주실 수도 있다”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상호 모순되는 일은 우리뿐 아니라 하나님도 할 수 없다. 하나님의 능력이 장애물을 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보기에 말도 안 되는 일은 하나님께도 똑같이 말도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8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삶의 환경으로 자연과 생존 조건을 주시고 자유 의지를 주셨다면 이것은 하나님조차도 바꿀 수 없다. 그래서 루이스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아무리 전능하시다고 해도 상대적으로 독립적이며 ‘가차 없는’ 자연을 창조하지 않고선 자유 의지를 가진 영혼들의 사회를 창조하실 수 없다는 점입니다.”9

이렇게 보는 이유는 불변하는 법칙과 인과적 필연성에 따른 결과 및 전체 자연 질서는 일상의 삶을 제한하는 한계인 동시에 그런 삶을 가능케 해 주는 유일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 질서 및 자유 의지와 맞물러 있는 고통을 배제한다는 것은 삶 그 자체를 배제하는 것과 같다”이다.10

 

2. 하나님의 선하심은 곧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며 하나님의 사랑은 그저 모든 것을 허용하는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루이스는 이렇게 말한다.

“꾸벅꾸벅 졸면서 여러분이 그 나름대로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연로한 할아버지의 인자함이나 양심적 치안 판사의 냉담한 박애주의나 손님 대접에 책임감을 느끼는 집 주인의 배려로서가 아니라 소멸하는 불로서, 세상을 창조해 낸 사랑으로서 작품을 향한 화가의 사랑처럼 집요하고 개를 향한 인간의 사랑처럼 전제적(專制的)이며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처럼 신중하고 숭고하며 남녀의 사랑처럼 질투할 뿐 아니라 꺾일 줄 모르는 철두철미한 사랑이다.”11

이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주된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물론 이 목적도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으로써 우리를 그분의 사랑이 ‘아주 기쁘게’ 머물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드시려는 데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12 그래서 왕비가 된 거지 소녀가 더러운 누더기를 걸치고 있으면서도 왕이 만족하기를 바라는 것이나 사람을 사랑하기를 배운 개가 야생 동물처럼 벌레 투성이에 더러운 몸으로 집안의 물건을 물어뜯으면서도 주인의 너그러움을 기대할 수 없듯이, 인간도 하나님이 거리낌 없이 사랑하실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질 때 비로소 진정한 행복이 인간에게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루이스에 따르면 인간에게 주어진 고통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존재로 빚어져 가는 데 기여한다. 이것이 루이스가 “인간의 고통과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조화시키는 문제는, 우리가 ‘사랑’이라는 말에 하찮은 의미를 부여하며 인간이 만물의 중심인 양 만물을 바라보는 한 결코 해결될 수 없습니다”라고 한 까닭이다.13 그에 따르면 “피조물에 불과한 존재들로서 인간의 역할은 언제나 주체에 반응하는 객체, 남성에 반응하는 여성, 빛에 반응하는 거울, 소리에 반응하는 메아리”가 되는 것이며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활동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반응하는 것”(response, not initiative)이다.14

 

3.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고자 하는데 그 까닭은 우리가 자유 의지를 잘못 사용함으로써 아주 악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이스는 죄 문제를 아주 심각하게 다룬다. 고통은 곧 죄의 결과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근거를 루이스는 “인간은 처음 지음 받았을 때에 완전히 선하고 행복한 존재였지만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써 오늘날 보는 바와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다”는 데서 찾는다.15

단지 저 먼 과거뿐 아니라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을 인식하고 우리 자아를 인식하는 순간에 하나님을 자기의 중심으로 택하느냐, 자아를 중심으로 택하느냐 하는 ‘무서운 양자택일’의 길에 서 있고 자기를 선택함으로써 배운 사람이나 배우지 못한 사람이나 누구나 매일 같이 죄를 짓고 있다.16 이것이 모든 개별적인 죄들의 배후에 자리 잡고 있는 ‘근본적인 죄’이다.17

따라서 고통에 대한 루이스의 핵심적인 사상은 이것이다. 인간은 하나의 종(種)으로서 스스로 부패했기 때문에 이런 상태에서 우리에게 선이 되는 것은 우리를 치료하고 바로 잡으며 고통은 실제로 그와 같은 치료책이라는 것이다.18 그래서 루이스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메가폰으로서 고통이 혹독한 도구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또 고통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은 반항으로 연결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은 개심(改心)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악인에게 제공해 줍니다. 고통은 베일을 벗깁니다. 고통은 반항하는 영혼의 요새 안에 진실의 깃발을 꽂습니다. 만사가 잘 돌아가고 있다는 환상을 깨뜨리는 것이 고통의 효력 중에 가장 낮은 단계에 해당하는 첫 번째 효력이라고 한다면 두 번째 효력은 ‘지금 우리가 가진 것은 본질적으로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간에 전부 우리 것이며 그 이상은 필요치 않다’라는 환상을 깨드리는 것입니다.”19

이어서 세 번째 효력으로 루이스는 고통을 통해 비로소 우리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식적으로 선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을 들고 있다. 하나님께 자아를 완전히 양도하는 행위에는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라는 것이다.20 이처럼 루이스에게 고통은 분명히 목적이 있고 의미가 있는 것이다.

 

루이스는 신앙을 버렸는가

이제 물음은 루이스가 젊은 시절의 생각을 말년에도 그대로 일관되게 유지했는가 하는 것이다. 「헤아려 본 슬픔」 1장과 2장에서 인용한 앞의 구절들을 보면 루이스는 자신의 생각을 완전히 바꾼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은 더 이상 선한 분, 전능한 분이 아니며 가학적인 신이고 음식을 주고선 다시 빼앗아 가는 광대, 멍청한 바보로 불리기도 한다. 심지어 ‘나쁜 신’으로 언급되기까지 한다.

 

“나쁜 신을 믿는 것이 합리적인가? 어쨌든 그처럼 나쁜 점을 가지고 있는 신을 믿는 것이? 우주를 다스리는 가학적인 신, 악의에 찬 얼뜨기(The Cosmic Sadist, the spiteful imbecile)를?”21

 

그러면서도 그 자신은 내심 이렇게 묻는다.

“왜 나는 마음속에다 이처럼 쓰레기 같고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남겨 놓는 것인가? 이렇게 하면 마치 내가 덜 느낄 수 있기라도 하는 양, 손바닥으로 느낌을 가리려 하고 있는 것인가? 이 모든 기록이, 고통이란 겪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자의 의미 없는 글쓰기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22

「헤아려본 슬픔」 3장과 4장에서 루이스는 1장과 2장의 기록에서 보인 태도를 수정한다. 특히 관심을 끄는 대목은 두 가지다. 하나는 혹시나 자신의 삶이 종이 카드로 쌓아올린 성채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하나님이 생체 실험을 하고 있는 자인지 아니면 질병을 고쳐주고자 하는 수의사인지 묻는 질문이다. 여기서 필자는 「고통의 문제」를 쓴 40대 초반의 루이스와 「헤아려 본 슬픔」을 쓴 60대 초반의 루이스 사이의 연속성을 본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루이스는 조이 데이비드먼의 죽음에 대한 슬픔은 사실 그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임을 자각한다. 암으로 고생했던 조이의 고통에 비하면 자신의 고통은 별 것이 아닌데도 자신의 고통만을 생각하고 그녀의 고통에 대해선 생각하지 못했음을 인식한다. 동시에 루이스는 조이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같은 종류의 것이었음을 고백한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 안에 상상 외에 다른 요소가 없었는지, 조이에 대한 사랑 안에도 이기주의 말고 다른 것은 없었는지 자문해 보지만 오직 하나님만 아실 것이라고 루이스는 토로한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나 조이에 대한 사랑도 카드로 만든 성채였음을 발견한다.23 그리고 결국 아무 것도 모르는 쪽은 자신이었음을 고백한다.

“하나님은 우리 믿음이나 사랑의 자질을 알아보시려고 시험을 하시는 게 아니다. 그분은 이미 알고 계시니까. 모르는 쪽은 오히려 나였다. 이 시험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피고석과 증인석 그리고 재판석에 모두 한꺼번에 앉아 볼 수 있도록 만드신다. 그분은 언제나 나의 성채가 카드로 만든 집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내가 그 사실을 깨닫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쳐서 무너뜨리는 것뿐이었다.”24

여기서 바로 젊은 시절 루이스의 목소리가 다시 울린다. 삶의 중심으로 자신에서 하나님에게로 옮기는 방법은 고통으로 삶을 뒤흔드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하나님은 수의사인가, 생체 실험가인가 하는 질문은 앞서 잠깐 언급한 하나님은 혹시 ‘나쁜 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과 관련이 있다. 이 생각은 결국 하나님은 생체 실험가가 아니라 병을 치료하기 위해 고통을 주는 수의사나 외과 의사 또는 치과 의사라는 생각으로 답을 얻는다.

하나님이 우리를 치료하고자 고통을 주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그렇게 믿으면 믿을수록 자비를 구하는 일은 아무 소용이 없음을 믿지 않을 수 없다. 외과 의사가 다정하고 양심적인 사람일수록 더욱 무자비하게 썩은 살을 도려낼 것이고, 만일 자비를 베풀어 애걸복걸하는 일에 꺾이고 만다면 그때까지 겪은 고통은 아무 소용이 없게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루이스는 만약 고통이 필요 없다면 신은 존재하지 않거나 악한 존재일 것이라고 단언한다. 만약 선한 신이 계신다면 이런 고통은 필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니 나는 그분이 두렵지 않아”라고 말하는 자는 생전에 치과에도 가보지 않은 사람이라고 루이스는 힐난한다.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에 고통을 주시고 고통을 통해 치료해 주신다는 것이다.25 조이는 올바른 영혼을 지녔으며 영민하고 칼과 같이 그 지성이 잘 닦인 사람이었지만 조이나 자신은 죄 많은 여자이고 남자이므로 아직까지 치유가 필요하고 박박 닦아내야 할 얼룩이 있는 존재라고 루이스는 고백한다.

 

고통을 통해 루이스가 배운 것

자신의 고통을 통해 루이스는 두 가지 소득을 얻었다고 말한다. 하나는 하나님은 이제 자신에게 닫힌 문이 아님을 안 것이다. 그리고 조이를 바라볼 때 더 이상 공허한 진공을 만나지 않게 된다. 아니,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과 조이를 찬양하게 된다. 찬양이란 ‘그 안에 기쁨을 담고 있는 사랑의 양식’이며 우리가 찬양할 때 올바른 순서로 찬양해야 한다. 그래서 루이스는 주신 분으로서의 하나님을,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선물로서 조이를 찬양한다.26

조이는 루이스에게 마치 칼과 같이 뛰어난 지성을 소유한 존재였고 또한 들어가 보면 볼수록 깃들일 수 있는 정원과 같다고 토로한다. 루이스는 찬양을 통해 정원에서 정원을 가꾸는 분으로, 칼에서 칼을 만드시는 대장장이로, 생명을 주시는 생명의 근원으로, 아름답게 만드시는 아름다움의 근원으로 올라가는 경험을 한다.27

그러나 루이스는 예전처럼 그렇게 논리적으로, 합리적으로 고통에 대해 모두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더 이상 행동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이 하나님께 이런저런 질문을 던질 때 하나님은 역시 ‘묵묵부답’임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이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잠긴 문이 아니다. 외려 조용하고 분명히 동정적인 시선 같은 것, 마치 그분이 거절의 뜻으로 머리를 가로 저으시는 게 아니라 질문을 유예하시는 것 같은. ‘아들아, 잠잠하거라. 너는 이해하지 못한다’라고 하시는 것 같은.”28

그러면서 「고통의 문제」 마지막 장에서 천국을 다루었듯이, 루이스는 「헤아려 본 슬픔」이 끝나는 부분에서도 다시 천국을 말한다. “천국이 우리의 문제를 풀어 줄 것이나, 명백히 모순되는 생각들을 은근히 화해시키는 방식으로 해결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생각들은 모두 발아래 무너져 버릴 것이다. 문제라곤 애초부터 전혀 없었음을 보게 될 것이다.”29 젊었을 때의 루이스와 노년의 루이스는 동일하다. 다만 세상의 다양한 색깔을 조금은 회색빛이 강하게 감도는 모습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이 다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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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C. S 루이스이기에 가능한 내용들로 가득 차 있다. 순전한 기독교로 기독교를 탁월하게 변증한 루이스가 슬픔을 변증한 내용이다. 아니 변증했다가 보다 슬픔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슬픔은 변증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인간의 노력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지만 슬픔도 그 중의 하나이다. 인간에게 왜 슬픔이 필요한 것이며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필요하기에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 믿을 수밖에 없다. 루이스도 이러한 아픔을 처절하게 겪었고, 글로 옮겨 놓았다. 루이스가 탁월한 것은 처절한 고통 속에서도 글로 남겨 놓은 것이다. 그것도 구체적으로 말이다.

이 책은 루이스의 다른 책들과 틀린 부분을 몇 가지 발견할 수 있었다.

첫 번째는 다른 책들은 다른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썼지만 이 책은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썼다. 그러하기에 루이스의 새로운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적인 아픔과 고통을 사실적으로 느낄 수 있다. 두 번째는 다른 책들과 달리 책의 주제에 대해 변증하려는 노력을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고통의 문제라는 책에서는 고통을 왜 당해야 하며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지만 여기서는 그냥 자신의 생각만을 서술하고 있다. 오히려 이것이 더 큰 설득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세 번째는 이 책은 출판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하지 않았다. 일기이기 때문이다. 고통을 잊고자 쓴 글인데 지금 이 시대에도 공감할 수 있는 책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루이스의 새로운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루이스도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다만 그는 아픔이 왔을 때에 글로 쓰면서 이겨냈다는데서 평범을 넘어섰다고 볼 수 있다. 슬픔은 인간에게 아픔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그 아픔 뒤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볼 때에 슬픔을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슬픔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되어 감사하다.

"죽음은 없다"라든가 "죽음이 중요한 게 아니라"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참아 내기란 어렵다. 죽음은 있다.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다. 발생하는 무슨 일이건 결과가 있게 마련이며 그 일과 결과는 회복할 수도 돌이킬 수도 없다. 차라리 탄생이 중요치 않다고 말하는 편이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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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S 루이스의 「헤아려 본 슬픔」

이별의 고통 속에 신음하는 상한 영혼의 보고서

 

루이스의 글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감탄이지만 문제의 본질을 그토록 명징하고 견실하게 드러내는 작가를 나는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루이스의 글을 처음 대하는 사람들은 그의 간결하고 재치 있는 문체에 끌리지만 일단 그의 작품 세계 속으로 잠입해 들어가면 그의 방대한 지성과 확고한 영성에서 우러나온 진수성찬을 맛보게 된다. 인간이 맛 볼 수 있는 최고급의 요리, 거기다가 아주 오래 된, 그러나 그윽한 향기가 코를 찌르는 포도주를 한번 맛보게 되면 그 이전까지의 식탁이 문득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나는 분명히 루이스에게 찬사를 보낸다. 그러나 사실은 나 같은 영적 불한당까지 배려하셔서 루이스를 통하여 당신의 카드를 살짝 보여주신 하나님의 짓궂은(?) 유모에 찬사를 드리는 것이다. 나는 루이스의 <헤아려 본 슬픔>을 읽으면서 어떤 알 수 없는 격정에 사로잡혀 자주 책을 덮었다. 그리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잠깐씩 잠이 들곤 했다. 글쎄, 하나님의 카드를 보고 너무 황망하여 잠시잠시 혼절한 것일까?

읽을 책이 너무 많지만, 그래서 오히려 마음만 부산하지 정작 읽어야 할 책들을 읽지 못하는 실정이지만 내 마음을 늘 지긋하게 누르는 생각은 루이스를 다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통이라는 문제>를 세 번 읽었지만 읽을 때마다 새로운 깨달음을 얻으며 감탄하곤 한다. 나는 나의 생각과 말과 글 속에「C S 루이스」가 자연스럽게 겹쳐지고 녹아들 때까지 루이스를 철저히 소화해야 한다는 강박감을 느낀다. 인생은 짧다. 위대한 고전을 최소한으로 추려서 반복하여 읽되 특별히「C S 루이스」를 읽을 것! 「C S 루이스」를 읽을 것!

<헤아려 본 슬픔>을 읽으며 나는 루이스에 대하여 한 가지 궁금했던 사적인 호기심을 해결 받았다. 그것은 루이스와 그의 아내 조이의 결혼 생활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그들이 성생활을 즐겼는지 그게 몹시 궁금했다. 만약 그들의 결혼 생활이 육체관계를 배제한 정신적인 결합뿐이었다면 나는 무척 실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루이스는 이 책에서 "지난 몇 년간 조이와 나는 사랑에 탐닉했으며 그 갖가지 양식을 다 즐겼다. 심신 어느 곳이고 충족되지 않은 바가 없었다." 라고 솔직하게 밝히고 있다. 그의 고백이 매우 흡족했다. 왜냐하면 나는 육체와 정신을 분리하는 지성과 감정을 혐오하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정직하고 단순하며 심오한 사람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비롯하여 인간의 감정에 의하여 문제의 본질이 흐려지는 것을 일절 용납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아주 꼿꼿하다. 절대 사람에게 의탁하지 않는다. 감정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감정의 과장과 왜곡을 칼같이 집어내는 사람이다. <헤아려 본 슬픔>에서 루이스는 자신과 한 몸이 되어 영혼의 깊은 교감을 나누었던 사랑하는 아내 조이와의 사별에 따른 슬픔과 고통의 감정을 철저히 해부한다.

그 과정에서 루이스는 하나님의 부당한 외면에 절망스런 비명을 지르며 항의한다.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계시는가? 다른 모든 도움이 헛되고 절박하여 하나님께 다가가면 무엇을 얻는가? 면전에서 쾅! 하고 닫히는 문, 안에서 빗장을 지르고 또 지르는 소리. 그리고 침묵. 차라리 돌아서는 게 낫다. 왜 그분은 우리가 번성할 때는 사령관처럼 군림하시다가 환난의 때에는 이토록 도움 주시는 데 인색한 것일까?" 루이스는 대놓고 하나님의 부당한 취급에 항의한다. 그러나 루이스의 항의는 책의 머리말을 쓴「매들린 랭글」의 말처럼 건강한 슬픔의 표지이다. 우리는 성난 목소리로 하나님께 대들었던 루이스의 용기에 감사한다. 루이스처럼 탁월한 신앙인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의심할 용기를 가졌기 때문에 우리들도 믿음에 대한 회의와 고뇌를 솔직하게 터놓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루이스는 죽은 아내가 천국에 있다는 확신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 하지만 아무런 응답도 얻지 못하자 "구하여도 얻지 못하리라!"고 낮게 빈정거린다. 그러면서 죽은 사람을 불러올리는 심령술사에 대한 유혹을 단호히 뿌리친다. 그것은 믿음이 말라붙은 간조한 땅을 걸으면서도 끝까지 그분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지는 안간힘인 것이다.

<헤아려 본 슬픔>의 주제는 '이별의 고통'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 그것은 삶의 본질을 파괴한다. 그것은 죽음보다 더 깊은 슬픔이다. 주님이 겪으셨던 최고의 슬픔과 고통은 하나님의 부재였다.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주님은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실 것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주님의 인성은 하나님과의 이별로 인하여 갈갈이 찢어지는 것이다. 루이스는 머지않아 천국에서 아내를 만날 것이다. 그러나 이 땅에 남은 루이스는 아내와의 이별로 인하여 죽음보다 깊은 슬픔과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이다. 만약 우리의 삶이 이생뿐이라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모든 사람보다 불쌍한 사람들이다. 만약 우리의 삶이 이생뿐이면 "서로 사랑하라!" 는 주님의 가르침은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우리의 삶이 이생뿐이면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무슨 수로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나는 센치멘탈한 알코올 중독자였던 외삼촌의 허무한 죽음을 기억한다. 오, 맙소사! 그런 고통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나의 목숨과 맞바꿀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과의 영원한 이별?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만약 우리의 삶이 이생뿐이라면 우리는 아무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철면피처럼 나만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 그것이 가장 현명한 일이다. 서로를 미워하고 증오하다가 죽는 것이 그나마 고통을 줄이는 최선의 방법이다. 그러나 주님은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 부활이 전제되지 않고는 주어질 수 없는 계명이다. 부활이 있기에 우리는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조이는 죽기 직전, "저는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롭습니다."라고 말했다.

루이스는 어느 날, 기이한 체험을 한다. 죽은 아내를 만난 것이다. 하나님께서 루이스에게 허락하신 독특한 축복일 터이다. 루이스는 그 기이한 체험에 대하여 두 페이지 반에 걸쳐 자세하게 기록하였는데 죽은 아내와의 만남을 '정신과 정신의 완전한 친밀감'으로 표현한다. "이 친밀함은 감정적 요소 없이도 완전한, 팽팽하게 긴장되면서도 원기를 회복시켜 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친밀함이 사랑 그 자체일까?/ 무엇보다도 그것은 견실한 것이었다. 온전히 신뢰할 만한 것이었다. 견고했다. 죽은 자에 대한 허무맹랑함 따위는 없었다." 황효식 (뉴스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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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S. 루이스 책의 서평을 쓰게 된 것에 대해 영광으로 생각한다. 그를 통해 영광 받으시는 하나님을 찬양!

헤아려본 슬픔이라는 책은 제목만 봐서는 오해하기 쉬운 책이다. 이 책은 결코 슬픔에 빠진 이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서야 한다거나 하나님께 더욱 굳건한 믿음을 드리라고 설교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이 책은 오히려 H(루이스가 그의 아내 조이를 부르는 약칭)의 죽음을 철저하게 슬퍼하는 루이스의 슬픔 고백록이다. 어떤 면에서 이 글은 루이스의 일기이며 슬픔의 감정이 분출된 형상이다.

“나는 내가 어떤 상태를 묘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슬픔의 지도를 그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슬픔은 ‘상태’가 라니라 ‘과정’이었다. 그것은 지도가 아닌 역사서를 필요로 하는 것이어서 임의로 어느 지점에서 그 역사를 쓰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영원히 멈출 이유를 찾지 못할 것 같다.”

이 글이 이 책의 목적이었으며 슬픔을 직선적으로 바라보는 방법이 아닐까 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슬픔의 감정이란 것을 주셨다. 우리는 이 감정을 사용하고 싶은 곳에 사용한다. 누군가의 죽음이나 실패, 때로는 좌절에 사용하기도 한다. 슬퍼하는 사람에게 누군가의 말처럼 그렇지만 기뻐하라 감사하라 말하는 것은 인간의 감정을 역행하는 말처럼 들려 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귀에 거슬리는 말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슬픔은 어떻게 시작해서 어떠한 ‘과정’으로 흘러가는가? 우리는 그것을 위해 슬픔의 한 단면을 둘러 볼 필요가 있다.

“모든 불행의 일부는 소위 그 불행의 그림자이거나 반영이다. 단지 고초를 겪는 것이 아니라 겪고 있는 고초에 대해 계속 생각해야 하니까 말이다. 단지 가없는 매일을 슬픔 속에 살아야 할 뿐 아니라, 날마다 슬픔 속에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매일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사실이다. 우리가 느끼는 슬픔에는 그 슬픔의 원인 자체만이 아니라 그 슬픔을 슬퍼해야 한다는 사실이 더해져있는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슬픔이란 속성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가지게 해준다. 지금 우리가 슬퍼하는 사실은 무엇인가? 그 사실 뿐만 아니라 더해져 다가오는 것들은 무엇인가? 그 중에는 우리가 꼭 더할 필요 없는 슬픔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슬픔은 그다지 논리적인 것이 못된다. 어쩌면 이런 탁상공론-나의 서평-가 실제로 루이스같이 슬픔을 겪고 있었던-또는 ‘있는’-사람들에게 어떤 위안이 될 수 있겠는가. 슬퍼하는 자들을 향한 우리의 최선의 반응은 함께 슬퍼하고 기도해 주는 것이리라.

“되돌아보면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H에 대한 추억에 크게 마음을 쓰고 있었고, 그것이 거짓되이. 변할지도 모른다는 점에서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하나님의 자비로우시며 선하심 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다) 나는 더 이상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놀라운 일은 그런 데에 신경을 쓰지 않게 되자 사방팔방에서 그녀를 만나게 되는 것 같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고백을 통해 슬픔을 극복하는 힘은 정확한 인식과 그 곳에서 놀랍도록 건져내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루이스는 이 책을 통해 슬픔의 극복방법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다. 단지 슬퍼할 뿐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회복한다. 우리는 누구나 큰일을 겪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어느 순간에는 그 일이 정말 나에게 있었는지조차 모르게 흐릿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반대로 전혀 믿어지지 않던 사실이 어느 날 아침 햇살을 타고 지극한 실감으로 다가오는 경험도 있을 것이리라 생각한다.

나는 슬퍼하는 이들에게 그 현실을 극복하라고 말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나 역시 그런 슬픔에 빠졌을 때 그런 조언이 결코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슬퍼하라고 말하고 싶다. 숨기지 말고 슬퍼하시라. 그리고 그대로 하나님께도 아뢰어보라.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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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아려 본 슬픔』은 범상한 책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전혀 책이라고 할 수 없다.” 루이스의 양아들 더글러스 그레셤이 이 책 末尾에서 한 말이다. 그렇다. 책이라면 마땅히 갖춰야 할 서론 본론 결론 따위는 어디에서고 찾아볼 수 없다. 어찌 보면 衆口難防인, 도무지 손댈 수 없을 만큼 어질러진 방 같은 글이다. 하지만 어질러진 만큼 아내를 잃은 슬픔이 얼마나 지극했는지를 엿볼 수 있게 된다.

60이 다 된 나이에 결혼해서 고작 3년 남짓 살고 사랑하는 아내를 떠나보낸 자신의 아픔을 아무 여과장치 없이 있는 그대로 써 내려간 루이스의 이 일기가 책으로 출간되고 나서 적잖이 파문이 일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니 파문이라기보다는 루이스를 시기하던 일련의 무리들이 그의 명성에 흠집을 내려고 믿음의 여정에서 낙오된 것 같은 글을 걸고넘어지기도 했다니. 자신의 위상에 치명타가 될지도 모르는 책을 용감하게 발표한 그에게 애정과 존경이 느껴진다.

책을 읽는 내내 사람이 이렇게 솔직할 수 있을까 의아했다. 극에 달한 슬픔은 자기 자신도 다 내려놓게 하는가? 다른 책에서 루이스가 솔직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일기가 가진 속성이 지극히 개인적이고 은밀하다고 해도 보통사람이라면 일기장에 마저 쓰지 못할 내용까지, 마음 속 밑바닥까지 다 드러내 보이는 그의 일기를 보면서, 일기에서마저 스스로를 교묘하게 속이는 사람들과는 한참 다르다는 생각을 한다.

또한 자신에게 닥친 슬픔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모습이 역력한데도 그의 날카로운 분석력은 여전하다. 자기 자신, 자기와 아내와의 관계,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마치 제 3자가 되어 바라보듯 하는데, 이토록 자기와 자기 주변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자기 자신을 한 치의 허술함도 없이 냉정하게 다루는데 한마디로 “알짤 없음”이다.

한 가지 위로가 되는 점은 경험이라는 면에 있어서는 ‘그도 어쩔 수 없는 유한한 인간이구나. 라는 것이다.

“나는 세속적인 행복에 기대지 말라고 경고를 받은 바 있었고, 스스로 그렇게 다짐하기도 했다. 우리는 심지어 고난 겪을 것을 약속받은 처지 아니던가. 그것은 예정된 계획의 일부였으니까……미리 생각하고 계산해 보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남이 아닌 나 자신에게, 그리고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예견된 일이었고 나름대로 준비도 많이 했으리라고 상상되는 슬픔이었는데도 모두가 무용지물이었다니……아무리 읽고 듣고 간접적으로 배우고 하물며 미리 예견을 하고 준비하고 있었던 고통도 세상에서 처음 당하는, 또는 자기만 유일하게 당하는 고통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다시 한 번 깨닫는다.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이해하려고 애쓴다고 해야 맞다.” 중학교 때 한문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다. 생각할수록 맞는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흡사 욥기와 같다는 생각은 나만의 생각일까? 그는 하나님께 욥과 같이 항의하고, 절규하고, 실망했다고 따진다. 그가 이렇게 당당하게 따질 수 있었던 것은, 폭풍 속에서 욥을 심하게 꾸짖으시지만 결국에는 “그가 입으로 죄를 범치 않았다”고 욥의 손을 들어주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루이스의 항의는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의 반증이라 생각된다. 상대가 받아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화도 내고 항의도 할 수 있는 것이지, 정작 그런 믿음이 안 가는 대상에게는 자신의 보따리를 풀어놓지 않는 게 인지상정이지 않는가.

사실은 이 책을 읽고 이 글을 쓰면서도 왠지 마침표가 찍어지지 않는 느낌이다. 그에 대해 너무나 생각할 것이 많고 할 말이 많은데 다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부러움, 崇慕, 사모, 존경, 사랑, 안타까움……이런 걸 한 단어로 뭐라 해야 하나? 아~~~! 견딜 수 없는 능력의 한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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