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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시 여행] 남원시 왕정동 '양사재'...........98

작성자유랑자1|작성시간21.03.07|조회수303 목록 댓글 0

[남원시 여행]   남원시 왕정동 '양사재'...........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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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남원 만복사지옆 양사재(養士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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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지 왕정동 양사재(養士齋)는 만복사지 터 바로 옆 골목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자리하고 있으며

선비들에게 매우 영향력 있는 교육 공간으로서 선비를 기르는 공간이라 생각하면 될것같다서당 공

부를 마친 재능있는 청소년들이 모여 생원, 진사시험 공부를 하던 향학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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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의 양사재는 남원향교의 소유로 왕정동에 따로 자리하고 있으면서 향교보다 낮은 선비들이 모여

일종의 친목을 도모 하면서 인맥을 쌓아가는 터전이자. 또한 진사시험에 합격하면 양사재에서 부표

(附表)를 해야만 합격 사실이 인정될 정도로 선비들에게 매우 영향력 있는 교육기관이다. 먼저 유랑자

는 양사재 솟을 대문인 외삼문 앞에 다가선다, 이 외삼문을 통과하면 곧바로 양사재 마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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씀바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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씀바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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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면5칸.옆면 2칸으로 되어있는 팔작지붕을 하고있는 양사재는 대청마루 전면에 양사재(養士齋)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현판 글씨는 호남 명필로 알려진 이수형의 글씨다, 또 왼편에는 대방향약소(帶方鄕

約所)란 현판도 걸려 있다..

 

본시 향약에는 4대 덕목(鄕約 四大 德目)이란게 있다, 조선 시대에, 권선징악과 상부상조를 목적으로만

든 것인데 향촌의 자치 규약을 말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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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업상권(德業相勸) : 착한 일은 서로 권한다.

과실상규(過失相規) : 잘못한 것은 서로 규제한다.

예속상교(禮俗相交) : 서로 예절을 지킨다.

환난상휼(患難相恤) : 어려운 일은 서로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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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여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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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사재 대청 안쪽 뒤쪽 벽 위쪽에 린산천기(麟山泉記)와 찬영문(贊影文)이 걸려있고 그 아래에는 '진

인사 대천명(盡人事待天命) 이라는 글귀가 걸려 있는데 이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다하고 나

서 천명을 기다린다'는 뜻을 담고 있다,.

 

본시 우리나라에서는 향약이 조선왕조의 중엽부터 널리 시행되기 시작했다. 명종과 선조의 시대에 이

르러 퇴계의 예안향약, 율곡의 서원향약과 해주향약 등 전국적으로 향약을 두지 않은 마을이 없을 정

도로 많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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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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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마루 뒤쪽 벽 위쪽에 린산천기(麟山泉記)와 찬영문(贊影文)이 걸려있고 그 아래에는 '진인사 대천명(盡人事待天命)사람

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다하고 나서 천명을 기다린다'는 글이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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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사재(養士齋)글씨는 호남 명필로 알려진 이수형의 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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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의 대방향약(帶方鄕約)은 옛 원천방(源泉坊)에 행해오던 원천동약(源泉洞約)을 이어서 실시한 것

이 전해온다. 원동향약(源洞鄕約)은 전북 지방 유형문화재 146호 지정 보존되고 있으며 마을 단위의

조산(造山)향약이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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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사재에는 매년 봄가을로 상읍례(相揖禮·절을 하는 법)와 독법례(讀法禮·글을 읽는법), 향음주례(

飮酒禮·음식과 술을 마시는 법), 향사례(鄕射禮·활을 쏘는 예법)를 1642년부터 실시해 오다가 일제 때

이르러 미풍양속을 이어가지 못하고최근 상읍례와 독법례가 일부 단체에서 행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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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향약소(帶方鄕約所)란 현판도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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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산천기(麟山泉記)와 찬영문(贊影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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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양사재란 고을 향교 옆에가면 별도의 부속 건물로 자리들을 하고 있는곳 들이 많다, 남원향교는

태조 이성계의 향교 설치령에 따라 1410년(태종 10년)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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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남원시 왕정동 대복사 부근에 세웠다가 향교에서 매년 치르는 큰 행사인 석전대제일이 되면 호랑

이가 나타나 남원도호부의 부민들이 크게 놀라는 사건이 2~3년 지속되자, 1428년(세종 10년)에요천 너머

의 남원시 노암동 덕음사 자리로 이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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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당시 덕음산으로 가기 위해 건너야 했던 큰 하천인 요천에 설치되어 있던 섶다리 등의 교각이

해마다 홍수 등에 취약해 많은 비가 내리는 날이면 향교로 가는 길목인 요천을 건너갈 수 없게 되는일

이 발생하자,1443년(세종 25년)에 다시 남원 시가지가 한눈에 보이는 왕산(王山) 자락인 현재의 자리에

남원향교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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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유랑자가 방문한 양사재(養士齋)는 향교와 함께 양반사족들이 자신들의 신분적 우위를 도모할 수

있는 기구로 당시엔 사마재 와 양사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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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 양사재는 향교의 교육기능을 대신할 목적으로 세운 교육기관으로. 운영과 재정의 충당을 위하여

재임과 재생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재임은 양반 사족들이 담당하였고 재생은 군현의 형편과 양사재의

경제 정도에 따라 정원이 정해져 있어 대체로 양반자제들을 뽑아 교육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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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구향들은 신향들의 등장으로 인해 유명무실하게 되어버린 향교의 교육기능을 대신할 새로운교육

기관으로서 양사재를 만들었으며, 결국 양사재는 향촌 내의 신분질서의 변화에 대응하여 구향세력들이 자

신들의 지휘확보를 위한 수단의 하나로 만들어 낸 것이라 보면 될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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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사마재(사마소)는 성균관에서 수업할 수 없는 그 지방의 생원이나 진사들의 교육장소로서 마련

된 기구였으며 친목과 학문 정치토론 및 교육활동 등을 펼침으로서 각 고을의 교화와 지방행정에 기

여하였다. 그러나 점차 여러가지 일에 간여하는 압력단체로 발전하여 지방통치에 간섭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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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중앙에서는 사마소의 폐단을 자주 지적 하였고 그 활동을 규제하러 하였다. 그러다가 중간에

서원이 등장하여 중심기구가 됨에 점차 쇠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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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 한쪽에 양사재 중수 기적비 등 4기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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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사재는 가운데 두칸은 대청마루로 되어 있고 오른쪽으로 두칸, 왼쪽으로 한칸의 방이 있으며, 앞쪽으로는 전체적으로 툇마루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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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사재가 자리하고 있는 왕정동은 원래 남원의 만덕면 지역으로 왕묘(王廟), 강정(江亭)과 서봉면(棲

鳳面)의 정치(正峙) 및 통한면(通漢面)의 용정(龍井)  각 일부를 병합하여 왕묘와 강정에서 이름을 따

왕정리(王亭里)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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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0년경 옥천조씨(玉川趙氏)가 처음 터를 잡았으며, 1700년경에 장수황씨(長水黃氏)가 이주하여 마을

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고려말 이성계 장군이 운봉 황산에서 왜구를 격파하고 돌아가는 길에 남원성에

들렸다가 잠시 마을 앞 축천강변에 쉬어 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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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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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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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이성계 장군이 조선 왕조를 창건하여 왕위에 오르니 사람들은 이마을 이름을 왕정이라고 부르

게 되었다고 한다. 남원 양사재는 만복사지 옆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양사재 앞에서 기린봉까지 가는

등산로코스가 소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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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일지는 장담할수는 없지만 혹여 시간이 허락하면 등산도 해보고 도선국사가 남원고을의 센

기운을 누르기 위하여 절을 지었다는 비구니 승려들의 수행,정진 도량인 대복사를 가보고 싶은 마음

을 안고 아쉬움을 남긴채 오늘은 양사재만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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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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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시내 도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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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 여행기 이어보기

https://cafe.daum.net/b2345/LKz0/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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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사재 주소

*전북 남원시 왕정동 532-1

*전북 남원시 양사재길 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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