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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읽기란 무엇인가

작성자mathmania|작성시간07.07.12|조회수724 목록 댓글 0

읽기란 무엇인가

인류가 동물의 세계에서 벗어나 인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언어의 사용 때문이었다. 그런데 인류 진화에서 음성 언어의 사용은 인간 형성을 위한 '제1의 언어적 혁명'일 뿐이다. 인간 문명의 발달을 위해서는 '제2의 언어적 혁명'이 필요했다. 그것은 바로 '문자'의 발명 및 사용이다. 오늘날과 같은 고도의 문명도, 따지고 보면 이 문자로 인해 가능했던 것이다.

 

문자 언어의 사용은, 우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물리적 해방(物理的 解放)'을 인간에게 가져다 주었다. 그 결과, 인간은 그보다 앞선 시대 사람들의 문명을 이어받을 수 있게 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문명을 창조해 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야말로 '누적적 사고(累積的 思考)'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또, 문자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인간은 음성 언어를 사용할 때와는 달리, 언어 그 자체를 기억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나는 '심리적 해방(心理的 解放)'을 얻게 되었다. 문자 언어는 기록과 보존이 가능하기 때문에 인간은 문자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정보 그 자체가 아니라 정보들의 관계의 이해, 분석, 종합, 평가를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즉, 인간의 사고는, 사실을 단순히 기억하는 것에 머무르는 저차원의 사고에서, 내용의 기술(記述)과 설명(說明), 그리고 그 내용의 논리성(論理性)과 합리성(合理性)을 추구하는 고차원의 사고로 바뀌게 된 것이다.

 

문명 비평가(文明批評家)들은, 문명의 발전이 바로 이런 고차원의 사고에서 가능하게 되었다고 본다. 독서는 이와 같은 문자 언어 사용의 대표적 형태이다.

 

힌두 철학에, "열매는 나뭇가지에 달려 있든지, 아니면 땅에 떨어져 있다. 나뭇가지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순간은 열매에는 없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보이는 정태적(情態的)인 현재는 있지만, 과거와 미래를 연결지어 작용하는 동적(動的)이며 초월적(超越的)인 현재는 없다는 뜻이다. 동물은, 눈에 보이는 물리적 자각(自覺)의 세계에서 본능적으로 살아간다. 그러므로 동물한테는 현재만 있을 뿐, 과거나 미래는 없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과거, 현재, 미래를 제한 없이 자유로이 넘나들면서 초현재적(超現在的)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그런 초현재적 삶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읽기이다. 읽기라는 행위는 '책을 읽는다'는 현재적 행동이지만, 그 정신적 실체는 과거와 미래를 넘나드는 초현재적 사고이기 때문이다.

 

책은 인간이 창안해 낸 수많은 도구(道具) 중에서 가장 위대한 도구이다. 그리고 이 도구는 인간이 타고난 본질적 능력인 기억(記憶)능력과 상상(想像)능력에 기초를 두고 있다. 다른 도구들은 모두 시간이나 공간의 제약을 받는 인간 신체의 부분적 확장일 뿐이다. 망원경이나 현미경은 눈의 확장이고, 확성기나 전화기는 입과 귀의 확장이며, 농기구나 총은 손의 확장이고, 자동차나 비행기는 발의 확장이다. 그러나 책은 신체의 일부가 아닌, 기억과 상상의 확장이다. 기억과 상상의 확장인 책을 읽음으로써 인간은 물리적인 현재적 삶을 넘어서서 과거나 미래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초월적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책이 인간의 기억과 상상의 도구로서 초월적 삶을 가능하게 해 주는 훌륭한 도구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 도구는 읽혀져야만 그 가치를 발휘할 수 있다. 서가에 꽂혀 있는 책은 작용하지 않은 도구로서 망각된 기억이며, 죽은 상상일 뿐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책을 서가에 꽂아 두는 것만으로 마치 그 내용을 소유한 것처럼 생각한다. 읽지도 않았으면서 마치 읽은 것처럼 믿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책의 소유는 내용의 소유가 되어야 한다.

 

책의 내용을 소유하게 되면 우리는 여러 가지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는 '앎의 즐거움'을 얻고, 삶의 지혜를 터득하는 '깨달음의 즐거움'을 얻으며, 가슴이 설레거나 눈물이 핑 도는 듯한 '감동의 즐거움'도 얻는다.

 

읽기는 이러한 즐거움만 주는 것이 아니다. 읽기는 개인적으로는 인격 형성의 근원이 되며, 집단적으로는 이웃과 사회를 하나로 이끌어 주는 견인차가 된다. 읽기를 통해서 독자는 여러 시대의 여러 인간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들의 환경과 생활과 애환을 함께 경험한다. 그러면서 독자는, 때로는 공감도 하고 때로는 분개도 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게 된다. 다른 인간에 대한 공감과 분노가 이웃과 사회에 대한 관심이라면 자신에 대한 반성은 자신의 인격에 대한 관심이다. 그래서 읽기는 곧 인격 형성과 사회 의식 계발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읽기의 목적 또는 동기를 통해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보도록 하자. 읽기의 첫째 동기는 사람들 대부분이 인정하는 것으로서, 인간과 사회와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지식을 얻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창문을 여는 이유가 밖을 보기 위함이듯이, 책을 읽는 이유는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함이다. 그 새로움이 바로 지식과 정보이다. 지식이나 정보는 이제는 있으면 좋고 없어도 괜찮은 장식이 아니라, 소유의 대상이며 부의 원천이며 인간에 대한 인식이나 분류의 기준이다. 그러므로 지식과 정보 획득을 위한 읽기는 더욱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

 

앎에 대한 인지적 충족만이 읽기의 동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할 일이 없을 때에 심심풀이로 책을 읽기도 하고, 재미로 책을 읽기도 한다. 책의 내용이 실생활에 직접적으로 이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리고 때로는 그 내용이 사실이 아닌 허구임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책을 읽는다. 읽기를 통해서 사람들은 일상의 생활에서 벗어나 환상의 세계에 잠입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기쁨을 얻는다. 이런 읽기가 바로 지식이나 정보 획득이라는 생활적 수단을 넘어서서 순수한 인간성을 지향하는 읽기이다. 독자는 이런 읽기를 통해서 마음의 정서(情緖), 생활의 여유, 감동의 참맛을 얻는다. 그리고 그 결과로 삶의 서정적 질을 높인다.

 

느끼고 깨닫기 위한 읽기, 마음의 휴식을 위한 읽기는 지식 사회, 정보 사회에도 크게 필요하다. 아니, 오히려 더 강하게 요구될지도 모른다. 지식과 정보가 절대시되는 사회, 과학의 발전과 경제 성장이 우선시되는 사회에서는 자칫 인간에 대한 관심이 소홀해지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회일수록 우리는 인간에 대한 사랑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아름다움을 맛보고, 철학을 생각하고, 나와 이웃을 되돌아보는 읽기, 곧 느끼고 깨닫기 위한 읽기는 바로 이런 사회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는 좋은 대안이 된다. 여기서는 남을 경계할 필요도 없고 서두를 필요도 없으며, 또 읽기의 결과로 구체적인 소득을 얻지 못해도 조금도 아쉽지가 않다. 참된 민주주의를 구현하려면 더욱 많이 읽어, 느끼고 깨달아야 한다. 그것이 곧 인간에 대한 관심과 감각을 높이고 이웃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싹트게 하는 마음의 밭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을 '사고하는 동물'이라고 말한다. 생각 또는 사고가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요체가 된다는 것이다. 문자 언어를 통한 읽기는 인간 고유의 특성인 사고 중에서 가장 우수한 사고이다. 문자 언어가 가지는 여러 가지 구조적(構造的) 및 기능적(技能的) 특성 때문이다.

 

그런데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문자 언어에 의한 사고인 읽기의 가치는 점차 뒷전으로 밀려 나고 있다. 문자 언어보다 정보 전달이 더 빠른 화상(畵像)매채, 즉 영화, 텔레비전, 비디오, 만화 등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읽기는, 비록 속도가 느리고 다양한 색깔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나, 가장 추상적인 수준에서 가장 구체적인 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모든 수준의 정보에 억압당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조절하는 장점을 가진다. 능률적인 독자는 책의 선택에서부터 읽기 속도, 내용의 이해와 감상, 그리고 인생관과 세계관 형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스스로 해 나간다. 읽기 중간에 잠시 멈추어 혼자만의 생각에 빠질 수도 있고, 싫증이 나면 책읽기를 중단하였다가 나중에 다시 읽을 수도 있다. 읽기는 곧 자기 결정의 연속이며 사적 세계(私的 世界)의 창조이다. 그래서 읽기는 인간적이다.

 

현대 사회에서 그리고 학교에서 읽기가 제 위상을 확보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인간성의 상실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학교 교육이 학생 개개인의 자아 실현을 지향하지 않고, 사회 생활이 그 구성원인 개인과 가정의 인간적 삶에 관심을 두지 않는 풍토에서 지극히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읽기의 위상을 바로세우기는 매우 힘들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비록 힘들기는 하지만, 바로 인간 본연의 가치를 높이는 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리고 본질적인 동인(動因)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읽기를 생활화하기 위해서는 다음 두 가지의 노력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첫째는 읽기의 중요성과 가치에 대한 인식을 바르게 전환하는 것이고, 둘째는 읽고 싶은 동기를 획득하는 일이다. 그런데 읽기에 대한 인식과 동기는 외부로부터 강압적으로 주어질 수가 없다. 그것은 당사자가 기꺼이 나설 심리적 태세(態勢)를 마련할 때에라야 가능한 것이다.

 

읽기에 대한 인식과 동기는 자발적으로 체득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식과 동기를 먼저 체득한 사람이 읽기를 생활화하는 것을 실천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중요하다. 자녀가 책을 읽기를 바란다면 부모가 먼저 책을 읽어야 할 것이고, 회사 직원이 책을 읽기를 바란다면 경영자가 먼저 책을 읽어야 할 것이다. 자녀는 부모를 존경하고, 회사 직원은 경영자를 선망한다면, 부모가 책을 읽는데 자녀가 책을 읽지 않을 리 없고, 경영자가 책을 읽는데 직원이 책을 읽지 않을 리 없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읽기의 중요성과 동기를 체득하여 읽기를 생활화하기를 바란다면, 먼저 자신이 읽기를 실천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책을 중요시하는 사회, 그리고 책을 읽는 사회로 나아가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노명완)

 

 

독서의 진미

독서 삼매(讀書三昧)라는 말만 들었지, 그런 경지(境地)에 내가 들어 본 일이 있는지 판단조차 할 수 없고, 만권서(萬卷書)를 깨뜨리고 박람강기(博覽强記)를 능사로 하기에는 원체 바탕이 얕고 재주가 미치지 못한다. 내게도 한때 문학서를 탐독한 소년 시절이 있었지만 꿈만 같고, 지금은 다만 필요에 쫓겨 책을 읽는다고 하는 것이 내 독서에 대한 가장 적절한 평일 것이다. 다급하여 책을 들면 여기저기 필요한 부분만 뜯어 읽게 마련이다. 책은 읽기 시작하면 반드시 끝장까지 통독(統督)하라는 것이 내가 어렸을 때 받은 가장 중요한 교훈의 하나였고, 한동안 이것을 지키느라 애도 썼건만 이것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 그럴 여유가 없다. 시간은 내면 없지도 않겠지만,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이 탈이다.

 

역시 긴급한 필요에 의해서였지만, 이 근래 나는 몇 권의 신간 전공서를 통독, 정독하고 오랜만에 흐뭇한 느낌에 젖어 본 일이 있다. 최근의 언어 이론에 대한 내 이해도 새로워졌지만, 이를 계기로 독서하는 태도가 새로워진 듯하여 더욱 기뻤다.

 

나는 필요에 쫓긴 독서를 폄(貶)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여유 있는 자발적인 독서만이 삼매경(三昧境)에 들게 하는 것은 아닐 것으로 생각된다. 진정한 필요성은 성실한 독서를 가져올 것이요, 성실은 많건 적건 삼매의 경지로 이끌어 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서의 진미는 아무래도 자유로운 독서에서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마음 내킬 때 읽고 싶은 책을 읽는 여유, 정신적, 경제적인 여유가 내게는 무척 아쉽다. 지금의 나에게 이런 귀족적 아취(雅趣)가 허락될 리 없다.

 

그러나 이런 아취를 즐길 수 있는 기회가 내 생활에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일년에 두어 번쯤 으레 앓는 몸살로 자리에 누웠을 때, 이 때가 내 생활에서 가장 사치스런 시간이다. 나는 전에 읽은 기억이 있는 소설이나 수필집을 다시 펴 볼 수 있는 것이다. 읽은 기억이 있는 글을 다시 읽는 것처럼 마음에 부담없이 그 내용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얼마 전 사다 두었던 신간 시집을 읽는 것도 이 때다. 대개는 실망하지만, 마음에 드는 한두 가편(佳篇)을 얻었을 때의 기쁨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이기문, '독서에 대한 단상'에서)

 

 

의사 소통 행위로서의 읽기

독서(讀書)란 글자 그대로 '책을 읽는다' 혹은 '글을 읽는다'의 뜻이다. 책을 읽는다는 의미도 결국은 책 속의 글을 읽는 것이므로 독서란 결국 글을 읽는다는 뜻일 것이다.

 

글 속에는 글을 쓴 사람의 사상과 감정이 나타나 있다. 글을 읽는다는 것은 글쓴이의 생각과 만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독서는 필자와의 의사 소통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 하면 글을 읽음으로써 글쓴이와 생각을 나누고 찬성하고 공감하고 반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독서라는 행위를 통하여 보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만날 수 있다. 의사 소통을 하기 위하여 우리는 사람을 직접 만날 수도 있지만 사람을 직접 만난다는 것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독서를 통하여 우리는 현재는 이 세상에 없는 옛 선인들과도 만날 수 있고, 먼 외국의 사람들과도 만날 수 있다.

 

독서가 의사 소통 행위라는 의미 속에는 독서 행위가 일방적이 아니라 쌍방적이라는 뜻이 포함된다. 의사 소통은 둘 이상이 하는 것이며 서로간의 생각이 교환됨을 의미한다. 어느 한쪽의 생각이 다른 한쪽으로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서로 교환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필자는 없는데 어떻게 생각이 오갈 수 있느냐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서 쌍방적이란 독서할 때에 글을 읽는 사람이 필자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독자는 필자의 사상이나 생각에 공감하고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그 반대로 필자의 생각과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독자는 글의 내용과 상호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 박영목, 한철우, 윤희원 공저, 국어과 교수 학습 방법 탐구. 교학사. 1997.

 

 

정보화시대, 독서(력)의 政治化

우리 시대를 정보화의 시대라고 규정한다고 해도 독서의 방식을 약간 바꾸는 정도라면 굳이 시간을 들여 이런 논의를 할 필요가 없을지 모른다. 그것은 학자들의 할 일일 따름이다. 이 시대의 성격을 어떻게 파악하는가 하는 것은 학문이데올로기에 매몰되어 安暇를 구가하는 이들의 호사취미에 불과한 일. 그렇게 본다면 독서론 또한 마찬가지 경우가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시각과 방법으로는 현대의 위기를 초극할 수 없다. 학자를 포함한 독서인의 실천이 문제의 핵심에 해당한다. 독서를 통해 삶을 이끌어 가는 방법과 방향을 모색하면서 독서 자체를 삶의 과정으로 편입해 들이는 일이 시급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서의 정치화가 필요하다.

 

1. 지식의 생산과 지식의 지배

정보화시대의 특징으로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지식 생산의 양식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지식이 양적으로 폭증하며, 지식의 가공, 저장, 전달에 기술력이 막강하게 작용한다. 정보화는 통신기술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다. 발달된 통신기술은 지식의 보급을 세계대로 가능하게 한다.

 

정보화사회에서는 지식 생산이 보편화된다. 지식 생산에 종사하는 전문가와 그러한 업종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의 수가 대폭 증가한다. 수적으로 팽창한 지식소유자들은 집단을 형성하게 된다. 집단을 형성한 이들은 사회·문화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강력한 힘을 행사한다. 지식이 권력화하는 것이다. 권력화된 지식인들의 집단화는 지식권력의 투쟁을 유발한다. 권력화된 지식은 자본으로 무장된 통신기술을 통해 지역을 가리지 않고 전파된다. 그 결과 지식은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양적 폭발을 가져옴은 물론 억압의 이데올로기가 된다.

 

지식을 보급하는 통신 기술은 돈으로 운영된다. 그 결과 자본을 소유한 집단과 그렇지 못한 집단 사이에 지식의 편중현상이 나타난다. 정보를 '인포메이션'이라고 하는 것은 그 본래 뜻이 '형태부여하기'라는 것이다. 정보가 구체적으로 입수되어 들어오지 않는 이들은  삶의 형태라는 것이 없다. 정보의 습득 능력을 갖추지 못한 이들이 정보의 결핍으로 시달리고 열악하기 짝이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그 사실에 대한 정보는 결핍되어 있는 것이 우리 사회의 역설적 국면이다. 정보화는 정보 결핍(엑스포메이션)의 그늘을 딛고서만 성립한다. 이는 국가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시장에 가면서 구입할 물품 목록을 쓸 줄로 몰라 그림으로 그려 가지고 가는 사람들이 글을 읽고 쓸 줄 알도록 하자는 것도 리터러시의 교육이다. 그러나 哲學이나 역사, 사회에 대한 글을 한 줄도 읽을 줄 모르는 이들로만 구성된 사회는 상상하기조차 끔찍하다. 우리 시대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세계 문맹자들의 용감한 만행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그러한 점에서 리터러시의 교육은 국가 차원의 문제라는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그리고 방향이 잡힌 교육이라야 한다.  

 

독서의 정치화는 세계를 운용하는 힘으로서의 독서 능력을 뜻한다. 그 가운데는 읽을 감, 독서자료를 골라내는 안목이 포함되도록 교육과정을 재편성해야 한다. 어떤 독서자료든지 돈이 딸려 있는 법이다. 책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는 이유는 책이 가치평가적인 용어가 되어 있기 때문인데, 책값을 지불하는 데 인색하지 않은 것이 우리 전통이다. 텍스트라는 용어 또한 그러하다. 지적 수준이 얼마 정도 보장되는 이들이 사용하는 전문어(자곤)의 하나가 텍스트이다. 여기서 독서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까닭도 그것이다.

 

2. 독서물의 가치 변별 능력

돈이 안 들어간 독서물은 별로 영양가가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독서물의 내용은 물론이고 그 판매고까지 돈으로 조작되는 사회에서 독서물의 正典 개념은 달라져야 한다는 이야기는 이미 진부한 논의가 되었다. 정전의 개념이 달라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만 하는 것은 별로 소득이 없는 발언이다. 정전을 가려 볼 줄 아는 능력을 갖추도록 독서물 선택의 방법에 정치적 감각을 불어넣어야 하는 것이다.

 

정전 개념의 변화를 주도한 이들도 독서인이고, 그 변화를 수용하면서 독서가 나갈 길을 모색하는 것도 독서인이다. 그들은 권력을 지닌 집단이다. 이 권력을 지닌 집단이 독서를 다시 규정하고 길을 모색하지 않는 한 그 집단은 힘을 유지할 수 없다.   

 

정보화시대의 독서와 관련된 문제 가운데 하나가 문자정보의 영상화이다. 영상시대라는 말을 할 뿐만 아니라 '시뮬라크르의 시대'라는 이야기가 화두로 돌아다닌 지 오래다. 그러나 정작 문자정보의 영상화가 어디까지 진행되었는가 하는 데 대한 검토는 별로 없다. 매체를 달리하여 전달되는 모든 정보를 영상으로 환원하려는 졸속한 판단이 사실을 왜곡한다. 문자정보를 영상화할 경우, 이는 이미지 읽기로 읽기의 방향이 달라지고, 감각에서 감각으로 이어지는 읽기가 된다. 다라서 이전의 읽기 개념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Martine Joly, Introduction l'analyse de limage, pp.82-5. cf) 영상이 소통에 작용하는 역량은 막강한 것이라서 언어로 따르지 못할 점이 있다. 광고언어가 영상을 이용하는 까닭은 그러한 힘 때문이다. 그러나 영상을 철학하는 데는 다시 언어로 돌아가야 한다. 이는 언어의 추상화 능력으로 인해 대상을 설명하는 이른바 학문의 가장 강력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언어의 철학성을 배반하는 모든 독서론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우행에 해당한다. 영상을 영상으로 반성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음악이라는 음악이 있고, 그림을 그리면서 화폭에 화가를 그려 넣음으로써 스스로 메타적 시각을 갖추는 경우가 없는 바 아니다. 그러나 이는 언어를 통한 자성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철학은 언어의 추상화 기능에 힘을 입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영상과 언어의 관계에 대한 깊이있는 성찰이 독서론 편에서 요구된다는 것은  贅言에 지나지 않는다.  

 

3. 독서물의 재생산

정보화사회는 일종의 독서사회라 할 수 있다. 정보를 가공하고 저장하고 유통하는 데는 정보화의 메카니즘을 따라야 하지만, 정보의 수용과 새로운 정보의 창출은 독서를 통해 수행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의 고독한 독서를 강조하는 개인주의적 관점은 한계가 스스로 분명해진다. 물론 문학의 어느 부면에 해당하는 독서물을 읽을 때는 개인적 고독과 심리적 분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독서사회에서 독서인들이 힘을 갖기 위해서는 집단화를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독서사회학과 함께 '독서경영론'을 모색할 수 있게 된다. 그래야 지식기반사회, 정보화사회를 버텨나가는 독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정보화사회가 좋기는 한데, 독서와 돈이라니 하는 의혹이 파고들 수 있다.선비는 돈을 멀리한다고 하는 것이 우리 전통의 미덕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독서경영론의 모색 운운하는 것은 망발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독서가 사회현상으로 부각되었고, 독서시장이 형성되었으며, 독서사회가 이루어지는 판에 그 경영은 필수적 과업이다. 독서가 돈이 된다는 의식의 보편화, 독서사회를 위해서는 투자를 해야 한다는 경영철학의 확립, 학교의 독서교육 또한 생애에 도움이 된다는 실리적 관점을 확립하는 일 등은 독서사회의 성립과 운용을 위해 중대한 고려항목이다.

 

독서의 방법을 가르치면서 주제 찾기 방법을 지나치게 강조한 감이 있다. 달리 생각해 보면 주제를 찾아내는 일에 몰두하는 것은 예종적 이기주의 발상이다. 물론 내가 돈을 들여 독서물을 확보하고 그것을 읽는 노력이 있다는 점에서는 주제 따라가기 식의 독서를 이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語弊가 없는 바 아니다. 그러나 독서의 궁극적 목적은 또 다른 독서물의 생산에 있다. 우리는 읽고 쓰는 행위가 언어운용 과정의 다른 측면일 뿐이라는 사실을 겸허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근대화 이전의 독서는 반드시 글쓰기로 연계되는 것이었다. 글읽은 것을 일상 말하기에서 인용했고, 다른 글을 쓸 때 인용하여 用事로 삼았던 것이다. 글읽기와 글쓰기의 이러한 유연성은 근대화와 더불어 약화되었다. 독서와 글쓰기가 각각 전문화라는 이름으로 소외되는 현상을 보여주게 되었다.

 

가치있는 독서물의 생산에 재귀하는 독서가 아니라면 그 독서는 일종의 자위행위에 불과한 것이 된다. 글을 소비하는 소비자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제까지 우리가 읽을 가치가 있다고 공인하는 독서물을 생산한 이들은 모두가 독서인들이었다. 독서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는 다른 독서물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점, 글읽기와 글쓰기는 서로 맞물려 있다는 점에 대한 반증이다. 이러한 양면을 고려하지 않는 한, 독자는 끊임없이 수세적인 위치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독서활동은 독서물의 생산활동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문헌정보학을 전공하는 이들 사이에 글쓰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것은 글쓰기가 학문하기, 살아남기 등과 다른 작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독서의 교육 문제에 대한 모색도 그러한 방향에서 이루어져야 함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 우한용, '지식정보화시대의 독서- 독서의 政治學을 위한 覺書'에서

 

 

2.효율적인 읽기의 방법-SQ3R

⑴ 훑어보기(Survey) 단계

  글의 제목을 통해 전체적인 내용을 짐작해 보는 단계

  글의 첫 문단과 마지막 문단을 읽고 두 부분 사이의 내용을 미루어 짐작해 본다.

 

⑵ 질문하기(Question) 단계

  제목을 질문으로 바꾸어 보며, 제목과 관련하여 궁금한 사항을 메모하는 단계

  훑어본 내용을 근거로 글의 중심 내용을 마음 속으로 질문해 본다.

 

⑶ 자세히 읽기(Read) 단계

  중심 내용이나 자신이 제기한 질문과 관련된 내용을 차분하고 자세하게 읽는 단계

  전문 용어나 어려운 어휘, 각 문단의 핵심 어휘나 구절 등을 메모해 가며 글의 세부적인 내용을 파악해 본다.

 

⑷ 되새기기(Recite) 단계

  글의 내용을 요약하고 정리하는 단계

  글쓴이의 의도나 목적을 파악하고, 각 문단의 핵심 어구를 활용하여 전체 내용을 재구성해 본다.

 

⑸ 다시 보기(Review) 단계

  글의 내용을 정리하고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는 단계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글을 정리 요약하며, 나아가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 새로운 시각으로 글을 지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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