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장: 로스차일드 가문과 그들의 지난 3세기에 걸친 영향력(중국과의 관계 포함) 2026年6月7日 Azzurra

작성자새소년|작성시간26.06.10|조회수49 목록 댓글 0

제 5장: 로스차일드 가문과 그들의 지난 3세기에 걸친 영향력(중국과의 관계 포함)

2026年6月7日 Azzurra  https://cafe.daum.net/flyingdaese/WK49/105

 

 

 

 

 

第5章:ロスチャイルド家とその過去3世紀にわたる影響力
2026年6月7日 Azzurra 



                           제 5장: 로스차일드 가문과 그들의 지난 3세기에 걸친 영향력

 

                                                     2026年6月7日 Azzurra 번역  오마니나


로스차일드 가문에 대해 쓴다는 것은,세계에서 가장 유력한 가문 중의 하나인 로스차일드 가문의 역사를 깊이 파고든다는 뜻이다. 그들은, 이 왕조가 영국왕실에 합류한 이래, 윈저 가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제이콥 로스차일드 경과 그의 파트너인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함께 찍은 사진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문장학(紋章学)은 이 가문의 문장을 분석하므로서,그 수수께끼의 일부를 밝히는 것에 도움이 됩니다. 다른 상징적인 요소들 중에서도, 5개의 화살을 든 손은, 가장(家長)인 마이어 로스차일드의 아들들이 세운 5개의 유럽왕조(런던, 파리, 나폴리, 프랑크푸르트, 비엔나)를 상징한다(시편 127편 “젊은시절의 아들들은 용사의 손에 있는 화살과 같다”를 인용). 공식 설명에 따르면, 이는 풀타르코스의 실류로스 왕의 이야기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실류로스 왕은 임종의 자리에서 아들들에게 양손으로 화살을 부러뜨리라고 부탁했습니다. 아들들이 그렇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실류로스 왕은 하나씩 꺾는 것을 보여 주었고, 가족은 다른 분가와의 단결이야 말로 힘의 원천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중앙에는 빨간 방패(독일어 "Rot‑Schild"의 번역)가 있고,그 위와 왼쪽에는 육각별과 검은제국 독수리가 그려져 있다. 이 문장은 고대 로마제국에서 유래했으며, 카를 대제에 의해 복원되어, 후에 신성로마제국과 오스트리아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는, 로스차일드 가문을 "남작"이라는 칭호를 부여해 귀족으로 그 지위를 올렸다. 오스트리아 재무장관이자 오스트리아 중앙은행의 창립자인 요한 필립 폰 슈타디온=발트하우젠 백작이, 대출금리를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로스차일드 가문을 귀족으로 승격시키는 방안을 오스트리아 외무장관 클레멘스 폰 메텔니히에게 제안했고, 메텔니히는 이를 승인해, 로스차일드 형제 중의 4명에게 세습이 되는 독일귀족의 칭호가 부여되었다(1816년 9월 25일과 10월 21일). 문장에 있는 사자는 헤센 가문을 연상시킨다. 헤센 가문의 거대한 자금은, 나폴레옹이 헤센=카셀 선제후 빌헬름 1세의 영토를 침공한 후,로스차일드 은행의 관리 하에 들어갔다.6년 후, 거액의 대출을 거쳐, 오스트리아 황제는 1822년 9월 29일, 5명의 형제를 세습남작(본인과 남녀의 친자손 전부)으로 만들었다. 네이선은 1838년에 영국에서 오스트리아의 칭호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받았다. 장남인 라이오넬은 1847년에 영국남작의 칭호를 받았지만, 결국 동생인 앤서니에게 넘어갔다. 1885년, 서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트링 남작으로 작위가 수여되었다. 그러나, 금융가를 귀족으로 추대하는 이 관습은 영국에서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윌리엄 3세는, 그의 전쟁자금조달을 지원한 네덜란드의 은행가 솔로몬 데 메디나(1730년 사망)를 기사로 서훈했다.

로스차일드 은행왕조에 대해서는 많은 설이 주창되고 있으며,빌더버그 클럽의 가장 중요한 멤버들 중의 다수는 (예를들면, 텔레콤 이탈리아의 CEO이자 로스차일드 유럽 부사장인 프랑코 베르나베, 바클레이즈 은행의 사장이자 캐서린 드 로스차일드의 남편인 마커스 아기우스, 쉘의 존 카, 존 미클루스웨이트, 자니 민턴 베도즈, 그리고 록펠러 가문의 이익과 연락을 담당하는 헨리 키신저 자신)등과 이스라엘 국가와 강한 연관이 있으며, 실제로는 이스라엘의 구상자이자 창설자(1917년의 영국정부와 월터 로스차일드 경 사이의 발포어 선언을 떠올려 보세요)이며, 재정적 지원자 (입법권인 쿠네세트와 사법권인 대법원이 들어 있는 건물을 기증한 적도 있다), 그리고 정치적 지지자(세계 유대인 회의를 통해)가 되었습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기록에 남아있는 최초의 인물은,1577년생인 이삭 엘하난 로스차일드다. 그들은 18세기 이후, 특히 1744년에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가 태어난 이후로는, 유럽의 귀족 궁정에서 국제적인 금융제국을 구축했다. 마이어는 오펜하이머 은행에서 일했으며, 후에 헤센=카셀 공 빌헬름 1세의 재산을 관리했다. 나폴레옹 전쟁 중, 그들은 영국군의 전쟁비용도 지원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공식 웹사이트 중의 하나에 따르면, 1815년만 해도 웰링턴 공작에게 980만 파운드(현재가치로 약 8억 1500만 달러)를 대여한 기록이 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자금 지원 덕분에, 웰링턴은 벨기에에 모여 있던 20만 9천 명의 영국,네덜란드, 프로이센 군인들에게 급여를 지급할 수 있었고, 그들은 나중에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을 물리쳤다."

공식 역사서에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기록은 없지만,그들은 독자적인 정보전달망을 통해 워털루전투에서의 승리를 사전에 알게 되어, 런던 증시에서 막대한 부를 축적한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정보전달자인 존 로워스가 로스차일드 경에게 보낸 편지의 추신뿐이며, 그 안에는 “화이트 위원으로부터 워털루 전투에서 승리를 일찍 알게된 덕분에, 당신이 커다란 이익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로스차일드 가문 자신은, 로스차일드 문서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는 1744년,프랑크푸르트의 유덴가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암셸 모제스는 상품거래와 환전업을 운영하고 있었으며, 헤센 공에게 수집용 동전을 개인적으로 공급하고 있었다. 친척의 도움도 받아, 마이어 암셸은 1757년 하노버의 사이먼 볼프 오펜하이머 은행에서 야코프 볼프 오펜하이머 밑에서 견습생으로 일하며, 외국무역과 환율에 관한 귀중한 지식을 습득한 뒤,1763년에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형제들이 하던 사업으로 복귀했다. 그는 희귀 동전의 딜러가 되었으며, 한때 아버지의 보호자였던 막대한 부를 가진 헤센 황태자 빌헬름 1세(1743~1821)의 보호를 받았다. 그의 동전사업은 확대되어, 여러 명의 공작을 고객으로 두게 되었고, 후에 금융서비스의 제공까지 사업을 확장했다.

    1769년,마이어 암셸은 "궁정대리인(宮廷代理人)"이라는 칭호를 얻고,빌헬름 1세의 재정을 관리했다. 빌헬름 1세는 1785년에 아버지가 사망한 후, 헤센=카셀 방백 빌헬름 9세가 되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 로스차일드 가문이 헤센 용병 고용에 대한 영국의 지급을 처리하게 되면서, 사업이 급속히 확대되었다. 1806년, 빌헬름 9세가 프로이센을 지지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나폴레옹이 헤센을 침공했다. 나폴레옹의 진군에 직면한 빌헬름 9세는 홀슈타인 공국으로 망명하지 않을 수없게 되었다.

 

점령군으로부터 금고를 숨기는 방법이라는 난제는,그의 재무고문이었던 카를 프리드리히 부델스(1759~1819)에 의해 해결되었다. 부델스는, 로스차일드 가문이 그의 자금을 보호하기에 가장 적합한 입장에 있다고 판단해, 그의 모든 주식을 로스차일드 가문에 맡기도록 권유했다.그래서 그는, 막대한 재산의 일부를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에게 맡겼다. 마이어는 런던에 있는 아들 네이선에게 그 일을 의뢰했다. 네이선은 빌헬름 9세의 자금 55만파운드를 영국국채와 귀금속에 투자했다. 이러한 투자는 매우 큰 이익을 가져다 주었으며, 빌헬름 9세가 망명지에서 귀국할 무렵에는 상당한 이자가 쌓여 있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금융관리에 있어서의 신뢰성과 빈틈없는 처리로 확고한 평판을 쌓아 왔다.1807년 이후, 부델스의 영향하에서, 빌헬름 9세의 광범위한 금융 거래는 거의 모두 로스차일드 가문에 의해 처리되었으며, 1813년에 프랑스군이 헤센 선제후령(選帝侯領)에서 추방될 때까지,부델스는 빌헬름 9세를 대신해 로스차일드 가문의 서비스를 이용해, 유럽 각지에서 비밀리에 금융거래를 해왔다. 19세기초,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는 빌헬름 9세의 주요 국제은행가로서의 지위를 굳히고, 방백(方伯:빌헬름 9세)으로부터 자금을 차입해 독자적인 국제대출을 시작했다.그는 또한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를 피하기 위해 상품을 수입하므로서 이익을 얻었다.

    이러한 거래의 결과, 마이어 암셸은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고,1810년에 회사명을 M.A. 로스차일드 운트 제네로 변경했으며, 프랑크푸르트에 있던 4명의 아들과 파트너십을 맺었다(아들인 네이선 마이어 로스차일드(1777‑1836)는 이미 맨체스터와 런던에서 사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네이선 마이어 로스차일드의 사업이 점점 성공을 거두면서,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형제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1812년, 제임스 마이어 로스차일드(1792‑1868)는 파리에 은행을 설립했다. 살로몬 마이어 로스차일드(1774-1855)는 1820년에 비엔나에 정착했다. 카를 마이어 로스차일드(1788-1855)는 1821년에 나폴리에 정착하고, 암셸 마이어(1773-1855)에게 프랑크푸르트 은행의 경영을 맡겼다.

    이러한 네트워크 덕분에, 로스차일드 가문의 은행사업은 유럽전역으로 확대되었으며,당시 가장 성공한 국제은행가가 되었다. 현재, 그 핵심이 되는 은행업무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7대가 담당하고 있다.

1816년 이후,로스차일드 가문의 여러 분가는,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합스부르크 가문)과 영국왕실로부터 "남작"이라는 귀족 칭호를 받았다. 1825년까지, 로스차일드 가문은 영국은행에 충분한 대출을 제공해, 금융위기를 회피할 수 있었다. 1694년에 설립된 이 은행은, 실제로는 민간은행이 운영하는,법정통화를 발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중앙은행의 최초 실험 중의 하나였다. 19세기 이후, 로스차일드 가문이 잉글랜드 은행을 재정적으로 장악한 것은, 이 왕조의 비할 데 없는 권력을 보여주는 획기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실제로, 알프레드·드·로스차일드는 1868년부터 1889년까지 영국은행을 개인적으로 경영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1837‑1901년, 나중에 "유대인 보호자"라는 칭호를 얻음)과 그녀의 총리인 벤자민 디즈레리, 에드워드 7세(후계자이자 영국연합 그랜드 롯지의 프리메이슨 그랜드마스터), 그리고 프랑스의 루이 필립 1세(1830‑1845년)의 가장 중요한 자금제공자 가문이었다.

나폴리 지점은 바티칸 은행과 관계가 있어, 1832년에는,카를 폰 로스차일드가 다른 회담상대(국왕을 포함)에게 요구받았던 것처럼, 그레고리우스 16세의 발에 키스할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고 전해진다.

1873년, 그들은 리오 틴토를 설립했다. 리오 틴토는,그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장 중요한 광업회사 중의 하나였다.

그 외의 세계적인 사건들 속에서도,로스차일드 가문이 브라질의 포르투갈으로부터의 독립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브라질 정부에 대해 독립승인에 필요한 자금을 제공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현재, 그들은 이스라엘, 중국, 프랑스, 미국, 칠레,아르헨티나 등 전세계에 포도밭과 와이너리를 보유하고 있으며, 6만점이 넘는 미술품을 다양한 미술관에 기증할 뿐만 아니라, 세계각국에 수백 채의 궁전·저택은 물론, 고딕양식의 성까지 소유·관리하고 있다. 이것들 중의 대부분은 대학 및 공공기관에도 기증되고 있다.

예를 하나 들어보면, 영국의 와데스돈에 있는 위즈던 매너(Waddesdon Manor:처음 5장의 이미지. 빅토리아 여왕과 그의 아들인 에드워드 7세가 찬양한 궁전), 코트다쥐르(프랑스)에 있는 베아트리체 드 로스차일드의 별장, 할튼 하우스와 멘토모어 타워즈(잉글랜드, 버킹엄셔), 19세기의 가장 긴 성인 페리에르 성(프랑스. 독일황제 빌헬름 1세는 “어떤 왕도 유지할 수 없으며, 로스차일드 가문의 것만이 가능하다”고 말했다),빌라 피나테리(이탈리아), 네오고딕 양식의 로스차일드 성, 바이트호펜(오스트리아), 데 하르 성(네덜란드) 등이 있다.

위즈든 매너의 주요한 볼거리 중의 하나는, 샘의 중앙에 위치한 저택의 중앙조각입니다. 이것은, 금전과 저승의 왕을 다스리는 신인 플루트에게 바쳐진 것으로, 플루트가 저승의 여왕이 될 프로셀피나를 납치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플루트는 로마인에게는 "죽음의 신", 그리스인에게는 "부의 신"이었습니다). 로스차일드 가문 자신도,영국의 귀족이나 왕족과 마찬가지로, 프리메이슨에 소속된 것을 공개적으로 밝혔던 사실을 생각하면, 이러한 신을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 그 상징성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화에 따르면, 죽음의 신 명왕인 플루트는 다음과 같이 얘기됩니다. "주권자로서, 그는 국가의 통치를 감독하고, 그 엄격한 법을 제정하고 있다. 그의 신민인 허무하고 불쌍한 영혼은, 바다의 파도와 하늘의 별들만큼이나 많이 존재한다. 지상에서 죽음이 가져오는 모든 것은 이 신의 지배 하에 놓이며, 의 부를 늘리거나 혹은 그의 먹이가 된다. 그가 통치를 시작한 날부터, 그의 대신 중에서 그의 명령에 반한 자는 한 명도 없었고,그의 신민 중에서 반란을 획책한 자도 한 명도 없었다. 세계를 지배하는 3기둥의 주권신 중에서, 그는 불복종이나 반항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유일한 존재이며, 그 권위는 보편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모든 신들 중에서, 명왕 플루트는 가장 냉혹하고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융통성 없는 신이었지만, 모든 인간은 계급·신분·출신지와 관계없이, 언젠가는 그의 영역에 도달하기 위해, 모든 신들 중에서 가장 공정하다고 여겨졌다

프로셀피나가 명왕 플루트에게 납치된 경위에 대해,신화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프로셀피나는 펠구사 호수에서 물놀이를 하고, 님프들과 장난을 치며, 꽃을 따고 있었다. 그러자, 근처의 에트나 산에서 플루토가 네 마리의 검은 말과 함께 나타나 ,그녀를 납치해 결혼하고, 그가 지배하는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명계(冥界:저승)인 하데스에서 함께 살기로 했다. 플루트는 그녀의 삼촌이기도 했고,주피터와 케레스는 그녀의 형제자매였다. 이렇게 해서 프로셀피나는 명계의 여왕이 되었다

로스차일드 가문과 비교(秘教)와의 관계는,제이콥 로스차일드 경이 현대미술가인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인간의 피를 사용한 예술"로 유명)와 나란히, 1797년에 토마스 로렌스가 그린 "사탄이 군단을 소환하다"라는 제목의 그림 아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에 찍히므로서, 더욱 악명이 높아졌다.

블룸버그가 공개한 영상에서는,제이콥 로스차일드 경이 자신의 딸인 한나 로스차일드에게 인터뷰를 받고,보다 "환경 친화적"이고 "기후변화"에 대한 요구에 부합하는 미래의 세계에 대한 계획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유엔, 로마클럽, 다보스 회의, 기타 글로벌리스트 단체 등과 같은 엘리트 계층이 추진하는 주요한 담론 중 하나다.
https://www.youtube.com/watch?v=dAYMWpe9NWc

 

프리메이슨과의 관계에 대해, 로스차일드 가문 자신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사람들은, 도덕적·정신적인 가치관, 자기계발,그리고 자선 활동을 통해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데 관심을 갖는 우애단체인 프리메이슨과 관계를 맺어 왔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1840년대에 버킹엄셔에서 광대한 토지를 확보하기 시작했다.1836년, 네이선 메이어 로스차일드의 미망인 한나(1783~1850)는, 아이들이 도심 밖에서 건강하게 운동할 수 있도록 버킹엄셔의 멘토모어에 몇 에이커의 토지를 구입했다. 1850년, 메이어는 멘토모어의 저택을 12,400파운드에 구입하고, 조셉 팍스턴과 그의 의붓아들인 조지 스톡스에게 저택의 건설을 의뢰했다. 1900년까지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여러 분가와 세대가 수천 에이커에 달하는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고, 아일즈베리 계곡은 거의 로스차일드 가문의 토비지(飛び地)로 변해,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1839년부터 1898년까지 활동한 페르디난드·드·로스차일드 남작이 세운 위즈던 매너다

1870년까지, 그들은 시오니스트 운동의 주요한 자금제공자 중의 한 사람이 되었고,기록에 따르면, 프랑스 지부는 알리앙스 이슬라에리테 유니버셀에 연간 50만 프랑을 기부했다. 20세기에, 에드몽 드 로스차일드 남작(로스차일드 가문의 프랑스 지부)이 팔레스타인에서 최초의 시오니스트 정착지를 지원하고 (1세기 후, 로스차일드 가문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은행인 골드만삭스가 팔레스타인 영토내의 불법 시오니스트 정착지에 자금을 제공),후에 발포어 선언의 수령자가 되었다. (이것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설명한다.)https://www.youtube.com/watch?v=Kj5eypBex-U

 

1924년, 로스차일드 남작은 팔레스타인 유대인 정착협회를 설립하고,정착지로 12만 5천 에이커의 토지를 확보했다. 공식 웹사이트에 는, "1934년에 파리에서 에드몬드가 사망했을 때, 그는 약 50만 두남(5만 헥타르)의 토지를 입식지의 건서를 포함한 유산을 남겼다"고 기록되어 있다.이스라엘 건국후, 로스차일드 가문은 쿠네세트(국회)와 대법원 등, 공공건축물 대부분의 건설자금을 제공했다.

                                                                      이스라엘 대법원

로스차일드 은행은, 워버그 왕조와 함께,전세계에서 달러를 발행하는 민간기관인 미국연방준비제도의 창설금융기관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제이콥 로스차일드 경과 세계유대인회의(WJC)의 로날드 로더 씨.

현재, 세계최대의 시오니스트 조직인 세계유대인회의의 이사장은 바로 데이비드 루네 드 로스차일드 남작이다.

                    WJC의 이사회장이며, 로스차일드 & 컴퍼니의 회장이기도 한 데이비드·드·로스차일드 씨.

                                    세계 유대인 회의(WJC)회장인 로널드 로더와 데이비드 록펠러.

 

로스차일드 가문의 영향력은,19세기 초부터 바티칸의 재정운영과 밀접하게 연결되었으며, 이 관계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사진은, 바티칸에서 로마교황과 함께 찍힌 데이비드 루네 드 로스차일드와 로날드 로더를 포착한 것으로, 린 포레스터 드 로스차일드는 2020년에 이 교황과 함께 "포괄적 자본주의 평의회"를 설립했다.

                                                      제이콥 로스차일드와 찰스 황태자.

                                     린 포레스터 드 로스차일드, 찰스 왕세자, 크리스틴 라르가드(IMF).

프랑스 대통령인 마크롱과 데이비드 드 로스차일드.마크롱 씨가 이전에 로스차일드 은행에서 임원을 역임했던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이스라엘의 500셰켈 지폐에 그려진 에드몽·드·로스차일드 남작:

1966년 이스라엘에서 발행된 로스차일드·크네세트 금메달에 새겨진 에드몽·드·로스차일드.이 메달은 로스차일드 가문이 이스라엘 건국과 크네세트(이스라엘 의회)의 설립에 기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19세기에 세계의 금융계를 장악한 뒤, 20세기와 21세기에는 로스차일드 가문이 영국,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로 가계를 확장해 나갔다. 20세기 이후, 눈에 띄지않게 행동하는 전략을 고수해 온 로스차일드 가문은, 현재 로스차일드 은행의 거점이 전세계 40개국 이상에 퍼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빌더버그 회의에 대한 참석은 비밀리에 이루어지고 있다.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

– 프랑코 베르나베, 로스차일드 유럽 부사장, 텔레콤 이탈리아 사장 겸 CEO, 빌다버그 상임 멤버.
– 존 카, 로열 더치 셸 회장, 로스차일드의 대표 기업인 리오 틴트의 이사, 빌더버그 상임 멤버.
– 존 미클루스웨이트,로스차일드가 소유한 이코노미스트 잡지의 전 편집장.
–자니 민턴 베도즈, 에코노미스트 잡지 현 편집장.
–마커스 아기우스, 바클레이즈 은행 임원, 빌더버그 상임 멤버, 캐서린 드 로스차일드와 결혼.
– 조지 소로스(이 연결은 소로스가 보유한 퀀텀 펀드와 로스차일드 이탈리아 SpA, 런던의 NM 로스차일드 & 선즈와의 연계) 그 조직의 간부인 리처드 캣츠 등 금융가와 GC 카를와이스,닐스 O. 타우베 등 다른 공통금융가들을 통해 발견되었다. 그는 1990년, 1994년, 1996년, 2000년, 2002년에 빌더버그 회의에 참석한 기록이 있지만, 그 이후 로스차일드 가문과 거리를 두고 록펠러 가문의 글로벌리스트 계획에 참여하게 되었다.

로스차일드 왕조의 구성원들은 다음 연도에 빌버버그 회의에 직접 참석했습니다.-1998년 에블린·드·로스차일드, NM 로스차일드·앤·샌즈 회장, 이코노미스트지 회장(1972~1989년), IBM 이사(1972~1995년)
-1995년 에마 로스차일드
- 1983년 에블린 드 로스차일드
-1977년 에드몬드·드·로스차일드 남작, 빌더버그 운영 위원회 위원


1973년에 데이비드 록펠러가 설립한, 미국·유럽·일본(현재는 중국도 포함)간의 자본주의를 조정하기 위한 조직인 삼극위원회의 경우, 빌더버그 회의와 달리, 참가자의 대부분이 실업가가 아니라, 지식인이나 싱크탱크의 리더다. 다만, 로스차일드 은행과 쉘 회사 등의 대표자들도 참가하고 있다.

삼극위원회 집행 위원회의 구성원 :

알폰소 코르티나 씨: 로스차일드 유럽 부회장, 로스차일드의 스페인 및 라틴아메리카 담당 시니어 어드바이저, 텍사스 퍼시픽 그룹의 스페인 담당 시니어 어드바이저, 무차 마드리레냐 이사회 멤버, 알리안츠 AG(마드리드) 국제자문 위원회 멤버.
알폰소 코르티나 씨는 1996년부터 레프솔의 사장을 맡았으며, 이후 2004년까지 레프솔‑YPF의 사장을 역임했다. 2007년에 로스차일드 유럽의 경제고문으로 임명된 뒤 부사장으로 취임했다
나이젤 히긴스,로스차일드 그룹 최고경영자(런던)
킨록드의 카 경, 귀족원 의원(런던),스코티시 파워(이벨드로라)부회장, 전 로열 더치 셸의 부회장, 전 주미영국대사, 전 유럽조약 사무국장
(로열·더치·쉘 이사.다국적 광업회사 리오 틴트(로스차일드 가문소유)이사. 영국 귀족원 의원. 주미영국대사(1995~1997년), 외무성 사무차관(1997~2002년), 빌더버그 회의 운영위원회 위원
파나기스·불루미스 씨, NM 로스차일드 고위 고문, 전 그리스 전기통신기구(OTE) 회장 겸 최고경영자(아테네)

로스차일드 은행은 이른바 인터알파 그룹의 뒤에도 위치하고 있다. 1971년에 결성된 이 그룹은 11개의 은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 산탄데르 (스페인),
- 로열 뱅크 오브 스코틀랜드 (스코틀랜드),
-인테사 산파올로 (이탈리아),

-소시에테 제네랄(프랑스), 
- 코멜츠 은행(독일)
 - ING (네덜란드), 
- KBC (벨기에),
- 노르데아(스웨덴),
- 그리스 국립은행,
- 포르투갈의 에스피리토 산토 은행,
- 아일랜드의 AIB.

블랙스톤의 배후에 있는 로스차일드 은행

국제관계와 지정학을 전문으로하는 멕시코 국립 자치대학(UNAM)의 알프레도 자리페 라암 교수에 따르면, 블랙록과 블랙스톤은 모두 로스차일드 은행가 가문이 소유하고 있다.이는 러시아의 RT 네트워크도 같은 주장을 하고 있으며, 금융 미디어 각사는 양사의 임원들이 직책을 공유·교환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실제로 제이콥 로스차일드 경은 블랙스톤 국제자문위원회의 위원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블랙스톤의 CEO인 스티븐 슈워츠만은,미중경제의 가교역할을 맡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두 사람과 원활한 대화를 유지하고 있다. 슈바르츠만은, 트럼프 정권하에서 전략정책포럼(SFP)이라고 불리는 자문위원회의 의장을 맡고 있다. (블랙록의 래리 핑크 씨와 함께). 중국에서는 최근, 청화대학내에 중요한 싱크탱크인 슈바르츠만 컬리지를 설립했다. 이 대학은, 양국간의 협력과 "지정학적 안정"을 촉진하는 리더의 양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슈바르츠만은 예일대학의 비밀결사인 "스컬 앤 본즈"의 멤버이기도 하다(동 단체에는 조지 부시와 존 켈리 등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

전략정책포럼의 멤버들은, 인원수가 적은 빌더버그 회의와 같은 구성을 가지고 있다.

    스티븐 A. 슈워츠만(포럼 의장), 블랙스톤 회장, CEO, 공동창업자.
    폴 앳킨스 그는 파트맥 글로벌 파트너스 LLC의 최고경영자(CEO)이며, 전 증권거래위원회 위원이다.
    메리 바라, 제너럴 모터스 회장 겸 CEO.
    토비 코스그 로브, 클리블랜드 클리닉 CEO.
    제이미 다이몬, JP모건 체이스 회장 겸 CEO.
    라리 핑크, 블랙록 회장 겸 CEO.
    밥 아이거, 월트 디즈니 컴퍼니 회장 겸 CEO.
    리치 레서, 보스턴 컨설팅 그룹 사장 겸 CEO.
    월마트 스토어즈 사의 사장 겸 CEO, 더그 맥밀런 씨.
    짐 맥너니, 보잉사 전 회장, 사장 겸 CEO.
    아데바요·오군레시, 글로벌 인프라스트럭처 파트너스 회장 겸 매니징 파트너.
    지니 로메티, IBM회장 겸 사장 겸 CEO.
    케빈 워슈, 후버 연구소 셰퍼드 가문의 특별 객원 경제학 연구원, 전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이사.
    마크 와인버거, EY 글로벌 회장 겸 CEO
    잭 웰치, 전 제너럴 일렉트릭 회장 겸 CEO.
    다니엘 야긴 씨, 퓰리처상 수상자이자 IHS Markit 부회장.


중국과의 연계

세계 대부분의 국가와 마찬가지로,중국도 균질한 블록(하나의 세력)은 아니다. 러시아의 분석가인 다니엘 에스토린에 따르면, 3개의 주요 권력그룹을 확인할 수 있다. 각각이 독자적인 이익을 가진 역사적인 씨족(氏族)에 의해 대표되어, 아시아 대국의 통치에 있어서는 동맹을 맺고 있지만, 통합된 것은 아니다.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배한 민족주의 그룹("황룡")은 시진핑에 의해 대표되며, 푸틴의 러시아와 도널드 트럼프가 대표하는 미국의 전통적인 산업강국과 동맹을 맺고 있다. 두번 째는 공산주의·마오쩌둥주의 그룹("적룡"). 3번째 그룹은 리버럴(자유주의)파("청룡")로, 신흥억만장자와 기업가들로 구성된 자본주의 부르주아 계층이며, 다보스 회의와 미국의 딥스테이트, 특히 민주당의 글로벌리스트 세력과 연결되어 있다. 이 마지막 그룹이, 영국 및 다양한 국제기구와의 협정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동 그룹은, 거대한 투기꾼인 조지 소로스가 중국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할 때 언급하는 것이며, 동시에 시진핑과 블라디미르 푸틴을 서방국가들의 최악의 적이라고 부른다. 로스차일드 은행의 공식설명에 따르면, 중국과의 관계는 이미 1830년에 시작됐으며, 이 은행은 마오쩌둥 혁명후인 1953년에, 재빠르게 관계를 재구축한 은행 중의 하나였다.

중국과 로스차일드 가문의 권력구조와의 연계는,금융면에서 복잡한 관계에 의해 형성되어 있다. 중국투자유한책임회사(CIC)는, 중국의 외환보유고의 대부분을 관리하고 있다. 2015년, CIC는 8,130억 달러를 운용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사회는 중국정부관계자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자문위원회에는 존 손턴(골드만삭스, HSBC, 바릭 골드의 임원이며 슈워츠만 대학 명예펠로우)과 존 맥(모건스탠리 임원)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2011년 6월 21일, 서 이블린 드 로스차일드 경과 레이디 린 드 로스차일드 부부와 함께 중국출장

         중국의 왕치산 부총리(오른쪽)와 제이콥 로스차일드 씨(2012년 4월 26일, 베이징에서). (신화사/사환치)

                알렉산드르 드 로스차일드 씨와 CEFC 차이나 에너지 회장인 엽건명 씨(2017년 5월, 상하이).

2013년부터,로스차일드 은행은 보유하고 있는 금보유량의 일부(전세계 금보유량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음)를 중국에 재분배하겠다고 발표했다. 동 은행의 공식 웹사이트에는,"로스차일드 가문이 중국과 처음 접촉한 것은 183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우리 은행은 마오쩌둥의 공산주의 혁명의 시작으로부터 불과 4년 뒤인 1953년 이후,관계를 재구성한 최초의 서양 비즈니스 기관 중의 하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2014년 3월 26일, 시진핑 국가주석과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중국국제공상그룹(CIIC)의 왕천일 회장과 로스차일드 그룹의 데이비드 로스차일드 회장이 협력협정에 서명했다.

2015년, 영국은 G7국가 중에서 최초로 아시아 인프라 투자은행(AIIB)에 가입했다."백악관은, 영국이 중국이 지원하는 새로운 금융기관인 아시아 인프라 투자은행(AIIB)설립에 참여한다는 결정에 우려를 표명했다.워싱턴은, AIIB가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 아시아개발은행과 경쟁하려 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우리는, 영국이 항상 중국에 동의하는 경향을 우려하고 있다. 이는 신흥국을 상대하는 최선의 방법이 아니다’라고 미당국자가 파이낸셜 타임즈에 전했다”며, 스페인의 엘 파이스 신문은 2015년 3월 13일자 기사 "영국의 중국 프로젝트 지원이 세계의 금융질서를 뒤흔들다"로 보도했다.

                2015년 7월 15일, 영국주재 중국대사관에서 제이콥 로스차일드 씨와 함께 찍힌 중국대사

그리고 마침내 2015년 10월 20일, 시진핑 국가주석은 런던에서 영국과의 협정에 서명했다.이 회담에서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함께 왕실마차에 탑승해 여왕 궁전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다른 합의사항 중에서도, 앞으로 금으로 뒷받침된 페트로 위안의 발행과 런던의 금융시스템을 통한 거래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어, 중국은 점차 미국의 페트로 달러를 대체할 수 있게 되었다. 스페인 신문인 엘 파이스는 이번 회담을 “시진핑 주석의 방문은 중국과 영국의 ‘황금시대’ 개막”이라고 보도했다.https://www.youtube.com/watch?v=eYSQVmR3OTM

https://www.youtube.com/watch?v=BzoigLTDBwY

영국은 중국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강화하고 있으며,사진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시진핑 국가주석의 투샷(2015년)이다.

                                                       중국·상하이에 있는 HSBC의 본사.

중국, 영국왕실, 로스차일드 가문을 연결하는 또 다른 주요한 금융상의 연결은,HSBC(홍콩상하이은행)다. HSBC는 아편전쟁 후,홍콩과 상하이에 지점을 설립했으며, 1865년 이래 지속적으로 영업하고 있다. 상하이에 있는 역사적 건축물의 중앙 돔에는, 프리메이슨의 상징이 풍부하게 그려져 있다(런던의 영국연합 그랜드 롯지의 돔과 비슷한 양식으로, 오각별, 다윗의 별, 태양과 달, 황도 12궁 등).

홍콩에 있는 위풍당당한 본사건물은,1985년에 당시의 회장에 의해 낙성식이 거행되었다. 마이클 샌드버그 남작은, 1977년부터 1986년까지 HSBC의 최고경영자(CEO)를 역임했다. HSBC 빌딩의 옆에는, 초록색과 파란색 건물이 들어서 있다. 이곳은 로스차일드 가문보다 훨씬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명성도 높지만, 인지도는 훨씬 낮은, 유력한 바루크 가문이 소유한 스탠다드 차터드 은행의 본사건물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창시자인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1744~1812)는 "국가의 통화를 통제해 주면, 그 누가 법을 만들든 상관없다"는 명언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그가 실제로 그렇게 말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로스차일드 가문이 1913년에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지배권을 잡았다는 사실은, 그의 말이 진실이었음을 증명할 뿐이었다.

오스트리아계 가문의 상속인은, 1816년에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로부터 합스부르크 제국의 세습남작의 직위를 받았다. 영국계 가문은, 빅토리아 여왕에 의해 귀족으로 승격되었다.

1832년, 그레고리우스 16세 교황이 카를 마이어 폰 로스차일드와 회담했을 때,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로스차일드 가문이 교황의 반지에 키스할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1868년에 제임스 드 로스차일드가 사망한 뒤, 장남 알폰스 로스차일드가 가업인 은행을 이어받아,이스라엘 건국계획을 지원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870년대에는, 로스차일드 가문은 알리언스 이슬라에리트 유니버셀에 연간 약 50만 프랑을 기부했다.

제임스·드·로스차일드의 아들 중에서 막내인 에드먼드·제임스·드·로스차일드 남작은, 1882년에 리션·레치온에게 이스라엘 최초의 식민지를 건설하는 사업을 지원하고, 오스만 제국의 지주로부터 현재의 이스라엘국가를 구성하는 토지를 취득했다.

1924년, 그는 유대인 정착협회를 설립하고, 22.36평방킬로미터 이상의 토지를 구입했다.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텔아비브에는 그의 이름을 딴 로스차일드 대로가 있으며, 또한 브루뉴=비앙쿨, 메투라, 지크론·야아코브,리션·레치온, 로슈·피나에 있는 에드몽·드·로스차일드 공원 등 이스라엘 전역에도 그의 이름을 딴 장소가 몇 군데나 존재한다.

제임스 알만 드 로스차일드는 이스라엘 국회(크네세트)의 건물을 이스라엘 국가에 기부하는 형태로 자금을 제공했으며,대법원 건물은 도로시 드 로스차일드가 기증한 것이다.

대통령 집무실의 입구에는,로스차일드 부인이 당시의 이스라엘 총리인 시몬 페레즈에게 보낸 편지가 전시되어 있다.그 편지 안에서,그녀는 대법원을 위한 새로운 건물을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발포어 선언

로스차일드 아카이브의 공식 웹사이트에 따르면,1916년 이후, 영국은 시오니즘에 대한 지원의 대가로, 점점 부담이 커지는 제1차 세계대전의 증가하는 비용을 시오니즘이 부담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더욱 중요한 점은, 외무성의 정책입안자들은, 시오니스트가 미국을 전쟁에 참전시킬 수 있도록 설득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정치 엘리트와 기득권층(에스텝리시먼트)사이에는, 시오니즘을 지지하는 감정이 상당히 강했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총리와 발포어 자신을 포함해, 영국 지도자들의 대부분은 독실한 기독교 시오니스트였다

최종적으로 합의가 이루어져,시오니즘은 영국으로부터 팔레스타인을 양도한다는 약속을 얻었고,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으며, 그리고 그 결과는 뒤집혀, 호엔초렐른 가문이 이끄는 독일 제국, 로마노프 가문이 이끄는 러시아 제국, 오스만 가문이 이끄는 오스만 제국, 그리고 역사적인 합스부르크 가문이 이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붕괴했다.

협정체결을 위한 공식협상은 1917년 초에 시작되었다.같은 해 봄에는 미국이 선전포고를 하고, 11월에는 이미 상당수의 부대를 파견한 바 있다. 이것은 협정의 최종 합의와 거의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버나드 바룩

바룩 일가

바룩 가문은 1620년에 예루살렘에 도착했지만, 일부 연구자들은, 그 기원을 로마 제국 말기인 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보고 있다.

현재, 이 일족의 일원인 다윗 바룩 라우 씨가 이스라엘 최고의 랍비직을 맡고 있다.

미국내에 있어서 시오니즘 운동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버나드 바룩이 꼽힌다. 그는 20세기 전반에 20세기 후반의 헨리 키신저와 동일한 역할을 수행했다. 바룩은 5명의 미국대통령의 주요고문을 역임했으며, 1917년 혁명이후에는 소련과 거래를 하면서(제철소, 트랙터, 자동차, 장갑차의 개발 등), 금융투기꾼이자 은행가이기도 했다. 바룩은 군수산업에도 막대한 투자를 진행하고 있었다.

바룩은 우드로 윌슨의 대통령 선거운동에 자금을 제공했으며(윌슨은, 미국민간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를 설립한 대통령이다), 국방회의자문위원회를 통해 윌슨의 고문을 맡았고, 전시산업위원회(WIB)의 위원장도 역임했다. 1929년의 주식시장의 폭락을 예견하고, 1년 전에 보유주식을 모두 매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프랭클린 D. 루즈벨트와 해리 트루먼의 고문을 역임했다. 전후, 바룩은 미국의 핵개발계획을 감독했으며, "냉전"이라는 말을 만든 인물로 알려져 있다. 바룩이 소련의 핵무기보유에 반대했기 때문에, 스탈린은 바룩와 거리를 두고, 독자적인 핵개발계획을 지속했다.

처칠은 영향력이 있는 버나드 바룩과 함께 차를 타고 움직였으며,바룩은 처칠과 아이젠하워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발포어 선언으로 알려진 공식 선언은, 1917년 11월에야 비로소 발표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참상은, 전쟁종전 후 불과 3년 만에 이스라엘 건국에 이상적인 상황을 만들었다. 이것은, 약 70만명의 팔레스타인인이 고향에서 강제로 추방되는, 나크바(대참사)의 시작이기도 했다.

국가가 세워지자, 로스차일드 가문은 공적인 자리에서 물러나, 눈에 띄지 않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2012년, 그들은 금융비즈니스 파트너십을 통해 록펠러 왕조와의 관계를 공식화했다. 이 관계는, 협력 시기와 대립 시기 등, 기복이 있었다. 안드레이 풀소프 등 러시아의 분석가들은, 예를들면 제2차 세계대전에서 록펠러 가문이 로스차일드 가문을 이겼다고 주장하고 있다. 2012년, 로스차일드 가문의 영국지류인 제이콥 로스차일드는, 록펠러 파이낸셜 서비스사의 37%를 인수했는데, 이것은 로스차일드 가문이 록펠러 가문에 대해 상대적으로 세계적인 패배를 인정한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info).

                                                 제이콥 로스차일드, 제4대 로스차일드 남작.

                                 제이콥 로스차일드가 위즈던 매너에서 영국의 보리스 존슨 총리와 면담.

제이콥 로스차일드 경(영국계)과 데이비드 록펠러 (2012년, 사진: 바니티 페어지, 로스차일드 가문 특유의 건물에 눈에 띄는 빨간색에 주목).

2012년 로스차일드 가의 영국지부와 록펠러 가의 동맹에 관해, 러시아의 분석가이자 역사가인 안드레이 풀소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포브스와 블룸버그 등이 발표하는 세계의 초부유층 순위는, 대중을 속이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게이츠와 버핏의 600억~700억 달러는 대체 무엇일까? 가장 큰 부는, 수세기 동안 축적된 가문의 부다. 가장 보수적인 전문가의 추정에 따르면, 로스차일드 가문의 총자산은 3조 2000억 달러(러시아어로는 "조"지만, 그들은 제국단위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를 초과한다. 하지만, 아무도 확실한 것은 알지 못한다. 그들은 부를 과시하기 위해 수세기 동안 부를 축적해 온 것이 아니다. 1818년, 로스차일드 가문의 은행가들은 처음으로 유럽정부를 굴복시켰다. 19세기 내내 그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가족으로 여겨졌다. 록펠러 가문은, 그보다 1조 달러가 적은 것 같다. 왕조의 창시자인 존은, 달러기준으로 세계최초의 억만장자였으며,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이었다. 포브스지는 그의 자산을 높이 평가했다. 당시의 자산 규모는 3,180억 달러. 2007년 말의 달러환율로 환산하면 3,180억 달러다. 게이츠, 버핏, 슬림… 그들과 비교하면, 마치 거지와 같다.

"로스차일드 가문과 록펠러 가문. 각각의 씨족에게 400억 달러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라는 것은 여러분도 아실 겁니다. 따라서 일부 유명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듯이, 400억 달러를 나눠서 위기에 대처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저에게는 민감하게 느껴집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리스크분산을 위해 그 소액자금을 모아두는 것은 양가의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 됩니다. 그 경우, 그들은 그런 뉴스를 공표할 일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화제가 되고 있는 동맹의 또 다른 이상한 점은, 자본의 분배입니다. 록펠러 가문은 신탁에 370억 달러를 투자했고, 로스차일드 가문은 겨우 30억 달러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책임자입니다. 이 협정은, 일족의 당주(当主:현재의 주인)로 인정받는 데이비드 록펠러(6월에 98세가 됩니다)와, 겸손하게 말해도 "일가의 실권을 잡고 있다"고는 할 수 없는 제이콥 로스차일드가 서명했습니다. 제 의견으로는 로스차일드 가문이 록펠러 가문을 이겼다고… 20세기 전체는 특히 이 두 가문 간의 투쟁의 이면에서 사태가 전개되었다. 세기 초, 유럽의 로스차일드 가문이 정점에 서 있었다. 하지만 록펠러 가문은 2차례의 세계 대전에서 승리했다. 그리고, 절정은 소련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차르 시대에 러시아에 들어갔다.그들의 라이벌은 스탈린과 함께 그들을 옆으로 밀어냈다. 제1차 5개년 계획과 산업화에 자금을 지원했다. 데이비드 록펠러는 흐루쇼프, 코스이긴, 고르바초프와 만났다… 20세기 후반, 로스차일드 가문은 복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목표를 달성했다. 이는 록펠러 가문이 끝났다는 뜻은 아니다. 세계 상위 20개 가문 간의 격렬한 경쟁은, 케네디 가문에 일어난 것처럼, 라이벌을 물리적으로 말살하는 것에 의해 비극적으로 끝나는 일은 절대 없다. 톱 100에도 들지 못했다. 처음의 20위에서는, 보통 "물의 휴전"이 성립한다. 이 용어는, 키플링의 모그리라는 책에서 따온 것이다. 기억하고 있겠지? 정글에 가뭄이 발생하자, 코끼리가 코로 그것을 알린다. 휴전 중에는 안테로프가 포식자의 공격을 두려워하지 않고 호랑이 옆에서 열심히 물을 마신다. 돌의 정글에도 "물의 휴전"이 있다. 알렉산드르 지노비예프의 저서 '틈새의 봉우리'의 상징적인 표지를 떠올린다. 두 마리의 쥐가 오른쪽 앞발로 서로를 졸라 죽이고, 왼쪽 앞발로 서로를 잡고 있다. 이 일러스트는 세계권력의 정점에서의 상황을 완벽하게 반영하고 있다.

                                                제이콥 로스차일드 경과 에블린 드 로스차일드.

                                            이블린 드 로스차일드와 영국의 찰스 왕세자.

                                                   에블린 드 로스차일드와 클린턴 가문.

영국지점인 에블린·드·로스차일드와 프랑스 지점의 데이비드·드·로스차일드가, 1808년에 런던에서 NM 로스차일드 & 선즈 은행을 설립하고, 현재도 영업을 이어가고 있는 네이선·메이어·로스차일드의 초상화 옆에 서 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나폴리 지파

로스차일드 가문의 나폴리 지점은, 1822년부터 역사가 깊은 메디치 은행(피렌체의 메디치 은행은 1397년에 설립)과 관계를 맺었다. 카를 폰 로스차일드는, 나폴리 왕국의 재무부 장관이자 왕국의 재무대신이었던 루이지 데 메디치와 협력해, 이 지역을 대표하는 은행이 되었다.

                                                             카를 마이어 폰 로스차일드

1826년까지,카를 폰 로스차일드는,후에 벨기에 왕이 될 작센=코블루크 가문의 레오폴드를 나폴리 별장에 초대했다. 1829년에는 시칠리아 총영사로 임명되었다. 1832년, 로스차일드는 유대교 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신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로부터 성 게오르기오스 훈장(콘스탄티누스 훈장)을 수여받았다.

로스차일드&피그리의 CM은행은, 교황령, 나폴리 왕국, 파르마 공국, 토스카나 대공국에 대출을 해주었다.

영국의 분가와의 관계가 계속해서 좋지않아,이탈리아 통일의 과정에도 적응하지 못했고, 1863년에 은행을 폐쇄하게 되었을 것이다.

다양한 저자들은, 르네상스 시기를 대표하는 재벌 중의 하나인 고대 메디치 가문과의 이 연결은, 로스차일드 가문이 메디치 가문의 수세기에 걸친 재산의 상징이 되었음을 시사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메디치 가문은, 레오 10세, 클레멘스 7세, 레오 11세 등 여러 교황을 배출했을 뿐 아니라, 다수의 공국과 후국을 소유했다. 현재 메디치 가문의 당주는, 1957년생 오타비아노 데 메디치 오타비아노 디 토스카나 왕자와, 1974년생 줄리아노 데 메디치 디 토스카나 디 오타야노 왕자가 있다.오타비아노 가문은, 고대 로마의 옥타비아 씨족의 후손이며, 로마 황제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조상에 해당한다.

                                                             오타비아노 드 메디치 왕자

로스차일드 가문과 흑인귀족과의 연관성은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다.현재, 프랑스 지부의 당주이자 세계 유대인 회의의 의장인 데이비드 루네 드 로스차일드는, 1974년부터 올림피아 드 알도브란디니 공주와 결혼했다. 알도브란디니 가문은, 역사 깊은 볼게제 가문과 팔네제 가문과 연관이 있다. 이포리토 알도브란디니는 1592년에 교황 클레멘스 8세를 역임했다.

                     현재 같은 이름의 가족이 소유하고 있는 빌라 알도브란디니는, 16세기에 지어진 것이다.

                                        데이비드 르네 드 로스차일드와 올림피아 알도브란디니 공주.

로스차일드 가문과 카를 마르크스의 관계

폴 H.코흐는 저서 '일루미나티'(플라네타 출판, 부에노스아이레스, 제3판, 2005년, 11쪽)에서, "백과사전에는 보통 실려 있지 않지만, 원본은 대영박물관의 문서 컬렉션에 보관되어 있다. 이른바 '정의의 인간동맹’ 수표에 서명한 사람은 네이선 로스차일드이며, 마르크스는 그 수표에 의해 유명한 저작에 대한 보수를 받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관계성은, 무정부주의 지도자이자 제1국제당에서 마르크스의 동지였던 미하일 바쿠닌에 의해서도 지적된 바 있다.

1871년 12월에 발표된 '볼로냐의 국제주의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유대인 그룹과의 갈등이 격화되는 가운데,바쿠닌은 마르크스를 이들 그룹의 대표자로 보고, 마르크스와 로스차일드 가문의 관계를 지적하고 있다."(…) 그는 현재, 적어도 대부분은, 한편으로는 마르크스의 뜻대로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뜻대로 된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반동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 마르크스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반대로, 마르크스는 본능적인 매력과 존경심에서, 로스차일드 가문의 금융천재에게 자연스럽게 끌리게 된다유대인의 연대, 역사를 통해 지속되어 온 이 강한 연대가 그들을 결속시킨다. 이것은 이상하게 느껴질 것이다. 사회주의와 거대은행 사이에 대체 어떤 공통점이 있는 걸까? 그것은, 마르크스의 권위주의적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가 국가의 강력한 중앙집권을 요구하고, 중앙집권이 이루어지는 곳에는, 반드시 중앙은행이 존재한다.

오늘날은 반유대주의로 비판받을 바쿠닌의 이러한 발언은, 카를 마르크스 자신이 1843년의 초기 저서 '유대인 문제에 대하여'에서 언급한 내용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그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대교의 세속적 기반이란 무엇인가? 실천적 필요성, 자기이익이다. 유대인이 실천하는 세속적 컬트란 무엇인가? 고리대금업자다. 그들의 세속적 신이란 무엇인가? 돈이다. (…) 유대인들은, 금전의 힘을 장악하는 것뿐만 아니라, 금전이 그것을 통해, 혹은 그것이 없이 보편적인 힘이 되고, 유대인의 실천적 정신이 기독교인의 실천적 정신이 되었다는 점에서, 유대적 방법으로 스스로를 해방시켰다. 유대인은 , 기독교인이 유대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스스로를 해방시켰다. (…) 유대인의 실천적 정치력과 그들의 정치적 권리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은, 정치와 금전의 힘 전반 사이의 모순이다. 전자는 이상적으로는 후자를 능가하지만, 실제로는 후자의 하인에 불과하다. 따라서, 유대인의 일신교는, 실제로 많은 요구를 가진 다신교이며, 화장실조차도 신의 법의 대상으로 삼는 다신교다. 실천적 필요성, 이기주의는 부르주아주의의 원리다." 사회는, 부르주아 사회가 스스로의 내부에서 정치국가를 완전히 창출하면, 그 순수함을 그대로 드러낸다. 실용적 필요성과 이기주의의 신은 화폐다. 화폐는 이스라엘의 질투심 깊은 신이며, 다른 어떤 신도 그 앞에서 정당하게 승리할 수 없다. 화폐는 인류의 모든 신들을 굴복시켜 상품으로 바꾼다. 화폐는 만물의 보편적 가치이며, 그 자체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화폐는, 인류의 세계와 자연계를 모두를 포함한 전세계에서, 그 고유한 가치를 빼앗아 갔다. 화폐는 인간의 노동과 존재의 본질이며, 인류에게 소외되어, 이 이질적인 본질이 인류를 지배해, 숭배받고 있다. 유대인의 신은 세속화되어, 보편적인 신이 되었다. 환어음(Bill of Exchange은 어음발행인(채권자)이 제3자(지급인)에게 일정한 금액을 지정된 날짜에 수취인(또는 소지인)에게 무조건 지급해 줄 것을 위탁하는 요식 유가증권)이 바로 유대인의 진정한 신이다. 그들의 신은, 환상적인 환어음에 불과하다. (…) 유대교는 부르주아 사회의 대관(戴冠)과 함께 정점에 이르지만, 부르주아 사회는 기독교 세계에서만 그 영광을 찾는다. 기독교의 보호 아래, 모든 국가적·자연적·도덕적·이론적 관계가 인간에게 순수하게 외부적인 관계로 변한다면, 시민사회는 국가생활과 완전히 분리되고, 인간의 모든 보편적 유대가 끊어지며, 그 유대가 이기주의와 이기적인 욕구로 대체되어, 인간세계는 서로 적대감을 가지고 원자론적으로 맞서는 개인의 세계로 녹아들 가능성이 있다. (…) 유대인의 사회적 해방은, 사회의 유대교로부터의 해방인 것이다.

바쿠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인 카를 마르크스가 쓴 그런 문장도, 오늘날에는 "반유대주의적"이라는 꼬리표가 붙을 것이다.

바쿠닌의 "마르크스가 로스차일드 가문으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았다"라는 비판을 믿는다면, 마르크스가 이후의 모든 저작을 산업자본가계층과 프롤레타리아트의 대립촉진에 중점을 두고,금융권력의 분석을 거의 하지 못하는 배경으로 몰아넣은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마르크스의 날카로운 자본주의 분석에서, 대영제국의 재정을 지탱한 중심인물인 로스차일드 가문은, 명백히 존재하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망명생활의 마지막 34년을 런던에서 보내며, 대영제국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반시오니즘은 "반유대주의"가 아니다

시오니즘의 배후에 있는 이 거대한 조직을 폭로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을 공격하는 최선(그리고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반유대주의자"라고 비난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누구도(철학·예술·과학 등에 큰 공헌을 해온) 민족·문화·종교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을 피하기 위해 바로 이런 편견의 어둠에 숨어 있는 소수의 왕조가문(워버그 가와 로스차일드 가 및 그들의 다양한 분가 등)에 의해 구축된 금융권력구조를 비판하고 있다는 점은 명백하다.

이스라엘 국내에도, 베체렘과 같은, 시오니스트 국가를 조직적으로 비난해 온 인권단체가 존재한다.

                               http://www.btselem.org/press_releases/20160720_fatalities_in_gaza_conflict_2014

많은 유대인 지식인들이 이스라엘과 그 정책에 반대하고 있다.

국제유대인 반시오니즘 네트워크(IJAN)는,2008년부터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멤버 중에는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하요 마이어 씨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웹사이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www.ijan.org/

로스차일드 왕조의 계보

영국 지사:

셋째 아들인 네이선 메이어 로스차일드는 영국으로 건너가, 맨체스터에 정착했지만, 이후 런던으로 옮겼다. 그는 먼저 맨체스터에서 섬유업 인력 파견회사를 설립하고,그 뒤 런던에서 N.M. 로스차일드 & 선즈를 창업했다. 1806년에 한나 바렌트 코헨과 결혼해, 7명의 자녀(딸 3명, 아들 4명)를 두었다.

 

프랑스 지점:

다섯째 아들인 제임스 메이어 드 로스차일드는 프랑스로 건너가,파리에서 로스차일드 형제사를 설립했다. 그는 1824년에 자신의 조카인 베티 살로몬 드 로스차일드와 결혼했다. 그녀와 사이에 다섯 명의 자녀(딸 한 명과 아들 네 명)를 두었고, 그 중 네 명은 로스차일드 가문끼리 결혼했다.

오스트리아 지점:

차남인 살로몬 마이어 폰 로스차일드는 오스트리아로 건너가, 비엔나에 SM 폰 로스차일드를 설립했다.
그는 캐롤라인 스턴과 결혼해, 그녀와 사이에 두 자녀(딸과 아들)를 두었다.

 

나폴리 지점:

넷째 아들인 카를 마이어 폰 로스차일드는 나폴리로 가, CM de Rothschild & Figli를 설립했다. 그는 1818년에 아델하이트 헤르츠와 결혼했다. 그녀와 사이에 다섯 명의 자녀(딸 한 명과 아들 네 명)를 두었으며, 모두 가족 내에서 결혼했다.

 



이 기사에서 제시된 의견이나 분석은, Kontrainfo 편집팀의 견해를 반드시 반영하는 것은 아닙니다.우리는 다양한 관점에서 현실을 제시하므로서, 의견교환을 촉진하고, 공공 및 학술적 논의에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러한 의견은 언제나 비판적으로 검토되어야 합니다.

 

글의 출처와 사진보기는 이하 원문 링크를 이용하세요.

 

 

                                            https://note.com/fake567/n/n78a8ce26596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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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 록펠러 왕조. 글로벌리스트 프로젝트.유엔, 에너지,금융분야에서의 전략적역할

2026年5月20日 Azzurra https://cafe.daum.net/flyingdaese/WK4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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