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2:23-3:21절
22절을 보면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다’고 말한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야 제자들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즉 성경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23절은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다’고 말한다. 제자들도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야 믿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이름을 믿었다는 것은 그들이 믿은 믿음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을 많이 말한다.
믿음이란 단어는 히브리어로는 에문 @WmaE (faith) 에무나 hn;Wma> (faith) 에매스 tm,a> (faithfulness)등 명사형으로 몇번 씌어져 있고 보통 ‘믿는다’는 동사 아만 @m'a; (believed)이 비교적 많이 씌어져 있다.
신약성경에서는 헬라어 명사 피스티스 pivsti" (faith) 동사 피스튜오pisteuvw (피스튜오)라는 단어다.
믿음이란 것은 인간관계 속에서 신뢰를 말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 pivsti" (faith)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의 신뢰를 말한다. 즉 하나님은 인간과 계약(언약)관계를 맺으시고 인간이 절대적으로 신뢰할 것을 요구하셨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선친들은 하나님께서 먼저 보여 주신것에 대한 반응이 있었다. 즉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을 보고 그들은 믿고 그 명령에 복종했다. 즉 하나님의 말씀, 약속에 대한 전적 신뢰 이것이 믿음 pivsti" (faith)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배신행위로 말미암은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신 일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셨다. 그리고 이 십자가의 복음에 명시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 pivsti" (faith)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속죄와 구원에의 신뢰는 인간이 그리스도의 것으로 되고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교제를 가지게 됨을 말한다. 즉 믿음 pivsti" (faith)이란 것은 어떤 것을 신뢰한다는 의미가 아닌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보여주셨고 그 보여주심에 절대적 순종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되는 것을 말한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수없이 많은 기적을 보았다. 병든자를 치유하시고 걷지 못하던 자가 걷게 되고 눈먼자가 눈을 뜨게 되고 심지어 죽은자도 살아나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그때마다 제자들은 믿었다고 말한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표적을 보고 제자들은 이렇게 반응한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요2:11절)
그러나 그 믿음은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기적을 통해 자신들이 예수님을 신뢰했다는 것이지 그 기적을 통해 표적을 믿은 것이 아니다. 즉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이심을 믿은 것이 아니라 나타난 현상을 믿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2:22절에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다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서 그분이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의미는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23절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다’고 했지만 여기서 말하는 믿음역시 제자들과 같은 믿음이다. 즉 그들이 믿은 믿음은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24절에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24절에서 ‘의탁’이라는 단어가 pisteuvw (피스튜오) 라는 단어다. 즉 그들은 나타난 현상을 보고 믿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말은 그들이 당신이 그리스도이심을 그들이 알지 못했다는 것을 말한다.
25절은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라’
즉 예수님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다 아신다. 그래서 그들을 속마음을 다 아셨다는 것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났다. 죄인으로 태어난 인간이 누군가를 신뢰 할 때는 자기의 이성적 판단의 옳고 그름으로 신뢰하기도 하고 신뢰하지 않기도 하는 것이다. 이성적 판단을 성경은 육체라고 말한다. 육체 가운데 사는 자는 절대로 하나님의 약속 앞에 순종할 수 없다. 순종하는 것 같아도 결정적인 순간에 배신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들이 믿었다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래서 3장에 바리새인 디모데가 등장하는데 디모데를 통해서 성경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었고 유대인의 지도자였다.(1절) 당시 바리새인은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 구원의 필수조건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율법적으로 완벽하려고 했고 많은 사람들은 그런 바리새인들을 존경했다. 오늘 니고데모는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밤에 예수님께 찾아왔다.
그리고 예수님께 말한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2절)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분이 행하신 행동이 하나님이 행하신 표적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의 말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절)
니고데모도 표적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예수님도 표적에 대한 이야기를 말씀하신 것이다.
단지 니고데모는 표적의 의미를 나타난 현상 즉 기적으로 생각하고 표적이라고 말했지만 예수님은 표적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요 그 죽음과 부활을 경험한자가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은 ‘거듭난다’라는 단어를 쓰였다.
‘거듭난다’라는 단어는 a[nwqen (아노덴)이란 단어다.
이 단어는 성경에 여러구절에 등장한다. 예를들면
마 27:51절을 보면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a[nwqen)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위로부터(a[nwqen)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요3:31절)
여기서 ‘위로부터’라는 단어가 아노덴(a[nwqen)이다. 즉 아노덴(a[nwqen)은 꼭대기 부터의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다.
또한
‘일찍부터(a[nwqen) 나를 알았으니 저희가 증거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행 26: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a[nwqen)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수 없느니라’(요 3:3절)
‘내가 네게 거듭나야(a[nwqen)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요 3:7절)
즉 아노덴(a[nwqen)은 '하늘로부터' '처음 또는 시작부터' ‘다시’ ‘새롭게’라는 의미다.
거듭난다 a[nwqen (아노덴)는 것은 ‘원대대로 돌아간다’는 의미다.
원래의 시작점은 하늘에서부터 시작된 시작점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창세전에 우리가 태어나기전에 자녀로 부름을 받았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안에서 그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절)
비록 세상에 태어 날 때는 사탄이 아비요 죄인의 신분으로 태어나지만 원래시점 우리가 죄인으로 태어나기 전 즉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신 시작으로 새롭게 돌아가는 것이 거듭나는 것 a[nwqen (아노덴) 이다.
3절에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가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 것이라고 역설적으로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거듭난다는 의미를 이성적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예수님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4절)라고 물은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거듭난다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물’은 성경에서 ‘정결케 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정결케 된 사람이 하나님의 성령을 받게 된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엡 5:26절)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22절)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침례(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행 22:16)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전 6:11절)
거듭난다는 것은 결국 원래시작점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그 시작점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물과 성령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5절을 보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으로 되어있는 성령은 원문성경에는 pneu'ma (퓨뉴마 the Spirist)라는 단어다.
앞서 1:33절에서도 언급했지만 성령과 영은 분명 다르다.
여기서는 성령이 아니라 ‘영’이다. 즉 ‘그리스도’를 말씀한다.
5절은 ‘물’은 회개의 침례를 말하는 것이고 ‘영’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말한다.
결국 사람이 거듭난다는 것은 회개와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믿음의 본 즉 표적이 되셨다.
그래서 믿음은 pivsti" (피스티스) 하나님께서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그리스도 부활하신 것을 보여주셨고 그 보여주심에 절대적 순종으로 함으로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되는 것을 말한다.
6절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
창세전에 그리스도안에서 택함받지 않은 자녀로 태어난 사탄의 자녀는 사탄의 자녀지만 ‘영’ 즉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의 자녀라는 것이다.
6절에서 두 번 언급하고 있는 ‘영’은 5절의 물과 성령(개역개정/ 원문에는 영)으로 되어있는 성령과 같은 단어다. 즉 5절의 성령도 ‘영’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다. (성령은 요16장을 묵상할 때 자세히 묵상하기로 한다)
8절에서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그러하니라’ 여기서 성령으로 된 단어는 원문에는 ‘영’이다. 8절의 의미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녀는 우리가 왜 그렇게 태어나야 되는지 모르는 주님의 주권아래 태어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바람이 임의로 분다.
어디서 시작됬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구원이 나의 신앙적 행위로 오지 않는다.
내가 믿음을 갖는 어떤 종교적 행위로 구원받는게 아니다.
내가 영접하는 것도 아니다.
때가되면 그리스도의 복음이 성령을 통해서 들려오게 된다.
성령을 통해서 죄 의 심판이 무엇인지를 알게되고 그때 회개 하게된다. 그리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요16장)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니고데모는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냐고 묻는다.(9절)
예수님은 네가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10절) 이 말씀은 네가 율법안에서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지만 너희는(여기서 너희는 율법아래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증언을 받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며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는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느냐고 말씀하신다.
인간은 누구나 보고 믿게 되있다. 보지 않으면 믿을 수 없는게 인간이다. 그런 존재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예수님은 앞서 2:2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라’
예수님은 인간의 속마음을 다 아시는 분이신데 그런 인간에게 무엇을 증언하실 필요조차 없으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이 땅에 직접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고 친히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그리스도로 부활하심을 몸소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이다.
13절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가자 없느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외에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즉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한 사람은 그 누구도 없다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죽음과 부활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14,15절)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려진 놋뱀을 보아야 살았듯이 예수님도 십자가에 못박히셔야 한다. 그것을 믿는자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믿는자’ pa'" o pisteuvw(파스 호 피스튜오 soever who believeth) 라는 단어도 pisteuvw(피스튜오) 단어다.
믿음은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지만 표적과 관계 되 있다. 예수님의 직접적인 보여주심이다.
16,17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앟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세상으로 된 단어 kovsmo" (코스모스)는 보통 ‘세계’ ‘세상’으로 번역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kovsmo" 코스모스는 좀더 넓은 의미를 가진 단어다. ‘질서’ ‘꾸밈’ ‘장식’의 의미로 사용된다.
예를 들면 코스모스는 ‘무엇인가 잘 모아지거나 구성된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기병대의 조직 전투를 위한 대형’ ‘사회의 삶의 규정이나 제도’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특히 헬라 철학에서 코스모스는 대체로 ‘세계질서’ ‘질서에 의해 유지되는 공간’의 의미를 갖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빛’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오셨다거나 보내심을 받았다’고 말할 때 전체 kovsmo" 코스모스를 가르키는 것이며 단지 인간이 사는 이세상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와 세상이 대립관계에 있는데 그 대립 관계에 있는 세상을 사랑하셨다면 무엇인가 모순이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kovsmo" 코스모스는 하나님의 주권하에 만들어진 질서를 말한다.
그 질서 즉 kovsmo" 코스모스는 ‘하나님의 주권계획’이요 ‘복음’이요 ‘주님의 뜻’이다.
그 뜻대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고 그 일로 ‘그를 믿는자 마다’(여기서 그를 믿는 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자를 말하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앞서 14절에서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미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을 언급했다. 죽으심과 부활하신 분이 예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17절은 더 명확하게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그렇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님이 아니라 그리스도다.
롬1:3,4절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물론 예수님은 그리스도시다.
그런데 로마서1장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신 분을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분’으로 말한다. 그분이 부활하신 주님 즉 그리스도시다.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으로 사셨고 여기서는 예수님이다.
그래서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이 말씀은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되신 주님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다. 영으로 오신 것이 아니다. 예수라는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이것 자체가 표적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실 이유가 있는가?
당신의 준비된 자녀를 구원하시기 위해 꼭 고통받기 위해서 인간이라는 육신을 입으셔야 했는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주님께서 말씀으로 준비된 하나님의 자녀를 부르시면 안되는가?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예수님이 되셔야 하고 그 예수님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계획이요 복음인 것이다.
17절 하반절은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 안에 있는 준비된 하나님의 자녀가 건져냄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탄이 지배하는 이 땅은 그리스도도 하나님도 모른다. 그래서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더 많은 고통가운데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준비된 자녀는 세상을 이길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가 그러하였던 것처럼 세상에 있지만 하나님에게서 난 자들이며 더 이상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18절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것이니라’
하나님의 주권계획 속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는 심판을 받지 않지만 믿지 아니하는 자는 심판을 받는다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심판을 받는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 그리스도를 말한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야 영생을 얻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심판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pistis 믿음이란 단어를 내가 무엇인가를 신뢰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안된다. pistis 믿음은 하나님의 주권계획과 나의 순종과 관계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과는 다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가 그리스도로 부활하셨다. 그것이 표적이고 복음이다. 그것처럼 우리도 죽어야 한다. 죄의몸 사망의 몸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 위해 오신분이시다.
그리고 그분이 본질이신 그리스도로 부활하셨다.
우리도 죽어야 한다.
그래서 거듭나는 것이다.
19절을 보면 빛이 세상에 오셨지만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고 말씀한다.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예수라는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행위가 악해서 즉 빛의 자녀가 아니기 때문에 어둠을 사랑할 수 밖에 없고 악을 행할 수 밖에 없다. 즉 사탄의 권위아래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21절)
‘진리를 따르는 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를 이 땅에 육신의 모습 즉 예수’로 보내신 것을 믿는자를 말한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1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21절)
믿음의 행위가 내 스스로 믿어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즉 주님의 주권 계획아래서 이루어진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요17:16절)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자는 예수가 그리스도 이심을 믿게 된다.
예수님은 표적을 보고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성경이 말하는 표적은 ‘거듭나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다.
거듭난다는 것은 이 세상 가운데 있는 믿음의 자녀가 때가되면 예수께서 그리스이심을 믿게 되어 비록 세상에 있지만 주님의 주권아래 살게 되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