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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설교

담대한 삶(벧전 3:19)

작성자김 정연|작성시간26.06.16|조회수0 목록 댓글 0

 

일시: 2026.6.14

말씀: 벧전 3:19

제목: 담대한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I. 들어가는 말

 

자동차 뒤에 문구나 붙여 놓은 문양을 보면  운전자가 어떻다는 것을 대충 짐작할  있습니다. 반대로 개인적으로 여러 가지 이유로 초보운전 패를 떼지 않고 운전을 해보니 사람들의 생각도 어느 정도 알게 됩니다.  때는 많이 유행하던 물고기그리스어로 익투스ICHTHYS로는  사람의 종교를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뜻을 가진 물고기는 카타콤Catacombs)” 떠올리게 됩니다. 카타콤은 로마 시대에 무덤이었고 기독교인이 박해를 피해 은밀하게 예배드리고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공간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비밀이 유지되어야 했고 서로가 기독교인인가를 확인하는 방법으로 물고기 그림으로써 활용했다고 합니다. 공교롭게도 무덤은 죽은 자들의 처소이고, 죽지만 부활한다는 확신을 가지는 기독교인들에게는 고난을 당하지만 결국 부활의 소망과 종말론적 희망을 키우게 됩니다. 어떠한 고난이라도 반드시 이겨  힘을 무덤인 카타콤에서 얻게  것입니다. 이처럼 말이나 패용(佩用) 그것을 넘어서 다른 것을 가리키는 표징이나 상징  있습니다. 문자 분명 사람이 다른 사람의 뜻과 마음을 읽어   있는 방법이지만 반드시 글자 그대로 의미 하지는 않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리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도 어떤 방식과 입장에서 해석하느냐에 따라 하는 문제는 오랜 신학적 과제이기도 합니다

문자  자체의 의미와  너머에 숨겨진 다른 의도도 동시에 가집니다. 따라서 표면적인 문자 그대로 믿지 않고  이면에 숨겨진 뜻이나 사상이나 주장 등을 파악해야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해석 것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리쾨르에 따르면 구어口語) 문자가 됩니다. 그런데 말이란 문자로 고정 되는 순간, 원래의 생생한 의도나 감정으로부터 멀어지고, 문자로 기록된 문장텍스트 저자의 손을 떠나는 순간 저자의 원래의 의도나 뜻과는 다르게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독자(讀者) 생각과 틀에 맞게 해석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의미를 나타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물론 출애굽 사건이나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나 바빌론 포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나 오병이어나 사도행전등의 역사적 사건들은 문자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전의 사건과 상황을 당시의 문화와 시대 속에서 당시의 언어적 배경을 바탕으로 문자로 기록된 책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의특히 읽는 개인 사고와 틀에 맞추어 지므로 문자적으로 읽고 판단하고 적용한다면 잘못된 결과를 낳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성경은 많은 은유와 상징의 언어로 가득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호와는 나의 방패요, 나의 반석이시다라고   방패와 반석을 문자 그대로의 뜻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새로운 영적 깨달음 얻게 되는 것이 성경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교리를 믿는 것이 아님은 극히 상식입니다. 그러나 문자를 묶어 교리라는 틀을 만들었습니다.  틀을 판단의 기준으로 세우고 정죄의 정당성을 획득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것은 우리의 믿음은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그것을 위해 성경이 있는 것이고 교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현실 속에서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해  영적인 각성과 깨달음을 위해서 노력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시도   없기 때문이고, 하나님 은혜 아니면   없기 때문이며, 하나님과 교제 하지 않으면 죽음 삶이나 마찬가지  때문입니다. 

 

성경은 과거에 일어난 일들이나 이야기들이 어떻게 문자 대로 일어났는지를 증거하는 책이 아니라  과거의 일어난 일들이나 말씀이 오늘날 성경을 읽고 받아 들이는 우리에게 삼위 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장차 부활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 하시므로 우리는 세상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인식 아래 완전히 다른 소망의 삶의 방식을 제안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지를 묻고 자신에 대하여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을 어떻게 영유(營有)할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II.   담대한 

 

본문을 토마스 아퀴나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옥 강하 해석하고 연옥 교리를 체계화 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합니다. 연옥이란 하나님과 화해하여 구원은 확정 되었으나  세상에서 지은 죄에 대한 정화를  마치지 못하고 죽은 영혼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머무는 상태를 말한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로 연옥의 불을 통해 정화 과정을 거쳐야만 최종적으로 천국에 들어   있다는 교리가 연옥 교리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이모 목사의 경우도 음부 강하 문제로 통합 측과 결별하기도 했습니다. 루터는 예수께서 음부에 내려가 사탄과 죽음을 정복하셨다고 하여 승리 해석했다 하고, 칼뱅은 그리스도의 극심한 고난 상징으로 고난으로 해석하였다고 합니다. 

어쨌거나 본문의 말씀은 대표적인 난해 구절입니다. 그러나 말씀드리고 싶은 점은  말씀이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 오느냐 입니다. 오늘날  말씀은 단순하게 과거의 문자적인 사건이 아니라 우리에게 고난과 소망과 구원과 은혜 다시   확인시켜 준다는 의미에서 확장 보여 준다 하겠습니다

 

우리는 예레미야 207~13 말씀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면서 고난과 소망을 가지고 살아 갑니다. 때로는 조롱과 반대에 직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없는  같은 사명감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악인의 손에서 건져 주신다는 확신에  있습니다. 

 

시편 697~12 말씀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세상에서 조롱과 멸시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은 오히려 우리가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증거가 됩니다. 그리고 끝내 하나님께서 우리의 수치를 영광으로 바꾸실 것을 굳게 믿고 견디게 됩니다

 

로마서 6 1~11 말씀처럼 우리는 세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다시 살아난 존재입니다.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삶을 버리고 은혜롭게 살아가며 죄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입니다. 결국 우리의 정체성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새롭게 세워진 사람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024~39 말씀처럼 우리는 세상에서 박해와 조롱을 받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진리를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지키시며 작은 것 까지 돌보시는 분이시기에,  결국 자기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살아 가면서 지옥 같다라는 고백할 때가 있습니다. 도저히 헤쳐나가지 못할  같은 고난의 터널, 사방이 가로막혀 숨쉬기 조차 힘든 절망의 감옥에 갇힌 듯한 순간들을 살아  때가 있습니다. 건강, 물질, 관계 속에서 깊은 영적 갈급함을 경험하곤 합니다.  나아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가 너무나 깊고 크고 높아 좌절 하면서 나는 아무런 공로가 없다 나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도 마땅하다 나는 하나님께 버림 받아도 당연하다 라는 영적인 상태를 겪을  그것은 바로 지옥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나의 의지를 포기하고 하나님께 어떤 항의도 하지 못한  하나님과 분리된 고통을 경험하는 것은 분명 지옥과도 같을 것입니다.  이사야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 6:5)하였고,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5:8) 바울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7:24)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지옥 같은 어둠 속에서도 예수님은 놀라운 소식을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의 통치와 권세가  세상이나  우주 어느 곳이라도 미치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 가장 절망적인 곳이라  지라도, 죽음의 그늘과 고통의 아픔이 영원한 영적 감옥에까지 예수님은 모두 찾아 가셔서 부활과 승리를 선언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교리적 사실은 오늘날 살아 내는 우리에게 얼마나 유용하겠습니까? 우리가 지옥 같은 고통을 겪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셨다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은 선언합니다. 절망의 감옥에서, 홀로 신음하고 있을 지라도 만나 주십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라고 선포하십니다

 

Ⅲ. 나가는 

 

우리는 세상을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할지라도 겁먹지 말아야 합니다. 살다 보면 가시 밭길을 걷고 전갈이 나오는 곳과 같은 삶이지만, 그럼에도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험악한 말을 하고 험상궂은 표정을 지우며 위협해도 무서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일은 세상에 하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듣든지 말든지 우리가 상관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이 아무리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지옥 같을지라도 낙심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미 우리 고통 한복판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미 오신 승리를 선포하신 예수님을 신뢰함으로써 외로움과 슬픔이 변하여 찬송이 되는 기적이 임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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