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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목교회

나 하나라도 (빌 3:10)

작성자김 정연|작성시간26.06.09|조회수1 목록 댓글 0

일시: 2026.3.

말씀: 빌립보서 3:10

제목:  하나라도

[내가 그리스도와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I. 들어가는 말

 

세상은 첨단 과학으로  편하고  오래 살고  안전하게   같지만 전쟁으로  순간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있는 요즈음입니다. 정의는 자기들 에서 이득이  때만 올바른 정의라고 하는 시대인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왜곡죄 대법관 증원법 재판 소원제 라는 사법 개혁 3법이 국회에서 통과되고 대통령도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일면 국민을 위하는  같지만 결국 끝까지 버틸  있는 힘과 권력을 가진 특권 층에만 유리한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앞에 평등하다는 상식을 벗어나  마저 자기들  유리한 도구로 변질 되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대다수 가난하고 평범한 국민을 위한다고 침이 마르게 선전하지만 대다수 가난하고 평범한 국민의 고통 발판으로 자기들  누리면 그만이라는 식입니다. 모두 자기들 만을 위해서 치열합니다. 1911 「정당 사회학에서 아무리 민주적인 조직이나 혁신적인 제도라도 결국은 소수의 엘리트가 권력을 독점하는 방향으로 흘러 간다라는 과두제의 철칙소수의 지배 주장한 독일의 사회학자 로베르트 미헬스는 참으로 혜안(慧眼) 가진  같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그렇다면 신앙 인으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현실을 철저히 외면하고 각자도생해야 하는가? 그래서  자신만 믿어 구원 받으면 그만이다 여겨야 하는가? 아니면 이에는 , 눈에는 눈이라면서 맞서서 싸워야 하는가?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과 소외된 자들을 위해 오셨고 그래서 맞서서 쟁취해야만 한다고 주장해야 하는가?  고민이 아닐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믿어 주심으로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환난 속에서도 인내와 소망을 가지게 되었으며 예수 님의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 5:1~11) 그러므로 광야에서 물을 찾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계신가 17:7)라면서 하나님을 시험한 것처럼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물을 준비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하나라도 라는 절박함으로 삼위 일체 하나님의 증인이 돼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는 가난한 대다수 속해 있지만 결국, 하나님을 믿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 내는 최후 승리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II.   하나라도

 

본문은 바울 사도가 감옥에 갇힌 상황에서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기쁨과 믿음을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로마 식민지였던 빌립보에 세워진 교회에는 율법주의와 이방 문화가 뒤섞여 있었습니다. 이때 바울 사도는  자신이 과거의 율법과 혈통을 자랑하던 바리새인이었지만, 예수님을 믿음으로서 이전 것들을 배설물 여기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연합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들을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손해로 여기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본받아 그의 부활과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알고 싶다는 소망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순절 기간을 지내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어떻게 본받아 부활과 고난에 동참할  있는가를 일깨워 줍니다. 그것은 성도로써   하나라도 법을 지키고자 하고,  하나라도 순종하고자 하고,  하나라도 사랑하고자 하고,  하나라도 남을 인정하고 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이미 주어진 승리자에 주어진 열매를 맛볼  있을 것입니다. 

 

1. 고난은  하나님을 인식하는 통로임을 알자

고난 우리에게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종말에 죽음의 고통 일평생 동안 나누어 겪게 하셔서 오히려 죽음 넘어서 소망을 갖게 하시는 하나님의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고난 은혜이자 배려가 아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우리가 홀로 겪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함께 하신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라는 것은 하나님 자신은 낮아지는 것이므로 고난 아닐  없습니다. 세상 적으로는 무력해 보이는 것이 낮아짐이요 고난이지만 결국은 특별히 돌보신다.”라는 자기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신다.”라는 것은 사랑  자체입니다. 

또한 함께 하신다.”라는 것은  우리 구원의 완성 과정에 참여 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고난 나누어 겪게 되는 과정 속에서 새롭게 됩니다. 옛것을 버리고 새롭게 되는 것은 언제나 고난 동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심 인식하게 되고  하나님은 고난 통해 일하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일하심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오심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통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 인식하게 됩니다. 과연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 예수님은 고난의 극치인 죽음을   겪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으심이 고난이자 사랑일진대 하나님의 속성도 사랑이자 고뇌입니다. 사랑은 자기 것을 내어 주는 것이고 고뇌  끝에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기쁨은 고난을 통하지 않고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고뇌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 복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2. 양심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양심 우리에게 무슨 의미인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나서 하나님이 뜰에서 거니시는 소리를 듣자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동산 나무 사이에 숨는 가책을 느끼는 마음 가짐입니다. 적어도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심어 놓으신  따르려는 자기의 방향성입니다.  하나라도 하나님 말씀을 따르려는 마지막 보루(堡壘) 같은 자기 확신입니다. 

양심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성령과 함께 있는 정의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험하고 풍파가 몰아 친다 하더라도  하나라도 적어도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가는 성도로서의 양심을 지킨다면 예수님의 증인이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과 우리 사이에 관계를 이어나가는 통로인 것이 바로 양심입니다.  나아가  자유 함이 내게 유익이지만 그것이 남에게 해가 된다면 제어를 하는 것이 진정한 양심 것입니다. 

 

3. 십자가의 죽으심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받는다는 것은 단지 예수님이 당한 고통에 동참하여 고행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죽으심 본질은 결국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말로서가 아니라 행해야 사랑의 진가가 발휘됩니다. 사랑한다 말은 하지만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십자가의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을 몸소 죽으심으로 실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거나 함께 하심을 인식하려면 반드시 사랑을 실천함으로 이룰  있는 것입니다.  사랑 죽음으로써 완성 되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러므로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이루었다 13:8) 사랑은 율법의 완성(13:10)이라고 단언했습니다. 또한 죽음을 넘어야 부활의 권능에 동참할  있게 됩니다. 

우리가 삶에서 사랑을 실천할  있겠습니까? 그것은 자기 비움입니다. 그것은 그저 자신을  포기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의견이나 자존심, 권리보다는 남의 그것들에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라도 사랑을 실천한다면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입니다. 

 

Ⅲ. 나가는 

 

우리는 혼란스럽고 억지스러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도로서의 본분을  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하나라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먼저 고난은  하나님을 인식하는 통로임을 알고, 성도로서의 양심을 지키며, 십자가의 죽으심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살 때 결국 부활의 영광을 맞보게  것입니다. 모두 그런 분들이 되셔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복의 복을  받아 누리시길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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